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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7장 1~13 가짜 속에서 진짜로 살아가기

LNCK 2022. 1. 7. 08:00

◈가짜 속에서 진짜로 살아가기          삿17:1~13절            스크랩, 출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교묘하게 진짜를 흉내 내며 사람들을 속이고 피해를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 가짜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 가짜인지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로 인해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짜, 진리를 가지고 세상의 수많은 가짜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가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성공, 가짜 만족, 가짜 종교, 가짜 행복, 온통 가짜투성이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가짜를 진짜로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가짜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짜인 줄 모르고 진짜로 착각할 때

문제는 더 커지고 더 비참하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 남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오늘 본문 17장부터는 사사기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됩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봤던 삼손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사사기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12명의 사사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17장부터는 사사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사사기의 결론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서론이 두 번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었는데

사사기의 결론도 두 번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구성을 보면,

두 번의 서론과

두 번의 결론이 있고

중간에 사사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의 결론 중에 첫째 결론에 해당되는 것이 17장과 18장인데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타락이 주된 내용입니다.

 

사사기에서 반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론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들의 타락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사기의 결론(17~21장)은

마치 책 마지막에 추가되어 있는 부록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추가로 설명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들이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혹자는 ‘결론’으로 보고, 혹자는 ‘부록’으로 봅니다. 뭘로 보든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결론을 보면서 주의할 점은

결론에 나오는 사건들은 삼손 다음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이나 인물의 연대 등을 생각해봤을 때,

그리고 지파들의 정황들을 고려해봤을 때

결론에 나오는 사건(17~21장)들은 사사기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를 생각하면

사사기는 16장 삼손의 이야기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뒤에 나오고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더 먼저 있었던 일입니다.

 

특히 두 번째 결론에는 정말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나옵니다.

어찌되었든 그동안 본론에서는 타락해가는 사사들을 볼 수 있었다면

결론에서는 타락한 백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백성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한 가정이 나옵니다.

모든 이스라엘 가정이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17:1~2)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미가라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어느 날 미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저주한 이유는 은 천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얼마의 돈을 도둑맞았습니까? 은 1100입니다.

노동자가 100년을 넘게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혹시 은 천백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전에 블레셋 지도자가 들릴라에게 약속했던 돈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미가의 어머니를 들릴라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은 천백이 괜히 나온 금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 초기이고, 삼손보다 훨씬 전의 일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들릴라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미가의 집안이 그만큼 재력이 있는 부유한 집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미가의 어머니가 큰돈을 도둑맞은 것으로부터 문제는 시작되는데

이 문제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돈을 도둑맞은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훔쳐간 것이 다름 아닌 아들 미가라는 사실입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돈을 훔쳤다가 어머니가 저주하는 것을 듣고 두려워서

다시 돈을 돌려준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어떤 말로 저주를 했는지 모르지만

미가의 마음을 바꿀 만큼 효과적인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가가 돈을 훔쳐간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미가가 사실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미가를 축복합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했다가 그 사람이 아들인 것을 알고

축복으로 바꿉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의 죄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넓은 마음을 가지고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라서 그러는 걸까요?

 

이 가정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자녀의 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돈을 훔쳐간 아들의 죄를 다루지 않는 엄마는 더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더 큰 문제를 부르고, 더 큰 문제는 또 더 큰 문제를 부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미가에게 돌려받은 돈으로 뜻밖의 일을 합니다. (:3~4)

미가의 어머니는 되찾은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 2백 세겔을 내어서, 은신상 2개를 아들 미가를 위해 만듭니다.

 

아들을 위하겠다고 우상을 만듭니다.

자기 아들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했던 저주가 아들에게 불행을 가져올까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을 부어 드리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셨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금하셨는지,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무엇이 죄인지 상관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생각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2계명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이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스러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집안은 그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이 형상을 만들면 하나님의 한 부분을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하나님의 다른 부분은 왜곡시키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표현하거나 오해되게 만듭니다.

 

하지만 미가의 어머니는 우상을 부어 만들었고

그 우상은 미가의 집에서 그들의 하나님이 됩니다.

 

그리고 미가는 집안에 추가로 뭔가를 계속 만듭니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미가의)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5

 

미가에게 신당이 있었습니다. 신당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신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에게는 신들을 모셔두고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성막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미가에게 은으로 만든 따끈따끈한 신상이 생겼습니다.

 

신당과 신상이 있는 미가가 또 무엇을 만듭니까? 에봇과 드라빔을 만듭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은 점을 치는데 사용했던 우상입니다.

 

하나, 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추어 가는 미가에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그러니 미가도 제법 나이가 든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직무를 레위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미가가 하나님 말씀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후에 보면 미가가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고용하는 것을 보면

레위 자손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가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별 문제 없는 그런 정도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가는 온통 가짜로 만들어진 가짜 신앙을 세웁니다.

그럼에도 미가는 자신의 섬기는 우상에 대해서

‘여호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13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무늬뿐입니다. 진짜는 없고 가짜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런 미가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6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합니까?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상을 만들고 내가 원하는 대로 신당을 세우고 내가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가짜 신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좇아서 가짜가 주는 만족과 유익과 편함을 좇아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그렇게 이스라엘은 가짜를 좇아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내 입맛대로 바꾸며 우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내가 만든 가짜를 섬기면서 진짜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하나님 말씀을 의도적으로 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이러한 태도로 말씀을 내 마음대로 선택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더 편하고 쉬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내가 만들어낸 가짜일 뿐입니다.

내 입맛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신다면   17:7~13

 

여러분은 혹시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평생을 걸쳐서 대답해야 하는 어려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왜?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은

내게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질문과 답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답으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나의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해서 잘못된 답을 가지고 있으면

인생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이유,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살면

결국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패와 후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해서 바른 답을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본문(:7~13)을 보면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오해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미가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미가의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손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됩니다.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7

 

레위 지파에 속한 한 청년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청년은 그곳에 더 있을 수 없어서 머물 곳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에브라임 산지로 갔고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됩니다.

아마 부유했던 미가의 집에 묵을 곳이 있을까 싶어서 들렀을 것입니다.

이렇게 미가와 청년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입니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9

 

레위 청년은 미가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황인지를 말합니다.

‘나는 레위 사람인데 머물 곳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미가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제사장이 없어서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던 미가에게 레위 사람이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머물 곳을 찾고 있다니 미가에게는 정말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협상에 들어갑니다.

연봉을 제시하며 레위 청년과 계약을 맺는 겁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0

 

특별히 미가는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표현이 주목할 만합니다.

미가는 분명 레위 청년보다 나이가 많았을 텐데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리더로서 가족을 인도하는 권위 있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여기 아버지가 되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레위 청년도 이 집안의 제사장이 되어 권위 있는 사람으로서 그 일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이런 제안에 대해서 레위 청년은 어떻게 합니까?

‘말씀은 고맙지만, 그런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봉사해야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 청년은 사사기에 잘 어울리는 결정을 합니다.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1

 

레위 청년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고 미가의 뜻을 따릅니다.

미가의 집에 머무는 것을 만족했고 머물면서 미가의 아들과 같이 됩니다.

이번에도 미가는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가뿐만 아니라 레위 청년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하나님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미가의 집에 속한 제사장이 되어서 우상을 섬깁니다.

 

레위 사람이 자기 신분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하고

잘못된 방법과 잘못된 동기로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 사람에게 어떤 명령을 주셨는지, 어떤 임무가 주어졌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7장에서 한 가정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았고

이어서 레위 사람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잘못을 가르쳐주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역할을 해야 할 레위 사람은

자신의 사명과 관계없이 미가의 뜻을 받아들이고 미가를 위해 제사장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미가는 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굳이 레위 사람까지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서 이런 일을 했을까요?

 

미가는 신당을 두고 신상뿐만 아니라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고

이번에는 레위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미가가 이렇게 하는 이유,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 걸까요?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13

 

미가가 이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중심에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자신에게 복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릅니다.

다만 복을 받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미가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잘못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복주의

인생의 답을 나에게 두고 내가 중심되어서 나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 인생의 목적을 성공에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성공을 위해, 성공에 방해가 되는 더 소중한 것들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공에 더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인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서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내 인생의 목적을 자녀에게 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언젠가 자녀에게 실망하고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자녀에게 인생의 목적을 둔다면 결국 그 자녀를 통해서

인생의 허무함을 뼈 저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사는가?’하는 질문에 답을 하려면

우리 인생의 목적, 우리가 사는 이유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가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다양한 일들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레위 청년 또한 그러합니다. 그는 레위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삶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이용합니다. 앞뒤가 바뀐 잘못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앞에 와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필요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뒤에 따라옵니다.

하나님을 앞에 두고 일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에게 목적을 두고,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허락된 것을 사용한다면

그만큼 인생은 낭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여러분 삶의 목표가 되십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그런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십시오.

한 때는 정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마음으로 뜨거웠는데, 지금은 아닌가요?

한 때는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최우선이었는데, 지금은 아닌가요?

 

한 때는 하나님을 섬기며 수고하는 일이 즐거웠는데, 지금은 아닌가요?

혹시 많이 지치셨나요? 생활의 염려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식어져있다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무뎌져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먼저 그 마음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정도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할 일은 하나님을 그 온전하심 그대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내 수준으로 낮추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말씀만으로 우주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모두를 만드셨습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와 모든 생명과 모든 지식과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십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혹시 이런 하나님은 아닙니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생각나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님,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내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

 

우리가 믿는 성경은 하나님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작게 만들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그냥 내 마음대로 바꾸며 내 편한대로 길들일 수 있는 분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정말 교만하게도, 정말 겁을 상실해서, 정말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진리와 다르게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섬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주인과 종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즉 자신의 아들을(모든 것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분을 섬깁니다.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그분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 그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이병권 목사 설교 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