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절에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그러니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미디안 연합군은 서로 서로가 공격하고 말았습니다.
밤에 기습공격을 받아서 경황이 없었기도 했거니와 서로 서로를 잘 모르는 처지에서, 피아가 식별이 어려웠던 거죠.
(오늘날 현대전에서도 이렇게 아군끼리 싸우는 경우도 종종 보고되고 있습니다. 레이더에는 군대가 잡히는데, 미리 아군 군대의 전개 사실을 통보받지 못하면, 적군인줄 알고 포를 쏘는 거죠. 오인사격이라 그러죠.
왜냐면 그렇지 않으면, 몇 초 사이에 오히려 적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할까봐 염려해서 서두르는 거죠)
항아리를 깨트린 것도, 대군이 몰려와서 닥치는 대로 부수는 소리로 들렸던 거죠.
21절에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횃불로 그들을 에워쌌으니, 적들은 꼼짝없이 포위되었다고 느낀 거죠. 어떻게 보면 이게 심리전이었고, 그보다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천군 천사로 이 전쟁을 승리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너희가 갖고 있는 숫자는 적을지라도, 너의 능력은 적을지라도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압도적인 능력으로 이 전쟁을 승리케 하신다! 본문은 이걸 말씀하고 싶으신 거예요.
▲자 그러면 기드온이 왜 '여호와를 위하여, 여호와를 위한 칼이다!' 이것만 구호를 외치면 되지, 왜 (교만하게) 자기 이름을 뒤에 끼웠을까요?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18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20 *A sword for the LORD and for Gideon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집회를 하는데, 그 집회의 구호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러지,
목사가 자기 이름까지 그 뒤에 넣어서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개를 위하여!' 만약 이렇게 구호를 외친다면, 이단 사이비로 가는 게 되지요.
그래서 이 표현이 우리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만, 이 말은, 당시 고대 관습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전쟁에 나가면 군인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앞에는 자기 신의 이름을 넣고, 뒤에는 자기 왕의 이름을 넣고! 그러니 이스라엘도 그 형식, 그 문화를 따른 것이죠.
예를 들면, 그리스인들은 '제우스를 위하여, 알렉산더를 위하여!' 이런 구호를 외친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군대가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이렇게 '여호와를 위하여'를 먼저 외친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대표가 누구인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군대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출14:13, 14)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대표자는 바로 '여호와'이시죠.
그리고 기드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종으로서, 그분을 대리할 뿐입니다.
한편 기드온은 300명 용사들에게 이 함성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미 이 이름들로 인해 두려워 떨었던 미디안 군대를(14절) 더욱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적용해서,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두려워 하냐면 이게 내 전쟁이라고 생각할 때 두려운 거에요.
'내가 이렇게 애를 썼는데, 내가 내 목숨을 바치는데
혹시 패배하면 어떻게 하나, 내가 목숨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사업에 실패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여러분 이게 나의 비즈니스이면, 두렵게 돼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비즈니스이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게 나의 전쟁이면 두렵게 돼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이면 두렵지 않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성경적인 원리이기도 하고요.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해서 사역할 때,
완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목숨까지, 나의 존재를 완전히 던져서까지 해 보니까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고요. (진짜 죽을 각오를 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어지는 거죠)
저는 성격이, 굉장히 주의 깊고 조심성 있는 사람이거든요
모든 걸 계획을 촘촘히 세워야 비로소 추진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속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시는 것을
그냥 내가 순종하며 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다 이루신다!'
이 고백이 있으면, 두려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기 때문에 두려운 거에요.
아직도 내 것이기 때문에 벌벌 떠는 거예요.
하나님께 내 생명을 던지면, 두려울 게 없어요!
두렵지 않으면, 사탄이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 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이게 가능하려면,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던지셔야 돼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그다음에 기드온을 위하여!'
이것을 마음에 하나도 꺼리낌없이 외칠 수 있으려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주도하심에서
이렇게 따로 빼돌린 영역이 없어야 돼요.
이것을 수학적 집합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집합 안에 내가 완전히 들어가 있어야 돼요.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사실 이 "기드온의 3백용사"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걸 다 해주셨습니다. 기드온처럼 순종만 하면 됩니다'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3백명의 군대로 13만5천이나 되는 450:1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지만, 그 가운데 우리의 역할은 뭐냐?는 거예요.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해 주신 게 없는 것처럼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단점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 주신 것은 맞아요. 우리는 정말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안 받은 사람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전심전력을 다해야 되는 거예요.
이런 신앙의 패러독스 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뭘 해주는데? 아무것도 없잖아?' 그런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그런데 반대로 믿음 좋은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주셨대, 이제 나는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 거야!'
우리가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신앙의 파라독스를 이해해야 합니다. *역설
'하나님이 다 해 주셨지만, 하나님이 미리 다 이루어 놓으셨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내가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거죠.
기드온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은 먼저 기드온에게 음성을 듣게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듣게 하셨고요.
또한 직접 주님께서 기도원에게 바알의 제단을 헐라고도 말씀하셨고 이제 또 심지어는 미디안 군인들의 대화를 통해서도 (보리떡이 굴러들어오는..)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세상을 통해서도, 그 뜻과 음성을 듣게 하신단 말이에요.
그렇게 들었을 때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선 경배했어요. 기도원이 하나님께 번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호와 샬롬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어진 거예요.
그리고는 그가 나와서 이제 하는 일이 뭡니까? 군대를 소집하고, 그 중에 3백명을 추려내고, 그걸 세 대로 나누고,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준비하는 거란 말이에요.
이것도 아이디어를 주셨겠죠. 그리고 보초가 근무 교대를 할 (느슨한) 시간에 치라는 아이디어까지 주셨어요. :19
어쨌든 기드온이 최선을 다했던 거죠.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듣고서.. 이제는 자로 가나 모로 가나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뒷짐지고 방관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따라서 기드온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 가운데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의 파라독스"를 꼭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어요. 골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속에서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부여주신 모든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는 거예요.
이 역사를 따라서 나도 힘을 다하고, 나도 수고를 다 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은사도 주십니다.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런 은사를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내가 수고를 다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가운데, 남들보다 많은 위협 가운데 처해졌고 남보다 수많은 수치와 모욕을 겪었지만 그러나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힘의 강력함, 그 능력으로 그는 끝까지 수고를 다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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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절,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롯샘 곁에 진 쳤고, 미디안의 진은 그들의 북편이요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기드온은 하롯샘 곁에 진 쳤고’
하롯 샘은 '이스르엘 골짜기'의 바로 북쪽 길보아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하롯은 '떨림"이란 뜻이다. tremble, quake
사울이 전사하는 길보아 산 전쟁 때, (삼상 29:1)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기 위해 진 친 곳이 '이스르엘에 있는 샘'곁이었는데,
이곳이 본문의 하롯 샘과 동일한 곳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이스르엘 골짜기 주변에는 샘을 끼고 있으면서 군대가 진을 치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미디안의 진은 모레산 앞 골짜기에 있더라’
'모레 산'은 '하롯 샘' 북쪽의 어느 한 곳일 것으로 추정한다.
2절, ‘기드온아,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이렇게 소규모의 군대로 대군을 이긴 역사를 찾는다면, 3만 6천 명의 알렉산더의 군대가
60만의 바사 왕 고레스 3세(Cyrus III)의 군대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이긴 경우이다.
일반 세속 역사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알렉산더가 엄청난 속도로 당시 세계를 제패했는데 전쟁 역사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진영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뭐 이런 상황에서는 이길 수 없다' 그런 전쟁들을 알렉산더는 다 이겼다.
그러니까 당시 기존에 있던 전쟁 전략전술에 관한 이론들을 알렉산더의 등장으로 다 재정립해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장점을 알았고, 상대의 단점을 알았다. 상당한 기동력이 있었고, 그리고 심리전에 능했다.
자신의 기동력을 발휘하는 순간 상대가 심리적으로 무너진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러니까 상대 진영이 조금 갈라진 빈틈 crack 이 생기면 거기서부터 급속도로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상대방을 이길 수 없는데 상대 진영에 빈틈이 생기는 순간, 그 빈틈을 파고 들면, 상대 진영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터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군대는, 자기들 그리스의 군대와는 달리 여러 민족의 군대를 불러 모은 집합체 였기 때문에, 숫자만 많을 뿐이지, 조직력과 결속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그 빈틈을 노리면, 상대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상대방의 대군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기드온이, 이런 전술을, 알렉산더보다 더 먼저 깨달았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수효를 줄일 것을 명하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였다.
1) 구원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고
2) 믿음의 정예 용사를 뽑기 위해서였다.
3절, ‘길르앗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여기서 '길르앗 산'은 요단 동편의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의 지경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본절의 길르앗은 '길르앗'이 아니라 '길보아'의 오기
라고 주장한다(Clericus, Bertheau, Cassel, Cundall).
왜냐면 현재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곳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산지가 아니라
길보아 산기슭의 하롯샘 곁(1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는 없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길르앗'이라 하면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 지파를 일컫는데,
히브리어 '-에서'란 말은 '-으로'라고 번역되며,
본절을 '길르앗 산으로 떠나 돌아가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기드온을 따른 사람들 중에는 그와 같은 지파인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며, 그 점에 의거할 때(6:35)
'길르앗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자연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가 된다.
이에 따라 영역 RSV도 이를
'집으로 돌아가라'(let-return home)는 의미로 의역하고 있다.
6절, ‘그 혀로 물을 핥는 자’
이들은 서서 물을 움켜 조금씩 핥았던 자들이다.
이들이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보다 훨씬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으므로
전쟁에 보다 적합한 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들은 서서 혀로 물을 핥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주위를 경계하면서, 방심하지 않는 자들임에 틀림 없다.
따라서 이들은 매우 조심성이 요구되는 횃불 작전(15-23절)에 적합했을 것이다.
17절,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나의 하는대로 하되 내가 그 진 가에 이르러서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횃불 작전은 한 두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실패하게 된다. 이에 따라 기드온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호에 따라서만 움직이도록 명령했다.
19절, ‘이경 초에’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의 밤 시간 계산은 해지는 시각부터 해뜨는 시각까지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즉 해질 때부터 밤 10시경이 초경이며, (애2:19) 10시경부터 2시까지가 이경, 그리고 2시부터 해뜰 때까지가 삼경이다.
한편 신약시대에 와서 이러한 시간 구분법은 좀 더 세분되어 일, 이, 삼, 사경으로 나뉜다(마14:25, 막6:48). 이는 유대인들이 당시 로마인들의 시간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19절,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근무 교대를 할 때, 아무래도 느슨한 틈이 많다. 이 틈을 노려서 기드온은 공격했다.
20절에, '세 대가 나팔을 불며'
3백 명의 군사를 3개 부대로 나눈 것은,
은밀함이 요구되는 작전에, 보다 민첩하게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24절, '에브라임 온 산지'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의 지경 남쪽에 넓게 펼쳐진 산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경계를 이루었다(수16,17장).
이 지파는 처음에는 전쟁에 소집되지 않았으나(8:1)
도망치는 미디안 사람들을 추격하기 위해 후에 소집되었다.
이로 보아 미디안 사람들이 주로 도망해 간 곳은 가나안 남부 지역임이 분명하다.
24절, ‘그 나루턱을 취하고’ 문자적으로는 '그 물들을(the waters) 취하고'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벧 바라에서 여리고 동편 요단 나루턱까지 이르는 모든 나루터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이 나루턱들을 지키게 한 것은 적들이 요단을 건너 동편땅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6:33).
25절,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
이들은 미디안 연합군의 군사 지도자 중 일원이었지 미디안 족속의 최고 통치자들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