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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20장 1~48 기브아를 기억하라, 승자 없는 전쟁

LNCK 2022. 1. 18. 11:41

◈기브아를 기억하라, 승자 없는 전쟁             삿20:1~48             여러 설교 정리

                                                                                                  사사기 설교 모음

 

◑내전을 치르기로 모여서 결정하다

 

삿19장에서 기브아 불량배들이 행한 끔찍한 일을 보았습니다.

레위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그들의 악을 갚아주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 쪼갠 시체를 보냈고,

이스라엘은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1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에서 가장 북쪽까지, 그리고 요단강 건너 길르앗에서도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인 미스바는 베냐민과 에브라임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었고

문제가 되는 기브아 지역과 5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과 그 결과를 보면 좋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같은 이스라엘끼리 싸우려고 모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이스라엘 병사의 수가 40만 명입니다. 엄청난 수가 모인 것입니다.

한 자리에 모인 이스라엘은 먼저 사건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레위 사람에게 이 일에 대해서 묻습니다.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4~6

 

레위 사람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잘 전달했습니까?

특별히 5절에 보면 기브아 사람들이 이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 레위 사람이 말한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그냥 일반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지도자들이나 유지들, 주인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레위 사람은 지금 몇몇 불량배가 아니라

기브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 일을 벌인 것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11지파를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보복을 위해 전체 이스라엘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앞서 자기 첩의 시신을 찍어서 12조각을 내서, 12지파에게 보낸 것 ..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19:29

그런데 11지파가, 이 한 명의 레위인에게 지금 선동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브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에게 첩을 내어주었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정당화합니다.

자신이 한 일은 기브아 사람의 악에 대한 당연한 반응처럼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브아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켜서 그 분노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레위 사람의 말에 넘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끔찍한 일을 벌인 레위 사람의 죄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레위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입니다.

 

모든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8~10

 

이스라엘은 전쟁을 결정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모인 인원의 1/10은 양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게 합니다.

 

40만명 중에 36만명은 전쟁에 투입되고 4만명은 보급을 맡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한 마음이 되어 기브아 성읍을 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는 베냐민에 속한 모든 지역에 사람들을 두루 보내어

기브아가 행한 악행을 알리고 기브아 사람들을 넘겨 줄 것을 요청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베냐민은 기브아를 내어주기 보다는 싸우기로 합니다.

싸우기 위해 모인 베냐민 병사가 2만6천명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에서 왼손잡이 즉 전쟁을 위해 훈련된 자가 7백 명입니다.

이렇게 해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군사의 수가 총 2만6천7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36만과 베냐민의 2만6천의 싸움입니다.

숫자만으로 생각하면 13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그냥 봐도 싸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왜 베냐민은 무모하게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할까요?

 

베냐민 지역에서 벌어진 일인데, 베냐민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 악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냐민은 왜 이런 결정을 한 걸까요?

 

“무엇을 위해” 베냐민 지파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합니까?

자기 사람을 위해 합니다. 자기 사람이면 다른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자기 동족의 죄에 대해서도 용납합니다.

자기 사람, 자기 지파, 자기 가족이면 합당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혈연을 중요시 합니다.

 

그런 마음 자체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정당한 다른 기준을 넘어서게 될 때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공의를 벗어나게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을 위해 불법을 행하고 자기 사람의 죄는 눈감아줍니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계속 뉴스에 나오는 일들입니다. 옳고 그름을 정직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결정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동족 간에 피 흘리는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진영이 있습니다.

그 행한 일을 심판하기 위해 일어선 이스라엘 연합군과

죄를 범한 자기 사람을 지키려는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은 3번에 걸쳐서 계속됩니다.

 

성경의 기록이 같은 형식으로 반복되는데 먼저 질문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그러고 나서 전쟁이 있고 그 전쟁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럼 세 번의 전쟁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8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이 질문은 바른 질문일까요? No

 

사실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질문은 이 전쟁이 합당한 것인지, 하나님이 이 전쟁을 원하시는지,

베냐민과 싸우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전쟁 자체에 대한 질문이 먼저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없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늦은 밤에 잘 시간이 다 되었는데, 엄마한데 와서 묻습니다.

‘엄마, 초콜릿하고 사탕 중에서 무엇을 먼저 먹을까요?’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을 결정한 후에

단순히 누가 먼저 싸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유다가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1장에서도 하나님은 유다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유다에게 리더의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혹은, 하나님은 레위인의 첩이 베들레헴 출신의 

유다 사람이었기에, 아마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냐민이 승리했고 이스라엘 연합군 2만2천명이 전사합니다.

 

전쟁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베냐민은 지형적으로는 더 유리했습니다.

기브아가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더 수월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수적인 우세를 앞세운다 하더라도

어차피 싸울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습니다. 36만명이 동시에 베냐민 군사들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순서를 정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베냐민에게는 훈련된 군사들도 있었기에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2) 두번째 전쟁, 패배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울면서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마 벧엘에)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23)

 

여기 두 번째 질문을 보면 첫 번째 질문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을 다르게 말합니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형제라는 언급이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싸우러 나갔고 또 패배합니다. 1만8천명이 전사합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4만 명이 죽었습니다.

 

3)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다시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엎드려 웁니다. 여기서 또 달라진 것들이 있습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26)

 

세 번째 전쟁을 앞두고 달라진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할 때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온’이스라엘 자손 ‘모든’백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스라엘 자손이라고만 언급이 되었는데

이제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이스라엘이 이번에는 금식하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두 번의 패배를 경험하고 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알지만 그들이 지금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합당한가?

그래서 사사기의 저자는 27~28절에서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이유를 언급합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벧엘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고

그 자리에 아론의 손자인,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생기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의 언약궤가 벧엘에 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분명 18장에서는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벧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사기 이후에 사무엘 때,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를 보면

언약궤가 실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서 생각하면, 언약궤가 실로에 있기 전에는 벧엘에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고

사사기의 두 번째 결론은 첫 번째 결론보다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28)

 

질문도 달라졌습니다.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전쟁 자체에 대한 질문이 담겨있습니다.

패배 전에는 이런 질문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이런 죄악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공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듭 되는 패배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합당한 일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28)

 

하나님이 이번에는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이스라엘이 승리하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승리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복 작전을 펼칩니다.

일부의 군사들이 베냐민과 싸워 패하고 도망을 가는 척 합니다.

베냐민은 속아서 성읍에서 나와 도망가는 적들을 쫓아갑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먼저 비어있는 성읍을 점령합니다.

 

그러고 나서 매복했던 군사들과 함께 모든 군사들이 연합해서

추격하던 베냐민 군사들을 포위하여 공격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쓰는 전략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점령할 때 썼던 전략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사용했던 전략을 형제를 정복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사기의 저자는 여호수아에 기록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이들이 하는 일이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와 같음을 알려줍니다(:40, 수8:20).

 

◑승자 없는 전쟁, 양측 다 패했습니다

 

결국 베냐민은 크게 패합니다.

 

잘 싸우던 베냐민이 왜 패배했을까요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리고 전략을 세워서 제대로 싸웠기 때문일까요?

이 패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35)

 

결국 베냐민을 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베냐민을 심판하셨고,

베냐민뿐만 아니라 베냐민을 치기위해 모인 이스라엘도

두 번의 패배를 허락하시면서 그들을 일깨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승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한 후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48)

 

베냐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도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은 징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했을 때처럼 베냐민을 진멸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합니까? 복수를 위해 합니다.

시작은 이스라엘에 죄악을 없애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4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냐민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더 크게 쌓이게 됩니다. 적대감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갚아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갚아줍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무엇이 옳은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벌어진 이 기브아 내전의 승자는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전쟁은 패자만을 남길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내전으로써 양편 모두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것은 온 이스라엘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의 타락은 온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단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브온 불량배들의 행동에 흥분하여 내전을 불사하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반면, 베냐민 지파는 기브온이 자기들에게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싸고 돕니다.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보는 느낌입니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원리에 대하여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기본적인 입장을 결정해놓고 어떻게를 구하거나 승리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자기 편한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다가, 어려워지면 엎드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는 전제라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손자 요나단을 통해서 한 번 놀란 우리는,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모세의 임종 전에 하나님께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입니다(신 31:16~18).

이스라엘은 장래의 역사에서 언제나 이 기브아의 비극을 기억해야 했듯이,

오늘 우리도, 이 기브아의 사건을 기억하고 우리를 돌아보아야만 하지 않을까요?

 

 

◑육신를 따라 선을 행하려 한 11지파

 

11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려고 한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육신 또는 육체를 따라서

선을 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3번의 전쟁에서, 처음 2번은 패하는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잘 들어보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매우 독특하고 희귀하고 특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사기는 내내 여호와의 목전에서 늘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어떤 정화 또는 개혁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2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목전에서 평소에 늘 악을 행하던 자들이, 즉 11지파가

이제는 어떤 개혁의 주체가 되어서 
'이제 여호와 앞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는 
아주 의미심장하고, 처음 보는 생소한 모습을 우리가 본문에서 됩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 그 누구도 승자도 없는 
승자없는 전쟁이 
결국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판하고 계시는 
심판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 주목하여 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어느 편도 승리한 곳이 없는, 승자가 없는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이라면 
왜 하나님은 양편 모두를 심판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결국 악을 행한 베냐민을 심판하셨다라는 거예요 :35

그래서 결국 베냐민사람 이만 오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38~46

베냐민 성읍 전체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베냐민을 왜 이렇게 완전히 심판하신 것입니까? 
베냐민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육체를 따라서 그들이 악을 행했기 때문이었어요. 

 

베냐민의 기브아 성읍 사람들은

마치 소돔 성에 살던 롯에게 찾아왔던 천사들에게 했던 것처럼

지나가던 행인 레위인을 학대를 하려고 했고

그에게 동성애를 요구하고, 그의 첩에게 성폭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죄악때문에 하나님께서 결국 이 베냐민을, 자기 백성 이지만 심판을 하셨다 라고

본문은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13절을 보면, 11지파가 베냐민의 악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전쟁이 일어났던 이유는, 베냐민 지파에 있었던 악을 제거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기 지파 사람의 악을 제거하지 않고, 끝까지 막아서며, 그것을 품고 있으려고 했던

그 악한 행위 때문에 그들이 심판을 받았다 라는 것이죠. 

우리도 살다보면 악을 따라 육체를 따라서 악을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육체가, 결국 우리를 자꾸 악하게 죄를 짓게 만들 수 있단 말이죠.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 악을 제거하시려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 
결국 그것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것을 품고 있는 것, 
이것이 더 악한 것이에요. 

다윗이 잘했던 것은, 죄를 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고 난 이후에 그 악을 제거하려고 할 때마다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라는 것이 중요했죠. 

그런데 오늘 이 베냐민지파를 하나님께서 결국 완전히 심판하셨던 이유는 뭐냐면 
그들 속에, 그들 안에 있는 육체를 따라서 그들이 악을 범했고 
그리고 그 악을 제거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그들을 붙잡고 있었던, 
육체를 따라서 악을 행했던 그 백성!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또 한편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11지파가 심판을 받은 이유인데요.

바로 육체를 따라 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


아니 선을 행했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는가요? 
자세히 봐야 합니다. 육체를 따라 선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에서 결국 하나님은 베냐민을 완전히 심판하셨어요 
그런데 베냐민이 심판 받기 전에, 먼저 그리고 더 많이 심판하신 부분이

바로 이스라엘 11지파를 향한 심판이었어요 

1차 전투에서 2만2천명 전사,
2차 전투에서 1만8천명 전사,
11지파 연합군이 베냐민 보다 더 많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서 악을 제거하려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거룩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11지파를 먼저 심판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선이든 악이든, 그것이 무엇을 따라서 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 육체(또는 육신)가 얼마나 교활하냐 하면 
우리를 속여서, 육체가 선도 행하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극단적인 예로, 조폭이 각종 기부 사업에 적극 참여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버림 받았던 사울 왕도
한 때 이스라엘에서 박수와 무당과 신접한 자를 다 쫓아냈던 적도 있었어요. 삼상28:3

그랬던 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엔돌의 신접한 자를 자기가 찾아가죠.

결국 그가 그 전에 박수와 무당과 신접한 자를 쫓아낸 일은, 가짜였다는 거죠.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입니다' 요3:6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11지파가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해야 돼!' 라고 말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심판을 받았던 이유는 뭐냐면

부패한 자기 육체를 따라서 그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 아닙니까!

 

첩을 두기도 했고, 자기의 첩(아내)을 12 토막 내서 보낸 레위인도 육체를 따라서 행했고, 

기브아 베냐민 족속도 육체를 따라서 행했고,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11지파도 지금 육체를 따라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우리가 지금 선을 행하고 있다'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서 뭔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중에 의아해 합니다.

악을 제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내 삶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가정의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전히 내가 주인 노릇하는 상태에서, 내 육체를 따라서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