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기도 한다는 것은, 기도의 자리에 간다는 거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고, 머리를 숙여야 되고 기도하는 행위는 자기 배꼽을 바라보는 그런 행위에요. 완전히 고개를 숙여야 되는 겁니다.
고개를 쳐들고 살아가던 우리의 인생이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정확하게 기도하는 자리에 가서 무릎을 꿇는 이 몸으로의 행위가 기도라고 하는 이 몸으로의 행위가 내 몸에 익숙되어져야 돼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몸으로 꿇는 거죠. 침대에 누워서도 기도가 가능하긴 하겠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맙니다. 기도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이 따라줘야 되는 거죠.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펴고 그 말씀앞에 서는 것도, 몸으로 해야 되는 거잖아요. 러닝머신에 올라가는 게 힘들듯이, 기도회 자리까지 나아가는 게 힘든 거죠.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어요. 눅22:39 '습관을 좇아' 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기도하실 수 있어요. 근데 기도의 자리로 가셨잖아요. 감람산이라고 하는 곳으로, 주님은 의지적으로 자기 몸을 움직여서 그 구별된 장소로 가셨고, 구별된 시간에 맞춰서 그 몸이 가서 기도를 하신 거예요.
여러분, 기도도 해보면요. 어떤 때는 그냥 앉아서 기도해도 괜찮은데 어떤 때는 무릎을 꿇고 막 기도해 보세요. 느낌이 달라요. 거룩한 습관이 우리 몸에 배여있어야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있었죠.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그런 습관 Habit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 저자 스티브 코비가 얘기했던 게 '아주 작은 습관이 반복될 때 그것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뇌과학 얘기를 많이 하는데 아무리 뇌의 작용을 바꾼다 할지라도 몸으로 움직여서 뇌가 기억되게 까지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후10:5절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몸이) 복종하게 하니'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있는 어떤 생각들을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완전히 복종하는 '반복적 행위'를 통하여 우리의 몸이, 그 말씀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론을 쌓는 것으로는, 사랑을 이해했다고 볼 수가 없어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 사랑이 내 몸에 베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몸은, 어디로 튈지 몰라요. 자칫하면 육체적으로 건강한 몸으로 죄를 지을 수가 있어요.
여러분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건강도 있는데요. 신앙은 없어요. 근데 그 몸으로 뭐 할 것인가요? 영적으로 훈련되지 않으면, 그 몸은 죄짓기에 딱 좋은 몸이에요.
여러분 인간이 스스로 신령해지지 않습니다. 몸을 훈련시키는 목표는, 몸으로 죄를 짓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몸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죄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몸은, 죄를 짓기에 편리한 도구로서의 몸이었어요.
여러분,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습니까? 죄를 짓는 일에 최적화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에 최적합화 되도록, 습관이 되도록 우리는 계속 우리의 몸을 훈련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제자훈련 이나 이런 사역자 훈련 2년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이 막 훈련을 시키는 데 그 목적 가운데 하나가, 몸에 완전히 습관되도록 하는 거거든요. 완전히 몸에 익어져서 그냥 저절로 되도록!
▲구원 받은 이후 "몸의 훈련"이 영성훈련 가운데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몸은 매우 간사해요.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몸은 이기적으로 단련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어드리는
"몸의 훈련"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한 순간에 걷어낼 수는 없어요. 이 죄성을 걷어내는 작업은, 지속적으로 해야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몸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계속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죄성으로 이뤄져 있는 내 육체가, 나를 공격하게 됩니다.
롬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몸)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우리는 그대로 두면, 우리도 모르게 음행과 온갖 들어온 것과 탐욕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런 의도적인 우리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게 우리 몸의 훈련이라는 거죠. 여러분, 말도 그러잖아요. 내가 자꾸 쓰는 말이 결국 내 삶을 지배하잖아요.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여러분 우리의 몸은 그냥 우리의 몸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거룩한 제물로서의 몸이라는 거죠. 거룩한 성전입니다.
불의의 도구로 드려지지 않도록, 너희 몸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무기로 올려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씀이 우리의 몸에 베어들기까지,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죠.
기도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고, 말씀 묵상이 자연스럽게 즐거워지고 선을 행하는 일상이 내 삶의 베어져 있는 것, 거기까지 우리가 몸을 훈련해야 된다는 거죠.
◑'영적 예배'를 드리는 몸으로까지 나아가야
'너희 몸을 ..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그러면 이 몸을 훈련해야 될 목적이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의 핵심인데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올려드려져야 할 몸이고 영적 예배로 드려져야 할 몸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여기서 '영적인 예배'라는 말이 나오는데 '합당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일날 교회 안에서 드리는 예배 만을 말하지 않아요. '삶의 예배'를 뜻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협소한 세계 안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면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죠.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이 합당한 예배는 훨씬 더 넓은 개념입니다. '나'라는 세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미성숙한 몸의 특징이 뭡니까? 자기만을 돌보는 겁니다. 자기 몸 밖에 몰라요.
하루 종일 자신의 몸에만 신경을 쓰고 다듬고 가꾼다면, 그럼 미성숙한 모습이에요. 미성숙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회 밖에 몰라요.
성숙하면 자신에 대한 관심이, 바깥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예배 (온전한 예배)'가 그런 거죠.
예배가 나 혼자만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오늘 본문 롬12:1~2절에서 말씀하는 예배는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드려져야 할 예배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를 대조하고 있어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거죠.
이 두 개는 연결돼 있죠.
△1.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는 거예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여러분 이 세대가 끌어당기는 힘이 엄청납니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려고 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날마다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도리어 이 세대가 주는 이 영향을 따라갈 가능성이 너무도 큽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따를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다 비슷비슷해요. 그 속에서 우리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되요. 이 세대를 본받으면, 이 세상과 똑같아 지는 겁니다.
여러분, 요즘 여성들 가운데서도 얼굴이 너무 비슷해요. 그런데 얼굴 만이 아니에요. 가치관의 문제에요.
여러분, 구원은 우리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닮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내야 이 몸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거죠.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돼요. 달라야 정상이거든요. 좀 다르게 살아야 정상입니다.
근데 우리는 '다르다' 그러면 술 담배 안 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내야 됩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영향력이 뭡니까? 가치관의 싸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이 세대가 주는 가치관을 본받지 말라는 거잖아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 뭡니까? 오늘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의 핵심은 '물질주의적 세계관'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죠.
거기에는 영원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잖아요. 여러분 TV드라마나 영화나 모든 것을 보세요. 어디에서든지 이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에게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시간과 성경 읽고 묵상하는 시간중에 어느 것이 더 많습니까?
여러분, 세상 문화들은 메시지를 뿜어내는 거거든요. 광고는 매우 과학적입니다. 치밀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한두 번만 보면 괜찮을지 몰라요. 그러나 지속적으로 계속 바라보면, 이건 속수무책입니다.
오늘 세상 안에 물질주의가 얼마나 강력합니까? 돈으로 평가되고 움직이는 세상! 그 시대마다 슬로건이 있잖아요. '현재를 즐겨라' 같은 것입니다.
신발 광고도 'Just Do It' 너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는 겁니다. 음료수 광고도 마찬가지죠. Enjoy 즐겨라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결정의 중심에, '오늘 지금, 나 개인!' 그거 밖에 없잖아요. 감각적이고 충동적인 세상입니다.
내가 마음에 내키는 걸 억제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남의 권리와 행복을 얼마든지 깰수도 있는...
바울은, 이런 세상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분별력을 가져라! 이 분별력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그래서 이 세계의 세속적 세계관이 만들어 놓은 세상 속에서 우리가 분별을 계속 갖지 않으면 우리는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거죠.
결국 우리의 몸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거죠. 그냥 우리의 몸을 세상에 맡겨 놓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숙한 몸은, 세상과 다르게 몸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거죠. 그래서 몸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 엉뚱한 곳에 내 몸을 제물로 바쳐서는 안됩니다.
우상 앞에 바치는 제물이 된다면, 그건 너무도 헛되고 헛된 것이죠. 귀중한 구원 받은 이 몸을, 어디에 바칠 것입니까?
이전에는 그냥 이 세상의 가치관을 쫓았습니다. 뭐 돈이 되는 일이면 다 했습니다. 소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은 자기의 몸을 파괴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만 기쁘게 해야 하는 삶은, 결국 자해 행위와 같다는 거죠.
△2. 그래서 오늘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여기서 '변화'는 transformed 인데, 외적인 형태만 바뀌어진 것을 말하고 않고, 근본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원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인간을 만들으셨을 때의 상태로 돌아가는 회복을 뜻합니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되는 것과 같죠. 땅을 기어 다니던 것이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이 '변화'
여기서 이 '변화'라고 하는 단어가 다른 데서 쓰여졌는데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몸이 '변형'되신거죠. transformed 헬라어로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근본적, 본질적 변화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여기서 마음을,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신자는 누구인가요? 신자란, 주일날 교회에 추석하는 어떤 외적 모습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신자란, 생각이 바뀐 사람입니다.
세속적인 생각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뀐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이 구분을 우리가 해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교회를 다니면서 내 생각이 옛날과 완전히 바뀌었느냐? 그럼 진짜다는 거에요.
그런데 생각이 안 변했어요. 그러면 진정한 신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생각, 가치관, 세계관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됩니다. 보는 관점이 다르고, 평가 기준이 다르고, 해석하는 기준이 다 달라야 합니다.
만약 그게 안 바뀌면, 교회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는 거죠. 철저히 손익을 따지는 거죠.
여러분, 세상이 그렇잖아요. 어디 가나 손해보는 일을 안 하잖아요.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계산이 안 되고, 값으로 매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라고 했습니다. 엡3:8
그 사랑의 깊이와 길이와 높이와 너비를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계산이 없는 거죠. 교회 일을 할 때도 세상적 방식과 그런 이해득실을 따지며 행동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는 이제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선다는 거죠. 그래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게 본문의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변화된 삶, 구원받는 삶은 몸이 이제 비이기적인 형태로 변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나의 건강만을 위해 살았어요. 내 육체가 나를 위해서만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 몸이,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에요.
여러분, 세상은 얼마나 살기에 힘들어요. 날마다 계산하며 살아야 되니까요.
그러나 '영적인 예배로 사는 삶'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공동체와 나누고 싶다면, 그게 성숙한 증거입니다. 예배는 그런 의미에서, 사적이면서도 공동체 적인 것입니다.
▲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에 주신 가장 큰 교훈 중 하나가 있는데 그게 '공공선'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교역자들과 굉장히 많이 나누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예요. 공공선!
코로나19 시절에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 많은 지장이 있습니다. 지금도 지장이 있습니다. 오늘 이 본당에는 2차 접종하신 분만 들어오게 했어요.
그래서 어떤 연유로 인해서 2차 접종을 못 받으신 분들이 지금 본당에 못 들어오신 것도, 제가 목사로서 굉장히 마음이 아프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참 힘든 시간을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빨리 이게 지나가야 되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모이는 예배'가 참 중요하죠. 중요한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예배는 훨씬 더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흩어지는 예배'입니다. 흩어져 세상 속에서 드리는 예배!
우리의 신앙의 폭이 좀 더 넓어져야 돼요. 영적 예배는 삶 전체로 확장되는 예배라는 거예요.
직장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보다 동료들을 더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내 자아를 죽이는 그런 시간들이 .. 바로 예배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삶속에서 높임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물론 받으시죠.
그런데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이 뭔지 아세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의 입술을 통하여 '너의 하나님이 위대하시도다!' 칭송하는 겁니다.
'너를 보니까 못 믿겠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은 다 꺼려하고, 다른 사람은 정말 손해를 본다고 다 도망치는데 내가 거기에 한가운데 들어가서, 내가 기꺼이 그 희생을 내가 내 몸으로 감당할 때
'저 사람은 왜 저러나? 돈 벌려고 온 친구가 아니네, 돈보다 뭐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하나님이라는 걸, 그들의 입술로 고백할 때 그곳에 예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게 진짜 예배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이원론적으로 빠진 게,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어 있는 겁니다. 교회와 가정이 분리되어 있어요. 교회에서의 예배가, 세상 속의 예배로 이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교회라는 경계선을 넘어서는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주일날 드러지는 예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예배가 끝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예배적 삶이 일상속에서 구체화 되어야 됩니다.
이런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 세상입니까? 뭐 상대를 죽이고, 내가 살려고 그냥 발버둥 치죠. 세상은 그런 거죠.
그러나 우리는 내가 죽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라는 고백이 *갈2:20
우리의 교회 안에서만 고백되어지는 간증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에서 고백되어지고, 증거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롬12:2
내가 주장할 마땅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나의 권리를 내어 놓을 수 있을 때 그게 영적인 예배예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드려지는 예배인 거예요.
여러분 이제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갇혀 있으면 안 돼요. 교회 안에서만의 예배를 드린다면, 아직 구약의 제사, 제의적 예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 제사는, 성전 안에서만 예배를 드리고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신약의 구원받는 백성들은 롬12장에서 얘기하는 '영적인 예배,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으로 드리는 예배, 우리의 몸이 가는 곳에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예배'의 예를 들면,
미자립 교회와 농어촌 교회를 우리 중에 섬기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떤 분은 주일날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또 미자립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 교회를 격려를 하고, 함께 해 줍니다. 시야를 넓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노약자들을 섬기는 재가 봉사자들도 오랫동안 연약한 우리 이웃 어르신들을 위해서 계속 돕고 계십니다.
지금도 다른 단체와 연합해서 끊임없이 어려운 동네에 가서 집을 고쳐주고, 도배를 해주고, 그걸 계속적으로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혼모들을 위해서 섬겨주시고 정말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개인적으로도 어마어마하게 바쁜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지금도 심혈을 기울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주민들을 돕는 일, 탈북민들을 돕는 일, 다문화 가정들을 섬기는 일,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일들을 위해서 애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 '영적인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롬12:1~2절은 '우리의 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 우리가 생각만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했다면, 집에서 다 드렸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몸으로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몸으로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됩니다.
내 건강,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에는, 역설적으로 건강도, 행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나만을 위한 건강은, 이미 몸과 마음의 밸런스를 깨뜨린겁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건강할 수 없어요.
▲마치는 말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세상은 갈수록 자아의 왕국입니다. 자기 자아를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모든 걸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불균형이에요. 다 깨어져 있는 거죠. 이웃과 이웃이 다 깨어져 있는 거예요. 가정도 다 깨어져 있고, 사회나 교회 공동체도 깨어져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삽니다. 우리의 몸을, 이웃을 위해, 세상을 위해,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영화롭게 사용하시고 우리의 몸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몸이 더 건강해 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을 기꺼이, 우리 몸을 내어놓는 이게 '그러므로의 삶'입니다. 롬12:1
이제 우리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가 없어요. 나만의 구원, 나만의 기쁨,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없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202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의 몸으로, 몸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들 몸이 가는 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몸을 너무 사리지 마시고 때로는 곳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부를 때 기꺼이 내 몸을 던지시길 바랍니다.
아끼고 내 몸을 사용 안 하면 한 십 년 젊어지는가요? 안 젊어져요.
아무리 (화장품) 발라도 노쇠해져요. 조지 휘필드의 얘기처럼 '나는 녹 슬기보다 닳아 없어지겠다'
이웃을 위해, 이웃을 섬기기 위해 우리의 몸을 희생할 때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때, 내 행복도 그저 따라올 줄로 믿습니다. 몸의 예배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몸의 영성을 추구하시길 바랍니다.
몸을 거룩한 도구로 길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죄를 짓지 않고, 몸으로 세상 방식을 추구하는 인생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내 몸이 산제물되어, 주님 위하여,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구체적으로 드려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