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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12장 7~15 점점 더 망가져 가는 사사들

LNCK 2022. 1. 8. 14:39

◈점점 더 망가져 가는 사사들         삿12:7~15              2016.06.23.스크랩, 출처

 

“그 땅이 평온한지 사십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삿3:11).”는 기록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 옷니엘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이면서 동시에,

사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소개해 주고 있다.

 

사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구원해내고,

이스라엘에 평온을 가져다주는 존재이다.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을 시작으로 해서

다섯 번째 사사 기드온이 죽을 때까지 이 역할은 비교적 잘 유지되어 왔다.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년 동안 그 땅이 평온 하였더라’ (삿8:28)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드온이 가져온 평온이 사사시대의 마지막 평온이었다.

여섯 번째 사사 ‘돌라’ 이후로 마지막 사사 삼손이 죽을 때까지,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평온을 누렸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사사 누구누구가 있었고,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죽어서는 어디어디에 장사 되었다”(삿10:2,5, 12:7,10,12,15, 16:31) 라는

다소 무미건조하고, 냉담한 결론만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의 등장에서부터 (B.C1373-1334)

여섯 번째 사사 돌라의 죽음까지 약 250년의 세월이 흘렀다. (B.C1149-1126)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사들조차도 평온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사사기 2장에서 찾을 수 있다.

 

참고로 사사기 2장은 사사기 전체에 대한 서론이자 요약이기 때문에

2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짐작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그들이 오히려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더욱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삿2:16, 17,19)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사사시대의 특징을 발견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조상들 보다 더욱 타락했다'는 것이다.

 

사사시대의 첫 세대는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섬겼다(삿2:7).

 

그러나 여호수아의 다음 세대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고,

당연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삿2:10,20).

 

이렇게 사사시대의 두 번째 세대들은 이미 조상들이 가졌던 믿음을 져버렸고,

조상들 보다 타락하고 말았다.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400) 기간 동안

단 한번도 조상들이 가졌던 믿음을 회복한 적이 없었다.

 

여호수아 세대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은 둘째 치고,

바로 앞 세대의 믿음으로도 돌아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고,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나갔다.

 

여호수아 세대의 믿음을 100점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 세대는 90점, 80점, 50점,

이렇게 한번 떨어진 믿음은 좀처럼 회복 될 줄 몰랐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하향평준화 되어 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들조차도 (위에는 백성들 전체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하향평준화 되어 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은 그래도 사사다웠다.

에훗, 삼갈, 드보라는 저마다 결점(왼손잡이, 이방인, 여자)이 있었지만,

사람 자체만 놓고 봤을 때는 크게 흠이 없었다.

 

그러나 사사들의 결함은 기드온 때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사는 기드온이 전환점 역할을 한다.

 

기드온은 의심 많고 머뭇거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후에는 탐욕적이고 포악한 모습으로 변질 되었다.

 

입다는 본격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낸 사사였다.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과 통치권을 놓고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원하는 바를 쟁취했다.

 

또 율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서원을 하는 바람에

자기 딸을 제물로 바치는 비극을 자초했다.

 

입다 이후에 등장하는 입산, 엘론, 압돈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기록은 아예 없고,

그들이 누린 부귀영화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사사 삼손은 그릇된 사사의 결정체로

모든 것을 제멋대로 처리하는 사사로 그려진다.

 

이렇게 너 나 할 것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조상들의 믿음을 따르지 않고 반복적으로 타락에 타락을 거듭해갔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선물로 주실 때 분명히 경고하셨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평안과 복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우상을 따르면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우상숭배를 일삼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이용하고 조종하려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평온을 주실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어린 자녀가 사탕을 좋아한다고 해서, 간식으로 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가 다 썩어서 잇몸이 내려앉고, 영양실조로 비실비실 거리는데도

“내 아이가 좋아하니까”하면서 계속 사탕을 입에 물려준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거나, 부모가 아니다.

 

아이가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해도 아이를 망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빼앗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는가?

 

우상숭배를 통해 얻게 되는 잠시 잠깐의 번영과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 진정한 평온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누리던 번영과 형통을 빼앗으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들의 믿음을 버리고 타락하면 타락할수록

점점 더 큰 고통과 환난과 수많은 이방 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었다.

 

심지어 세대를 거듭할수록 망가져 가는 사사들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이방민족이 아니라

타락한 사사를 섬기느라 허리가 휘고,

사사들의 욕심 때문에 온 나라가 뒤죽박죽, 쑥대밭이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한마디로 사사가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기드온의 말년을 포함해서, 기드온과 그 이후의 사사는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평온을 가져다주는 지도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하고, 찍어 누르는 지배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들의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이방의 통치자들의 본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오늘은 12장에 기록된 현재의 사사들이

이전의 사사들에 비해서 얼마나 더 형편없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기드온과 입다, 기드온과 입산을 비교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영적 상태가)은 이전 세대에 비해서,

그리고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비해서 어떤 상태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1~7절은 입다와 에브라임 사람 사이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룬다.

문제의 발단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도발에 있었다.

입다가 암몬 자손들을 물리치고 약 두 달이 흐른 뒤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시비를 걸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가 암몬과 전쟁을 할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으니(무시 했으니)

입다의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협박했다(1절).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함께 전쟁에 참여하자고 요청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거절했다(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적반하장으로 입다를 몰아세우고, 입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허세는 에브라임 지파의 특징인 것 같다.

왜냐하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치룰 때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지금과 똑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기드온이 전쟁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할때는 거절해 놓고,

전쟁이 다 끝날 즈음에 나타나서는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때 기드온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에브라암과 맞설 형편이 못됐다.

그래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추켜세우며 좋게좋게 마무리를 지었다(삿8:1-3).

 

그러나 입다의 경우는 달랐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상태였고(삿11:33),

자신이 내뱉은 서원 때문에 딸을 제물로 바치고 난 후였다.

 

에브라임의 어이없는 허세를 굳이 어르고 달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다 모아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물리친다.

이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이 4만 2천명이나 되었다(6절).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 번째(기드온, 아비멜렉, 입다) 동족상잔 이었고

사사의 주도하에 진행된 2번째 내전이었다.

 

첫 번째 내전은 사사 기드온이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학살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아비멜렉이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세겜과 데베스를 불지른 것이었다.

*아비멜렉은 사사는 아님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사 입다가 길르앗 사람들을 이끌고

에브라임 사람들을 살해 한 것이 세 번째 내전이다.

 

기드온이 일으킨 내전은 정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다.

왜냐면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미디안의 왕을 쫓고 있는 기드온과 군사들을 외면하고

굶주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삿8:5-8).

 

또 아비멜렉의 경우는 사사도 아니었거니와,

세겜 사람들이 먼저 아비멜렉을 배반했다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삿9:23).

 

그런데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몇 마디 도발적인 말에 흥분해서

4만 2천명이나 죽였다.

 

물론 에브라임 쪽에서 먼저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하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 갈수 있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의 집에 불을 지를 만한 위인이 못된다.

그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굳이 입다는 에브라임과 전쟁을 치르고,

심지어 전쟁에서 패해 도망가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죽여 버렸다.

 

기드온과 아비멜렉이 이성을 잃고 저돌적으로 동족을 죽였다면,

입다는 계획적이고 침착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에브라임 사람들을 차근차근 죽여 나갔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은 중요한 길목에 버티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한 사람 한사람 붙잡고 “쉽볼렛” 발음을 시켰다.

왜냐면 에브라임 사람들은 쉽볼렛을 발음하지 못해서 십볼렛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십볼렛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을 한명씩 한명씩, 그렇게 4만 2천명을 죽였다고 생각해보라.

이것은 성을 무너뜨리고, 성에 불을 지르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잔인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잔인하고 누가 더 사악한가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비극이 갈수록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기드온이 같은 민족을 학살한 사건은 사사시대 200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그 후 50년이 되지 않아 아비멜렉이,

30년도 채 되지 않아 입다가 동족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를 거듭할수록 점 점 더 포악해지고,

잔인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사사들이 더 부추기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는 기드온과 입산을 비교해보자.

먼저 기드온에게는 많은 아내와 많은 아들이 있었다(삿8:30).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아내와 많은 아들을 두는 것은 이방 왕들의 생활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사사가, 자신이 왕이 되어 군림하고 있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다른 형제들을 몰살시키고 권력을 독차지 한다.

그러나 적어도 기드온은 자신이 직접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입산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아들과 많은 딸들을 낳았고,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정치에 이용했다. 딸들은 이방 민족에게 시집보내고,

며느리는 이방민족에서 데리고 왔다. 흔히 말하는 정략결혼이다.

 

이방 민족과의 결혼을 통해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이방이 아니라, 타 지파와의 결혼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9절에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여기서 밖으로를 꼭 외국으로 볼 필요 없다.

‘자기 부족 밖으로’ 라고 보면, 타 지파에게 시집보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내전이 있었으니, 타지파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는 것이 사사의 역할이었다)

 

사사시대에는 12명의 사사가 등장한다.

12명의 사사 중에서 굳이 기드온을 기준으로 삼아서

다른 두 명의 사사와 비교한 이유는

기드온이 사사시대의 전환점, 그것도 부정적인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기드온을 기점으로 해서 기드온 이후에 등장하는 사사는

전혀 사사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기드온이 부패한 사사들의 포문을 연 것이다.

 

 

▲마치는 말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여러분 개개인의 인생 속에서

여러분의 믿음은 성장하고 있는 중인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 중인가?

 

우리는 조상들의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조상(선진)들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믿음을 뛰어 넘어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

 

기드온이 아버지의 우상을 무너뜨리고 여룹바알이 되었을 때(삿6:32),

그는 미디안과 싸워 이기는 믿음의 사사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처럼 자기 집에 금에봇을 우상으로 들였을 때(삿8:27),

그때부터 몰락과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삿8:35).

 

믿음의 역사는 조상들의 믿음을 회복하고 뛰어넘을 때 이루어진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역사를 쓰고 있는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향평준화 되어 가는 역사인가?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고, 뛰어 넘는 부흥의 역사인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은혜와 부흥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여기 모인 여러분이 바로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이 시대 가운데

믿음의 조상으로 쓰임받기 원한다.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이 회복되고 교회가 부흥하고,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길 기대한다.

 

*썹 목사 설교 스크랩, *원제목 : 믿음의 역사를 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