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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3장 21~30 진리가 무엇이냐
LNCK
2022. 2. 7. 07:15
https://www.youtube.com/watch?v=v3cTHPuVYro
◈진리가 무엇이냐 요13:21~30, 18:37~38 2017.11.05. 출처
◑하나님은 왜 설교에 은사 없는 사람을 종으로 부르시나? .. 라는 고민
10년 전 그 날은 너무 감격적인 날이었어요.
제가 그 날을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제가 1990년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무려17년 동안
하나의 문제를 갖고 너무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을 아주 심하게 했어요.
근데 이제 그 고민이 일평생 해결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너무나 명쾌한 해결함을 받아서
그 열매를 좀 여러분과도 나누려고 해요.
제가 실존적으로 많이 고민했던 질문은요. 여러분 웃지 마세요.
'하나님은 왜 설교에 은사가 없는 사람을 부르셔서 강단에 세우시는가?'
라는 문제였어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저희 아버지와 저의 아주 힘든 고민 이야기입니다.
▲보통은 젊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 목사가 되니까
PK라고 하죠. 목사님 자제들이 아빠의 어렸을 때 모습을 잘 기억 못해요.
근데 저는 아버지가 40대를 지나서 목회자로 이제 콜링을 받고 교회를 개척하니까
그 모든 게 처음부터 기억이 나거든요.
근데 나름대로 드라마틱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목회자로 세우셨는데
아버지가 너무 설교를 힘들어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봐도 '저렇게 힘들어하시는데
왜 하나님은 그냥 사업 잘하고 계시는데, 그거 해서 교회를 섬길 수도 있는데
이 나이에 저렇게 불러서... (목회자로 세우시나?)'
저희 아버지가 매일 새벽기도를 준비하려면, 새벽 3시 15분에 일어나셔요.
새벽부터 한 시간 넘게 책상 앞에 앉아서, 끙끙 소리를 내면서 설교를 준비하고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아들로서 볼 때, 너무나 이제 안쓰러운 거예요.
'저 나이에 저렇게 고생을 하시나?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를 왜 부르셨나?'
그래서 제가 (비교적 어린 나이 때부터) 나름대로 '설교가 무엇인가?'
이렇게 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설교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니까, 설교 카세트테이프를 많이 모으게 되었어요.
제가 당시 2천 개 이상의 영어설교 테이프만 그렇게 모았어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
그 당시에 유명한 척 스윈돌이나 존 맥아더 목사님
△그래서 이제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아침마다
설교 테이프 2~3개를 갖고 나갑니다.
왜 그렇게 됐냐면, 원래는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늘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켰거든요.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영어 설교를 들으면 되겠다'
그래서 카세트 테이프 앞, 뒷면에 설교가 각각 한 편씩 녹음돼 있으니까
보통 하루에 한 4~6편을 제가 매일같이 영어 설교를 듣고 다녔어요.
그때 영어 공부도 좀 되었던 것 같아요.
대학 4년 동안에 2천 개의 설교 테이프를 다 들었습니다.
한국 목회자들 것까지 해서 한 2천5백개 될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으면, 한 1백 편을 들으면
'아 정말 감동적인 설교다!' 이거는 아주 극소수에요.
그래서 나름대로 설교에 대한 정리를 했죠.
설교는 감동을 받기 위해서, 어떤 필링이 움직이기 위해서 들으면 실망하는 게 더 많고,
다만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대언하면, 그것으로 정말 저는 진심으로 은혜를 받고
만족하게 됐어요.
To know truth, 진리를 설교를 통해 배워서 아는 것.. (그것으로 제가 만족하게 되었어요)
오늘날 세대는, To feel the truth 이제 진리를 좀 느끼고 싶어해요.
그래서 내가 좀 감동을 받고싶어 하고,
이제 그런 기대를 갖고 있는데요.
'설교가 뭘까 뭘까?' 하다가 뜻밖의 장소에서 (해답을 얻었어요.)
2007년 11월 1일 일입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제 전공도 아니고, 철학 과목이었어요.
철학 과목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읽다가 깨닫는 게 있었어요.
근데 그때 너무 감격스러워서, 제가 그때 주일학교 설교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작성한 설교원고에요. 제가 이렇게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2007년 11월 1일,
제가 갖고 있었던 11년 간의 의문이 해결되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설교와 설교자' 라는 주제와 관련해
제가 가지고 있었던 의문이란
'왜 하나님은 설교에 은사를 갖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설교자로 부르시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나름대로 얻은 두 가지 결론은
첫째, 설교의 수사학과 테크닉은 설교자로서의 부르심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교회사에 보면 실제로 그런 부분에 부족한데
하나님이 크게 쓰신 일꾼들이 많이 있어요.
둘째, 설교의 핵심은 바른 진리를 증거함에 있다.
신자들이 설교를 들으러 나올 때, 갖는 기대 역시 진리와 관련이 있다.
-진리를 배우기 위하는 마음, to know truth
-진리를 삶 깊이 느끼기 원하는 마음 to feel the truth
제 경우는 후자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대신에 진리를 바르게 증거함을 통해,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제일 과제 라는 확신은 제 마음에서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전혀 뜻밖에도, 이 오랜 확신을 기꺼이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이, 진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고
좀 어려운 얘기지만 to be the truth 설교자 자신이 진리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좀 어려운 말로는,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라는 거죠.
근데 여러분은, '지금 저 사람(설교자)가 무슨 이상한 얘기를 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당시 제게는 너무 혁명적인 변화였어요.
그래 가지고 제가 너무 이게, 키에르케고르는 사실 목사 안수만 안 받았지
모든 신학 과정을 다 밟았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강도사 이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다.
키에르케고르 강도사님한테 너무 감사해서
제 전공과목을 내려놓고, 제가 얼마나 이 철학 과목을 열심히 연구했는지 몰라요.
사실 제 전공이 아닌데도, 교수님이 저를 불러가지고
'야 우리 학교에서 최고로 줄 수 있는 점수가 A+인데
내가 너에게 A+밖에 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철학과 교수님이 그렇게 얘기했어요.
제가 철학 공부를 그만큼 잘했다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그만큼 제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해결해준 게 너무 고마워서, 그냥 거기에 빠져서 한 몇 개월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제가 깨달은 것, 두 가지 포인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 강도사님이 뭐라 그랬냐면, 오늘 본문의 주해였어요.
Traning Christianity '기독교 교육 훈련' 이라고 번역도 되고,
Sickness unto death '죽음에 이르는 병' 그게 다 성경 텍스트를 그냥 주해한 겁니다.
근데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주셨는데
첫째는 뭐냐면
빌라도가 예수님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물었어요.
'인류가 태초 이래로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질문했던 모든 질문 중에 가장 어리석은 질문이 이 질문'이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했어요.
그토록 진리를 보기 원하는, 그 오랜 세월 기다려서
진리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자기 눈앞에 서 있는데
'진리가 무엇이냐?' 묻는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말은 꼭 뭐가 같냐면
두구와 대화하다가 '당신은 존재하십니까?'
태양 앞에 가서 '빛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랑 같다고 그랬어요.
그 말 자체가 '나는 영적인 소경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과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정말 그렇죠.
이러한 내용 가운데서, 키에르케고르 강도사님이 *영어발음 : 키에르케가드
이런 내용을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앉아서, 내가 저 안목사(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좀 진리를 알아야 되겠다.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얘기하면 *요18:38
이미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 예배를 통해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요.
여러분 예배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 존전에 나와서
하나님과 대면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듣는 거예요.
'내가 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좀 알아야 되겠다.'
이거는 벌써 '나는 진리에 무지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삶에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거예요.
남자들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면 첫번째 주일날 교회에 가서 그렇게 운데요.
왜냐하면 부모 떠나서 주중에 하나님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충분한 교제를 하다가
이미 주일날, 군대교회 예배당에 앉는 그 순간부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저는 그 경험을 간접적으로 유학 생활할 때 경험을 했어요.
처음 부모님을 떠나서 태평양 건너서, 처음 미국에서 영어로 설교하는 예배에 참여했을 때
뒤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건 뭐 설교를 알아들어서 울었겠어요?
이미 하나님과의 대면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실 키에르케고르 강도사님이 한 얘기가 맞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설교하나 보자' 이렇게 하는 자세 자체가
내가 예배자로 서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To feel the truth 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진리를 느끼길 원하는데, 참 재밌는 표현을 키에르케고르가 했어요.
◑진리를 관찰하지 말고, 진리가 되라
그림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어린아이를 동물원에 데려가면, 야수가 이렇게 나와 있는데
최대한 가까이 가서 보기를 원해요.
그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길 원할 때,
사자의 포효하는 것, 그르렁 거리는 소리 등을 최대한 근접해서 보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냐면, 케이지(우리)가 튼튼해야 돼요.
그리고 케이지를 부수고 사자가 튀어나와서 나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가 되면, 가장 가까이 가서 그걸 관찰하고 보기를 원합니다.
그게 지금 회중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설교를 듣는 회중의 자세가
진리를 가장 가까이 가서 느끼기를 원하는데
그 진리가 케이지를 열고 나와서, 나를 잡아먹기는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 만약 제가 '선교'라는 주제로 여기 와서 지금 설교하면
정말 수십 분 안에 여기를 다 눈물바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거 쉬워요.
왜냐면 선교사들이 남긴 스토리, 편지 몇 장만 강단에서 읽으면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스토리가 많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냐면 '내가 오늘 은혜받았다.'
그런데요. 여러분을 담당하는 교역자가
'내가 선교에 대해 그냥 이론만 전해서 안 되겠다.
내가 선교지에 직접 가서 탐방하고 오겠다...'
그래서 선교지를 다녀 왔는데, 보니까 그 교역자가 팔 하나가 없어요.
'내가 밀림에 가서 선교 하다가 사자 한테 팔을 뜯겼다.'
그럼 처음에는 교인들이 다들 은혜 받겠죠.
그 다음에 또 갔다 오니까 뭐 이번엔 다리에 총상을 맞고 왔어요.
'IS 이슬람 테러단체가 있는데, 거기 가서 단기선교하다가, 다리에 총탄을 맞았다.'
그쯤 되면 이제 교인들이, 그 교역자를 슬슬 피하기 시작할 거에요.
뭐가 두려우냐면 그 교역자가 '집사님, 다음 번에 저랑 같이 선교지에 갑시다.' 이런 말을 할까봐요!
키에르게고르 얘기에, '우리가 진리에 은혜를 받는 조건'이 뭐하면
최대한 근접해서 감상하고 눈물까지 흘리길 원하는데
그 진리가 갑자기 내 손을 딱 붙잡고
선교면 선교지로 그렇게 끌고 가는 거 .. 그거는 이제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얘기냐면, '진리를 관찰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그 대신 진리가 되라!' 입니다.
진리를 자세히 관찰해서, 그걸 잘 묘사하는 사람에 그치지 말고
우리 설교자가, 그 진리 자체가 되어야 됩니다.
회중도 마찬가지죠. 내가 진리를 가만히 가까이 가서 보고
진리가 나를 잡아먹지 않는 한, 그걸 즐기기를 원하지만
거기서 거리를 두고, 케이지가 튼튼한 지를 확인하는 그러한 심리를 가지고 있거나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설교를 들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대신에 '진리가 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똑같은 말로 뭐라고 말을 하냐면 '배우가 되지 말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되라'
Don't be an observer, Don't be an actor (관찰자가 되지 말라, 배우가 되지 말라)
설교자에게 가장 경고하는 게 뭐냐면 너는 배우가 아니라는 거에요.
그 말은 똑같이 뭐냐면, 여러분 신학생들이 지금
'저 안목사가 와서 얼마나 설교 잘 하나 보자' 하는 관객이 아니라는 거예요.
설교는, 무대 위에서 연기자가 연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은 관객이 감상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적용합니다.
설교자가 삶에 있어서 어떤 혁명적인 터닝포인트가 없는데
지난주보다 오늘 설교를 더 잘했어요.
이때 스스로 속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설교를 잘하게 된 게 아니고, 연기가 잘 된 겁니다.
회중 역시, 내가 지난주에는 설교에 은혜를 못 받았는데
오늘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고 이렇게 눈물이 났어요.
그럼 이제 나가면서 '은혜 받았습니다' 그러죠. 스스로 속지 말라는 거에요.
그거는 배우의 실감나는 연기를 보고, 그거에 대한 시청자의 감상후기에 불과하다는 거죠.
설교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연기를 보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연기가 아닌 정말 설교가 있을까요?
제가 그 예를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정말 연기가 아닌 삶으로, 전존재적으로 설교하는 내용으로
요한복음안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날의 설교본문은 요13:1절,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목이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설교에 서론, 본론, 결론이 있습니다.
▲설교의 <서론> 이야기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에요.
(이거 완전히 엉터리인 거 아시죠? 그림 자체는 좋지만
그 당시 예수님이 이러한 자세로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시진 않으셨습니다.
비스듬히 땅바닥에 누워서 식사를 했죠)
어쨌거나 그림의 양쪽에 가룟유다와 사도요한이 각각 있습니다.
그 사도요한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건너편에 베드로가 앉았어요.
나머지 제자는 누가 누군지 잘 모릅니다.
제가 중고등부 때도 이런 의문을 가졌어요.
'예수님의 제자가 참 바보구나, 특히 가룟유다가 참 바보구나'
우리가 그 날의 스토리를 알죠.
예수님이 식사 하시다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제자들이 '저니이까, 저니이까?' 막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을 자가 나를 팔 자이다.'
그 다음 장면이 뭐에요?
가룟유다가 예수님과 같이 그릇에 손을 넣어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떡을 찍어다가 가룟유다에게 주셨어요.
어쨌든 같은 그릇을 사용 했다고요. 그러니까 '가룟유다가 참 바보구나!'
왜냐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걸 꼭 찍어 먹어야 되나? 가만히 있어야지!'
그날 스토리가 잘 이해가 안 됐는데, 요한복음 본문을 읽으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자 그 날에 사실은 이렇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날 팔것이다.' 이렇게 얘기했을 때
제자들이 웅성웅성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와서 '접니까, 접니까?'
그때 예수님의 품에 사도요한이 이렇게 기대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고, 예수님이 아주 사랑하고 귀여워했던 제자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품에 기대서, 예수님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있는데
이렇게 건너편에 베드로와 눈이 마주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머리짓으로 (말은 안 하고) '물어봐!' 이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요한이 '누구예요?' 이렇게 품에서 속삭이듯이 물어본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에게만 작은 목소리로)
'나와 함께 그릇에 넣는 자가 나를 팔 자다' 그거 요한에게만 개인적으로 가르쳐 준 겁니다.
가룟유다는 그 말을 못 들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나서 이제는 모든 제자가 다 들리게
가룟유다에게 '너는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빨리 속히 해라'
그러니까 가룟유다가 그 자리를 뜹니다.
다른 제자들을 볼 때, '저 형제가 어딜 가나?'
저가 회계를 맡고 있으니까 떡을 사러 갔던지, 아니면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러 갔거니..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요한에게만 하신 말씀)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왜 예수님의 이 사건을, 사도요한이 기록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사건을 우발적으로 당하시고, 모르고 당하신 게 아니고
이미 다 아신다는 거예요.
이 모든 상황의 통제권은 예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성령께서 사도요한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이게 이제 서론입니다.
▲지금부터 설교의 <본론> '그 날에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입니다.
두 번째 제 의문은 뭐냐 하면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떼를 지어 왔죠. 성전 경비병들이 온거에요.
근데 반란수괴 혐의로 한 사람을 체포할 때, 그의 부하들을 남겨놓는 예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만 잡아가고, 거기에 같이 있었던 세 명의 제자들은 풀어줬을까?
그게 제 의문이었는데요. 그것도 요한복음에 자세히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잡힐 줄 아셨어요.
자 가룟유다와 군인들이 왔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이 먼저 물으셨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사렛 예수를 찾노라' 아주 당당하게 말했겠죠.
그랬을 때 예수님이 뭐라 그러셨냐면 '내가 그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 할 때
순식간에 수많은 군인들이 다 뒤로 자빠졌다 그랬어요.
이 부분에 사람들이 잘 주목을 안합니다. 근데 이거 굉장히 재밌는 장면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죠. 예수님은 강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한 번도 공생애 기간 동안에 그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갖고
사람을 제압하는데 쓰신 일이 없습니다.
귀신을 제압하는데는 쓰시기도 했어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치료, 그다음에 복음을 전하시고, 이렇게 품어주시는데 사용했지
사람을 제압하는데 안 쓰셨는데, 단 한 번의 예외가 있습니다.
'내가 그니라' 하면서 그 많은 경비병들을 다 넘어뜨렸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야~ 예수님이 드디어 능력을 쓰시는구나' 하고 덩달아 칼을 빼든 거에요.
그래서 말고를 칼로 쳤는데요. 귀를 잘랐다고 했죠.
저 안상혁 목사는 검도를 한 2년 배웠습니다.
검도를 배우면, 죽도를 쳐들고 하루에 1천 번씩 '머리 머리 머리' 하면서 상대의 머리를 치는 연습을 해요.
어떤 검을 쓰는 사람도, 귀를 겨냥해서 자르지 않아요.
귀를 겨냥했다는 것은, 머리를 쳤다는 거예요.
근데 너무나 빠르게 칼이 들어올 때, 몸을 못 피하면 본능적으로 머리라도 피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귀가 잘린 거죠.
예수님께서 능력을 사용해서 다 제압을 하신 다음에 다시 묻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때 성경에는 설명이 안 나오지만, 완전히 위압 당한 목소리로
'나사렛 예수를 찾나이다.' 그랬겠죠.
그 다음 대사가 제 가슴을 찢어놨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너희가 찾는 자는 나니, 이 사람들은 가게 하라'
그래서 홍해가 갈라지듯이, 성전 경비병들은 길을 터주고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를 먼저 탈출시키신 거죠.
그리고 나서 사도요한이 거기에다 뭐라고 주를 다냐면, 이것도 예언성취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자들을 한 영혼이라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요18:9
그러니까 주님이 끝까지 제자들의 안위를 보호하신 겁니다.
그 다음 장면입니다. 지금 제가 한 얘기가 요18:4~11절 사이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요.
뭔가 좀 공관복음을 읽으면서 좀 궁금하다 그러면, 대부분은 요한복음에서 그게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실 때 누구 생각을 했을까요?
베드로를 생각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하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닭이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22:60~62
베드로가 회개한 것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시고
두 분의 눈이 마주친 이후의 일이었어요.
예수님께서 얼굴을 얻어맞으시고, 심문을 당하시고, 괴롭힘을 당할 때도
이 베드로를 염려하십니다.
'얘가 나를 부인하고 스스로 낙담하면 안 되는데.. 좌절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다가, 베드로와 예수님이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를 했겠어요? '그거 봐라 내가 너, 나를 부인한다고 했지?
싸다. 그게 뭐냐 임마!' 그렇게 야단치셨겠어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미리 얘기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까봐
미리 용서를 선언하신 거예요. '괜찮아!'
'내가 그래서 네게 미리 얘기한 거 아니냐, 괜찮아!'
그리고 뭐라고 미리 말씀했냐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1~32
'네가 이렇게 된 건, 다 내가 알았어. 이미 다 용서했으니까..'
미래의 사명자로 아예 세우시는 거예요.
'너만 나를 배신한 게 아니야,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갔잖아!
그 제자들을 네가 추스려서 다 마음을 돌이키도록 해라!' 예수님께서 이제 그걸 부탁하신 거죠.
그 눈빛으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다음에
베드로가 나가서 통곡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품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사랑은
정말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구약적 용어로 인자(헤세드)와 진실(또는 성실), 히, 에메트
이게 예수님께서 자기의 삶으로 설교하신 내용이에요.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키에르케고르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 지구가 존재한 이래로 가장 어리석은 질문이 바로 '진리가 무엇이냐?' 요18:38
이렇게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은 것이라고 했잖아요.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대답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니라' 요18:37
이 말씀이 기가 막힌 역설이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진리다!' 이게 예수님의 당연히 기대되는 답인데,
여기서 빌라도 앞에서는 '내가 진리다!' 라고 대답을 안 하시고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 하십니다.
평소에는 '내가 진리 자체다'하시다가,
지금 빌라도 앞에서는 '나는 진리에 대해 제삼자다(증인이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이렇게 한 단계 낮춰서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예수님은 그 자신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에 대한 증인이다.. 라고 얘기할 때는
증인이 진리를 어떤 방식으로 증거를 해야 되느냐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자 예수님은 우리를 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증인이 하는 일은 뭐냐면, 진리가 여기 있고,
진리를 사람 앞에서 (제 삼자로서)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하는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즉 진리와 존재적으로 일치하는 분이
스스로를 '진리에 대한 증인'이라 얘기하신 것은,
우리에게도 '너는 증인으로서, 진리를 어떤 방식으로 증언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신 것'이라고 키에르케고르가 아주 잘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방식으로 보여주셨죠)
(쉽게 말하면, 행1:8절에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거기서 증인 witness 이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 뭘 목격한 것을 말하는 자..라는 뜻이 아니고,
즉 십자가를 말로 전달하는 게 아니고
복음이 무엇인지 자기 삶으로 보여주는 to be the truth 그가 바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주)
즉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서, 진리자체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진리에 대한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설교는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수사학이 아니에요.
그냥 연기를 잘하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어서
진리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니라' 요18:37
이 말씀이 그런 뜻이라는 거죠. 진리를 삶으로 증언한다는 뜻!
▲근데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생기죠.
'야 어떻게 내가 예수가 되냐?
정말 내가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냐?'
'내가 예수와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닌데
내 친구에게, 예수님의 증인이 돼서 어떻게 전도를 하겠느냐?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냐?' .. 물론 그게 아니에요.
키에르케고르도 그걸 잘 알았어요.
'만약에 이 존재론적인 문제, 자신이 진리가 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일차적으로는 내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 되도록 분투하도록 권고를 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그게 안 되면, 나는 실제 내가 선포하는 진리가 되지 못함을
끊임없이 회중앞에서 고백해라' ..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것이, 설교자가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기 위해서
'흥을 깨라' .. 이렇게 얘기한 거예요.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가면, 정말 유명한 연극공연, 뮤지컬 공연들이 있죠.
그게 S석이면, 4~5백불 해요.
큰 맘 먹고 우리 집 식구가 다 보러가기로 했어요.
비행기 값으로 벌써 수천불 내고, 그 비싼 입장료 내고 앞좌석에 딱 앉았어요.
'로미오와 줄리엣' 뮤지컬을 관람하는데, 거기서 독약 먹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독약 먹는 먹는 장면에서 줄리엣이 갑자기 관객을 쳐다보며 이렇게 흥을 깹니다.
'여러분, 이거 독약 아닌 거 아시죠? 제가 이거 먹는데, 이거 따라하시면 안돼요!'
그 얘기하면 처음에야 관객들이 웃겠죠.
조금 있다가 로미오가 한참 연기하다 말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거 (음독 연기) 어린이들이 절대 따라하시면 안되고, 이게 실제 독약이 아닌 거 아시죠?'
그러면 그때 관객들이 막 야유하며 분노할 겁니다. '연기에 집중해라' 그거죠.
비싼 돈 들여서 보러 왔는데, 왜 몰입하던 차에 판을 깨느냐는 겁니다.
설교자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스스로 연기 잘 하고 있네'
또한 관객들이 '저 설교자 정말 연기 훌륭하네' 이렇게 착각하지 않도록
자꾸 스스로 판을 깨라, 흥을 깨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못 삽니다'라고 고백함을 통해서요!
그걸 키에르케고르가 160년 전에 얘기한 거죠.
△저도 그거를 간접적이나마 체험했어요.
제가 전도사 되기 전에, 초등부 6학년 남자애들 반을 8년 맡아서 교사를 했거든요.
얘네들 말 안 듣죠. 맨날 떠들죠. 하루는 저희 집에 와서 성경공부하는데
그 날도 막 떠드는데, 어느 날 제가 '얘들아 솔직히 선생님은, 선생님 자격이 없어!
너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얘기 해도, 선생님도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이따금씩 있어.
나도 자꾸 쓰러지고 연약해!' 그리고 제가 울컥해서 눈물이 핑돌았어요.
아이들이 갑자기 숙연해지는 거예요. 평소의 성경공부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이렇게 설교자가 자기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해도, 그렇게 할 때 임하는 은혜도 있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삶으로 설교를 하셨어요.
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최후를 우리가 합니다.
다 변화되어, 진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드려서 복음을 전한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마치는 말
To be the truth, To be a Jesus' witness 이것이야말로 설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인데요,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진리 자체가 되는 일입니다.
진리가 되라! 이것이 정말로 진리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설교자나
모든 성도 각자에게 가장 큰 지향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던졌던 질문 '왜 하나님은 설교자의 기술적인 재능이 부족한 자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설교자로 불러 오셨는가요?'
첫번째는, 설교는 연기가 아니에요.
너무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자꾸 무대에 세우면, 진짜 설교가 연기인 줄 알아요.
그래서 연기를 못하는 사람, 말주변이 없는 사람, 모세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시는 겁니다.
두 번째는, 설교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만나 주시고
하나님께서 설교를 행하시는 것이고요. 하나님은 설교자로 마른 막대기 같은 사람을 갖다 쓰세요.
심지어는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도
구약시대에 순수한 복음을 전하신 분이에요.
필요하다면, 당다귀 같은 동물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이세요.
설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994년에 제가 예전에 이 글을 썼는데요.)
제가 그날 새벽에 눈을 떠서 화장실을 가는데, 새벽 4 시경이었어요.
아버지가 끙끙끙 대면서 설교 준비하세요. 이렇게 보니까
저희 아버지가 피곤하면 눈의 실핏줄이 터지면서, 흰자위가 새빨개 지거든요.
근데 아버지가 너무 측은한 거에요.
실제로 저희 아버지는, 토요일이 되면 어머니하고 형하고 저를 불러놓고
그 다음날 설교를 연습하셨어요.
연습하시면, 저희 어머니는 주중에는 천사인데
그 순간에는 마치 독사로 변하는 것 같아요.
아들인 제가 보기에도 너무할 정도로 '그것도 설교냐?'고,
이제 막 이렇게 지적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기가 교인들 전체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가 그걸 다 감수하셨어요. 그래서 가족들은 밤에 다 잡니다.
아버지는 애써 작성한 설교원고를 다 찢어버리고, 다시 준비하시는 날이 너무 많았어요.
주일날 강단에 설 때는, 많은 날 밤을 꼬박 새고 나오신 걸 잘 알아요.
그래서 비록 설교에 논리력이 떨어져도, 제가 알아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설교를 준비하느라 낑낑 거리신 것도 하나님이 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대로 성숙시키면서 그렇게 설교자로 아버지를 사용하셨어요.
그래서 진심으로 아버지 설교에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아침에 아버지가 너무 끙끙끙끙 대고 계셔가지고
제가 소파에, 아버지 책상 옆에 딱 앉았어요.
아버지는 제가 곁에 소파에 앉았는지도 몰라요.
그냥 한 5분 정도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때 뜬금없이 새벽에, 제가 아버지께 여쭈어보았어요.
'아버지, 제가 (대학 졸업 후에) 뭐 하면 좋겠어요?'
뜬금없죠. 저도 계획이 없던 질문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설교를 준비하시다가 펜을 딱 놓으시더라고요.
아버지는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렇게 본인 가슴에 이렇게 당신의 손을 갖다대시더라고요. (진심이란 뜻)
'상혁아, 목사가 되면, 설교자가 되면, 하나님은 일반 성도들은 정말 경험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주시지..'
그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제 존재를 무시하시고는, 다시 또 설교준비를 하시더라고요.
그날의 대화가 제 가슴에 남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지금 가지는 않지만 *목회자 - 신학교수
그날의 대화가 제 진로를 결정하는데, 사실 아주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됐습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얘기한 그 기쁨이라는 게 뭔가?'
'그렇게 설교를 힘들어하면서도, 자기의 적성에 안 맞는 이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무엇일까?' 그게 사실 제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이제 저도 좀 비슷한 길을 선택하게 됐죠.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시지 않는 기쁨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 존재적으로, 삶으로 설교하는 그 설교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시는 그 기쁨,
그것과 버금가는 기쁨을,
(비록 설교를 안 한다 해도) 자기 삶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그 증인의 기쁨과 동일하게 하셨어요.
증인의 삶을 살아도.. 설교자와 비슷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 '내가 집사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안 믿었을거고
그래서 집사님 너무 고마워요. 내 인생의 정말 은인이에요!'
이런 사람이 한 두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여러분 중독성이 있습니다.
네, 진짜 직업이라도 다 내려놓고, 정말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서
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 이끄는, 그 기쁨을 하나님께서 느끼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기쁨을 늘 누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정말 원해요.
그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뭐라 말씀하시냐면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결국은 기쁨입니다. 마25:21
증인의 기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