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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0장 38~42 무엇이 문제인가?
LNCK
2022. 3. 28. 10:37
◈무엇이 문제인가? 눅10:38~42 2022.02.11.출처
제가 캐나다로 오기 전에는, 마가의 다락방이란 기도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지내면서, 그때 제가 교육전도사였는데
호칭은 전도사인데 지금처럼 이렇게 정장을 입고 예배인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이런 시간은 별로 없었고요.
주로 대부분 시간들은, '안전제일' 이란 로고가 쓰여진 작업복 같은거 입고
맨날 나무하고, 집 짓고, 청소하고, 뭐 작업하고, 공사하고..
기도원의 거의 모든 공사들은 저희가 뛰어다녔던 것 같습니다.
산에서 나무 하면서 그렇게 지냈던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지금은 토론토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너무너무 귀한 성도님들과 함께 아주 행복하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로 말(설교)을 하는데, 성도님들은 삶을 사시더라고요.
제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 있어요. 몇 가지가 있는데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저희 교회는 박종민이라는 목사로 유명한 교회가 아니라
우리 거듭나고 변화된 성도들로 유명한 교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의 소원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를 드리는 건, 제가 일단 실력도 안되고, 일단 부족한 게 너무 많은 가운데
이제 성도님들을 보면서
정말 변화되고,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그런 성도들로 유명한 교회가 됐으면 좋겠다.. 라는
제 마음이 늘 있습니다.
지금 목회하는 것도 참 행복하고 너무 너무 좋은데요.
근데 제가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면서,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면
제가 어쩌면 그렇게 잠도 못 자고, 맨날 피곤하고, '안전 제일' 작업복만 입고 그렇게 뛰어다녔던
어쩌면 몸이 그렇게 힘들었던 '마가의 다락방'을
제 마음 한 켠에는 너무너무 그리워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말이 안 되거든요. 이상하죠.
한국의 그 기도원 산 속에서, 형제들과 전도사님(신학생)들과 함께 살며
함께 산에 가서 기도하고, 또 삽을 들고 종일 삽질도 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나무 하기(땔감 줍기)도 하고, 그렇게 예배하며 살아갔던 그때를
제 마음 한 켠에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요. 제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왜 고생했던 그 마가의 다락방을 그리워할까, 이유가 뭘까?'
왜냐하면 이건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돼요.
그때는요. 여러분, 진짜 좁은 공간에서 열댓명 전도사님들 함께 누우면
더 누울 데도 없어요. 비좁아서 그냥 잘 지나다닐 공간도 없는
그런 무슨 창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냈거든요.
처음에는 에어컨도 없었거든요. 여름에는 모기들과 사투를 벌이고
산모기가 얼마나 센지, 옷도 뚫습니다. 얼마나 무서워요.
겨울에는 전기가 이렇게 차단기가 자꾸 내려가요. 그러면 가끔 바닥에 온방 판넬이 꺼지거든요.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살았습니다. 그냥 감기에 걸리고요.
심지어 같이 살았던 한 전도사님이, 지금 목사님 되셨지만, 기관지가 너무 안 좋아가지고 병원에 갔어요.
그런데 의사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혹시 무슨 창고 같은데 사시냐고?'
흠짓 놀라가지고 아니라고 대답을 했다는데
'아무리 봐도 환기도 잘 안 되는 창고 같은 데서 사시는 거 아니냐?'고..
의사가 아는 거예요.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전도사인데 이렇게 정장을 입고 있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거의 맨날 작업복만 입고 다니니까
'내가 전도사인지 용역인지..' 좀 스스로 헷갈릴 때가 꽤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제 모여서 회의를 하고 결론을 내린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자원한 손해선교단이다' *순회선교단에 빗대어
크게 보면 공동체 가운데 누군가 손해를 봐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 해야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누가 한다고요?
'우리가 하자! 손해보거나 망할 것 같은 일이 있으면 우리가 하자!
그리고 진짜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든지/ 죽든지 ... 둘 중에 하나 결론 내자!'
그리고 맨날 이제 작업복 입고, 별로 전도사같지도 않고 무시도 많이 당했어요.
근데 하루는 그래서 제가 한번 거기 동료 청년 전도사님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공동체에 누군가는 해야 되는, 힘들어하고 하기 싫은 일이 있으면
우리가 제일 먼저 달려가서 하자.
우리 개인의 사역이 늦춰지고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공동체의 꼭 필요한 일,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이 있으면
먼저 손해보면서 달려가자!' (이게 십자가, 썩어지는 밀알이니까)
그러자 어떤 전도사님들은 제 말에 동의를 해 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주님을 위해 손해보려고 여기 모인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한참 삽질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먼저를 털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예배를 인도하러 예배실로 올라갔습니다.
▲하루는 박목사님께서 저희들 이렇게 다 있는데
'야~ 주의 종은 말이야, 밤이 맞도록 기도해야 돼요.'
그럼 또 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밤새도록 우리가 막 기도를 해요.
또 하루는 목사님이 '주의 종은 말이야 새벽을 깨워야 돼, 누구보다 예배당에 일찍 나와서
누구보다 늦게까지 남아서 기도해야 된다!'
그러면 새벽에 기도를 해야 되는데, 그때 이런 의문이 들었죠.
'그럼 잠은 도대체 언제 자나?'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또 새벽에 일찍 일어나니까요..
저희가 이제 공동체 규칙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뭐 새벽기도나 밤에 산기도를 한 번 빠지면 하루 금식이에요.
저희가 20 대의 젊은 나이에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예외는 없었어요. 때로는 너무 힘들어 보이면
(리더인) 제가 그 형제와 같이 금식하는 한이 있더라도 예외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원칙이 무너지면 공동체가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토론토에서 그 때의 고생했던 삶을, 제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잖아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요. 근데 왜 그리울까요?
여러분 저는 지금 여름에 모기와 사투를 버리지 않아요.
렌트비 내고 살지만 제 방도 있어요.
심지어 지금 아내가 밥도 해 줍니다. 지금은 배고프지도 않아요.
잠도 그때보다 훨씬 많이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원 생활이 지금 왜 그립냐고요?
여러분 왜냐하면, 고생스러웠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지낼 때 영적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에요.
다르게 표현해보면, 제 온전한 영적인 회복들이 그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영적인 시선이, 온전히 회복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박목사님이 거기에 살 때,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야 너 지금 되게 힘든 것 같지?
너는 지금 막 몸이 너무 지치고, 지금 이 시간은 도대체 뭔가?
내가 주의 종이 되려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지?
두고 봐라, 지금 이 시간을 가장 그리워하는 시간이 될 거다!
지금 시간이, 주님 앞에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될 거다!'
그때는 목사님의 이 말이, 제게 잘 이해가 안 됐어요. 몰랐어요.
지금 되돌아보면 조금은 알겠어요.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가 가장 우리 예수님께, 나의 시선이 온전히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던 때같아요.
왜냐하면 거기는요. 거기 살면 거룩해질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 성경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살면, 프라이버시가 없어요. 개인 생활이 없습니다.
그냥 같이 먹고, 같이 노동하고, 같이 일하고, 같이 청소하고...
또 저희가 외치는 여러가지 구호들이 있었거든요.
제가 "노동은!"
그러면 다같이 "기도다!" 하고 외치면서 나무를 했습니다.
그렇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 산에 올라가서 산기도 끝나면 저희가 외치는 구호가 뭐였냐면
제가 "주를 위해!" 하고 선창하면,
그러면 다 같이 "젊음을!" 하고 후창을 해요.
또 "주를 위해!"
다같이 "충성을!"
또 "주를 위해"
"생명을 드리자!"
근데 거기 살면 딴짓하는 게 없어요. 할 수도 없고요.
우리의 시선이 늘 예수님께..
잠시 머물다 가는 이 땅의 어떤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고정이 돼서 살아가더라고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이 본문을 이렇게 접근합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일을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앞에서 바쁜 모든 일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분주하게 일하지 말고,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그렇게 이 말씀을 본다면 이런 의문이 들어요.
'그럼 분주하게 일하는 것은 다 속된 일이고
주님 앞에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만 거룩한 일일까?'
예수님은 이런 뜻을 정말 전달하고자 하시는 걸까?
여러분 만약 그렇다면, 이 사건 이후에 요12장에 가시면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깨뜨려 주님 발에 붓는 아주 아름다운 사건이 나옵니다.
근데 그때 마르다가 뭐 하고 있을까요?
요12:2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 일을 하고..'
마르다는 여기서도 여전히 부엌 일을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마르다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말씀 듣는 일도 거룩한 일이고, 봉사하는 일도 거룩한 일이죠.
우선 순위의 문제이고, 마음 가짐과 자세의 문제이죠.
영적인 일을 우선하면서
또한 부엌 일이나 다른 봉사를, 주님 섬기듯이 한다면.. 그것도 거룩한 일이 맞습니다.
교회 카페에서 커피를 끓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설교하는 설교자도, 딴 생각을 하면서 설교를 전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영적 컨디션이 나쁠 때가 있잖아요. 그럼 설교만 하면 무조건 다 거룩한 일인가요?
만약 제가 이웃 교회에 초청 받아 가서, 그 성도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오기 위해 설교를 한다면,
그건 거룩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일입니다.
마르다처럼 교회에서 식당봉사를 하더라도,
영적인 일을 우선하면서, 주님께 섬기는 마음으로 식당 봉사를 하면,
그 일도 얼마든지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차 봉사도 마찬가지이고요.
저희가 선교지에 가서 음식이나 이런 것도 나누거든요.
그런 행함도 얼마든지 하나님 영광받으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여러분,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어마어마하게 큰 사역과 일도
남들보다 더 잘해야지 하는 비교의식으로 하면..
또는 나 자신이나 우리 교회를 드러내기 위한 동기로 하면... 그건 속된 일되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별 볼일 없는 일이라도,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요, 주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뭘까요? 마음이고 시선입니다.
마르다의 문제는요. 예수님만 향하던 시선이, 이제 누가 들어온 거에요?
마리아가 들어온 거예요. (예수님이 이것을 책망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맛있는 음식을 해드려야 겠다는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출발된 시선이
이제는 마리아를 향하면서... (비교, 시샘하면서) 속된 일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 시선이 옮겨지면서부터.. 거룩한 일이 속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여러분,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내립니까? 예수님께 시키잖아요.
'마리아한테, 예수님, 나 좀 도와주라고 하세요!'
이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예요? '한 가지만 해라!' 무슨 말일까요?
'너의 시선을 다른 곳에 두지 말라, 너의 초점을 흐리지 마라'
'나를 향한 네 마음을, 다른 곳에 두지 말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죠?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그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마음이에요. 사랑하는 마음!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하느냐? 입니다.
내 시선이 누구를 향하느냐가
속된 일과, 하나님 영광받으시는 거룩한 일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어떤 사역과 봉사를 하고 계시든지요..
여러분 제가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곳에 있으면서
때로는 화장실 청소를 막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어요.
거기를 막 청소하면서, 아무리 청소해도 또 더럽혀지거든요.
누구 한명만 왔다 가면 또 더럽혀져요. 또 청소하면서
'이게 내 마음이야, 내 마음을 닦아야지!
주님, 이 화장실 발자국같은 내 마음, 주님 깨끗하게 깨끗하게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해주세요.
덮어주세요. 깨끗하게 만들어 주세요..'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요.
때로는요. 나무를 하고 밤새 정화조를 삽질해서 묻으면서도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다.. 라는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건, 이런 일들이 어떻게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느냐?
(전도사로서 설교하는 일만 거룩한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설교도 거룩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나의 시선이 온전히 주임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의 시선이 영원한 가치 되시는 예수님께로 고정되니까
일도.. 거룩한 일이 되더라고요.
여러분, 혹시 우리 시선이
예수님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마리아가 보이지 않으세요?
영원한 가치되신 예수님이 아니라
옆에 여러가지 형태의 잠시 있다 없어질 '마리아'들이
내 눈에 더 들어오진 않으십니까?
분명히 시작은요. 예수님밖에 안 보였어요. 예수님때문에 기뻤어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그분께
'내 남은 달란트라도 그것으로 맛있는 음식이라도 해드려야겠다.
주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다.' 이렇게 나의 시선이 온전히 예수님밖에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에 보니까
세상의 수많은 '마리아들'에게 나의 시선을,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여러분, 처음 주님 만나고 어떠셨나요? 주님 밖에 보이지 않았잖아요.
다른 게 다 필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자식 교육앞에 무너지고 예수님도 없는 거예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 이 문제.. 이거 해결하는 데 앞에서는
예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요즘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뭐 집사, 권사, 장로.. 그 모든 것, 그 어떤 종교, 어떤 것들도 다 무너뜨리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대요.
'대학교'라고! *기독교, 불교 하듯이 대학교
여러분 제가 살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에도, 원래 학군이라는 게 없대요.
그러니까 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나, 저 초등학교에 들어가나 똑같았대요.
근데 요즘에 뭐가 생겼을까요?
한국 부모와 중국 부모가 많아지면서, 토론토에도 학군 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집사, 권사, 장로님 이라고 해도
거짓말로 주소지 옮겨서라도 보내시더라고요. 자녀교육 앞에서는 다 무너지더라고요.
시선이 예수님께 있는게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다른 것들,
마리아에게, 그 옆에 있는 세상을 보더라고요.
여러분 저는, 이 시대의 교회들의 문제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들을 가보십시오. 조직하고 관리하는 사람은 많지만
영적으로 고뇌하는 사람은 없어요.
내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로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요.
찬양하는 사람, 예배드리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 앞에 씨름하면서 매달리는 사람이 없어요.
교인들은 많지만
몸부림치는 성도는 거의 없습니다.
두려움은 넘쳐나지만, 눈물은 메말랐습니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은 많지만, 경건의 열정에 불타는 사람은 없어요.
교회 일에 이게 문제야, 저게 문제야.. 하고 훈수 드는 사람은 널렸지만
정말 그것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나를 드려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비난하고 싸우는 사람은 많지만, 영적 싸움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갈보리의 고난과 사랑을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그리스의 십자가가 감동도 감격도 되지 않는데,
아무런 위기감이 없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보고도 전혀 감격하지 않는데도
이 세상의 호의호식, 세상의 편안함과 미소와 안식을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이 교회의 시선이 예수님이 아니고
이 땅의 호의호식(좋은 옷 입고 잘 먹음)에 시선이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세요? 주님의 시선하고
우리의 시선이 너무 다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은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의 시선은 호산나 호산나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입성 이후 맞이하게 될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근데 제자들의 시선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그 제자들의 시선은, 예수님이 로마를 쳐부수시고
그 옆에서 한 자리 차지할 생각만 하더라고요.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죽을 생각을 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하며 살 생각만 합니다.
주님의 시선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할 십자가의 원대한 꿈을 향하시는데
사람들은, 온통 이 땅의 부귀영화만 갈망합니다.
예수님말고 다른 것만 쳐다보는 거예요.
본문으로치면, 마리아만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면요. 예수님하고 같이 있어도 '속된'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 로만 우리의 시선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 중에 한 분이, 이분은 원래 성격이 대단한 분이셨대요.
그래서 같이 일하던 분들이 혀를 내둘렀대요.
근데 이분을 제가 어떻게 알게 됐냐면
이분이 뇌암에 걸리시게 되고, 좀 많이 아프셨어요.
그래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아프게 돼서, 남편이 이렇게 업고 다니셨거든요.
그때 제가 이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처음에 그 집에 기도를 해드린다고 갔는데
남편 분이 저희가 왔다고 되게 싫어하셨거든요.
어쨌든 기도도 해드리고, 복음도 전하고, 계속 이렇게 말씀 전하고 예배드리고 하다가
이분이 예수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회개의 은혜가 임하고, 예배에 나오시면
그냥 아무튼 오시자마자 끝날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계속 울고만 계셨어요.
지나온 삶들을 회개하고..
여러분 그렇게 성격이 막 대단했다고 소문났던 분이
아휴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온순한 양이 됐는지...
세상에 그렇게 온순한 양이 없어요.
한번 이분하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대접하고 싶으시다는 거예요.
근데 이분들이 좀 어려우셨거든요. 제가 되게 부담스러웠어요.
근데 꼭 목사님께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래서 식당으로 가서 이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목사님, 저는 요즘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옛날에는 아침에 눈만 뜨면 그냥 모든 게 다 짜증나고, 힘들었는데..
남편 얼굴만 봐도 꼴보기가 싫었는데..
그냥 짜증나는 일도 많고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아프고 몸은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 주님을 만나니까, 내가 어떤 자인지 보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니까
모든 게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뜨면요. 그냥 그저 감사하대요.
남편을 보면, 그냥 밥 먹는 것 봐도 그렇게 예뻐 보이고
그냥 너무 너무 행복하고 너무 너무 감사하다고 그 얘기를 하시는데
제가 그 얘길 듣는데 너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예요.
세상 눈으로 볼 때, 이분은 행복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세상 눈으로 보면, 몸은 병들었죠. 죽어가죠. 가난하죠. 가신 것도 없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이 분 표정을 보면, 진짜 행복함이 얼굴에서 흘러 나오더라고요.
그 숨길 수 없는 행복한 표정 있잖아요. 행복이 묻어 나오더라고요.
그 얼굴 보고 있으니까 제가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예요.
'야~ 저 분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예수 믿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고
정말 행복하다..' 라는 것이 느껴 졌습니다.
▲그때 제가 깨닫게 된 게 있는데 뭐냐하면
예수님께 우리 시선이 온전히 향하면
천국을 살아가게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나 그 시선이 예수님께 멀어져서
다른 것들만 보이고, 마리아만 보고 있으면
지옥이 된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어디에 살건, 무엇을 먹던, 무엇을 타던 관계없이
천국처럼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미워하면요.. 아무리 좋은 집에서라도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차를 타도
지옥처럼 불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렇죠.
제가 이 분을 보면서 생각했던 말씀이 뭐였냐면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러분 마르다의 진짜 문제는요. 자기를 보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어느새 예수님을 향하던 시선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 하는 거에요? 남 탓만 하는 거예요. 마리아 탓만 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혹시 오늘 예배를 드리시면서도
'기도 하지 않는 저 남편이 문제고,
말씀도 잘 안 읽고 속썩이고 사고 치는 저 자식놈이 문제고..'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내가 그것만 보고 있다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그들만 보고 있는 내 시선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시선은 어느새 잃어버리고
그런 나를 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문제일 수도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님은 결국 천국의 가시게 되었습니다.
암이 다른데 또 전이 돼서, 병원에서 그러는데
이제 더 약도 안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너무 놀라운 거는요. 기적적으로 통증이 없으시다는 거예요.
'아~ 우리 주님이 지켜주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여러분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상황이 닥쳤는데도
얼굴에는 해같이 빛이 나더라고요.
저한테 '목사님, 잠시 후에 만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제가 자꾸 눈물이 나는 거예요.
목사보다 성도가 믿음이 훨씬 좋더라고요.
'목사님, 왜 우시냐고.. 우리가 잠시 후 만날 건데..'
'목사님, 제가 아프고나서 목사님을 만나서 너무 감사해요.
교회를 만나서 너무 감사해요.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어서 너무 감사해요.
천국 가게 됐으니까 너무 감사해요!'
여러분, 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보았습니다.
어떤 승리일까요? 죽음을 뛰어넘는 승리이에요.
이 분의 뇌암? 불행일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축복이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왜요? 내가 아팠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 만나지 않았냐고...
내가 아팠기 때문에 교회와 목사님을 만나고
우리 주님 만나서, 회개하고 이제 예수님 믿고 천국 가게 되지 않았냐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분의 시선은 늘 예수님께 있더라고요. 가난하고 몸도 아픈데
행복이 흘러 나오더라고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은데,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를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도 관심 없으셨어요.
영혼을 구원을 위한 십자가에만 그의 시선을 두셨습니다.
근데 여러분 제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목회를 하면서 제 시선이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기, 칭찬, 관심.. 그런 거 보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제가 지금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풍요로워졌어요.
근데 여러분 제 시선이 자꾸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향해서 많이 가더라고요.
예수님보다 다른 것만 찾고, 보고,
하나님 나라보다 이 땅이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게 솔직한 제 고백입니다.
제가 안 그러고 싶은데요. 지금 나름대로 싸운다고 하는데
교회가 좀 부흥하고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그것 때문에 막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어떤 분이 오셔서 '목사님 설교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면
제가 '아유 아닙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아닌 척 하면서도 제 속에서는 그것 때문에 막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제 시선이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들 감동시키려는 설교를 하려고 하더라고요.
제 시선이 예수님이 아니고요. 점점 사람들만 보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만 쳐다보는 거예요.
여러분 혹시 이 가운데, 시선이 예수님말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주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역대하16:7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신데요.
그러니까 주님이 지금 사람을 찾고 계세요.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시나요?
전심으로 그 마음과 시선을 주님께 향하는 자를요.
그 마음의 시선을 전심으로 주님께 향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십니다.
여러분이 시간 우리가 같이 결단하며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는데요.
이 시간 우리가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나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시선이 흐려져서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가 보이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이 아니라, 잠시 있다 없어질 것에 자꾸 자꾸 눈길이 갑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이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만 나의 시선이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어느새 남편이 문제고, 자식이 문제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문제고, 저 마리아가 문제라고...
그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옮겨진 내 시선이 문제입니다.
주님 나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예수님께만 온전히 나의 시선이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