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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9편 1~13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 앞에 침묵하는 다윗

LNCK 2022. 3. 13. 16:11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 앞에 침묵하는 다윗     시39:1~13       출처, 여러 설교 정리

 

◑1. 악인 앞의 침묵(1~3절)

 

시편 전체 150편 중에서 7개가 ‘참회시’라고 했습니다.  *6, 32, 38, 39, 51, 103, 143편

그 중에 6개가 다윗의 시편인데, 다윗의 참회시 중에 하나인 오늘 본문 39편은

배경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12절의 '나의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절 '죽기 전에 내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등에 의거,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겪을 때나, 혹은 그 뒤의 노년에 지은 시로 보기도 합니다. 

    

▲1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에도,

자포자기하며 마음이 내키는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스스로에게 말하기를"이라고 표현하는데,

곧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징계를 받게 되면, 조심하기보다 “나만 잘못했나?”,

“이것은 내게 너무 과한 벌이 아닌가?” 하기 쉽지만

그리고 자신은 말로 범죄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곧 바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거친 행동과 거친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언행(言行)을 조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행동과 말을 조심하며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에게 평안함만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2~3절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잠잠하다’는 ‘단단히 묶다’는 뜻인데, 본문에서는 ‘혀를 묶다’는 의미입니다.

혀가 묶이게 되면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간에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큰 눌림이 되었습니다.

할 말은 너무너무 많은데 그 말을 할 수는 없을 때, 정말 속이 터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을 잘못하게 되면, 말이 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아야 할 때는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유익합니다.

 

다윗은 ‘선한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악한 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물건을 사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될 때는

사지 않는 것이 바른 선택인 경우가 많듯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될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생과 믿음이 깊어집니다.

△침묵, 이것은 거대한 영성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침묵은,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은 언어의 또 다른 방식입니다.
침묵의 십자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변화되죠.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는, 이 침묵의 영성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십자가를 가장 선명하게 우리에게 드러내셨어요.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말보다 침묵을 통해서 더 많은 메시지를 오늘 온 인류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침묵을 배우고, 예수님의 침묵을 묵상하면서

많은 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침묵의 힘'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의 해법, 솔루션 (4~6절)

 

사람을 향해 입을 열지 않았던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새번역) “내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내가 언제 죽습니까?

나의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아마도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 제가 언제까지 저꼴을 보고 살아야 합니까?’ 하는

답답한 마음의 기도일 것입니다.

 

다윗은 악한 사람들이 참소하며, 불의를 행할 때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어 고백하는데,

“하나님, 저 악한 사람들의 행실을 모두 보셨지요?”

“하나님, 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떠드는 말도 들으셨지요?”,

“하나님, 저 악한 사람들에게 벌을 좀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날,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는 날이 언제인지,

자신의 인생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 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진짜 자신이 몇 살까지 살지, 몇 년, 몇 월, 며칠까지 살다가 죽을지

날짜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도 죽을 날이 있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끝에서 보아야 정리가 됩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면,

자신의 삶과 신앙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또 관계가 소원했던 사람이나 서로 감정이 상한 채 내버려 두었던 사람도 다시 정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할 때에, 연약한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다윗은 자신의 인생이 ‘한 뼘의 길이’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한 뼘의 문자적인 뜻은 ‘손바닥의 폭’인데, 약 10cm입니다.

10cm의 짧은 줄에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남은 인생이 그렇게 오래 살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힘든 일, 억울한 일이라도.. 그렇게 오래, 영구히 참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그렇게 힘든 날도 한 뼘과 같다
즉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니 힘들어도 견디며 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원인 제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윗 자신을 비방하고 욕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다윗의 솔루션, 대처 방안은 무엇입니까? -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4~6절)

 

자기가 당하는 공격들, 비방의 말들, 그런 현실적 문제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인생의 종말의 때를 생각해 보니.. 그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지금 "종말론 적인 신앙으로, 자신에게 닥친 비방의 문제를 극복"하는

대처방안, 또는 해결책을 찾았던 것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압력 밥솥 -클릭- 

 

또한 다윗은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라고 고백했는데, 

그 말은, 인생은 자기 전성기 때(든든히 선 때)도, 허무하다, 또는 입김과 같다.. 는 뜻입니다.

'허사'의 원어는 '헤벨'인데, vanity 허무도 되지만, breath 입김도 됩니다.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5절에서 다윗은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라고 고백했는데, 

6절에서는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림자’는 ‘허상’, ‘유령’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랑할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헛된 것입니다. 

그림자는 흔적을 남기지 못합니다. 세상에 없는 권력과 화려함, 부귀와 권세, 명예가 있어도 
시간이 흘러가면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슬픈 일, 억울한 일도.. 허사요,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헛된 일이니, 거기에 너무 상심해 할 일이 아니라는 거죠.

6절 후반부의 (새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입니다.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위 구절은 사실 좀 당황스럽게 합니다.

갑자기 '재산'이 등장하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문맥과 아무런 연결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문맥과 유추해서 연결하자면,

사람들이 싸우고 갈등하고 공격하는 이유는, 상당 부분 사실은 '재물'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바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도, 거두어도

자신이 쌓은 것을 누가 거두어갈지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 '돈은 돌고 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그것때문에 서로 다투거나 싸우거나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이 곧 죽는데, 그 재물을 영구히 소유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용서와 회복의 기도 (7~13절)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7절의 앞에 ‘그러므로’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강을 건널 때마다,

인생의 크고 작은 일을 겪을 때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실망을 할 때마다

저절로 고백되는 것은 “나의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입니다.

 

▲8절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다윗은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공격이, 자신의 죄에서 기인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환란이나 모든 곤경에 처할 때,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고백은

회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셔야, 비로소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다윗은 이제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원수 앞에서도 넉넉히 잠잠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들어하는 사건들의 배후에 이미 주님께서 계심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그런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흥분하지 않아도 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 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다윗은 비록 세상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어도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함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상황을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런 비참한 삶에서 건저 올려 주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들이 다윗 자신을 괴롭히지만,

다윗은 그 해결책을, 원수들에게로 향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거죠.

 

11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책망하시기만 하시고, 징계만을 계속하신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날지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2~13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그렇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인 것은,

그는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할 줄 아는" 경험과, 체험과, 노하우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르짖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주는 나의 죄를 용서하사' :13

-그는 기도가운데 자신이 나그네 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2

 

사실 부르짖고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결코 무시하실 수 없으시고, 

뜻을 돌이키실 수 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못 들은 척 하며 '잠잠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12

 

그리고 다윗 자신 역시, 이 세상에서 영원히 거주할 사람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는 잠시 왔다가 거쳐 가는 인생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앞서 인생이 한 뼘 밖에 남지 않았고, 5절

그림자와 같다고 고백한 다윗은, 6절

마지막으로 자신을 나그네 임을 깨달았습니다.  12절

 

사실 이제 곧 하나님 앞으로, 하늘나라로 갈 것을 생각할 때

희로애락 이 모든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1~3절까지, 정말 홧병이 날 정도로 자기 울분을 토로하던 다윗은

'영원'과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신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얘기지만,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성냥곽보다도 작게 보이고, 상당히 초연해지듯이,

다윗은 기도 중에, 마치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올라간 것처럼,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의 현실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땅 위에서 쳐다볼 때보다는, 생각이 많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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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에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두둔 형식으로’에서 ‘여두둔’은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로 볼 수도 있고,

일반명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두둔을 일반명사로 본다면 그 뜻이 ‘찬양’ 또는 ‘감사’입니다.

그렇게 보면 표제어가 ‘인도자를 따라 찬양과 감사의 곡조를 따라 부르는 노래’가 됩니다.

 

하지만 이 시편은 찬양시나 감사시로 분류되지 않고 참회시에 속합니다.

다윗이 인간의 유한함에 대해 고백한 시를, 이스라엘 공동체가 감사와 찬양의 곡조를 따라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께 올려드렸다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여두둔’은 고유명사인 사람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게 여겨집니다.

 

여두둔은 다윗의 시대에 아삽, 헤만과 더불어 악장(music director)로 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39편은 다윗이 지은 시를 악장 여두둔이 붙인 곡으로,

인도자를 따라서 회중이 부른 찬양입니다. 여두둔의 이름은 62편과 77편에 두 번 더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