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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30장 1~15 다윗을 돌로 치려 하다

LNCK 2021. 12. 23. 15:13

https://www.youtube.com/watch?v=J7EIuQR5vsQ

◈다윗을 돌로 치려 하다       삼상30:1~15       2021.12.05.출처 

※아래 ★표가 하이라이트 입니다.(갈색 블록)

사람은 보면 볼수록 참 속단하기가 어려워요. 
겉보기에는 괜찮은 사람같은데, 실제로 보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많지요. 

그런 사람의 진면목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위기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재앙 앞에 서면,  
사람은 자기 본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죠. 소위 본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글락 마을이 불타는 위기 앞에서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의 본색이
여과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백일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삼상30:1~3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벡에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블레셋 다섯 도시의 군대가 아벡에 모두 집결했습니다.
이스라엘 사울 왕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였죠.

이때 아기스의 수하에 있던 다윗도, 그 전쟁에 마지 못해 출전하게됩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그야말로 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그들이 다윗을 싫어하게 만드셔서
다윗과 그 부대를 시글락으로 돌려보내게 합니다.  *삼상28장
 
참 절묘한 방법으로 다윗이 빠져나온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들과 전쟁을 치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사흘을 걸어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30:1
시글락에서 떠날 때는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시글락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훨씬 가벼웠겠지요. 

그러나 시글락에서 지금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와보니까 온 마을은 온통 불타버렸고, 그냥 연기만 군데군데 피어오르고 있고 

처자와 노부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런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서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게 남의 얘기라서 그렇지,
내가 실제로 당한 일이라면 혼비백산하게 됩니다.
여러분, 놀이동산에서 애를 3~4시간 잃어버려서 혼비백산 하는 마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탓하지 않겠습니까?

아내와 자녀들이 다 사라진 겁니다. 생사를 알 길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심경들이 어땠겠어요? 

▲4~5절,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보통 이렇게 남자들끼리 함께 울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니까 뭐 어찌할 도리가 없고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울음을 터뜨렸겠죠. 
그랬더니 순식간에 울음이 온 무리의 통곡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냥 용사들 6백명 전체가 함께 통곡하는.. 그야말로 마을이 떠나갈 듯 우는 상황이 된 것이죠.. 

여기 '울 기력이 없을 만큼 울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한참 울다 보면 기진맥진하지 않습니까. 전신에 기운이 빠져나가잖아요. 
게다가 아벡에서 사흘 길을 돌아오는 동안, 제대로 먹었겠어요?

 

아주 몸이 지칠대로 지친 가운데서, 이제 마음마저도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집에 오자마자 그냥 죽도록 울고 나니까 어땠겠어요? 
어떤 사람은 뭐 졸도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에요.

다윗도 최근에 결혼한 아비가일까지 해서 두 아내가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이죠.
이때 사람의 본 모습, 본색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울음소리가 잦아들 즈음,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나서
이제 자기 죄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어떤 재앙을 당하면, 속죄양을 찾는 그런 본성이 있습니다.
이게 누구 잘못이냐는 거죠. 
누구를 잡아서 죽이거나 죗값을 물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건 사람의 죄성의 표출입니다. 자기 탓을 안 하고, 언제나 남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대 누구 한 사람 입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온 거에요. 
'다윗을 잡아서 돌로 치자!'

물론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왜냐면 다윗이 아기스왕 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신뢰를 쌓기 위해서 
평소에 아말렉 족속들과 남방족속들을 치고 다녔는데 

 

말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쳐서 취한 전리품이다' 라고 아기스를 속이면서 
결국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건 아말렉 족속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들로부터 반격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복수극은 예견된 일일 수도 있었죠.

'다윗을 돌로 치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게 인간의 본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여기 온 사람들 6백명이 어떤 사람들이에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다윗 수하에 모였습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22:2
아둘람 동굴에서 4백명이 지금 시글락에서는 6백명으로 불어납니다.  

이런 사회 부적응자들을, 그동안 다윗이 품어주고 안아주고 
그들과 함께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하나님을 누군지 모르는 그 정말 불한당과도 같았던 사람들을 
예배공동체로 이끌어왔던 그 다윗을 
배은망덕하게 지금 죽이자고 나서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과거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존재였습니다. 

다윗도 지금 기진맥진한 상황은 마찬가지예요. 
다윗은 뭐 이런 어려움을 안 겪습니까?
그들과 똑같이 지금 동일한 어려움을 겪고있단 말이에요. 

본문에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다윗)을 돌로 치자고 한 반면에, 
-다윗은, 똑같은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6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위기는 찾아와요. 
그런 피할 수 없는 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어떤 얼굴로 변하느냐는 것이죠?
그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직역을 하면 
'다윗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스스로 강해졌다' 입니다. 
but David encouraged himself in the LORD his God

'하나님 안에서' 라는 표현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이 서신서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반복적 표현과 동일한 뜻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가 반응해야하는 올바른 자세입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혼자 힘을 내기 위해서 발악적으로 행동하죠.
또 혹은 사람들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 힘을 모아서, 연대해서  
그 위기를 돌파하려고 합니다.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정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런 무엇이냐면, 이런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자가 신앙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안에" 머물렀더니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강해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몇 번 거치면서, 다윗이 '영적 근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세상 말로 '영적 맷집'이 키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근력'이 강화된 사람은, 이제 왠만한 위기를 닥쳐도 끄떡도 하지 않게 됩니다.

마치 전투에 수 십 차례 참가했던 베테랑 군인이
총성이 귀따가운 전쟁터에 나가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같게 되는 거죠. 워낙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7~8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이 지금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강해지고 났더니 
그냥 뛰어나가는 게 아니라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비아달을 불러서 '에봇을 좀 가져오세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8
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어떤 답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떤 답이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면 
우리는 그때 진실로 평안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상황은 전혀 지금 변화가 없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고,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놀랍게도 담대해지는 것이지요. 두렵지 않습니다. 

시18:6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환란을 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18:6
그리고 그 위기와 곤경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말이죠.. 
이런 질문을 주님께 드리고, 이런 답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지금, 마치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까 
시글락 공동체가 불에 타고, 가족들이 다 사로잡혀 간 
이런 비슷한 상황들을 만나고 있단 말이에요

예수전도단 사역을 시작한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1975년 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돼요. 

'도대체 왜 그렇게 교회에 주저 앉아 있니? 
너희들이 나가서 싸워야 할 영역이 어디인데 이러고 있니?' 

로렌 커닝햄 목사님은 '어디서 싸워야 하는데요?' 물었더니
주님으로부터 들은 일곱 가지 영역을 이렇게 증거 받았습니다. 

'가정, 종교, 문화, 교육, 대중매체, (악한 일부) 정부, 경제! 
너희들의 선교지는 여기인 줄 알아라!' 

아니 우리가 시글락에 와보니까 다 없어져버렸어요. 
자녀들도 다 뺏겨버렸어요. 

모든 영역에서, 아주 그냥 아말렉 족속들에게 씨도 안 남기고 다 빼앗겨버렸어요. 
근데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거죠?

'다른 교회를 돌로 칠 교회가 없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칠 자가 없나? 
이 교회 안에 돌 맞아야 될 사람은 없나?' 

혹시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고.. 사람들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마치 6백명의 용사같이 우리가 행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 공동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말렉 족속들이 들어와서 다 빼앗아갔는데 
심지어 자녀들도 다 뺏겼는데, 

미디어에 뺏기고, 게임에 뺏기고, 모두 다 뺏겼는데 
우리는 그런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뭐 그냥 건물 하나 어떻게 짓나? 
-이 교회를 어떻게 유지하나? 
-이 코로나시대에 사람들 빠져나가는데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이 안 빠져나가고, 이 교회 규모를 예전 그대로 유지하나? 

만약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면, 큰일 아니에요?

우리가 이럴 때 기도의 자리에 앉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 영역으로 뒤좇아가라. 
그러면 네가 빼앗긴 것을 도로 찾으리라!' 이 음성을 듣고 가야된단 말이에요. 

'가서 되찾아라, 찾을 수 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그 자리로 나아 갈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승리를 내다보고 가는 싸움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9~10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6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이게 다윗 리더십의 특성이에요. 
아니 지금 자기를 돌로 치려 하던 사람들 데리고, 무슨 전투를 하겠습니까? 

우리같으면, 나를 돌로 치려하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그 주범이나 주동자를 색출하느라 바쁘겠지요... 

그렇지만 다윗은 어때요? 
그 육백 명이 다 자기를 돌로 치려고 한 자들인데 
그 자들하고 뭉쳐서 다시 아말렉을 뒤좇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정도의 그릇이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저 말 한마디만 잘못 들으면, 그냥 평생 원수로 삼고, 서로 얼굴도 안 보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가다가 시글락에서 브솔까지 25킬로 되는데 
물론 아벡에서 백 킬로를 이미 걸어왔기 때문에 힘들죠.

그래서인지 브솔에서 1/3이 또 주저않아요. 못가겠다고 그래요. 
근데 다윗은 그들에게 쉬어라고 했습니다. 

이 브솔 시냇가는 영적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길목이에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계획은 
자원하는 자들로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먼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일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가 금방 망가진단 말이에요. 
교회는 억지로 일하게 하는데가 아니란 말이에요. 

여기는 무슨 부서를 정해가지고 
당신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자원하는 심령이 아니면, 끝까지 못 간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왜 권력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지 않고 
사랑이라는 걸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끝까지 가야 하는 나라에요. 영원한 나라에요. 
가다가 중단되어서 안 되는 나라 라고요. 

그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자원해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일에 절대로 동참해서도 안되고 
억지로 동참해봐야 갈 수도 없는 길입니다. 

억지로.. 하나님의 일은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데,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목사의 일일 수도 있고, 뭐 성도의 일일 수도 있죠.. 
하나님의 일은, 자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못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11~12절,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지금 아주 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길에서 죽도록 방치된 소년을 보고서, 다윗은 이 사람부터 살린단 말이에요. 
여러분 사람부터 살리고 보는 이게, 다윗의 리더쉽이에요. 
사람부터 살리고 보는 이게, 그리스도 인의 리더십이에요. 

다윗이 지금 이 애굽 소년이, 자기가 알고 싶은 비밀이나 정보를
다 알고 있을 것을 예상하고서, 그의 목숨을 지금 구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그런 평생 그렇게 남을 도우며 살아왔어요. 

양떼가 습격을 당해도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켰고 
이스라엘 군대가 조롱받고 위기에 빠져도 골리앗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사울에게 쫓겨서 도피할 때도, 그일라 주민들의 타장마당이 습격을 당하자 
그들을 또 공격으로부터 지켜주고 

나발의 목자들이 위험을 당하자, 그 목자들도 또 위기에서 구해주고 
그는 지금까지 사람 살리는 일을 주업으로 해왔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든지, 먼저 사람의 목숨을 먼저 구하는데 

자기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 왔기 때문에 

그가 이방인 애굽인이라고 하는 지극히 하찮은 사람,
그냥 지나가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을 이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얘기하신 거죠.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게 이제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예요. 
우리는 교회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생색나는 일 좋아합니다. 
사람들한테 인정받는 일을 좋아해요. 
결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자들한테 뭘 하기를 좋아하죠.. 

큰 자가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가고 
작은 자가 부르면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는 일이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자들, 하찮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한테 하는 게 '곧 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요, 예수님의 성품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약점도 많고 죄도 많이 지었지만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자기 시대에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었으니까요!

▲13~15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로 인도하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

결국은 이 하찮아 보이는 소년,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것만 같았던 이 애굽 소년 종을 살렸더니 
그가 지금 다윗이 가야할 목적지에, 아주 중요한 정보를 그가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거예요. 

길에 버려진 다 죽어가는 애굽 청년 한 명, 
우리가 보기에는,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무시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신비하게 이런 낮은 곳, 후미진 곳에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렇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날 때도 당대의 사람들이 못알아 본 이유는, 
그분이 아주 시골 산골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어린 소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력한 가문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알아보기가 아주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이고 그런 관습적인 일에서 
때로는 파격적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 자기 가족을 되찾기 위해서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는 다윗 일행에게는
빵 한 덩어리, 물 한 모금도 귀한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애굽 청년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아껴야 되는 상황이거든요.

그러나 아끼지 않고 베풀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이 군대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말렉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야할지를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열정이 늘 한 목표(내 구원의 완성, 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우리가 사는 동안 당하는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풀려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시글락 사건이 주는 교훈 중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 뜻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해결되는 해결 방안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일이에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그 부하들과 그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애굽 청년을 병들게 하시고, 주인에게 버림 받게 하시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 구원의 길을
잘 발견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 길은 종종 감춰져 있어서, 내가 깨어있어야만 발견되는 길입니다.

구약성경의 아말렉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신약성도인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 사탄 마귀의 권세를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 연약해질 때, 때로 정도에서 벗어날 때
원수 마귀는, 아말렉처럼, 우리를 약탈하러 들어옵니다. 그리고 빼앗아 갑니다.

그러니 이때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그분께 반응하면 
그 분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면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어떻게 풀어가시는지를 목격하는.. 
우리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모든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고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 있는 영적 존재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린단 말이에요. 

우리 힘으로 싸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싸움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날마다 기억하고 선포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가 기도에 자리를 떠나지 않는 거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