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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4장 1~22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LNCK 2022. 1. 25. 18:28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룻4:1~22         출처, 여러 설교 정리

룻기는 모두 4 장으로 되어 있지요. 
룻1장은 절망이었고, 아무것도 없음 이었습니다.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과 낙담이 1장이었습니다. 

근데 2장에서는, 보아스 라는 놀라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말할 수 없는 은혜라고 할 수 있죠. 
마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어주신 것처럼, 정말 구속주의 등장이 2장입니다. 

3장은 그 구속주를 붙잡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사건을 붙잡는 나의 믿음도 필요합니다. 

마지막 4장은 이제 결론이죠. 
이 결론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4장에서 비로소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회복됨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사시대 혼란 시대를 마무리하시고 
이제 사무엘상하로 넘어가게 되는, 
하나님이 보내신 새로운 왕 다윗의 시대로, 이제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게 됩니다. 

3장 어떻게 끝났냐면,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에게 보냅니다. 
그는 아무리 봐도 유력한 자고, 또 룻에게 마음의 호위가 있어요. 
그러니까 네가 보아스에게 가서, 아주 정중하게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되겠는지 의중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밤에 타작하는 밭에서요.

기업 무르는 자, 고엘은 여간해서는 정말 구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기꺼이 자기가 기업을 무르는 자가 되어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아스보다 기업 무를 순위가 앞서는 친척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는 1순위가 아닌데, 여기서 덜컥 그 밤을 보내게 보내고 나면 
이때부터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되는 거죠. 간음이 되는 겁니다.
  
룻기에 나오는 이 남녀관계는 좀 독특합니다. 
룻은 젊은 여인이고요. 그리고 보아스는 나이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장면은, 흔히 말하는 로맨스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해서 룻과 나오미 가정을 회복시키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그 다음날 바로 보아스는 행동을 개시합니다. 

▲4: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여기에 그 '기업 무를 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 친척의 가치가 아주 비중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면 나오미의 기업무를 자로서의 의무를, 그가 거부한 것에 대한
성경 저자(아마 사무엘)의 무시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엘리멜렉-나오미의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감당했다면, 
아마 그는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처럼, 그의 비중이 아주 높게 다뤄졌을 것입니다. 

자기의 경제적 손실 얼마 때문에, 하나님이 법으로 정하신 '기업무를 자'의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 그 친척은, 영생에서 영원히 실패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보아스는 그 성읍 장로 10명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2
성문에서는 많은 재판이 벌어지고, 많은 판결과 많은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항상 장로들이 대기하고 있었어요. 

▲3~4절,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시리아역(the Peshitta)에서는 '팔았다'로 번역했습니다. 
과거에 모압 땅으로 엘리멜렉 가정이 이주할 때 엘리멜렉이 다른 사람에게 
그 땅을 이미 판 것이란 의미입니다. 

여기서 '팔다 (마카르)'가 완료형으로 되어있는데, 
완료형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 확실한 약속이나 결심 등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이러한 의미로 번역하면 '팔려고 결심했다'란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가까운 미래를 나타내는 진행형 is selling
곧 '팔 것이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나오미가 자기 기업을 물러달라'는 뜻이 됩니다. 
(자기 기업을 이미 팔았지만) 이제 자기 가정의 기업을 친척이 사 달라는 뜻입니다.
기업 무르기를 해 달라는 뜻인데.. 그런 나오미의 뜻을 보아스가 대신 전달하고 있죠. 

보아스는, 친족에게, 당신이 먼저 자격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보아스의 일처리 방식이 아주 공개적이고 명명백백합니다. 
밀실 처리나, 숨겨서 은밀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 크리스천이 배워야 되는 일처리 방식입니다. 

'할래 말래?' 그랬더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물으리라' 했습니다. :4
어쩌면 청천벽력 같은 대답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자기가 무르겠다고 하는 걸까요? 
지금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나오미의 땅이 있다는 말을 들었죠. 
그런데 나오미는 나이가 많잖아요. 나이가 많은 과부잖아요. 
그러면 나오미가 곧 죽으면 자기 땅이 되는 거잖아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돈이 좀 들더라도, 내 재산 늘어나는 건데... 그래서 내가 사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보아스가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5절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재산만 무르는 게 아니라, 그 집에 아들도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 친척 입장에서 보면, 
돈 좀 내고 땅을 사들이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해서, 그 여인의 애를 낳아주면
자기가 재산권 행사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엘리멜렉의 기업(땅)이, 이제 새로 태어난 그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이게 손해가 막심한 거예요. 
돈은 돈대로 들고, 결국은 엘리멜렉 가정을 세워주는 일입니다. 
결국 남의 집 좋은 일을 시키는 거니까, 그 친척은 발뺌을 하기 시작합니다. 

▲6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자 이제 그는 두 손을 설레설레 흔들면서 자기의 '기업무를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법이에요. 
하나님이 이 고엘 법을 왜 만들었어요? 
돈들여서, 힘들여서 남을 살리라고 법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게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을 살리는 길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정의 입니다. 

있는 사람이 손해보면서, 없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
이게 요즘 말로 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 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받은 그 은혜를 나누며 살라하시는데 
인간은 거부하는 거예요. 

▲7~8절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그래서 기업무를 권리가 먼저 있는 친척과의 거래는, 이렇게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제 보아스와 룻과의 결혼은 율법적으로나, 사회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9절,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본 장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팔다, 사다'라는 말은
결국은 의미적으로 '기업 무르기를 해 달라, 했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 성읍에 있는 기업 무를 땅은 본래 엘리멜렉의 소유였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절에서, 그의 아들들까지 언급된 것은
상속에 관한 법적인 절차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10절,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 죽은 자의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보아스는 자신이 무른 땅을

죽은 자의 이름, 즉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의 이름으로 
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즉 이것은 룻과 자신 사이에서 낳는 아들을 
엘리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기업을 잇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자신을 위해 기업을 무른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된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의 가문을 위해서 기업 무름을 해주었던 것이죠. 

이것은 보아스가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해하여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기업무를 자 - 즉 구속주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다 깨어진 엘리멜렉 가문을 회복시키되, 온전히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의 잃어버렸던 땅(팔아버렸던 땅)도 다 되찾아 주고, 
그의 끊어졌던 후손도, 아들을 낳아 다 예전처럼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온전한 회복을 예표합니다.

△참고로, 그런데 마1:5절에는 족보가 이렇게 나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리고 이것은 본문 룻4:18~22절의 족보와도 일치합니다. 

보아스에게, 오벳 말고도 여러 다른 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족보, 메시야의 족보는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오벳'을 중심으로 해서 내려갑니다. 
어쩌면 서열상 핸디캡이 있는 오벳을 중심으로 족보가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통해서
족보가 이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며, 

다말과 라합을 통해서 족보가 이어지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은 이방인, 기생

하나님은 핸디캡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시는 걸까요?

그것보다는,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 깨어진 기업, 깨어진 가정, 깨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그 구속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많은 여러 정상적인 라인을 제쳐놓고서) 깨어지고 핸디캡있는
그런 사람이나 가정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사람까지 다 구원하는 셈이 되니까요!   

             *대표성의 원리, 룻과 나오미가 사사시대의 무너진 이스라엘을 대표함.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을 찾아가신 것과도
맥락이 같습니다. 

▲11~12절,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1~12절은 룻기의 핵심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룻)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11
룻이 이제 누가 되느냐면, 마치 라헬과 레아 라는 거에요. 
야곱의 아내입니다. 야곱의 아내를 통해서 12명의 아들들이 태어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입니다. 

그 열두 지파가 지금 다 무너진 시대가 사사시대 입니다. 
열두 지파가 다 무너졌어요. 

룻을 통해서 다시 한번 그 12지파를 회복시키는, 
이스라엘 민족, 그 무너진 민족을 다시 한번 재건하는 일을 
룻을 통해 하게 해 달라는 

성읍 사람들의 축복이요, 덕담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낳은 이 아기는 
그냥 그 엘리멜렉과 말론의 대를 잇는, 한 집안을 대표하는 아이가 아니라 
레아 와 라헬이 낳아서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열두 지파가 되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을 (장로들이, 성읍 사람들이)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Boaz가 에브랏(베들레헴의 옛 이름)에서도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도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2

자 이 여인이 마치 다말 같다는 거예요. 
너 보아스는 유다이고, 룻은 다말과 같다는 거예요.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인데요. 
다말이 머리를 써서 시부모 유다와 관계를 맺어서 베레스를 낳죠.

이것은 정상적으로 대를 있는 방법이 아니라 
정말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대를 잇는 거죠. 
그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난 아이가 베레스 잖아요. 

그 베레스의 후손이 누구냐? 보아스입니다.
그러니까 성읍 사람들이 칭송하기를
'보아스야, 우리 조상 유다도 기이한 방법으로 후손을 얻었듯이
너도 조상 유다처럼 기이하게 대를 이어가는구나!' (물론 보아스의 다른 자녀가 있었겠지만)

이것은 비꼬는 말이 아니라, 칭송이요, 축복입니다. 
창49장에 야곱은 죽기 전에 12아들을 축복하면서
12아들 중에 유다를 통해서 장차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49:10

결과적으로, 결국 유다가 다말을 통해 낳은 아들 베레스를 통해서
(유다의 셋째 아들 셀라가 아니라)
유다의 계보, 메시야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기를 원한다는 성읍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물론 성읍 사람들은, 보아스와 룻이 나중에 다윗왕, 메시야의 조상이 될 줄은 아직 몰랐죠.

▲17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나오미는 원래 아들 말론과 기룐을 모압 땅에서 다 잃었습니다.
그래서 대가 끊어질 판이었죠.

룻이 보아스에게 낳은 아들인데,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1) 태어난 아들 오벳을 나오미가 길렀다
2) 룻이 계대결혼으로 낳은 아들 오벳이, '나오미의 아들이 되었다'
이렇게 두 갈래 해석이 있는데, 2)번이 더 유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룐-말론-오벳 이렇게 되는 거죠.

그 아들 '오벳'은, 그 이름 뜻이 '섬기다' 입니다.
'늙은 나오미를 봉양하고 섬기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처럼 불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15

▲22절,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는 어떻게 시작했어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이렇게 시작했잖아요. 1:1

각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하던 그때에 시작한 룻기가 어떻게 끝나요? 
다윗의 출생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망이 없는 이스라엘을 재건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4:11~12절에 있다는 것이죠. 
11절에는 12지파의 회복, 
12절에는 베레스의 아버지 유다로부터 베레스를 이어서 쭉 이어져 내려와서
다윗까지 이어지는 계보, 그리하여 하나님이 메시아의 예표인 
다윗을 허락해주시는 데까지 가는 것이죠. 


마치는 말

룻기를 푸는 열쇠는 은혜(헤세드) 입니다.  *2:20에는 은혜, 3:10에는 '인애', 1:8에는 '선대'로 각기 번역
아무것도 없는 혼돈의 시기인 사사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찾아오신 그분의 은혜(언약적 사랑)를 붙잡았더니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였지만 
그 은혜를 붙잡았더니, 그 구속자를 붙잡았더니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가정(우리)을 어떻게 아름답게 멋지게 되살리셔서 
오히려 왕의 계보를 잇게 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어 나가셨는가를 보여주는 책이 룻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기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들리는 소문마다 흉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구속자(고엘)로 우리를 찾아 오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기업 무를 자인신 우리 주님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붙들기를 원합니다. 

세상에는 희망이 없지만, 세상은 온통 혼돈과 무질서뿐이지만 
마치 사사기의 혼돈의 시대와 같죠.
그러나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시고 
그 생명을 이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붙들자는 것입니다. 

그 분 안에 우리의 기업 무를 희망이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과 같은 우리를 통해서, 우리 교회에, 우리 집안에, 이 시대에 
다시 한번 하나님이 우리 기업을 크게 일으키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