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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장 1~27 다윗이 울며 금식하다

LNCK 2022. 1. 27. 11:31

◈다윗이 울며 금식하다            삼하1:1~27         여러 설교 정리 중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저희들이 한 마음으로, 한 믿음으로, 한 성령안에서 
여호와를 힘써 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올해도 말씀 가운데 주의 권능을 입는 삶이 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이, 우리 각자 인생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고 

말씀이 능력이 되고, 이 어렵고 힘든 시대를 이기는 진정한 용기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절,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사울이 죽은 후에'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사무엘상하는 원래 한 권이에요. <70인역>이 사무엘서를 상하 두 권으로 나눴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로 시작됩니다.  수1:1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로 시작합니다. 삿1:1

그점에서 보면 이 '사울이 죽은 후에'라고 기록된 부분을   삼하1:1
<사무엘하>로 나눈 것은 이해할만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1절은, 
다윗이 그 사울의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누구나 잘 알아요. 
다윗이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 
얼마나 깊은 원한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관계인지.. 

그리고 또한 블레셋으로 도망 간 다윗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 사람은 다 알아요. 
그래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죽었지만 
'혹시 다윗, 그가 이 사울의 죽음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억측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죠.

이 <사무엘하>의 이런 진술들은 
그 점에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보아 산 전쟁 때, 다윗이 네게브라는 저 남쪽지역에서 아말렉과 싸우고 있었고
사울이 전사할 때, 시글락이라는 서쪽 블레셋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반면에 사울은 갈릴리 북쪽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다가 전사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어요. 
거리로만 따지면 약 140킬로 이상되는 거리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과는 전혀 무관한 곳에 있었다...  
1절은 그런 뜻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죠. 

▲9~10절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사울의 죽음을 기술하는 위 구절은, 
삼상31장의 사울의 죽음과는 약간 설명이 다릅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삼상31장'에서는, 사울은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사무엘상하가 한 권이던 시절에는 바로 앞 단락,
자기를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가 두려워하며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스스로 그 위에 엎드러져 죽습니다.
그리고 병기 든 자도 자결합니다. 삼상31:4~5

그런데 본문 삼하1:8절은,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라고 했는데,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아말렉 소년의 보고(6-10절)가
완전히 날조된 거짓 보고임을 드러내 주는 결정적 단서입니다. 

왜냐면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사울이 (삼상31:4)
'아말렉 사람'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9절)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또 10절에 '그(사울 왕)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아말렉 소년)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삼상 31:3~4에는 사울이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사울의 죽음에 관한 아말렉 소년의 보고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일관된 위증인 것입니다. 

소년은 이렇게 위증을 하고, 또한 사울 왕의 왕관과 팔고리를 벗겨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큰 상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새로 시작될 다윗의 왕국에서, 자기가 한 자리 얻을 것도 어쩌면 계산했을 것입니다.

▲11~12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그런 생각이 얼핏 들었어요. 사실 얼마나 기분 좋은 소식입니까. 
무려 3천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10년 이상 쉴새 없이 자기를 따라다니고, 
자기를 죽을만큼 힘들게 만들었던 사람인 사울왕이 죽었다는데 
기쁜게 인지상정이죠. 

그런데 다윗을 우리가 곰곰이 들여다보면 볼 수록 
그를 왜 하나님이 택했는지, 왜 하나님이 자기 마음에 든다고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이 자기 옷을 찢으며 슬퍼하고 울은 이유는,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습니다. :12

자기 감정과 연민에 빠져서 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운명과 그 백성들의 죽음을 생각할 때..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저는 이 '슬품'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오늘 깊이 생각해 보게 되기 바랍니다. 
전도서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다는 거예요. 
슬퍼할 때도 있다는 거예요. 
물론 웃을 때도 있고, 춤출 때도 있지만요.

그런데 사람들은 
웃을 때는 웃습니다. 춤출 때는 춤을 춥니다.

그런데 울 때.. 울지 못하는 사람,
슬퍼할 때..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울 때 울고, 슬퍼할 때 슬퍼하는 사람이예요. 본문의 다윗처럼!

세상은 각박해져서, 우리는 점점 슬퍼해야 할 일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게 되었어요. 
아마 미디어를 통해, 너무 많은 슬픈 소식을 매일 접하면서
우리가 슬픈 일에 대해서 감정이 무뎌졌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가슴을 찢고 슬퍼해야 할 일이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에, 전혀 슬퍼하지 않는.. 냉혈한으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죠. 
마치 내 감정에 딱딱한 굳은 살이 박힌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결혼식은 못 갈망정 장례식에는 참석하라고 그랬어요.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가서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에요. 

이것이 사람을 얻는 지도자의 자질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얻고,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얻지 못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애도한 것을 보면,  
나를 힘들게 했고, 나를 어렵게 했고,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는 자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평소에 자기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다면

'그 양반, 잘 죽었다. 고소하다!' .. 이랬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그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시면
내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즉 내 육신의 감정으로부터 졸업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내 육신의 감정도,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다윗처럼, 울 때 울고, 슬퍼할 때 슬퍼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성령충만이 무엇입니까?
그 증거 중 하나는, 공감의 능력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느끼시는 희, 노, 애, 락을... 자기도 같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나는,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의 희노애락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육신의 희노애락을 그저 대변하고 있습니까?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러분, 성령을 받으면, 굳은 마음, 돌처럼 딱딱한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겔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미성숙한 신자일수록, 불신자일수록
자기 감점밖에는 중요한게 없어요. 
남의 감정,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런 것은 1도 관심없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 
내가 멀리하던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기름부음 받아 세워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축음이라는 사실로 
그 마음에 감정이입이 일어난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활 노래'라 부르는 애가를 짓습니다.  1:18~27

▲13~14절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근데 이 아말렉 청년을 처리하는 다윗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다윗은 도적 떼의 두목이 아닙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아말렉 청년이,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를 죽입니다. (거짓말이었지만, 다윗은 지금 사실로 믿고 있었죠)

다윗은 지금 어떻게 보면 한 나라의 왕처럼, 법관처럼 
근거 있는 사형을 언도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다윗의 태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살아있던 사울에 대해서도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 때문에 두 번이나 죽일 기회를 맞이했으나, 손을 대지 않았었고 

그리고 본인 자신도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인식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나발을 죽이려고 득달같이 달려가다가
그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 당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사람인데, 
어떻게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느냐?' 하는 말에
금방 정신을 차렸던 사람이에요.    삼상25:24~30

그래서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사울왕을 죽인 
아말렉 청년에게 사형을 내릴 때
자기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지도자가 종종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가끔 자기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청년을 죽일 때, 개인적 사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대로 결정하려고 애를 쓴 흔적을
우리가 본문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점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죠. *고전16:18, 잠25:1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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