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기도의 동산, 예루살렘에 오시면, 평소에 늘 드나드셨던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십자가 라고 하는 거대한 사건을 앞두고, 주님이 취하신 것은 기도였습니다. 육체를 입고 계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만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무덤덤하게, 담담하게 십자가를 맞이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 십자가 사건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죠.
막14:36절을 보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참 위대한 기도 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 잔은 무슨 잔입니까? 저주의 잔입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쏟아부으신 잔, 심판의 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잔은, 죄인이 마셔야 할 잔이죠. 예수님 앞에 그 잔이 지금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예수님이 멈칫하시고 계신 거죠. 왜냐하면 거기에 온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쏟아 부어지는 그 저주를, 주님이 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둠의 권세자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총공세를 퍼붓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 형벌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말할 것도 없어요.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한 것입니다. 가장 길게 고통을 겪으면서 죽어가게 하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앞에서 당하시는 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은 마취없이 척추수술을 하셨는데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었다는 얘기를 하시는 분을 들었습니다. 뼈를 맞추는 고통은, 육체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가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겪으신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죠.
▲우리는 이 동산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가시는 과정에 고뇌를 오늘 우리가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큰 정신적 고통, 또 육체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짖으셨는데, 아버지로부터 거절받는, 버림을 받는 사건 여기에는 '고통'이라는 큰 과제가 하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중심부에는, 이 십자가의 고통이 놓여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겁니다. 가볍지 않다! 이유는 십자가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이 겪고 있었던 모든 고통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여러분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고난의 문제, 고통의 문제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고난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고통은 피부에 와닿습니다. 고통은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실제입니다.
고난을 다루지 않고 인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밀려오는 이 고난은, 해석이 어렵다는 겁니다. 불가해 합니다.
고통은 다면체 라고 해요. 어떤 한 면만이 아니라 이해하는데는 너무도 면이 다르고 많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다루지 않고 인생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밀려오는 고난은, 그 문제가 해석이 어렵다는 거죠. 해석이 안 되기 때문에, 답을 내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당하는 고통의 깊이와, 고통의 종류가 다 달라요. 그래서 고난을 쉽게 다룰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고난의 문제를 가볍게 다루는 사람을 만나면, 분노가 막 일어납니다. 설교자도 성도의 고통에, 쉽게 답을 해주려고 하는 시도는 위험한 거죠. '네가 고난을 알아?' 하는 반응을 받게 되죠.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에, 깊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내가 그의 고통의 깊이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요.
고난을 제대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건 부부도 어려워요. 주변 사람들의 어설픈 위로는 고통을 더 심화시킵니다. 그 이야기가 욥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제대로 다룹니다. 고난에 정면으로 다가서게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아시는 분이고, 고난을 다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요? 그분이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죠.
그리스도는 고난을 새롭게 다루시고 새롭게 해석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직접 고통을 겪으셨던 그리스도이십니다.
살다보면 그 누구도 나와 같은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의 고뇌에 찬 장면을 보게 됩니다.
◑1. 주님의 기도 속에 우리가 첫번째 발견하는 것은 "주님의 기도는 진실했다"는 거죠.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이 본문은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도 보면, 굉장히 어려운 단어들을 썼습니다. 이유는 뭐냐? 그리스도가 겪으신 십자가 앞에서 극심한 고통, 고뇌의 마음의 심경을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여기서 '놀라시다' 라는 이 표현은 너무 놀라서 턱이 덜덜덜 떨린다는 말이며,
'슬퍼한다'는 말은 거대한 충격을 동반한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다'는 어떤 강력한 충격 속에서 극도의 슬픔에 잠겨 있는 상태라는 거죠.
14:34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여기 '심히' 라는 단어가 나오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죽음과 같은 고통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문제가 닥쳐왔을 때, 절망적인 사건이 다가왔을 때 심히 고민할 때, 이미 내가 죽은 것 같은.. 그래서 어떤 사람이 혼절 (혼이 나가며 기절) 하죠.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둔 자신의 심경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정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연약한 육체를 입고 계신 인간 예수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십자가 질게!' 하고 용감하게 나가신 게 아니예요. 심히 놀라셨고 극도의 슬픔에 잠기셨습니다. 짓누르는 고뇌에 찬 순간.. 기도라기보다는 고뇌의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은 당신의 맞이한 고난에 대하여 자신의 심경을 감추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당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는 거죠.
자기의 생각을,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거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솔직한 표현이죠. 예수님이 바라고 싶은 것이죠.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어요.
'하나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얻게 할 수는 없습니까? 가능하다면 이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여러분 기도안에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기도의 레슨이 있어요. '기도는 마음에 있는 것을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것이다!'
여러분, 시편을 읽어보면, 그 기도문들을 보면 굉장히 사실적이고, 직설적이고, 포장되지 않고, 자신에게 있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시10: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시58:6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대단한 얘기에요. 이빨을 다 부러뜨려 주시옵소서.. 라는데, 여과 과정이 전혀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심할 정도로 거칠게 표현합니다. 울분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게 기도입니요. 기도는 우리의 소원이나 갈망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까지 쏟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원수에 대하여 무제한적으로 보복해주시도록 탄원합니다. 여러분, 기도가 응답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드러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이라도 다 받아들여주시는 분이심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아요. 포장된 기도 라는 거죠. 아주 매끈하고 아주 그럴듯한 기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의 감정을 감춰요.
같은 사랑방 안에서도 기도의 제목을 나누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전혀 안 털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집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기도 제목을 나눌 때는 '그냥 다 건강하게 해주시고..' 이렇게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는 맴돌수밖에 없는 겁니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기도는 중심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건 기도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괜히 잘못된 사람들에게 털어놨다가 루머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거죠.
나는 정말 아픈 얘기를,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았는데 그 얘기가 막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상처를 받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세상에는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곳이 없어요. '비밀로 해줘!' 그건 희망사항이에요. 세상에 비밀은 없어요.
그래서 마음의 병이 되는 거죠. 내 마음을 털어낼 데가 없어요. 정말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곳이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우리 가면을 벗어야 돼요.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야 돼요. 내 속 깊은 감정을 표현해야 해요.
그래서 시51:10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죠. '하나님이며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직한 영!' 아마 밧세바 사건 이후에, 한 1년 동안 다윗에게는 이 정직한 영이 없었어요. 그 때도 기도 했겠죠. 다윗이 기도는 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문은 닫혀있었습니다.
▲형식만 남은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왜 문제가 되죠? 그들의 기도는 진실하지 않았어요. 기도의 내용이 심하게 가공되어 있었습니다.
내용으로 치면, 바리새인들처럼 내용이 좋은 기도가 어디 있겠어요? 미사여구로 꾸며진 너무 화려한 기도였어요. 근데 포장된 기도이에요.
기도는, 내 마음 영혼의 깊숙한 곳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실한 만큼 하나님과 교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힘들다면 힘들다고 얘기하셔야 돼요. 남편이 밉다면 밉다고 얘기하세요. 아내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떤 분은 진짜 새벽기도에 나와가지고 큰 목소리로 '지난 밤 마누라와 딸이 저를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훌륭해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건 진실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이야기, 모든 마음,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준비가 돼 있어요.
물론 응답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이를 꺾으소서' 한다고, 정말 꺾으시는 분은 아니에요. 공의로 응답하십니다.
'꺾으소서' 하고 막 소리를 지르다가,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아까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소리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기도를 드려야 된다는 거죠.
◑2. 여러분, 기도는 <치열한> 것입니다. 누가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현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요.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이게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힘쓰고애써서더욱간절히' .. 강조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어요.
'땀이 핏방울같이 떨어졌다' .. 어떤 분은 의학적으로 이게 가능하다는 얘기도 해요. 너무 강력하면, 진짜 뭐 땀방울에서 그냥 피가 터져서 묻어 나오는 거죠.
기도의 자리는 뭐예요? 여러분 영적 전투의 최전선입니다. 기도에 자리에서 승부가 나는 거죠.
예수님은 세 번이나 동일한 기도를 드렸어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세 번 힘써, 애써서, 간절하게 정말 땀방울이 핏방울되는 것 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하신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중언부언' 기도라고 하는데, 주님이 중언부언 하신 게 아니죠. 중언부언 이라는 것은, 의미 없이 뜻 없이 그냥 늘어뜨리고 반복하는 거죠.
사도바울에게도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찌르는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해요. 치열한 기도입니다.
바울에게 이 육체를 찌르는 가시는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세 번이나 간구했는데 이 기도도 예수님처럼, 치열한 기도였어요.
▲예수님의 기도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통곡하는 기도, 눈물의 기도!
히5:7 '그런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적당한 기도가 아니고,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당신 앞에 고통을, 기도로 풀어내신 거죠.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이런 순간에는 고상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전투적인 기도 입니다. 품위 있고, 세련되고, 격식을 갖춘 기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기도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사건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고상한 기도로 끝맺을 때가 있습니다. 별로 아쉬운 것이 없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커피잔 놓고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서, 하품도 몇 번 해가면서 다리 꼬은 자세로의 기도..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주님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에요. 피가 뒤섞일 정도로, 땀방울이 그냥 뒤범벅이 되는, 절규하는, 하나님께 울부짖는... 통곡할 수밖에 없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사람들은 '뭐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냐고?' 아직 깊은 고뇌를 경험을 못해봐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곳이 있다면 기도의 자리입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 사투를 벌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엉치뼈를 쳐버렸습니다. 골반의 고관절입니다. 그러면 그냥 주저앉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손을 안 놓잖아요. 매달리잖아요.
야곱의 모습은 처절합니다. 죽느냐 사느냐 입니다.
형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옵니다. 모든 게 초토화될 수밖에 없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매달리는 거죠.
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새기까지 처절하게 매달립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했습니다. 삼상1장에 보면, 그녀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기도 였는가요? 그 시대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엘리 제사장과 아주 대조를 이루는 기도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기도 안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도는 무기력한, 기운이 빠진, 형식적이며 제도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한나, 그 시대의 불임을 안고, 하나님 앞에서 절규했는데 그것은 영혼의 밑바닥,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토해내는 기도였어요.
엘리가 나중에 '술취했냐?' 그랬어요.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는 제사장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서 술취한 것으로 보았어요. 얼마나 강력한 기도였던지, 막 마치 술취한 것 같았죠.
신약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도도 치열합니다. 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엄마의 기도는 의례적인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딸이 사느냐/ 죽느냐.. 의 문제 앞에 이 엄마의 모성애! 하나님 앞에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났죠.
▲여러분, 기도는 늘 달콤하고 감미롭지만은 않습니다.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르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산모가 해산의 진통을 하듯이, 울부짖는 기도를 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삶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절박한 문제앞에 서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대한 산이 가로막혀 있는 듯한,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로 우리의 삶을 내몰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요?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전투적 기도 입니다. 치열한 기도입니다. 눈물이 있는 기도, 땀이 뒤섞인 기도로 승부를 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그야말로 기력이 소진할 정도로... 지금 예수는 그런 기도를 드리시는 거예요. 기도의 자리에서 성패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근데 제자들은 어때요?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이에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사투를 벌이며, 마침 승리의 길로 가시죠. 그러나 기도에 실패한 제자들은, 결국 실패의 길을 걷습니다.
땀과 눈물이 섞인 기도는 위력이 있어요. 치열함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자리를 한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미지근한 기도, 뜻뜨미지근한 기도, 눈물이 말라버린 기도, 애절함이 없는 기도, 치열함이 없는 기도, 무미건조한 기도...
그렇다면 영혼이 잠들어 있거나, 죽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현재의 기도의 자리에서 나의 기도의 태도가 내 삶을 결정하고 내 영혼의 상태를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고 그곳에서 이미 나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깨어있는, 눈물이 있는, 치열한, 부르짖는 기도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자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완전한 복종>의 기도였습니다.
36절에서 클라이맥스로 가는데요.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아버지, 당신은 모든 게 가능합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잔도 옮겨주십시오! 하나님, 전능하신 분 아닙니까, 이런 방법밖에 없습니까?
구태여 내가 십자가에서 꼭 죽어야 합니까, 이 십자가를 내가 져야만 합니까?
구원을 위한 당신의 목적은 바꿀 수 없겠지만 성취하는 방법은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와~ 대단한 기도예요.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옮겨주십시오!' 여러분 이 기도가 점점 바뀌기 시작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이것은 체념의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의 완전한 복종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최고봉으로 우리를 안내하십니다.
기도는 나의 원함을 관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소원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출발일 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나는 지니와 같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돼요.
만약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지 나타나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을 찾는다면 무당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당에게 굿을 부탁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의 소원을 무조건적으로 들어달라는 거예요.
거기에는 무슨 고상한 하늘의 뜻이나 이웃 사랑의 개념이 전혀 없어요. 오직 내 소원만 들어주면 그만인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는 다릅니다. 나의 원함이 성취되고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이 꺾이고, 아버지의 뜻 앞에 복종하는 기도! 이게 주님의 기도의 모델입니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주님은 완전한 복종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주신 잔을 외면하지 않으세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사실 이런 기도는, 예수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그렇게 사셨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라 산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신 분입니다.
산상수훈의 삶이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뭘까요? 자기 부정, 나의 길이 아니라 아버지의 길!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 앞에서 우리의 선택은 하나만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타협의 여지가 없어요. 우리의 소원보다 아버지의 소원이 훨씬 더 크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같은 기도를 드리신 이유는 뭘까요?
전능한 신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게 아니에요.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그 자리에 나아가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얼마나 치열한 전쟁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거예요.
극도의 압박감을 받으며 '나의 소원과 아버지 소원 사이에서... 그런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 세 번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원함을 꺾고, 아버지의 원하심으로 넘어가는 이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한 길인가요?
▲많은 경우에 우리는 여기서 실패를 해요. 몸부림을 치는 겁니다. '나의 소원에서 아버지의 소원으로 넘어가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거대한 장벽이에요. 우리의 소원이 쉽게 지워지지 않아요. 일평생의 작업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막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 앞에 멈춰서야 합니다.
자주 우리의 기도는 브레이크가 걸려야 돼요. 만약 우리의 기도가 막히지 않고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위치가 바뀌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되고 맙니다.
기도가 마술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기도가 종종 막혀야 돼요. 응답이 거부될 때가 있어야 된다는 거죠.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는 복종입니다. 구한대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들이 더 많이 일어날 때가 많아요.
여러분 우리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안됩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감사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는 경험을 할 때가 더 많아요.
복종의 기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선택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효율을 강조합니다. 기도 한 만큼 얻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투자 대비 얻은 소득이 중요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내가 기도를 위해 드린 시간이 얼마인데.. 하나님, 응답 안 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항상 기도를 통해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를 계산합니다.
그것은 기도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이 있습니다. 기도의 세계는 끝이 없어요.
기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느냐 보다, 무엇을 배웠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그 뜻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한국교회는 기도에 열심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한국 교회만큼 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지가 않아요. 기도는 뜨거워서 좋은데.. 기도의 방향이 확실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 기도를 자세히 들어보면, 기도안에 동기가 좀 불순해요. 그 안에 뭔가 이기적인 욕망이 들어있어요.
여러분 그런 잘못된 동기로 아무리 열심히 불같이 기도해도 그건 오히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기도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 answer 하시는 것만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 response하는 기도로.. 점점 변해가는 것이죠.
유진 피터슨은 그런 얘기했죠. '응답하는 기도'라는 표현을 써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응답(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이 기도는, 땅의 문제에서 하늘의 문제로 발전되어져 가야 됩니다. 우리의 고통이 제거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진짜 응답은 뭘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뭐에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 그분의 원하심을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의 원대로' 그 말은 뭘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거죠.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리실 그 진노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예수님은 자신이 살 권리도, 희망도, 의지도, 다 내려놓으셨어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한 아들의 선택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완전한 복종!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지점이에요.
▲창22장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앞에 완전한 복종을 보여주죠.
여러분 그 당시에는 이삭이 적어도 십대 후반이었을 겁니다. 어떤 유대인 신학자는, 모리아산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고, 이때 이삭의 나이를 약 33세 경이었다..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133세, 나중에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으려고 할 때 그냥 순순히 아들 이삭은 번제단 위에 올려지는 거예요. 웬만한 아이면 '아빠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고 뿌리치면 늙은 노인은 꼼짝도 못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대로 순종하는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의 이삭을 위하여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이레!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의 처분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복종이 있습니다.
기도의 절정은 응답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원함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복종은, 나의 원함이 아닌, 하나님의 원하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절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몰두하죠.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바쁩니다. 세상은 끝도 없이, 나의 권리와 상대의 권리의 싸움과 충돌이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몰두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결코 놓치면 안 된다고 우리는 세상 속에서 배워요. 어딜 가나 자기 권리를 쟁취하려고 핏대를 세웁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오면, 하나님의 뜻은 온데간데 없어져요. 각자가 자기의 목소리 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갈등과 분쟁이 많고, 요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기심으로 똘똘뭉쳐진 세상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아득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지워진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통은 일단 피하고 보자!'
그러나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고통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십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갔습니까? 언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언제 내 신앙이 가장 깊어졌습니까? 틀림없이 고통의 순간이에요.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보다, 고통의 순간에서 우리는 훨씬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난의 신비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고난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에는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통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 쉬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목전에 앞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다양한 기도가 있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의 레슨의 절정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로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고, 마귀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끝내고, 뚜벅뚜벅 십자가 앞으로 걸어가시죠. 이미 그곳에서 기도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동산에서 예수님부터 기도의 모범을 우리가 배웁니다. -거기서 그분의 기도는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기도였습니다. -완전한 복종의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시면서 주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기도 였어요. 그러나 아쉽게도 제자들은, 기도의 레슨을 받지 못합니다.
결국 처절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여러분, 기도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기도의 자리가 승부처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에서 이기면 이깁니다.
마귀는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를 잠들게 만듭니다. 주님을 닮은 위대한 기도자들이 되셔서 이 어려운 시대, 끊임없이 우리가 밀리는 수 없는 고난의 파도 속에서도 시련을 능히 견뎌내고 그 시련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모든 시련 속에 다가오는 마귀의 간교한 유혹을 분별해내고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