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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4편 치욕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LNCK 2022. 3. 18. 20:16

◈치욕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시편 44:1~26            여러 설교 정리

 

본문의 표제어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을 당해, 국가적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에

고라 자손이 하나님께 올린 호소의 기도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을 설명하는 표제어가 붙어 있지 않기에

어떤 위기인지에 대해서는 몇몇의 견해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히스기야왕 때에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한 사건(왕하 18:13~19:37)으로 봅니다.

 

그 때에 온 유다가 초토화 되고, 예루살렘마저 함락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돌아보았습니다.

 

◑옛적에 이스라엘을 도우셨음을 회상하며 구원을 요청함   (1~8절)

 

▲1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오늘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로 시작됩니다.

국가가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지금 앗수르의 18만5천 대군과 마주한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행하신 일’은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어서 우리가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버지들’입니다.

출애굽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무였습니다.

 

그것을 자녀들이 듣고 배워서 또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조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2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이것은 분명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한 역사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살게 된 것을

농부가 나무 심는 것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심으려면, 먼저 땅을 정리해야 합니다.

잡목이나 잡초가 우거져 있으면 전부 뽑아내어야 합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에 제대로 심기 위해서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 곳에 있는 잡목과 잡초와 같은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고,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을 고달프게(꺾어서 버리다) 하심으로

조상들을 번성하게 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심겨진 것이 자신들이 실력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3절입니다.

 

▲3절,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자기 칼’, ‘그들의 팔’은 인간(조상들)의 능력을 의미한다면,

‘주의 오른손’, ‘주의 팔’, ‘주의 얼굴의 빛’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에 그곳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을 각 지파별로 나누고, 각 지파마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서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들은 자기들의 칼이나 활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후손들이 알기에

고라 자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5~8절, 그래서 과거의 구원을 회상할 때, 시인은

현재의 극심한 시련에서도 구원을 기대합니다.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백성들의 비탄 : 막중한 시련에 처한 현실을 탄식함 (9~16절)

 

하지만 과거에 그렇게 조상들과 함께 해주시고,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조상들을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은 그렇게 하시지 않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9~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이제는' .. 강한 대조입니다.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다'고 과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앗수르의 18만5천 대군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 전에도 여러 번 작은 침략, 국지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이스라엘 북부지역이 외국으로부터 많은 침탈을 당했습니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그래서 대규모가 아니더라도, 소규모로 포로로 잡혀간 일이 벌써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가는 일, 그래서 노예로 파는 일은 흔한 다반사였습니다.

어쩌면 그런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지금 시인은 '우리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이 임했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런 고난을 주셨다는데, 뚜렷한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를 모르는가 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 종류가 존재합니다.

죄 때문에 징계를 받는 경우가 제일 흔할 것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고난의 뒤편에는, 자기 죄로 말미암는 징계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고통의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성도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여기가 천국이 아니잖아요.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삶 자체가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은 이유가 뚜렷한 없어 보입니다.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욥의 고난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그건 죄 때문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처럼, 그를 시험하시려고, 고난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창22장 모리아 산.

 

본문의 시가 소중한 것은, 시편중에서 이렇게 죄에 대한 다른 관점에 눈을 뜨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라는 주제가 이 시편을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뚜렷한 이유없이 찾아오는 고난 앞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인의 고백이

오늘 이 시편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라는 것입니다.

 

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그럼에도 소망이 있는 것은

시인은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14절까지 6번이나 반복되는 단어가 ‘주께서’입니다.

 

이 모든 일은, 그저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Everything is under God's control, 모든 것을 여전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요,

만약 주님께서 현재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또 뒤바뀔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28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했습니다  (17~26절)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7절이 본 장의 주제 구절과 같습니다.

근래에 극심한 고난과 환란을 겪었지만, '주께서' 그 모든 일들을 당하게 하셨지만

우리가 주를 잊지 않았고, 주님을 믿는 믿음에 신실했다는 것입니다.

18절에도 그런 굳건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19절). 

시인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20~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2절에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이 여호와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성취를 위해, 고난 받도록 선택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나라를 택하여, 그 강함을 통해 세상을 구원해 나가기 보다는

하나님은 약한 나라를 택하여,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을 보여주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해 나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바울도 약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원래 태생적으로도 약하지만,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도 다 약했고,

다윗이 통치할 때도, 이스라엘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강하심을 세계에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은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약함으로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는 것을 배워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여정에서 만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한 해석입니다.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2

이 구절은 롬8:36절에서 바울이 인용했는데, 로마서 8장이 본문 시46편과 같은 정황입니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본분이랄까요? 하나님이 세상에서 성도를 그렇게 약하게 두신다는 것입니다.

 

양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자구책이 없는 짐승입니다.

양은 가젤이나 얼룩말과 같이 다리가 4개가 있지만 그것들처럼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들소와 같이 뿔이 있기는 하지만 그 뿔이 앞이나 옆으로 나지 않고 뒤로 말려있어서

자기를 보호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다른 맹수들처럼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습니다. 이게 성도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누구보다도 강합니다.

왜냐면 목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여주라고, 성도를 약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좌절과 절망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17~18절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한 성도님이 별세하셔서, 지난 월요일 밤에 조문을 갔었습니다.

가는 길에 라디오 기독교방송을 틀었는데, 오래 전에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가 흘러나왔습니다.

 

♬나 주의 믿음 갖고 홀로 걸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노래 부르네

폭풍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주는 내 친구 진실한 친구, 세상 끝까지 주 의지 하리

폭풍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이 나보다 훨씬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그 어려울 때에 신앙을 지켰던 분들이

움직이지 않는 큰 바위와 같고, 거목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시인도 온 나라에 폭풍 구름이 몰아쳐 하늘을 덮어도 믿음을 갖고 실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라 자손인 시인은 과거에 조상들을 출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주셨다면,

지금도 그렇게 역사해 주셔야,

후손들이 또 지금의 역사를 돌아보고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하소연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버릴 정도로 흔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때가 히스기야왕 때에 산헤립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였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산헤립의 군대를 쳤습니다.

그날에 죽은 산헤립의 군인들의 숫자가 18만 5천명이었습니다. 사37:26

하나님의 시계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도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심이 분명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분명히 응답해 주셔야 하고, 손을 내밀어 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가정에,

일터(학교)에, 삶의 자리에 심어주셨습니다.

 

혹 하나님의 시간표와 나의 시간표가 달라,

우리가 가는 길에 폭풍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다할지라도 실망하지 맙시다.

그런 때에 믿음이 없고 패역하게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살며 순종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과 순종을 따라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회복의 갈구   (23~26절)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관련 일화 / 중동에 선교사로 나간 젊은이교회 자매가 있습니다.

최근에 많이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힘든 시절을 보내며 메일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깊은 기도 가운데 울부짖는데, 주님이 제게 물으신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도,

네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와도 나를 사랑하겠느냐?

어느 누구도 그렇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그렇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잘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그려졌습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힘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신 그 분 말입니다.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영역 속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바라는

이 세대로 인하여 슬퍼하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동안 힘들다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제가 원하는 주님의 모습으로 저를 도와주지 않으셨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주님의 형상이 아니라

그 분 그대로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제가 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선교사님은 늘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그 어려움 중에도 주님으로부터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