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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편 1~2 신앙의 내면화와 외향화

LNCK 2022. 3. 21. 18:45

 

◈신앙의 내면화와 외향화            시1편 1~2               2009.08.16.출처

 

제가 지표수와 심층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물은 대부분 먹지 못하는 물입니다.

왜냐하면 오염되어 정화되지 못한 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물을 지표수물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30m정도 파내려 가면 깨끗하게 정화된 단물이 나옵니다. 이 물이 심층수 물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물이 땅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정화되어 깨끗한 생수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오랜 세월을 거쳐 땅속으로 스며들면서 수정처럼 맑게 정화되는 것입니다.

깊이 스며들면 들수록 더 깨끗한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오랜 세월동안 정화되었다가 거꾸로 분출될 때

이 물은 사람을 살리는 생수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깊이 스며들었다가 분출되는 물은 말할 나위 없이 정말 생명수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땅에 떨어진 빗물이 생수로 변하되는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땅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내면화’와 다시 밖으로 분출되는 ‘외향화’로 개념화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결여되든 빗물이 생수로 되살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를 예로 들고 있는데요, 비는 먼저 바깥에서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땅속 깊숙한 곳에서 정화 되어 다시 땅속으로 나오게 되는

내면화와 외향화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풀이나 나무도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씨를 뿌려야합니다.

먼저 외부에서 씨를 땅에 심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일정한 기간을 지난 후에 땅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이지요.

내면화 과정을 통해 외향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무는 뿌리가 땅속에 있어야하고 땅속에 뿌리를 두어야 나무는 자랍니다.

이른바 내면화로부터 외향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면화와 외향화는 공유되어 있습니다. 분리될 수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씨앗 그대로 있고 싹이 나오지 않으면

그 씨앗을 죽은 것입니다.

뿌리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에서 밖으로 싹이 나오지 않으면 그 뿌리는 죽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면화와 없이 외향화가 있을 수 없고

외향화는 내면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씨앗이 외부로부터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가서

수태되고 잉태되면 내면화와 또 때가 차서 태아가 자궁의 문을 열고 출생하는 외향화를 거칠 때에만

새로운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생명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첫째는 반드시 내면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면화의 과정이 있지 않으면, 생수도 꽃도 사람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내면화와 외향화는 중단 없이 되풀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씨앗을 땅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 싹이 났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뿌리는 계속해서 옆으로 밑으로 뻗어가야 합니다.

또한 싹은 자라서 줄기가 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태어났다고 해서 절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사를 하고 양분을 섭취하는 내면화와 또 성장이라는 외형화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렇다고 육체의 성장만으로도 안 되지요. 계속해서 지혜와 지식이 습득되는 내면화와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표출하는 외향화를 거듭하면서 전인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외향화의 건강성은 내면화의 깊이와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생수 ‘에비앙’은

레만 호수 옆 프랑스 에비앙 마을에서 퍼 올린 생수입니다.

 

이 생수가 세계적으로 왜 유명하냐하면 알프스의 눈녹은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에비앙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15년이나 걸린다는 것입니다.

 

15년동안이나 땅속 깊숙이 스며들어 다시 분출되는 물이니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 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내면화가 되면 될 수록 외향화는 더 좋은 것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서부유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인데

바람만 크게 불어도 거목은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려져있는 장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답니다.

 

우리나라는 나무를 심은지 1년도 안되는 나무를 제외하고는 그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서부유럽 쪽에서는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나느냐하면

그곳에는 겨울이라 할지라도 혹한이 없습니다.

일년 내내 비가 많이 오고 늘 흙과 나무는 습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뿌리가 밑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나무 같으면 물을 얻기 위해 뿌리가 밑으로 계속 내려가지만

서부 유럽 쪽은 물이 넉넉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의 뿌리가 밑으로 뻗지 못하고 옆으로만 뻗어있으니까

바람이 불고 태풍이 자나가면 그 큰 나무라도 몇 십 년 된 나무라도 그냥 쓰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와 법칙은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안쪽을 ‘내면’ 바같 쪽을 ‘외향’이라는 단어로 개념화시켜서 쓰고 있지만

이런 원칙이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섭리의 원리와 원칙이며

영적인 세계에서도 원리와 원칙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내게 임한 주님의 은혜, 주님의 말씀,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내 심령 속에 깊이 되새기는 내면화가 선행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면화 없이 하루아침에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은 굉장한 모순입니다.

 

이것은 임신한 여인이 10달의 기간과 노고 없이 하루아침에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계시록 3:20절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밖에서 주님이 들어오시겠답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면 그는 들어오셔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이 내면화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내면화는 반드시 외향화, 곧 삶으로 표출되어야합니다.

그 내면화와 외향화는 단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묵상 등은 신앙의 내면화를 위한 것입니다.

경건의 시간, 예배시간등도 신앙의 내면화를 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내면화가 더 깊으면 깊을수록

외향화는 계속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요즘 좀 많이 했습니다. 13년간 참 많은 고통과 아픔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이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하나님이 요셉을 이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기 전 그 기나긴 세월동안 요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히 내면화를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면화의 깊이가 국무총리가 될 만큼의 내면화에 충실했다는 것을 우리는 아셔야합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만일 왕의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어찌 애굽의 정치와 지리와 문화를 알 수 있겠습니까?

왕의 감옥에서 정치인, 학자, 왕의 가까운 측근들을 어찌 만나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철저히 내면화의 훈련을 한 사람입니다.

 

막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미나 아비나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보면 ‘나와 및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내면화 된 사람은

어떻게 외향적인 삶이 이어지느냐하면 버리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 깊이가 크면 클수록 깊으면 깊을수록

자신을 죽이는 일과 세상 것을 버리는 일에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100배의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다고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8장에 바리새인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의가 못한 이유는 신앙의 내면화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내면화가 없는 신앙의 외향화는

반드시 자기 교만을 낳고 그 교만은 하나님과 사귐의 큰 장애가 됩니다.

 

반면에 세리는 그의 선행된 내면화에 대한 칭찬입니다.

참된 내면화가 앞서야 바른 외향화가 뒤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일기를 방학 때 써오라고 해 놓고 검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일기장을 선생님이 읽는 것이지요.

일기는 자기 거울인데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서 읽기를 써야합니다.

 

어릴 때 실컷 놀다가 한 달 치의 일기를 쓰려고 하니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다들 경험이 있겠습니다마는 쓸 것이 없어서 오늘은 날씨 맑음, 어제와 같음, 어제와 같음,

이렇게 쓰는데도 힘듭니다.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절대로 의미 없는 말이 없습니다.

행9:19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꼭 어린아이 일기장처럼 육체적 건강을 돋보이는 것처럼 기록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의 내면화가 외향화로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3일 동안 눈이 멀어 보지도 못하고 식음은 전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내면화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내면화에서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외향화의 시작을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가 지속적으로 내면화의 삶을 살았는지를 아셔야합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도리까 두려워 함이로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은 계속해서 내면화의 가속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내면화의 깊이가 복음의 외향적인 삶을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무엇이 방해되었습니까? 방해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감옥이, 매가,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겠다는 결사대가

그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파선되어 죽음의 위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아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복음전파에 어떤 부분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바로 끊임없이 자신을 말씀으로 성령으로 내면화시키는 깊이와 넓이 때문입니다.

 

▲“신앙의 내면화와 외향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행전이란 매일 신앙의 내면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외향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삶의 기록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님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로마서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빌1: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성자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몸으로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가 영으로 다시 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임하신 주님 그분께서는 또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성령강림 후 다음 장인 사도행전3장에 보면 ‘제 구시에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아름답고 전통적인 미문의 장엄함 앞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그 걸인은 나이가 40세였습니다.

사람들이 성전 미문 앞에 메어다 주면 하루 종일 구걸로 연명해 온 자였습니다.

그 짓을 근 40년이나 하였으니 참으로 가련한 신세였습니다.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 앞에 지나는 베드로 일행을 보고 평소대로 구걸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곳으로 지나가는데 평소에 매일같이 구걸하는 장면을 보면서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의 영이 베드로의 마음에 살아계시니,

그가 보고 말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형제여 내겐 당신이 요구하는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 대신 내게 있는 것이 있으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걸으십시오.’

 

잘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지금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이었습니다.

그러면 앉은뱅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물질로 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얼마나 누리고 있느냐를 보셔야합니다.

 

은과 금도 앉은뱅이에게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베드로가 제시하고 그들 치유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심정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부요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부요함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 부요함은 바로 생명이며 그 생명을 나누는 것만큼 세상에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베드로의 마음에 계시며 그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니

엄청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면 3000명이 회개하며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통회가 일어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런 역사는 성령의 내면화가 외향화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마음에 계신 사도들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역사인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영으로 임하신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다고 했습니까?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이미 임해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내면화의 핵심입니다.

신앙의 내면화란 이미 내게 영으로 임해 계시는 주님에 대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해 깨어 있는 한 나의 외향적 삶은 그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 안과 밖이 너무 다른 것입니다.

예배당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는 분위기 상 주님의 임재를 쉽게 느낄 수 있기에

마음과 자세가 경건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벗어남과 동시에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삶이 주님과 무관해 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어쩌면 예배 때만이라도 교회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할 정도로

너무 주님과 함께하고 계신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내면화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이미 내게 임해 계시는 주님에 대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됨이 더 충만해지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또한 충만해 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분으로 다져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새벽기도, 공식적인 예배, 말씀묵상

이 모든 것이 주님에 대해 깨어있기 위함입니다.

 

신라호텔의 이길현사장이라고 기업인들에게는 꽤 알려진 인물입니다.

고 이병철삼성회장이 이길현사장을 두고 ‘세계를 보는 만원경’이라고 할 정도니까요.

이 분이 신라호텔을 최고의 호텔로 만들고 최고의 경영자가 된 비결은 새벽기도에 있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하나님말씀을 묵상하고 지혜를 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가 하루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7장16절 이하에 보면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가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우리의 외향적인 면을 보면 내면화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애완용강아지는 가족의 서열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제일 높은 서열에게 가서 꼬리를 하염없이 흔들어 됩니다.

서열이 제일 낮은 식구들에게는 엄청나게 무시합니다. 자기보다 낮게 생각해서 물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면 그 강아지가 누구를 제일 높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누구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루의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내면화작업을 우리는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도 됩니다.

 

말씀이 내면화되지 못하면 믿음의 삶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날마다 죽이지 않으면 내 삶의 주관을 내가 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장하고 있습니까? 삶의 변화가 있고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러면 내면화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성령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면화의 강화를 위해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분으로 충만케 채워나가는 일을 합니다.

그 내면화의 강화는 삶에서 충실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면화가 강화되면 될 수록 외향화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의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그 나라의 것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그 나라에서 확인 될 일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표가 안 나고 힘을 잃을 수 있지만 성령께서 매일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삶이 복된 삶인가를 알고 행하는 자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 복은 내면화를 통해 외향화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시편1:1-2절까지 오늘 본문말씀이며 결론의 말씀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내면화로 인해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라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내면화가 이렇게 외향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자신을 날마다 죽이고 그 말씀에 강한 영향을 받지 않으면 악인의 꾀나 죄인의 길이나,

오만한 자의 자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면세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를 존귀히 드러내는 삶을 통해 복 있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내면화로 표현됩니다. 이런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이웃과 사회에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거목으로 인해 옆에 있는 작은 나무들을 보호하며 풍성히 자라도록 합니다.

 

여러분 영성이 깊은 영적인 삶을 위해 말씀으로 무장하며 묵상하며 성령과 교통하며 교제하며

기도에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