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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3장 17~19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소서

LNCK 2022. 3. 22. 11:20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소서            합3:17~19       2021.07.04. 출처

하박국의 시작부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느냐?' 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박국의 마지막 부분은 
'이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이 하나님의 두 번의 응답을 듣고 나서 
역사의 경영자가 되시고, 인생이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제 앞으로 바벨론에 침략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겠지만 
하나님은 다시 공의를 행하실 것이다... 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죠. 

자 그러나 거시적인 민족사를 논하는 것과 
개인적인 인생사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은 좀 다른 차원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은, 하박국이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상황이 어려워진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겠다... 라고 고백하는 놀라운 내용입니다. 

▲17 절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이 3개의 나무는 
건조한 이스라엘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제공하는, 유대인들에게는 3대 과실수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통치기인 태평성대를 묘사할 때, 전형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왕상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그런데 그런 과수원에서, 이제 더 이상 기쁨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고, 
또 유대인들의 주식에 해당되는 밀과 보리를 더 이상 논밭에서 소출을 거둘 수가 없게 되고,
우리에 양 떼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 모든 것들은, 본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선물이라는 것이죠. 
가나안 족속들이 우상숭배와, 극단적인 성적, 도덕적 타락에 빠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내몰고, 
그들이 갖고 있던 성읍과 논밭과 과수원과 우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선물을 주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거든요. 
롬11:29절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여기서 은사(카리스마)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선물을,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너희가 거룩한 나라를 세워야 된다..는 사명으로 주셨던 거죠. 

그래서 신6:10~11절에 모세가 이런 경고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너희가 그렇게 배불리 먹었을 때 
하나님이 이것을 주셨다는 감사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하고, 타락에 빠지면... 

'내가 가나안 족속에게 행했던 것처럼 너희에게서도 이 선물을 빼앗을 것이다.'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15

자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자연환경과 생활환경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누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돈과 쾌락과 성공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이 자연환경과 생활환경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열매들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거에요. 

▲현재 인류는 세계적인 전염병 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백신이 보통 계발에 3년 걸린다고 그러는데 
1년여 만에 계발을 해서 빨리 전파를 하고 있지만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을 해서 또다시 혼전 양상으로 들어가고 있죠. 
이게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로 요즘 한국도 
'이게 내가 경험했던 한국의 날씨인가?' 싶을 정도로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북미는 더 난리잖아요.
캐나다 밴쿠버같은 데는, 에어컨이 필요가 없는 도시거든요. 
근데 42~45도 이렇게 올라가는 거예요. 이상 고온 현상입니다. 
지구가 이상합니다. 

로마서 1:20절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과 능력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만물가운데 다 드러나 있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이 자연환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한 거예요. 

롬8:19절 이하에는, '피조 만물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람들이 정반대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즉 극단적 무신론 과 인본주의와 성적인 타락과 물질 만능으로 치달으면 
계시록의 예언대로, 이 자연이 정반대방향으로 돌게 된다는 거예요. 

천체가 흔들리고, 자연히 파괴되고, 바다가 오염되고, 재난과 지진으로 인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실 것이다.. 라고 예고하셨어요. 

자 우리에게 지금까지 기쁨을 주던 이런 상쾌한 공기, 
또 자연환경.. 산과 바다와 하수.. 이 많은 것들.. 
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는 날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요? 

제가 여러분의 겁을 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자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하나하나 거두어 가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두려움에 빠지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시겠습니까? 

계시록의 예언을 보면, 마지막 때에 자연재해가 심해지고, 하나님의 징계가 계속 임하는데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계시록의 3번 나와 있어요. 

자연의 은총, 선물이 있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자연의 은총을 거두어 갔을 때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만 할 것이다... 라고 계시록에 3번이나 나와 있어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합3:17절 말씀입니다. 
여기 나오는 항목들을 제가 지금 자연에 관한 이슈로 설명했지만 
그 시대 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경제적인 조항들이죠. 

당시에 경제활동이라는 건 전부 1차산업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재해 때문도 아니고, 개인의 노력부족 때문도 아니고, 

전쟁으로 인해서, 바벨론에 침략으로 인해서,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고 
그들이 거둔 소출과 수익도 전부 몰수당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17

자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박국 선지자처럼 
'도대체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근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갑작스럽게 전면적으로 임하여서 
모든 사람들이 개개인의 사업에 아무런 소출을 거둘 수가 없고 
더 이상 내가 누리던 것들을 누릴 수가 없게 되고 
삶의 기쁨의 근원들이 끊어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요? 

하박국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요?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어요. 자 그래서 본문 1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8

그러한 극단적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저는 기뻐하겠습니다! 
상황을 봐서는 결코 기뻐할 수 없지만, 내 영혼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겠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게 가능하냐는 것이죠. 
이 히브리 텍스트는 특징이, 앞절과 뒷절이 평행법입니다.

똑같은 말을 조금 표현만 바꾼 거예요. 

▲그러니까 18a절 '내 영혼이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18b절이 아주 정확하게 병행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어요. 
'나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즐거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거예요. 

같은 얘기 아닙니까? 아뇨, 이거 완전히 다른 얘기에요. 
이런 것이죠. 하나님이 네게 어떤 필요를 공급해 주시고 
나에게도 어떤 도움을 제공해주시고 
어떤 위기에서 나를 건져주셔야만 감사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전혀 안 주실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오롯이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해서 나는 기뻐하겠다... 는 것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무슨 뜻인가요? 
풀무 불에 우리가 타서 죽도록 놔두실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온 것은 
어떤 도움을 받아 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그분 만으로 인하여서 기뻐하고, 사랑하고, 충성하며 살아온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게 참 신앙이고, 참사랑이죠. 

최근에 각기 다른 두 성도님이, 어머님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기도부탁을 하셨어요. 
두 분의 어머님 다 암 투병을 하고 계시는 분인데 
저도 함께 치유를 위해서 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상태가 계속해서 안 좋아져 가니까, 불안하고 근심걱정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기고, 
나중에는 이제 신앙적으로도 또 감정적으로도 계속 무너지는 거예요.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셨어요. 
'제가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기도를 할 때, 

설교때 들은 치유에 관한 말씀이 
설교 때는,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이제는 무슨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 맞나요? 목사님' 

제가 이렇게 답변을 드렸어요. 
'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 것은 
결국 우리는 약속을 붙잡는 게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에요.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니냐?
아뇨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느냐,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이건 다른 거예요. 

어린 자녀들이 부모가 맛있는 거, 아니면 선물을 가지고 집에 들어갈 때 
아버지 손에 들려 있는 선물을 바라보느냐, 
선물을 들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느냐? .. 이건 다른 거라고요.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하나님, 이게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꼭 회복시켜 주셔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선물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너무나 감사한 것이죠. 

'그러나 내가 원하는 그 선물을 주지 아니하신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 고백이 있는가요? 

그게 하박국의 고백이었어요. 

▲그래서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빌1:20~21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건 뭐 바울이니까 그렇게 고백한 거지, 저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죽어도, 제가 주를 위해 죽는다면 그건 제게 유익합니다!' 
여러분 그냥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대사로 이렇게 고백하실 수 있겠어요? 

바울이 일차로 로마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의 상황이 바로 빌립보서의 상황입니다. 
이제 사형언도가 내릴 수도 있고, 아니면 무죄판결이 나서 풀려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빌립보서를 쓴 거였어요. 

그래서 빌립보서에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당장 내가 사형장의 이슬로 처형이 되든지 
아니면 풀려나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면 내게 유익함이라!'

그런데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무조건 저를 살려 주셔야 됩니다. 무조건 무죄판결이 나게 해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바울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세상사람인 경우예요. 

'나는 그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오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게 중요하고, 
내가 살게 되던/ 죽게 되든 하나님은 선하시며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근데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빌1장의 앞부분에 상황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죠. 
자신의 감옥에 갇혔더니, 사도 바울이 정말 대단한 복음증거자였잖아요. 
당대의 본인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으니까요. 

근데 본인이 감옥에 갇히니까, 다른 사역자들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바울이 그런 상황을 이렇게 보니까 
내가 감옥에 잡혀서도 이렇게 복음이 더 흥하 게 되면 

'내가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면, 더 좋은 거네? 
그러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고, 복음의 역사가 더 흥왕게 될 수 있다면, 
주님,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영광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오늘 죽는 것이 하나님께 더 유익이 되고 영광이 된다면... 제가 기꺼이 죽겠습니다!' 
바울은 이 고백을 드린 거예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0
 
 
▲여러분은 이 고백이 있으십니까? 
믿는 사람에게 '오늘 하나님이 당신을 데려가신다고 해도, 그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기존의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질문해야 할 문제에요. 

근데 사람들이 수십 년을 교회를 다녔는데, 이런 기도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아니 목사님, 긍정적으로 표현하면서 기도를 하지 
왜 굳이 그렇게 부정적인 표현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까?' 

아니 그게 성경에 써있는 거잖아요! 
여러분 이것은, 내용상으로는 부정적인 기도 일지라도 
주권자 하나님을 긍정하는 절대적 긍정의 기도입니다. 

'내가 소원하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데.. 이루어져야 되는데..' 
여러분 그렇게 기도 하잖아요? 그럼 기도 할수록 불안이 커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갈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으면, 막 벌벌 떠는 거예요. 
'건강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사업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게 되면 어떻게 하지?'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고백할 것은 
건강이나 물질이나 지위나 명예가 ..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내가 믿는 분, 내가 속한 분, 나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오직 바칠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어떤 성도님이 두 번이나 
헌금과 십일조에 대한 질문을, 장문의 이메일로 하셨어요. 

그래서 설명을 드리다가 제 얘기를 했는데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드립니다. 
그러나 10 전체를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원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홀랑 전부 다 가져가실까요? 
홀랑 다 가져가시기도 하더라고요. 여러 번! 

그런데 더 넘치도록 채워 주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아~ 얘는 줘도 자기 혼자 고인물이 아니라, 흘러 보내는구나!' 

우리가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왜 축복의 도구들을 안 주시겠어요? 

사도바울이 '오늘 제가 죽는 것이 주께 영광이 된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하나님이 홀랑 생명을 가져가실까요?

물론 가져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 빌1장을 보니까 
'나는 지금 죽어서 주님 곁에 가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은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생각하면, 내가 육신으로 남아서 여러분 곁에 있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사람이었잖아요. 그래서 정확하게 예견했던 것 같아요. 
정말 하나님이 그의 생각에 동의하셔서, 그가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나게 하셨어요. 

로마서 15장이 나오듯이 그는 서바나 선교를 정말 하고 싶어 했잖아요. 
그래서 출옥 후에 스페인 선교도 할 수 있었고 
자기가 세웠던 초대교회들을 다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딤전, 디도, 빌레몬 썼던 시기)
그리고는 2차로 붙잡혀 들어가서, 그때 로마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다시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쪽인가요? 
'건강과 생명 물질과 지위를 하나님이 내게서 다 가져가신다 할지라도 
저는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기뻐하겠습니다..' 
이런 하박국의 기도를 여러분은 드리실 수 있나요? 

대답을 일주일 내내 고민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의 대답이 중요하지만,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왠줄 아세요? 

여러분이 뭐라고 대답하든 간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가져가실 수 있고 
그대로 두실 수도 있는 건..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라는 게, 팩트이기 때문이에요. 

단지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의 차이일 뿐이에요.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유하고 담대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 매어서,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것이에요. 

 

◑19절에 하박국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제 극단적인 무기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낼 수 있다.. 라고 노래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것이 나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 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에요. :19
물질이 나의 힘이 아니고, 어떤 소출이 나의 힘이 아니고 
내 인생의 수고의 열매, 보람, 업적.. 이게 내 힘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기 때문에 
내 발을 사슴의 발처럼 만드시고 높은 곳에서 뛰어다니게 하십니다.' 

갑자기 이 표현이 왜 나왔나요? 
유대인들은 이 표현이 뭔지를 너무나 잘 아는 거예요. 
유대 광야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유대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의 모래사막이 아니라 
뾰족뾰족한 돌들이 깔려 있는 황무지, 돌짝밭입니다. *나무가 없는 반사막

그런데 그곳에 아주 가파르고 높은 돌산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돌산 위를 사슴들이 산양들이 뛰어다니는 거예요. 

도저히 사람 같으면 아찔하게 보일 그곳을 사슴들이 뛰어다닌다고요. 
그래서 여러분 감이 안 오실 것 같아서, 유튜브에 아주 짧은 영상인데 
'암벽, 산양'이렇게 두 가지 키워드만 쳐도 몇 가지 아주 짧은 영상들이 나와요. 한번 보세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산양이나 사슴들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인생이 그럴 수 있냐는 거죠. 
절망하고 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십니다..' 라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절벽같은, 도저히 불가능한 그런 자리에서도 
기뻐 뛰고 비상할 수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떠한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압박하던 사람들이, 그들(하박국 같은 자들)을 두려워하고 의아하게 여기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살면 저럴 수 있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의 비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 하십니까? 그럼 이상한 거 잖아요. 

저와 여러분에게는 부활소망이 있고 천국소망이 있잖아요.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의 한계선을 넘어선 사람들이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에 일부러 잡혀 들어간 거 아시죠? 
그래서 저는 그걸 볼 때마다, 
무슨 조금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이 부족한 액션영화 보면 
주인공이 일부러 악당들에게 잡혀서 악당의 소굴에 들어가서 
막 그 소굴을 다 정리하잖아요. 

근데 사도 바울은, 그런 개연성이 부족한 액션 영화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상대랑 싸운 거에요. 로마 제국을 상대로! 
그들의 심장부에 일부러 잡혀 들어간 거예요. *황제에게 재판을 청함 
거기서 복음을 전하려고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복음의 깃발을 꽂고 복음을 전해서 
결국에는 제국이 뒤집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히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할렐루야!

그러니까 여러분, 안타까운 것은 
왜 크리스천인데, 내가 세상을 감당하려고 하는가요? 
왜 여러분이 세상을 감당하려고 하십니까? 

학업을, 사업을, 내가 맡고 있는 사역을.. 왜 내가 감당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내가 감당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치는거에요. 낙심하는 거에요.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이 나를 감당치 못할 사람으로 사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잖아요. 하나님의 레벨에서 살잖아요. 
그러면 세상이 나를 감당할 수 없는 게 정상인것이죠.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잖아요. 
그러면 사탄이 볼 때는요, 식은 죽 먹기에요. 

이런 거 있죠. 내가 사람을 기대고 있는데, 그 사람이 푹 쓰러지면 나도 같이 푹쓰러지는 거예요. 
내가 건물 안이 튼튼하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 있는데,
건물이 갑자기 붕괴하면 나도 같이 붕괴하는 거예요. 

내가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데 
물질이 갑자기 없어지면, 나도 무너지는 거예요. 
건강을 믿고 있었는데, 건강이 무너지면, 그러면 신앙도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세상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흔들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사탄도 나를 흔들어 놓을 수가 없어요. 
'주 여호와 만이 나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합3:19

그러니까 이 90도 절벽에 가까운 그런 낭떠러지를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그 사슴들 
중력의 법칙이 적용이 안 되는 것처럼 살잖아요.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정말 '하나님 한 분 만을 붙잡고 살겠습니다!' 이 고백이 클리어한 사람들은 
마치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사람들처럼 산다는 거예요. 

사슴이 절벽을 보면,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 뛰는 것처럼 
일반인들이 낭떠러지를 보면 아찔하겠지만, 절벽 타는 선수들이 보면 흥분되지 않겠어요? 
기쁘지 않겠어요? 도전의식이 생기지 않겠어요? 

여러분, 코로나로 시기가 어렵다고 해서 왜 낙심하고 절망하십니까? 
인생의 객관적인 고난 자체가 우리를 절망케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정직하게 얘기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오히려 고난조차 기뻐하게 돼 있어요.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 귀결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예고하고 있는 마지막 시나리오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순교는 실패가 아니라 승리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저를 한번 따라 해보세요. '하나님 만이 나의 힘이십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으시고 
'하나님만이 나의 힘 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 힘이십니다!'

이 고백이 내 마음 가운데 아직 온전하지 않다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을 채워주시고 회복하시고 넘치게 하여 주셨습니다. 

역경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완전히 반전시킬 수 있는 
하박국과 같은, 바울과 같은,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스더와 같은, 드보라와 같은 하나님의 딸들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