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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장 27~31 신앙의 허상과 실상
LNCK
2021. 12. 22. 10:28
https://www.youtube.com/watch?v=SHXpbpQWKJc
◈신앙의 허상과 실상 막14:27~31 2021.12.12.출처
◑본문 설명
막14장에 이르러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에 가까이 다가오시고 계시는데
함께 부각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공생애를 보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실패하는 모습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스가랴13:7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목자를 치리니 양이 흩어질 것이다' 막14:27
'목자를 친다'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양들이 흩어질 것이다' .. 예수님의 제자들의 흩어짐을 미리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앞으로 닥쳐올 일들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아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같이 공생애 동안에 늘 함께해 왔는데
'너희들이 나를 다 버릴 것이다.' 갑자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역시 베드로가 발끈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성격답게 나섰습니다.
막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찌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단호하게 얘기를 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 반감도 생겼을 것 같아요.
'예수님, 무슨 얘기를 지금 하는 겁니까?
우리가 모든 걸 버리고 지금까지 따라 왔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다니요?'
이렇게 말한 베드로의 말을 듣고 '너를 믿는다.' 그러고 끝났으면 좋겠는데
예수님한 한 말씀 더 하세요.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다시 강공을 하시는 거죠.
베드로도 센데, 예수님도 아주 세게 얘기하세요.
너는 나를 부인할 거라는 거죠.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러면 베드로가 알아들어야 됩니다. 그런데도 못 알아들어요.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힘있게 말하되' 그랬어요. 아주 세게 말했다는 거죠.
헬라어 원어상 '계속적으로 말하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만 얘기한 게 아니고, '나는 절대 그렇지 않겠습니다'
라고 막 계속 재차 말한 거예요.
또 여기 보십시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얼마나 각오가 대단합니까? 순교적 각오입니다.
'죽을지언정 나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떠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그와 같이 동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로서의 당연한 다짐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면,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믿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되죠? 무참하게 깨지고 맙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죠? 베드로가 거짓말한 겁니까?
거짓말한 게 아닙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절대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어요. 죽을지언정!' 진심이었어요.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깨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은 진심만으로는 안돼요.
진심이 현실에서 검증이 되어야 됩니다.
문제는 그 진심의 현실에서의 입증입니다.
사람들이 공약도 합니다.
또 맹세도 합니다. 서약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들이 닥치면, 사람은 말이 바뀌는 거죠.
진실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말을 한다고, 그 사람이 진실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으면 간증을 많이 하죠.
'나는 이제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로 이전과 같이 살지 않겠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나 이제 정말 다른 삶을 살 겁니다..' 등등 막 얘기해요.
그러나 조금 지나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때가 많아요.
그 장담과 공약과 간증이 참 조심스러워요.
▲베드로는 얼마 못가서 실패합니다.
이게 처음은 아니죠. 익숙한 장면입니다.
주님 앞에서 멋진 신앙고백을 하지만
즉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고백을 했지만
곧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런 책망을 받았습니다.
'나로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래서 물 위를 걷기도 했지만
곧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여러분, 장담하고 있는 베드로에게서, 우리는 뭘 느끼는 겁니까?
자신에 대한 신뢰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신뢰하는 겁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죠.
자신은 충분히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믿었던 거죠.
여기서 여러분,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내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대개는 여러분,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좀 냉혹하고
자신에 대한 평가는 관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자신에 대한 무지의 결과에요.
베드로는 자신이 그렇게 무너질 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 이해가 정확히 안 되어 있었던 거죠.
자기 현실이 파악이 안 된 겁니다.
이게 미성숙함의 특징이죠.
▲아이들이 미성숙합니다.
배트맨 옷을 입혀주면 자꾸 높은데서 뛰어내리려고 그럽니다.
그 옷을 입으면 자기가 배트맨이 된 줄로 착각을 하는 거죠.
그 아이들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게 뭐냐면 '현실검증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에서도 정상인과 정신질환자를 구분할 때
'현실검증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은 현실을 검증하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현실에 대해 왜곡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곧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거죠.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해도 안 받아들여요.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지금 현실검증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예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이해가 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노는 거죠.
주님과 지금 대화가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는데.. 못 알아듣고 있는 겁니다.
현실이해가 약하면, 결국 비현실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계속 심화되면 뭐예요? 허황된 꿈을 꾸는 겁니다.
자기 이해가 부족하니까, 현실 검증능력이 없으니까
이게 심해지면 어떻게 돼요? 과대망상증 환자로 가는 거죠.
우리 신자들이 이렇게 살기 쉽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이 거창해요.
자신이 세상을 다 바꿀 것 같이.. 얘기를 해요.
근데 막상 현실로 돌아가면, 고작 TV채널 밖에 못 바꿔요.
신앙세계 안에서, 현실검증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의외로 꽤 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통해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이 얘기해요.
자기가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허구속에서 스스로 속아서 살고 있는 거죠.
자신이 나라를 구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이게 메시아 신드롬 이라는 거죠.
이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사이비 교주들이 주로 이런 부류들 입니다.
현실 이해가 너무 약해요.
여러분, 신앙을 가지면, '현실에 대한 몰이해'로 가지 않습니다.
현실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신앙을 가지면,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게 됩니다.
▲여러분, 서점에서 잘 팔리는 책이 처세술, 자기관리 영역
이런 주제의 책이 가장 많이 팔립니다. 주로 무엇을 강조합니까?
'너 자신을 믿어라'는 거죠.
'너의 잠재력을 일깨워라. 네 안에 있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라!' 이런 얘기죠.
그외 '너는 할 수 있다. 너를 개발해라'
이게 더 나아가면 '네가 신이다, 네가 부처다'
이렇게 뉴에이지로 빠집니다.
다 비슷한 얘기들이에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또 강조하고요.
너무 절망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가르침들은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폐해가 더 크겠지만.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잘 안 되는 거죠.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거예요.
갈수록 현실감각은 없어지고
막연한 이상만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비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뭔가 허구에 사로잡혀 있는데, 자신을 점점 부풀리는 쪽으로 흐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벽에 부딪치고 맙니다.
내가 생각한 것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 커지면
어느 순간 소위 말하면 멘붕이 오는 거죠.
베드로와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디베랴 바닷가로 가잖아요. 왜 그랬습니까? 멘붕이 온 겁니다.
자기들이 생각해 오던 어떤 상상의 그림과
실제 자기 현실과의 갭이 너무 커지니까 멘봉이 온 거예요. 다 무너진 겁니다.
▲자 결국 베드로의 이 공언, 이런 야심찬 장담 안에는 *내가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다 하는 장담
그의 야망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야망이 있었던 거죠.
'누가 오른쪽 왼쪽을 차지할 것인가?' 그런 얘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자신 안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뭔가 한 자리 할 것 같은..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 왔는데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니까
자기 야망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발끈하고 지금 나온 거예요.
나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거죠.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지키는 것보다
사실은 자기 야망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자리 하는 그 야망을.. 포기할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겁니다.
◑자기를 똑바로 아는 게 정말 어렵습니다
결국은 여러분, 베드로의 이 모습 속에서
우리가 자기를 바로 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겸손이 뭡니까? 겸손은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겸손이 잘 안 되죠?
나를 잘 모른다는 거죠.
수도 없이 깨어지고 절망한 이후에야
겨우 만들어질 수 있는 게 겸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겸손해졌다? 그런 건 없습니다.
'어느 날 저 분이 되게 겸손해졌네요..' 그건 겸손한 척 하는거죠.
사람이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겸손해집니까?
다 그렇지도 않아요.
오히려 실패를 통해 교만이 드러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절망으로 빠집니다.
실패했는데, 왜 화를 내죠?
자기 자존심이 훼손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과정이
많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해 집니다.
여러분 겸손이라는 게,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왜 성경은 이렇게 겸손을 강조하죠?
교만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거죠.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없는 거죠.
교만이란 뭘까요?
자기 자신에게로 초점을 맞추는 생각과 행위에요.
▲요즘 '자존감 pride'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이런 주제가 많이 떠오르고 있어요.
또 요즘 상처, 열등감.. 이런 얘기들을 많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뭘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거죠.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
'내가 나를 믿고 살아왔는데, 누가 나를 건드려?' 화가 나는 거예요.
또는 '내가 나를 믿고 살아왔는데 실패를 해?' 스스로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 자존심이 훼손당했다고 못 견뎌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신앙 안에서
내가 나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나(내 자아, Ego)에 대해서 기대를 한다.. 나를 신뢰한다 self-confidence'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건 불가능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기대를 할려면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내 의지 대로, 내가 생각한 대로, 나를 움직일 수 있어야 돼요.
근데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는가요? 불가능해요.
왜냐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에요.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나는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왼쪽으로 가 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런 탄식을 합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너무 힘들다는 거죠.
마치 그 가시나무 새의 노래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어떤 게 나인지 알 길이 없어!'
▲우리는 나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듣기를 두려워합니다.
남이 나를 평가하면 화가 나죠. 자칫하면 그와 원수가 됩니다.
'네가 나를 알아? 너는 나를 알고 얘기하는 거야?'
문제는 나도 나를 잘 모른다는 거죠.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대단한 줄 알았습니다. 베드로처럼!
그러나 복음을 만나고 난 뒤에 바울은 달라졌어요.
자신에 대한 허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죠.
바울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자존심 강하던 바울이 무슨 표현을 씁니까?
'나는 죄인중에 괴수로다'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
이렇게 자기를 한없이 낮춰요.
다시 말하면, 내게는 소망이 없다. 내 안에는 소망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프리즘을 통하여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전에 강한 자의 모습이 다 사라졌어요.
▲여러분 우리의 의지를 보십시오. 얼마나 자주 무너집니까?
작심삼일 이라 그러잖아요.
요즘은 작심삼일이 너무 길어요. 작심일일, 그것도 길어요.
'작심반나절' 하다가 '작심 한시간'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래요.
우리의 감정은 어떻습니까?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으로 몇 번이나 오락가락 해요.
아침에는 천국, 점심에는 지옥, 저녁에는 반지옥!
여러분 내 감정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지금 가졌던 좋은 감정이, 언제까지 갈 수가 있겠습니까?
왜 친구가 바뀌죠? 왜 그렇게 가까웠는데 서로 원수가 되죠?
그렇게 철저하게 서약하고 결혼했는데, 왜 마음이 바뀌죠?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에요.
우리의 이성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살지를 못해요.
이렇게 우리 인간의 본성은 지정의가 총체적으로 허약합니다.
넘어지고 깨어지는 이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요.
내가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결심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호언장담해도, 베드로의 호언장담과 비슷하게 되버리는 거죠.
근데 끝까지 우기면서,
우리가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난 다른 사람이라고,
난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럼 결국 뭡니까?
그건 여러분이 자기를 모르는 거예요.
(진정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베드로처럼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를 신뢰합니다)
결국 여러분, 다른 사람이 나를 배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나에게 배신하는 거예요.
즉 자기 말을 자기가 지킬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결단만 하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만약 내가 결단한 대로 지금까지 다 되어 왔다면
여러분 지금 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약하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의지적으로 다짐해도...
특새 때마다 은혜 받은 걸로 결단했다면, 그래서 실천했다면
나는 정말 하늘의 구름 속을 지금 걷고 있을 거예요.
부흥회 때마다 내가 결단한 그대로 살았다면
우리 인생은 지금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예요.
내가 좋은 마음을 먹었다고.. 내가 지금 좋은 말을 하고 있다고..
앞으로 계속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말한 대로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건 순진한 생각이에요. 근거 없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진면목은 테스트를 거쳐야 되는거예요.
검증 이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주님은 우리를 테스트 하실 때도 있어요.
또한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을, 주님이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
시험에서 승리하려면,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충성심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너무 아름다운 단어인데, 요즘 우리가 잃어버린 말이 하나 있죠.
'충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충성이 뭡니까? 끝까지 가는 겁니다.
아니 한 번 결심했다면, 끝까지 가야되는 거에요.
말과 행동의 일관성,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야 돼요. 일관성!
말과 행동이 똑같은 진실된 성품을 integrity 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보면, 충성과 반대로 진짜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어요.
들쑥날쑥 바다 물결같이 늘 요동을 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변덕스러움은 미성숙이에요.
어린 아이들이 그러잖아요. 변덕이 심하죠.
특별히 사춘기의 특징이 뭡니까? 변덕스러움입니다.
자기 마음을 종잡을 길이 없어요. 자기도 제 마음을 몰라요.
학교를 간다 했다가 / 안 간다 했다가
뭐 밥을 먹겠다 했다가 / 금방 또 안 먹겠다 그러고
이렇게 사춘기 때는 불안정해요.
여러분 이 사춘기라는 거는 한 때로 끝내야 되는 거잖아요.
근데 이 불안정한, 들쑥날쑥한, 오락가락하는 이 변덕스러움이 일평생 지속된다면
사실 어쩌면 우리 인생 전체가 사춘기일 수도 있어요.
영적으로 사춘기, 그만큼 미숙하다는 거죠. 싱싱하다는 뜻이 아니라!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은 영적으로 사춘기적입니다.
그들이 한 말을 믿을 수 없는 겁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또 망쳐버렸죠.
주님이 '너희가 나를 다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 당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나와야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무모한 자신감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는 거죠.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지만, 주님을 돕는 게 아니라
주님께 방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보다
예수님께,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삶을
내가 살아갈 때가 훨씬 더 많아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내가 주님께 도움이 되는 거 맞나?
아니면 지금 주님께, 내가 혹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보면 헷갈려요.
여러분! 늘 조심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깨어있어야 된다는 거죠.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은 일평생의 작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허상들을 끊임없이 걷어내야 되는 거죠.
어떻게 해야 되죠?
먼저는 나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됩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충성'도 내가 하고 싶은데, 안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충성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충성도 빛 바래지는 거죠. 충성이 안 되는 거에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의지로, 내 감정에서 나오는 충성은
한순간에 뒤집어져버리니까.. 계속적인 충성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온전한 제자가 되기 어렵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가능합니다.
그래서 갈5장에도 보면, 충성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충성의 열매가 맺히게 된다는 거죠. 갈5:22~23
여러분이 직분을 받아도, 그때 막 서약하고 처음에는 열심히 하잖아요.
그런데 한 일년 지나면, 직분 받은 약발이 다 끝나요.
그걸 끝까지 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성령의 열매로서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겁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부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전에는 자기 자신으로 충만했어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친 이 사건, 그 처절한 실패를 통하여
제자들은 자기를 믿을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철저하게 경험한 거예요.
여러분 자기 한계를 처절하게 경험하면, 그 다음에 뭐가 오는지 아세요?
무기력증이 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고기 잡으러 갔던 제자들의 마음에는, 이런 무기력증이 가득했을 거예요.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언제 사람이 변합니까?
자신의 실체(죄성, 연약함)를 정확하게 보기 시작할 때부터 변화됩니다.
주님이 그들을 다시 찾아주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끝났습니다.
다시 일어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나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다 실패를 경험해요.
그것을 기록한 이유가 뭘까요? 우리도 그들과 똑 같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변에 사람들이 실패하면
'저 인간은 질이 낮네, 수준이 뒤떨어지네' 이렇게 판단하지 말고요.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면 큰 일납니다.
나도 그와 똑같은 자로 여겨야 돼요.
바울의 고백이 정확하죠.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었다' 고전15:10
여러분, 이 바울의 고백이 간단한 고백 같지만,
내 입에서 진실하게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신앙이 상당히 성숙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여러분 우리는 일평생 우리의 연약함은 사라지지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 순간은, 한순간도 없어요.
우리의 안정감을 우리(의 굳센 믿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제자들처럼, 때로는 성숙을 위해서 실패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성공만 경험한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목표한 대로,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은.. 앞으로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없이 성공한 사람은, 가장 요주의 인물입니다.
왜냐면 앞으로 크게 넘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여러분 성공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은요,
하나님은 자기의 관심 안에 들어올 수도 없어요.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자기가 중심에 서 있어요.
나폴레옹은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며 호언장담을 했어요.
뭘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그건 '배트맨~'하고 뛰어내리는 애하고 비슷한 정신 수준이에요.
여러분 중에 실패를 해온 분이라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기 쉬운 지점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공만 해 온 분이라면, 한번 확실하게 실패를 경험하거나
아니면 이 성공만으로는 결코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처절하고 깊이 깨닫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해요.
그래야 자신이 이룬 성공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만의 실력과 힘으로 의지로 결단만으로 뭉쳐진 인생은.. 불안한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 가운데 의지가 강한 분들이 간혹 있어요.
그들은 마음을 먹으면, 한 번 결심하면 반드시 해내는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자기 의지로 성을 쌓아올리면 올릴 수록 불안해합니다.
내 힘으로 쌓은 것이기 때문이죠.
여러분, 인간이 쌓은 성은 오래가지 않아요.
세상은 그래서 실패를 감추고, 실패를 미화해버리고, 실패를 부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는 달라요.
한 번 실패해도 괜찮아요, 젊어서 실패를 경험해야 돼요.
그리스도 안에서 실패하면 되는거죠.
그때 그 실패로 인하여, 우리 안에 있는 강한 자아 Ego가 죽는 경험을 해요.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강한 에고,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죽이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즐겨 사용하십니다.
실패를 통해 성도는,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거죠.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먼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만약에 그 탕자가 그 돈을 가지고, 타국에서 돈을 많이 벌고 성공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까요, 안돌아 왔을까요?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그의 실패였습니다.
이런 경우엔 실패가 복이에요. 실패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겁니다.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연약함을 통하여 주님을 더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간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자기 연약함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유능한 사람을 찾고 계신 게 아니라
유능한 사람은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은 유능하든지/무능하든지..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마치는 말
신앙이란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의 실패를 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가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면서
맨 처음 드는 생각은
우리는 절망에 빠집니다. 왜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렇게 동거동락하며
예수님께 직접 레슨을 받았던 제자들마저 이렇게 참담하게 실패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말할 것도 없죠.
그러나 주님은 그 제자들의 실패를 통하여
그들을 아름답게 다듬어가고 계세요.
그들의 실패를 사용하셔서, 그들이 참 제자로 성숙되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고,
그분은 한번도 우리와의 맺은 약속을 깨신 적이 없고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넘어졌다면.. 절망할 필요가 없어요.
실패했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성공보다,
우리의 실패를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하셔서
우리를 제자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복음의 이야기요, 성경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스토리의 핵심인 줄로 믿습니다.
실패는 쓸모 없는 게 아니에요. 실패는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절망이 약이 되고 아픈 만큼.. 그 후에는 잘하게 되는 것이죠.
많이 넘어질수록, 나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거죠.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와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나중에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다시 사용하세요.
이렇게 복음서에서 비참하게 실패했던 이들을 사용하셔서
사도행전의 물꼬를, 복음의 물꼬를 트시는 일에 놀랍게 사용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