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은 40 년 동안 광야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제 약속의 땅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바로 그 관문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단강 이라는 관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태어나 자란 다음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물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는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광야에서 태어나 자란 자녀들은 하늘에서 내려지는 만나는, 늘 자연이요, 일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도, 자연적인 일부 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전에 만나가 내리지 않았던 때 또 출애굽 하기 전에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 그 조상들이 경험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체험이 없는 다음 세대들입니다.
그들에게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요단강은 범람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요단강이 보통 평상시에는 30 미터 폭이 되지 않는 작은 개울입니다.
그런데 봄철이 되면, 저 북쪽에 헐먼 산으로부터 눈이 녹아 내려오는 물이 흘러 넘쳐서 폭이 넓게는 1 킬로가 넘는 아주 큰 강물이 되고 사람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이들(출애굽 2세대)이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불안했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서 있는가?'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습니다. 삼일 동안 을 그 요단강 가에 멈춰 서 있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2
아마도 그 기간은,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기간이고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광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하고 불안하고 염려하는 기간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통과하여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명령은 새로운 명령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부터 주어졌던 명령이요,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기에 광야를 방황한 것이요, 그 명령은 여전히 그들에게 유효한 명령이었습니다.
△어떻게 요단강을 통과하여 그 땅에 들어갈지도 이미 백성들에게 주어진 방법대로 입니다.
광야를 여행할 때, 그들은 언제나 구름 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그 구름기둥을 바라본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서 가면 그 백성들이 뒤따라갔던 그 흐름대로 지금까지 인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민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이것은 새로운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명령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 앞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출애굽을 인도하신 하나님이요, 광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요, 새로운 추가적인 명령이 없다면, 지금까지 주어진 그 명령을 준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그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수3:2~4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하여 걸어가야 하는 *설교제목 이 백성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여호수아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이 명령은 예전에 조상적부터 지켜왔던 방식 대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서 가면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믿음의 기대를 가지도록 하는 권면을 줍니다.
▲:5~6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이 지휘관과 여호수아의 명령 전체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한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라는 단어입니다.
:6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서 강을 건너라'
:11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보라 온 땅에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이 앞서가던 언약궤는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인재를 의미한 것입니다.
그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모세의 율법책, 싹난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만나 이 세 가지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죠.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사랑.. 이 모든 것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매고 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앞서 가신다'는 것을 늘 상기하도록 언약궤를 앞서가게 하셨죠.
광야를 지날 때는 구름 기둥이 더 먼저 앞섰습니다. 구름 기둥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고, 언약궤는 땅에서 움직이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 요단강을 지나면서부터는 구름기둥이 사라집니다. 이제 광야시대가 끝났다는 것이죠.
사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구름기둥 가운데 불이 임하여 불기둥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 언약궤를 중심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언약궤가 앞서 간다는 것은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시고 광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이요, 여호수아의 하나님이요, 동일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앞서 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길에 '앞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모세가 체험한 하나님 입니다.
만일 어떤 기자가 모세에게 인터뷰를 할 때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요?'라고 물으면,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요. -또 진노 하시는 하나님이요.. 이렇게 여러 하나님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모세는, 신명기를 썼죠. 그가 자신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차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갈 다음 세대들에게 자신의 체험한 하나님을 간증하고 교훈을 주는 내용이 신명기 아니겠습니까.
신명기의 '신'자가 새로운 신이 아니라, 거듭 신 자죠. 申命記
'하나님의 계명을 거듭 상기시켜주고 알려주는 말씀' 이라는 뜻의 신명기죠.
신31:8절에서, 모세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자신과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친히 앞서 가신 하나님'이라고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보지 않은 길로 가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가보지 않은 그 길을 친히 앞서 가시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의 지도는 무엇입니까? 어느 전문가 집단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도가 아니라 '친히 앞서가시는 하나님의 임재' 그것이 곧 우리 미래의 지도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한 앞서가시는 그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는 미래의 지도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미래의 지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하나님을 믿고, 바라고, 의지하는 신앙인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영적 리더십을 가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앞서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교훈
▲1. 첫째로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따라올 수 있도록, 한걸음 앞서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걸음만 앞서십니다.
우리가 따라갈 수 없는 정도로 멀리 앞서가시면 우리가 어떻게 따라 가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와 함께 갈 때, 자녀가 따라갈 수 있는 보폭으로 걷듯이..
또 자녀가 그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갈 수 있도록 부모가 그 거리를 유지하며 앞서가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보고 따라갈 수 있는 정도로 한 스텝 앞서서 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리적으로도 이때 수3:4절에 보면 그 언약궤와 그 백성들의 거리를 '이천 규빗 (900미터) 쯤 되게 하라'
2천규빗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입니다. 물리적으로 그랬죠. 그런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할지라도 아무리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도 사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면 '한걸음 앞'을 보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언의 영을 부여주셔서 다니엘과 또한 에스겔과 이러한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대를 앞서서 미래를 보여주시는 예언의 능력도 있지만
우리 개개인의 인생을 바라보면 사실은 한걸음 앞서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우리보다 한걸음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반드시 열어 주신다는 겁니다.
△독일 나치에 저항하였던 본회퍼 목사님은 그분의 시편명상에서,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삶을 시작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성경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삶을 시작하셨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시작이 아니라는 거죠. 이미 하나님은 우리와 오래전부터 함께하고 계셨어요. 바로 우리 보다 한걸음 앞서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을 계산할 때 아침부터 저녁까지로 계산하지만 창세기 1장, 또 구약적 신약관은 '저녁부터 아침'이죠. 유대인모든 절기는 일몰부터 그 다음 날 일몰까지입니다.
왜 저녁부터 하루를 계산하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저녁이 되면 우리는 지쳐서 쉬게 되고 또 자게 됩니다.
하나님은 쉬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데요.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일하시는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우리가 아침에 깨었을 때, 우리가 할 일을 하나님이 앞서 한걸음 행하시는 일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시는 겁니다.
아침에 해가 뜰 때, 우리는 해가 뜸으로 시작된다고 하지만 그해를 떠올리시는 그 하나님과 함께 그 하나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바로 우리의 인생인 것이죠.
▲2. 둘째로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려운 목적들을 가지고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실 때, 단 한 가지 목적만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다중목적을 이루십니다.
성경의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대에 어떤 예언이 주어지면 그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 같지만, 거기엔 항상 암시가 되어 있고 보다 먼 미래를 예언하십니다.
다윗시대에 주어진 예언이 메시아를 예언했듯이 그리고 메시아를 통해 주어진 말씀이, 종말의 때를 예언하고 또 종말을 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하듯이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행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일도, 이스라엘 백성에는 그냥 장애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건너지 못하는 이 강물을 어떻게 건너느냐? 바로 그 생존과 통과, 그 한 가지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너머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이루어질 전쟁입니다.
백성들은 지금 '요단강, 이걸 어떻게 건너느냐?' 이것이 큰 과제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강을 건너온 이후에, 그 종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것도 더 큰 문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요단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1) 첫째는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강력하게 세워주시는 겁니다.
수3: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왜 여호수아를 높여주신다고 말씀합니까? 그것은 여호수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백성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장차 가나안 정복전쟁을 싸울 때, 그 여호수아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어떻게 여호수아를 통해서 전해지는 그 말씀에 백성들이 순종할까요?
이미 모세를 통해 그것이 증명되었죠. 출애굽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의 통로가 되었던 모세조차도 반항하고 배역하고 그에게 불평하고 항의했던 백성들이 여호수아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겠습니까?
출애굽의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루신 것은 그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를 인도할 때 그 모세의 리더십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신 겁니다.
그것이 그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죠. 여호수아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통과할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강물이 멈춰서며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은 여호수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의 정복전쟁을 치를 때 하나 될 수 있는 견고한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제 이 장벽을 통과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더 중요한 목적은, 이제 이 요단강을 건너는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의 종족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겁니다.
이제 이 가나안 정복전쟁이 수4장 이후부터 시작될 때 그 민족들과 싸우기 전에, 이 민족들의 간담이 다 녹아있어요.
싸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 사기아닙니까? 정신과 용기, 마음의 상태가 중요한데
요단강에서 그 강물이 멈춰서는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봄철에 건넜다는 그 사건이 소문이 났을 때 그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다 마음이 녹은 겁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이 수월하게 전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앞서 전쟁을 하고 계신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강물이 범람하고 있을 때 '이걸 어떻게 건널까?' 그냥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두번째, 세번째 목적까지 다 성취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장애물이 더 심각할수록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이 더 여러가지 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쉬울 것 같습니다.
내가 직면한 장애물이 더 높고 크고 어렵다면 '하나님이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이루시는 목적이 더 많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시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넌 후에 이런 반응이 백성들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죠.
수4:14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죠.
2) 두 번째 목적은 여호수아서를 읽어 나가다 보면 나옵니다. 백성들이 요단강이 멈춰 섰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이, 전쟁의 승리를 이끄는 아주 중요한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요단강물의 장애물을 통하여, 이미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요단강' 그러면 찬송가에 장례찬송에 많이 나오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래서 어느새 '요단강은 곧 죽음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 죽음의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진짜 의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 거기서 만나는 장애물.. 이것이 요단강의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다 헤아리기 어려운 목적을 이루시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그것은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릴 적부터 성실하고 정직했습니다. 흔히 요셉을 '고자질쟁이' 이런 시각으로 해석합니다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자기가 만들어서 꿨습니까? 아니죠. 자기가 바라는 대로 꿈이 꿔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꿈이죠. 그것을 얘기했더니 형들이 그때부터 미워하기 시작됐어요.
또 형들이 과실을 범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어요. 그걸 고자질쟁이 라고 나쁘게 말하는데 뒤집어 보면, '아주 어릴 때도 형들의 잘못을 분별할 수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거에요. 똑똑한 겁니다.
형들이 뭘 잘못했는지 따지지 않고, 그대로 본받는 것이 동생들의 습관인데 '형들이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건 용기이고, 그걸 말하면 미움받는다는 걸 몰랐겠습니까? 요셉은 그렇게 총명했다는 거예요.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정직하고 성실하고 새로운 길을 택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겁니다.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유혹을 거절하니까 더 어려움이 생기고.. 그렇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어져서 그가 애굽총리가 되는 순간, 그리고 그때도 몰랐을거에요.
그런데 형들이 찾아오는 순간 그는 모든 인생의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풀리게 되었어요.
창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미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목적을 이루고 계시는 겁니다.
이 코로나 재난도, 이것은 사실 인간의 환경 파괴로 인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수인성 전염병, 즉 동물에게서 사람으로 전염되는 이러한 전염병, 이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했던 이 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뛰어넘는 인간의 어떤 개발, 그런 추구, 그런 도시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온 일종의 '자연의 역습'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나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일조차도 하나님은 우리 앞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목적을 가지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3. 세 번째로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 또 가본 적이 없는 길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수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있던 이 믿음, 이 믿음에서 나오는 기대! '내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여호수아가 구체적으로 요단강 물이 어떻게 멈춰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광야를 인도하신대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강물에 발을 디디는 순간,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여실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놀라운 일이 경험되지 않은 까닭은 우리가 익숙한 생활, 익숙한 발걸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가서는 안 되죠.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열려있지 않고 늘 익숙한 발걸음만을 의지할 때, 우리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해요. 사실은 우리가 익숙한 발걸음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숨어 있어요.
우리의 대자연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땅에 썩어져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줄기가 나고, 그곳에서 씨앗보다 더 큰 열매가 맺어지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게 반복되니까, 사람들은 당연한 '대자연'이라고 여깁니다. 대자연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자연의 하나님도 또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 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 이 자연의 질서대로 움직여지는 것, 저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 것.. 다 우리가 설명할 수 있으면 '자연'이라고 말하지만 설명한다고 해서,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아니에요.
이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교만이요, 무지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도 우리가 익숙한 생활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가보지 않은 길을 갈 때는,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긴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또한 새로운 명령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죠. 다음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느 방향입니까? 몇 발자국을 가야 됩니까?
이렇게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한 환경에서 놀라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새로운,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게 될 때 이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3장에서 새로운 명령이 주어지죠. 지금까지 광야 사십년을 지날 때는 새로운 명령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구름 기둥이 앞서가면 언약궤가 뒤따라가고, 백성들이 따라가고 멈추면 또 텐트를 치고 그곳에 머물게 되고... 또 다시 움직이면 텐트를 접고 움직이고... 사실 그것도 놀라운 매일 매일의 일상이었죠.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먹고 매일매일 놀라운 일이었지만, 익숙하고 반복하면요, 한 십년 만 반복하면 '자연'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에요. 놀라운 신비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 요단강 물 앞에 서 있을 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약속의 땅으로 걸어갈 때 이제 새로운 명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단강 이라는 이 장애물, 이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을 받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 재난이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명령을 들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우리가 실천해야 되는 명령이 여호수아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 라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우리가 정결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매일 우리가 어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가는 오늘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위기와, 새로운 장애물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랍니다. 하나님의 언약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어졌고 성령안에서의 기도로 주어져있고 이렇게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통해 주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게 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이 재난은 분명 새로운 명령이 주어지는 때입니다.
바벨탑 사건 때, 온 인류를 흩으시고 새로운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바로 이때는,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새 역사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우리가 보고, 우리가 따라갈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홍해가 열릴 때는 정반대였습니다. 홍해는 먼저 모세가 지팡이와 팔을 내밀때 갈라지고 난 다음에 들어갔어요.
그러면 요단강 은 제사장들이 발을 디뎌야 됩니다. 강물에 발을 디뎌야, 마치 빠져 죽을 것처럼 디뎌야 그 강물이 멈췄습니다.
홍해 때는 뒤에서 좇아오는 애굽의 군대들을 무찌르셨어요. 그러나 요단강이 멈춰 설 때는, 그 앞서있는 가나안 민족들을 하나님이 앞서 무찌르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질 때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행하는 놀라운 일을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요단강 이 멈췄을 때는, 너희는 스스로 정결하게 하라. 우리의 믿음에 참여와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요단강 앞에 서 있는 시점입니다. 우리는 홍해를 가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믿고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장애물, 새로운 미래, 가보지 않은 길, 이것은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할 때,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기간은 교회가 더욱 정결해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타락한 세상에 습관을 따라 행하고, 죄의 유혹을 따라 행하고 이 세상의 관습을 따라 행하게 되면 어쩌면 이 거센 물결과 함께 휩쓸려 떠내려갈지 모릅니다.
이때는 우리의 믿음에 이 눈을 떠야 할 때 우리의 영혼의 깨워서 앞서 행하신 하나님을 이 언약궤가 어디로 가는지, 오른쪽으로 가는지/ 왼쪽으로 가는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뉴스만 볼 게 아니라 더욱 말씀을 보고,
가로막힌 요단강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그게 강물이 빠져서 죽을 것 같은 발걸음이지만, 거기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