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헤브론에서 칠년 반 동안 왕으로 지낼 때, 아들을 6명 낳았어요. 물론 딸은 기록이 안됐지만요.
근데 다윗이 헤브론에서 점점 왕권이 안정되어 가고 그가 점점 왕국의 기초를 다져가는 동안 이렇게 많은 아내와 아들들이 태어났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이것도 점점 강해지는 표현이예요. 지금 우리가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에는 왕이 아내를 많이 거느리고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그게 그 당시에는 번성의 한 가지 싸인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대와 관행에서 다윗이 또한 자유롭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시대적, 또 사회적 문화적 관습속에서 살았다는 거죠. 그게 절대적으로 옳은 삶을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내를 여럿 두면서 그 집에는 복잡한 문제가 생겨요. 첫 아들 암논은 나중에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범하다가 결국 그 오빠 압살롬의 손에 죽고 말아요.
둘째 아들 길르압은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로부터 얻었지만 일찍 죽은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별로 기록이 되지 않았어요.
셋째 아들은 압살롬인데,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라그랬어요. 왜 그술 왕 하고 또 이렇게 혼맥을 맺었을까요? 그술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작은 왕국 입니다.
그 당시에 아내를 많이 두고, 자녀를 많이 두고 또 결혼이라는 것을 왕권을 확장해 가는, 왕권의 기반을 확충해 나가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다윗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뜻이 되죠.
그건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11지파)을 압박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그술 왕과 혼맥을 맺은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압살롬은, 형 암논을 죽이고 결국 외할아버지 (그술 왕) 한테 도망가서 3년간 있게 되죠.
돌아와서는 반역을 일으켜서 결국은 형을 죽이고 아버지 다윗을 쫓아내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넷째는 아도니야인데, 위에 형들이 다 죽었기 때문에, 그가 왕위 세습 1순위가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밧세바와의 사이에 태어난 솔로몬이, 다윗의 왕권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인이 왕위 계승 1순위라고 생각했는데, 왕권은 포기하지만 대신에 아버지 다윗의 첩 아비삭이라도 달라고, 밧세바를 찾아가서 부탁했다가.. 결국 죽게 되죠.
어쨌든 우리가 지금 아들들의 이름을 살펴보는 이유는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아내를 많이 얻고 아들을 계속 낳으면 그게 하나의 강해지는 표지로 보았지만 결국 이런 것들도 나중에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몰라요.
다윗처럼 자식 때문에 속썩는 일을 많이 경험하고 다윗처럼 자식 때문에 눈물을 많이 쏟은 사람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아들을 낳거든, 데이빗 이라고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마세요. 고생을 죽자고 한 사람입니다. 평생 피난 생활, 망명 생활.. 한번도 편한 적이 없었던 인생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쓰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뭐 그냥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함부로 기도했다가 인생이 어떻게 꼬일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조심해서 기도하라 이 말이죠.
어쨌든 우리가 다윗은,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서 섬기고자 했지만 그 당시 삶의 방식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은 가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세우는 데는 철저히 실패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께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식들에게 너무 무관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게 그 당시에 가정사의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쨌든 다윗은 하나님을 따라서 점점 강해졌는데 뭘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어요.
군사를 늘렸다든지, 무역을 증진했다든지 뭘 했기 때문에 다윗이 점점 강해졌다.. 이런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7년 반 동안 뭘 했는데,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졌을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7년 반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다윗이 점점 강해지는 시간을 허락하셨는데
그 강해지는 방법이 뭘 싸워서도 아니고 왜냐하면 그 이후에 치열하게 싸운 흔적이 없어요.
아브넬의 소년 용사들과 요압의 소년 용사들이 헬갓핫수림 이란 곳에서 서로를 찔러죽이는 소규모 전투를 한 번 벌인 것 말고는 삼하2:16 제대로된 전쟁 다운 전쟁을 치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 삼하3장은, 다윗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점점 강해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인생에 무슨 일을 해서 강해지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권력을 장악하면 강해진다고 생각을 해요. 실세가 되면 강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얘기가 지금 다음 얘기와 연결이 됩니다.
◑6절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다윗이 강해지는 동안, 사울의 집에서는 아브넬이 점점 권세를 잡습니다. 다윗이 '강해지다'는 동사와, 아브넬이 '권세를 잡으니라'는 히브리어로 같은 어근의 동사입니다.
아브넬이 (다윗처럼) 점점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점점 강해졌다는 거예요.
권력을 잡으면 강해진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면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인지도가 있으면 그 사람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강해지는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아브넬은 사울의 집에서 권세를 점점 얻어가고 점점 강해져야 될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면 거기는 지금 이스보셋이 왕이에요. *사울의 넷째 아들
왕이 강해져야 정상이지 군사령관이 점점 강해져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게 세상의 비극이에요.
▲우리 민주주의는 제도를 만듭니다. 그 제도에 따라서 우리는 힘의 분배를 기본으로 만들어 놓고 있어요. 그래서 그 분배된 힘의 범위 안에서, 규정된 힘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런데 인간인지라 죄인인지라 누구든지 권력이 좀 생기면 누구든지 무슨 자리 하나 생기면 이게 점점 권세가 되는 거예요. 점점 큰 힘을 행사하려 하는 거예요. 사람 둘 셋 데리고 있어도 보스 노릇을 하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어디다 갖다 놓아도, 힘을 점점 얻고 강해지고자 하는 거예요.
하물며 군사령관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아브넬은 강해져서는 안될 사람인데,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될 사람인데, 점점 그 사람이 강해지는 바람에.. 역으로 이스라엘은 11지파를 통합함으로써 점점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점점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단 말이에요.
이거는 우리가 크게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어떤 조직에서 한 사람이 점점 힘을 얻어가게 되면 그 조직 전체는 힘이 점점 약해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가장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겸손함으로 힘을 하나님께서 부여주셔서 점점 강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본인이 독단적으로 힘을 쌓고, 힘을 축적하고 남의 힘을 빼앗아서 점점 강해지면 겉보기는 엄청 강해지는 것 같은데, 그 나라 전체를 놓고 보면, 점점 약해지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회나 공동체나 나라가 강해지려면, 승자독식, 일인 지배체제가 아니라
권력이 분산되어 골고루 힘을 발휘하는 균형과 견제를 이룰 때.. 정말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그걸 지금 역행하고 있다는 거죠.
일례로, 가정에서 아버지가 그냥 온 집안을 좌지우지 흔들면, 그 집안이 강해질까요? 큰 일을 만나거나, 아버지가 무슨 일을 겪으면.. 그때 그 집안은 견디지 못해요. 평소에 아버지께로 너무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비록 아브넬의 얘기지만 이 시대의 가정과 교회의 얘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은 맥없이 무너졌어요. 가정은 그냥 뭐 가정 자체가 지금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을 맞았어요. 가장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가장의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가장이 마땅히 자기 권위의 뿌리로 삼아야 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단순히 그냥 맞벌이해서 가장이 힘을 잃은 게 아니에요.
가장이 어디에 자기 권세의 기초를 두어야, 그 가정이 강해질 수 있냐? 이 말이에요. 그건 뭐 어떤 조직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무슨 나라를 보더라도 그렇고 그래서 제도가 정하고 있는 권력 이상을 끊임없이 추구해서 자기의 권력을 점점 쌓아갈수록 나라 전체의 힘은 약화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지만, 링컨 대통령 같은 사람은 국무회의 하는데 말이죠. 기도 하는데 그날따라 장관이 목소리를 너무 작게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좀 들리게 하십시오, 장관!' 그랬더니 '각하, 제가 지금 각하 들으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어느 나라에서 수반에게 그렇게 함부로 얘기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민주주의 한다는 이유가 뭐예요? 제도가 정하고 있는 권력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냥 힘만 생기면.. 정치 얘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조직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예요.
힘이 좀 생기면 그냥 사람을 좌지우지하고 사람을 내 멋대로 하고자 하는 그 욕망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죠.
소위 니체가 말하는 '권력 의지가 발동하는' 거죠. 정치를 해서 권력 의지가 있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못 돼서 권력 의지가 발동하는 거예요. 사람이 악해서 권력 의지가 발동하는 겁니다.
▲인생의 길은 두 가지에요. 사랑의 길과 권력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과 그냥 세상의 길이 있을 뿐이에요.
근데 오늘날의 교회가 왜 이렇게 약화됐습니까? 사람이 너무 강해진 거예요.
어떻게 보면 드러나야 될 하나님은 안 드러나고, 사람만 드러나는 거죠.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에요. 사람만 드러나면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한 두명 있게 되면.. 그렇게 되는 거죠.
보통 개척교회하면, 목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지금도 제가 마음먹으면, 이 교회는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모든 문제는 저한테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아브넬이라는 작자가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이유를 아십니까? 사울왕이 죽고 나서, 5년 동안 자기 멋대로 했어요.
그런데 5년이 지나고 나니까, 본인이 권한을 휘두르는 것은 좋은데, 책임이 점점 무거워진 거예요. 그리고 백성들의 눈치가 자꾸 자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왕의 책임은 이스보셋 한테 지우기 위해서, 그를 왕으로 세운 겁니다.
본인은 권력의 단맛만 따먹고 나중에 책임질 일은, 왕이 다 책임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아브넬은 언제나 권력 편에 서 있는 사람이에요. 사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고, 사울이 죽고 나서도 그랬고..
다윗이 점점 강해지니까 다윗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게 오늘 본문의 얘기고 다윗이 오라고 그랬습니까? 제발로 다윗에게 찾아들어가서,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에게로 넘기겠다고 약조하는..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친구예요.
그게 다 자기가 자기 권력을 스스로 더 강화시킨 결과란 말이에요. 따라서 권력을 점점 강화시키는 사람은 권력이 약해질까봐 두려워하는 것 이상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다윗에게, 한꺼번에 이스라엘을 주시지 않았어요. 어떻게 해야 나라가 강해지는지를 학습하는 기간이 7년의 기간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잠잠이 기다릴 줄 아는 것,
하나님이 통일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 그게 다윗의 역할이에요.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분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된 것은 블레셋 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해석을 해요.
왜냐면 어쨌든 그는 블레셋에 망명을 가지 않았습니까? 시글락 마을을 받아서, 한동안 어쨌든 거기서 블레셋의 신민처럼 살았던 사람이죠.
근데 그가 귀국을 했지만, 열두 지파가 보기에는 그가 심각한 오점을 남기고 온 거예요. 어쨌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이 적국인 블레셋에 망명을 해서, 거기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왔으니까 뭐가 그렇게 떳떳하겠어요?
그러나 블레셋 입장에서는, 다윗이 감으로써, 한 지파라도 왕을 차지하면 훨씬 이스라엘이 이렇게 나누어져서 분립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컨트롤 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거죠.
그래서 통일이스라엘 보다는, 분열된 이스라엘을 훨씬 더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그 행보를 블레셋이 암묵적으로 그냥 내버려 둔 거라는 그런 해석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7년 동안 다윗은 무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거나 다른 사람의 약점을 빌미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거나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는 잠잠이 머물러 있기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나? 하며 기다렸을 뿐인데 그의 권력은 점점 강해지고, 또 유다 지파의 입지도 점점 강해진 반면에
훨씬 우세한 입장에 놓여있던 11지파의 이스라엘은 국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본단 말이죠.
우리 인생에도 그런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권력을, 내가 힘을 독점하면.. 전체 조직이 점점 더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덜 타락하는 것이죠. 훨씬 더 지혜롭게 인생을 마치게 되겠죠.
그러던 중 판세를 뒤흔드는 일이 터지고 맙니다. 7~8절입니다.
◑7~8절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러분, 권력이 이렇게 집중되면, 꼭 터지는 게 돈 아니면 여자예요. 성적인 스캔들 아니면 돈 문제입니다.
아니 권력을 지금 손에 쥐었는데, 어쩌면 그 욕심때문에 권력을 쥐었는데 그래서 권력 잡으면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잖아요.
사울 왕의 첩 리스바 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아브넬이 그와 통간을 했던 모양입니다. 혹자는 정치판에서, 어쩌면 없는 일을 '만들어낸 스캔들'일 수도 있었다고 보기도 하는데요, 본문의 정황상 사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약 아브넬이 뒤집어쓴 것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종 하는 행위로, 그는 자기 옷을 찢었을 거에요.
자기가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지만 왕을 왕으로 인정하고, 자기가 군사령관의 위치에 머물렀다면 이렇게까지 과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 권력이 왕권을 넘어섰기 때문에 왕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이죠. 분노하는 것이죠. '누가 너를 왕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네가 지금 나한테 따지냐?' 하는 식이었죠.
그러나 이스보셋은 따질 만한 일을 따진 거예요. 왜냐하면 왕의 첩이나 왕이 여인을 건드리는 것은 왕권을 빼앗아 오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 그 당시 관행이요 문화였어요. 굉장히 상징적인 행위였어요.
그래서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아도니아가 죽게 된 이유는 솔로몬한테 왕권을 빼앗겼어요. 왕권은 빼앗겼고
그는 왕권을 이제 찾아오기는 어렵고, 밧세바한테 가서 다윗을 수종들던 아비삭을 달라고 말했다가, 자기 목이 달아나지요. 왠지 아십니까?
그 아버지의 여인을 달라고 하는 것은 왕권을 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말을 전달하자 솔로몬은 '어머니, 그건 왕권을 달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하면서 명하여 아도니야를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아도니야는 당시에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기도 하고요.
나중에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때도 어땠습니까. 아히도벨의 간언을 받아들여서, 압살롬은 어이없게도 아버지 다윗이 두고간 첩 10명을 데리고, 백주 대낮에 왕궁 옥상 텐트안에서 여인들을 범하는 짓을 저질러요.
그 말은 '나는 이제 아버지와 끝났다. 아버지를 내가 이겼다. 아버지의 여인은 전부 내 여인이 되었다. 이 나라는 전부 내 거다' 라는 걸 선포하는 행위에요.
그러니까 본문에 이스보셋이 당연히 이런 문제를 따지고 든 거죠. 따질 만한 일이고 문제를 삼아야 할 문제인데 아브넬이 반발함으로써, 이게 지금 문제가 이렇게 번지고 만 거예요.
그러고는 아브넬이 지금 무슨 막말을 시작하냐면 9~11절까지입니다.
◑9~11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
아브넬이 지금 '하나님이 다윗의 집으로, 사울의 왕권을 옮기셨다'고 말합니다. 지금 자신이 지금까지, 11지파의 권력 실세로 집권하고 있었던 것은, 왜 그랬던 것입니까?
그리고는 '지금 내가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과 맹세한 것을 내가 지키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적인 말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말은 맞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구미에 맞을 때만,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고, 이용하는 거죠. 말은 맞지만, 그 근본 동기는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이 있는데 아브넬이 그러면 여자 리스바 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홧김에 이 일(나라를 다윗에게 넘겨주려는 결심)이 일어났다고 생각을 해야 되나요?
아니에요. 여러분 반역은 홧김에 하지 않습니다. 반역을 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요. 아브넬 이 사람은 정말 머리가 좋고 치밀한 사람이에요.
블레셋과 사울이 전면전을 치를 때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왕과 그 아들들이 다 죽었는데, 군대장관이 살아남다니요... 제일 먼저 죽어야 당연하지 않나요? 그런데 자기가 머리를 잘 써서 살아남았던 거지요.
따라서 그는 지금 반역을 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반역을 끊임없이 생각해왔던 것이, 지금 적당한 때가 되자 폭발한 것입니다.
그는 때가 되기만 하면, 다윗이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다윗에게 뛰어갈 마음의 준비가 평소에 되어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점점 이스라엘의 11지파들은, 그 마음이 다윗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아브넬은 잘 간파하고 있었던 사람이죠.
그래서 그는 명분만 있다면, 어떤 기회만 포착된다면 그는 기꺼이 백기를 들고, 다윗에게 투항할 마음을 평소에 먹었던 사람이었어요.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해요. "누가 (교회를) 나가겠다면 내보내세요. 그런 사람은 언젠가는 나갑니다." 그가 나가겠다고 우연히 한 번 툭 던지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평소에 계속 나가나/ 안 가나? 나가야 되나/ 여기 계속 있어야 되나? 어느 게 나한테 도움이 되나? 항상 그 생각을 하다가.. 그게 겉으로 한번씩 던져보는 말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나간다는 말이 튀어나오면 그냥 내보내세요.." 그렇게 누군가가 제게 조언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회사 생활을 오래 겪은 가운데서 터득한 경험에서 나온 말 같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브넬처럼 두 마음이 항상 왔다갔다 해서 정한 바가 없어요. 그 아브넬의 끝은 비참합니다. 다음 장인 4장에 보면, 그의 비참한 죽음이 나옵니다.
◑12절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다윗은 다윗대로 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왔어요. 뭐 그술 왕의 딸 마아가를 데려온 거라든지, 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윗의 방법대로 통일을 쭉 구상했겠지만
통일의 결정적인 전기는, 다윗의 노력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갈등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 통일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도, 우리 방식대로 되는 게 뭐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 수록 안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 그런 방법으로 통일을 시키시겠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브넬이 이제는 다윗한테 사람을 보내가지고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읍시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2
'내가 당신을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라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13~15절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다윗이 이렇게 미갈을 데려오라고 요구한 것은, 통일 이스라엘의 적법성을 얻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미갈하고는, 다윗이 정식 이혼한 것도 아니었어요. 다윗이 망명하자마자 사울이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줘버렸던 것이죠.
그러니까 미갈을 데려오면, 자기는 사울의 사위가 되는 것이고 사울에게 다른 아들이 없으니, 그러면 자기도 사울의 왕위를 합법적으로 승계하는 되는 어떤 자격이 생기게 되죠. 그런 (인간적인) 계산을 다윗도 한 것 같아요. 그는 그 나름대로 머리를 쓴거죠.
◑17~19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아브넬은 자기 의사를 전달하고 돌아와서, 이제 11지파를 설득하는 작업을 시작해요. 특별히 베냐민 지파가 불안이 많죠. 왜냐하면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니까요.
그 지파를 마지막으로 설득하고 그는 다시 다윗에게로 내려가서 '정지작업 끝, 이제 통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러고 온 거예요. 20절이하입니다.
◑20~21절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아브넬이 다윗 왕에게 와서 보고를 할 때 '내 주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윗에게로 본인이 배를 갈아타기로 결정한 것이죠. 그는 배신을 결정했습니다.
어쨌든 이 아브넬의 배신은 다윗에게는 7년 반의 인내의 세월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목격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이라고 하는 정말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만들어가듯이 지극히 평범한 저와 여러분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고자 하고, 우리 또한 다윗의 길로 가고자 하는 까닭은 우리 또한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행하시는 일들을 잠잠히 바라보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 때문이고 또한 알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 스스로를 내맡기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때까지' 저와 여러분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각자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이라는 거에요. 다윗은 그 계획에 순종했고 사울과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그 계획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인생의 길이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기로 결정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따르는 길,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 성령님께 순종하는 길, 그 음성에 따르는 길을 가기로 결정한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때 이 땅 가운데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겠지요. 이런 변화를 꿈꾸지 않으면, 늘 권력의 풍향계가 어느 방향인가? 누가 힘이 있나, 누가 실세인가, 어디를 가야 내가 안전한가? 평생 그것을 따라다니다가 여러분, 우리 인생이 끝나는 거에요. 그렇게 쫓아다니다가 다 인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