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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3:1~16 주의 일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

LNCK 2022. 3. 29. 16:44

 

◈주의 일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       합3:1~16       021.06.26.출처
*'쾌락주의 관점 (아래에 네모 박스)은 꼭 보세요! 

 

오늘은 하박국 강해 네 번째 시간입니다. 
드디어 하박국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내용입니다. 

◑1. 첫번째 부분은 <고난의 시대에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입니다.  합3:1~2

합3:1 '이것은 시기오놋 형식에 맞춘 예언자 하박국의 기도입니다.
:2 오 여호와여, 나는 주의 명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을 이 시대에 다시 새롭게 하셔서 
이 시대에 알려지게 하소서. 진노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소서'  (우리말 성경)

1절의 '시기오놋'은 시편에 나오는 '식가욘'의 복수형인데, 
'감정적으로 들뜬' 이런 뜻입니다. 곡조의 이름, 한 형태입니다. 
이런 곡조의 맞춰서 그가 감정적으로 고양된 찬양과 기도를 올린 것이죠. 

하박국은 두 번의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두 번의 대답을 들었고 
그리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시기오놋 형식으로) 찬양시, 기도시를 올려드린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 본문을 보면서, 하박국은 
성전에서 전문적으로 찬양사역을 하던 레위인일 것이다... 이렇게 추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였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과 악한 세상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느냐?' 
이 문제에 관해서 굉장히 고통스럽게 고민을 했던 것이죠. 

2절에 '나는 주의 명성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명성이 무엇인가요? '여호와께서 역사 가운데 행하신 일'입니다. :2

애굽의 바로를 징계하시고 홍해를 가르치고 그들을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십계명을 주시고 
또 요단강을 가르시고, 가난한 땅을 정복하게 해주시고 
사사들을 통해서 주변 민족들에게 승리하게 하신 
이 모든 과거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그리고 그 일들로 인해서 열방이 '정말 이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인정하게 된 
그 하나님의 명성을 의미합니다. 

자 이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도 하박국과 똑같은 현상을, 인생에서 경험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갑자기 좁아지는 때가 있는 거예요. 
합 1장과 2장에서는 그의 시야가 좁았던 것이죠. 

마치 탁 트인 들판에서는 주변 환경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죠. 
그런데 나무가 울창한 미로 속을 지날 때는, 내 주위 전체가 보이지 않고 일부분만 보이죠. 

그러다가 그 미로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면, 정말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좁아진 시야로 인해서 '여기에는 더 이상 길이 없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이 역사 경영을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된다..' 이런 원망이 나오게 되는 거죠.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미로의 막다른 골목에서 산 정상으로 들어올리시면 
드디어 시야의 전체가 보이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왔던 길, 그리고 내가 앞으로 갈 길과, 출구까지 다 보이는 거예요. 
그때 탁 트인 시야를 가짐으로 인해서, 그동안 가졌던 답답한 마음들이 일순간에 다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지만 
교만한 바벨론을 다시 또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사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실 것이다!' 

하박국은 이런 미래사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지금은 너무나 좁게 보고 있다가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미래사가 보이니까 
그가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역사, 과거사도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합3:3~15 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던 과거사에 대한 찬양입니다. 
자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명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겸비하게 된 거죠. 

그전에는 '이런 강심장이 있나?'할 정도로, 하박국이 하나님께 막 대들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 미래에도 펼쳐질 일들,
그리고 과거에도 이미 펼치셨던 하나님의 구원사를 기억해보니까 
하박국은 갑자기 겸손해진 것이죠. 그리고는 두 가지 기도를 했습니다. 

첫번째는 '주의 일을 이 시대에 다시 새롭게 하소서!'  :2
두 번째는 '진노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소서!' 2b절

저는 본문, 이 하박국의 기도를 딱 읽으면서 
하박국의 답답했던 심령과 기도가.. 순간 딱 터지게 되었구나, 해결되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몇 날 며칠을 기도해도, 몇 달을 기도해도 
계속 영원히 답답할 때가 있어요. 

나는 땅에서만 외치고, 하나님은 천상에 계시는데 
응답이 없어진 것 같은... 

그런 하나님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기도가 뻥 뚫리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의 보좌앞으로 나의 기도가 확 달려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이 하박국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이심전심이 되는 거예요. 
자 이 두 가지 기도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1. 첫번째는 '주의 일을 이 시대에 다시 새롭게 하소서' 3:2  

개역성경에는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부흥'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그런데 두 가지 표현,
-다시 새롭게 한다. 
-부흥시킨다. 
영어단어로는 revive 라는 단어를 썼는데 다. 똑같은 개념입니다. 

여러분 '부흥'이라는 것은  (다시 '부', 흥할 '흥')
과거에 흥했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해요. 

오늘날 한국 교회는 부흥이 무엇인지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자 
마치 과거에  하나님이 일으키셨던 부흥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은 상태가 되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대가 다시금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케 하여 주옵소서! 
한국 교회가 다시금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왜냐하면 우리보다 부흥을 더욱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온전히 찬양을 받으시고 
또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동역의 관계를 이루는 것, 
이게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온 세상 가운데 알려지는 것, 
이것(부흥)을 너무나도 원하는데 

하박국이 그 시대 상을 보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이
마치 그것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것이 
하박국은 마음이 어려웠던 거죠. 

네, 우리의 마음도 이 시대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또 자신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데 
이게 오히려 역방향으로 가는 것 같으면 
우리 영혼이 답답한 거예요. 답답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 '주의 의를 다시금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2. 두 번째는 '진노가운데서도 자비를 기억하소서'  :2b
 
이 표현이 참 놀랍죠. 진노 와 자비에 동그라미 치시겠어요? 
하나님은 공의로,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죠. 

전쟁과 재난과 전염병과 고통을 기뻐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부모님에게 책망을 듣는 것을, 기뻐할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회복과 구원과 성장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라면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인류역사 라는 거시적인 측면,
아니면 여러분 각 개인의 인생이라는 미시적인 측면,
이 두 가지에서 

고난과 고통의 문제가 우리에게 찾아오면 
일단 사람들은 '악!' 소리가 나게 돼 있어요. 

현실이 힘든 건 사실 힘든거거든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게 있다고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여러분 인류사와 개인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관점의 오류를 주의하셔야 됩니다. 

제가 오늘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쾌락주의적 관점입니다. 

우리가 너무 거기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쾌락주의 관점이란 이런 거예요. 고난을 악이라고 해석하는 거에요.
 
'쾌락'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약간 좀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데 
'희락'이라고 고치셔도 돼요. pleasure 입니다.

그냥 인생이 즐겁고 행복한 것, 이 쾌락을 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거는 쾌락주의적 관점일 뿐이에요. 

고난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쾌락 자체가 선도 아닙니다. 
그것은 좋고/ 싫음의 기준일 뿐인 것이죠. 선/ 악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생에는 또 다른 기준이 있어요. 
그것은 옳고/ 그름, 또는 선 / 악의 기준이에요. 

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라는 것은 
'구시대적인 관점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철학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절대주의적 관점'인 거예요. 

절대자가 계시고, 절대 기준이 있고,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을 쾌락주의 관점과 믹스해서 표현한다면 이런 거예요. 

진리는 불쾌할지라도 진리인 것이에요. 옳은 것이에요. 
거짓은 유쾌할지라도 그것은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미국의 한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는 사십 대의 백인 남성이 
대학 캠퍼스에 가서 현장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대학생을 붙잡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40대 백인 남성이, 대학생에게 마이크를 딱 들이대면서 
'제가 10 대 중국 소녀라고 스스로 주장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아~ 뭐 그렇게 생각해서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게 옳은 것이죠.' That is true.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냐? 그건 틀린 이야기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는데 
오늘날은 '쾌락주의적 관점'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유쾌하다면, 거짓이 진리로 둔갑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시대적인 핫이슈들을 
왜 이런 관점으로 자꾸 접근을 하는가? 

정치인도 그렇고, 대중도 그렇고.. 왜 이런 접근을 하는가? 
우리 전체가 쾌락주의적 관점으로 세뇌가 돼 있기 때문이에요. 

또 한 대학의 무신론 클럽의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 거예요. 
변증가가 '여기 테이블에 아기를 올려놓고, 아기의 손과 발 사지를 자른다면, 
당신은 뭐라고 이야기 하겠습니까?' 

'글쎄요. 그것을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의 무신론을 부인하는 게 되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하는 거죠)

그걸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쾌한 일은 아니죠.' 
이게 실제 대답이었어요.  
*무신론은 신이 없으므로, 신의 존재를 안 믿기에, 신이 정한 도덕적 절대 기준을 믿지 않음


'당신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이의 소중한 생명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라고 얘기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오늘날의 극단적 무신론은, 절대자 라는 존재를 부인하고 
절대 진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지켜야 되는 도덕률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겁니다. 

철저하게 유물론적 관점에 치우치다 보니까 
인생의 기준으로 남은 것은, 유쾌함과 불쾌함 의 기준만 남은 거에요. 

유쾌하면 선이고 
불쾌하면 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생의 소중한 것들 가운데 고난이 없는 것이 없어요. 
학생이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청운의 꿈을 꾸며 
그 일을 위해서 매진하는 것... 여러분 힘들지만 소중한 것 아닙니까! 

결혼해서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정말 바른 사람으로 양육해 가는 것,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이 어찌 아니 소중한 일입니까! 

죄인들이 모이면 늘 싸우고 분열되게 돼 있어요. 문제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일...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이 일만큼 소중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저에게 '왜 그렇게 고생을 하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죠. 

인생의 과정과 역사의 과정 가운데 고난의 길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인 선을 향해서 가는 길은 
불쾌한 길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것은 악한 길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악한 분도 아니시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시려는 분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이런 힘든 과정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분이세요. 

자녀들을, 이런 힘든 과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기꺼이 내어주신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야 말로, 
가장 궁극적인 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가장 큰 고통을 감내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쾌락주의적 관점으로 만약에 세상을 해석한다면 
하나님 만큼 어리석은 존재는 없는 거예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인 거예요...  



'진노가운데 자비를 기억하소서' 합3:2
 
역사의 굴곡을 통해, 인생의 고난을 통해 
결국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결국에는 구원을 완성하실 하나님, 
결국 이 천로역정의 끝에, 그 구원의 가장 찬란한 영광으로, 
천국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자 두번째 <역사를 회고하고 미래를 기다리다>

합3:3~15절까지는 역사 회고의 내용이고요. 
16절은 미래를 기대하는 내용입니다. 

합3:3~4 '하나님께서는 데만에서 오셨으며
거룩하신 분은 바란 산에서 오셨습니다. (셀라)
그분의 하늘을 덮고 
땅에는 그분께 대한 찬송이 가득 합니다. 

그분의 광채가 햇빛과 같았고, 두 줄기의 빛줄기가 그분의 손에서 번쩍이니 
그 안에 그분의 권능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박국이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예요. 

긴 내용이고, 시적인 표현들이라서 좀 복잡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3절에 보면, '에돔 남부에 있는 데만에서 하나님이 오셨고 
거룩하신 분께서 바란 산 (시나이 반도의 동쪽에 있는 산)에서 오셨다.' 

그래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은 시나이 반도 서쪽에서 이루어졌으니까 
하나님이 마침 동쪽에서 마주 오시는 것 같은, 마중 나오시는 것 같은 표현이에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 하늘을 덮는다.' 

4절에는 '그분의 광채가 햇빛과 같았고, 두 줄기의 빛줄기가 그의 손에서 번쩍인다' 
이 구절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시내산에서 사십 일 동안 머물렀던 모세에게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손수 쓰셔서 주셨잖아요. 
그리고 그 영광의 광채가 모세의 얼굴까지 비춰졌었던 것이죠. 

3:5~7절 '재앙이 그분 앞서서 나아갔고 전염병이 그분의 뒤를 따라 나아갑니다. 
그분께서 멈춰 땅을 측량하시며, 그분께서 바라보니 나라들이 떱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산들이 무너지고, 오랜 세월을 거친 언덕들이 무너져버립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들만이 영원합니다. 

내가 곤경에 처한 구산의 천막들을 보았고 
미디안 땅의 휘장들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5절에 재앙에 대한 표현이 나왔죠.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가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거역하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죠. 

그리고 6절에 보면, '땅을 측량하시자 나라들이 떤다' 
성경이 일관되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라와 민족들에게 땅의 경계를 정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측량한다'는 것은, 땅을 재분배 하시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열방이 두려워서 떤다는 거예요. 

7절 '곤경에 처한 구산의 천막들, 미디안 땅의 휘장들이 떨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땅을 다 측량하셨다는 것은 
사사 시대에 첫번째 사사 옷니엘이 
메소포타미아의 왕이었던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쳤죠. 바로 그 구산입니다. 

그래서 구산의 천막들, 그리고 미디안 땅의 휘장들, 
기드온 사사가 미디안 사람들을 쳤죠. 

그래서 하나님이 결국에는 그 땅을 측량하시고, 
땅을 재분배, 재조정을 해주시게 되는 것을 
그들 이방이 알고, 예상하고 두려워했다.. 라는 것입니다. 

3:8~10 '주께서 주의 말들을 타시고 주의 승리의 전차를 타시니 
오 여호와여, 주께서 시내 들에게 화를 내셨습니까 
아니면 강들에게 진노하신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바다에 분노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 승리의 전차를 타셨다'
바로와 애굽의 전차 부대가 그들을 쫓아올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잖아요. 
마치 그 장면, 이스라엘은 가만히 서 있고, 하나님이 대장되셔서 
전차를 타고 나가셔서 맞서 싸우시는.. 

그리고 홍해 바다를 꾸짖으셔서, 그 흉용하는 바다가 갈라지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3:9 '주께서 활을 꺼내서 많은 화살들을 시위에 놓고 당기셨습니다. 
주께서 강으로 땅을 쪼개셨습니다. 

:10 '산들이 주를 보고 뒤틀리고 억수 같은 물이 휩쓸며 내려갑니다. 
깊은 바다가 소리를 높이고, 물줄기는 힘 있게 높이 치솟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널 때, 깊은 바닷물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물벽이 되는 것을 본 거잖아요. 이게 10절의 표현입니다. 

3:11~12 '빛처럼 나는 주의 화살과 번쩍이는 주의 창 때문에 (전투 중이죠)
해와 달이 하늘에서 멈춰버립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화친 조약을 맺었는데 
그 배신한 기브온을 치러, 아모리 5 족속의 왕이 공격을 했죠. 

그래서 아모리 사람들과 싸울 때, 
'태양아 기브온 골짜기 위에 머물러라' 라고 여호수아가 선포합니다. 

그랬더니 그 적들을 치기까지, 해와 달이 중천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하나님이 베푸셨죠. 

3:13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주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셨습니다. 
주께서 악한 사람의 집 우두머리를 쳐부수셨고 
발에서부터 머리까지 발가벗기셨습니다. (셀라)'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들을, 승리의 역사들을 다 행하셨다는 거예요. 

3:14~15 '그들이 몰래 숨어있는 비참한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우리를 흩어버리려고 폭풍처럼 밀려올 때 
주께서 그들 용사의 우두머리를 주의 화살로 꿰뚫으셨습니다. 
주께서는 말을 타시고 바다를 짓밟으시고 물을 크게 휘저으십니다.' 

출애굽할 때 히브리민족은 사실 비참한 노예 신세였잖아요. 

그래서 14절에 '비참한 우리' 라고 했습니다.

광야 사십년을 통과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들은 초라하고 비참한 행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비참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인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애굽을 물리치시고, 광야 사십년을 동행하시고, 
요단 동편의 민족들을 다 승리케 하시고 
요단 서쪽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가난한 땅을 다 정복하게 하셨잖아요.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과거사를 돌이켜 보면서 
오늘의 평안을 회복하고, 미래의 소망을 되찾게 된 거예요. 

자 그러면 과거사를 이렇게 묵상하면서 
어떻게 그의 마음 가운데 이런 회복이 일어났는가? 
두 가지로 나누고 싶습니다. 

▲1. 어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오늘과 내일도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마치 받지 못할까봐, 내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간구하기 이전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것이냐, grace of God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구할 것이냐 gracious God
이건 다른 거예요. 

매번 내 인생에 어려움과 결핍을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마치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걱정하면서 기도를 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까지 내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이제 앞으로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 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할렐루야! 이건 다른 문제인 거예요.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은사와 콜링에 대해서 메시지를 할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지만 
사실 롬11:29절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냐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정말 주옥같은 메시지를 쫙 풀어가다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내 동족은 구원의 그 장에서 떠나 있잖아요. 
그러니까 바울은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러나' 라는 문맥안에서 이 표현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은사.. 은사는 다른 말로 선물이죠. 

하나님이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들이 있고 
그 선물에는 하나님의 콜링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어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오늘과 내일도 은혜를 베푸실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거죠.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조상들을 허락하셨고 
율법을 주셨고, 기록된 성경과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 오게 하셨잖아요. 

이런 선물들을 과거에 주신 하나님,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장차 반드시 유대인들에게 그 은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어요. 

자기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소망으로 얘기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향, 하나님의 기질을 말한 거예요.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해서 
다 멸망에 이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화가 나뭇잎이 푸르러지고 회복되는 그날, 
주께서 오실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이죠. 

이게 인류 역사의 구원사의 하나님의 큰 그림이에요. 
그게 로마서 9, 10, 11장에 기록돼 있는 것이죠.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경험하는 중일지라도 
절대로 여러분의 영적인 정체성을 빼앗기시면 안돼요. 

하나님의 징계는, 사실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싸인이잖아요.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속여서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어, 하나님이 너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어! 
하나님은 선하지 않아, 하나님의 인생 경영과 역사 경영은 실패한 거야! 
더 이상 기대하지 마, 더 이상 기도하지 마!' 
이런 거짓말들을 계속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놓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인류가 한번 선악과를 따 먹었지, 
우리가 또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어 줄 수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부르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베푸신 은혜와 콜링을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이십니다.

 

▲2. 어떻게 보면 이 두 번째는 첫번째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변개치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거에요.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할렐루야 

사탄의 거짓말에 우리가 귀 기울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한번 내켜서 사랑했다가 
돌아서서는 마음이 변하시는.. 그런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하다는 게 뭔가요? 
영원은 변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동일한 상태가 영원입니다. 
이것을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오늘이나 어제나 장차 미래가 다를 바가 없으신 분!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잠시 환란을 당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어제 나를 구원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장차도 나를 구원하실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거예요. 믿으십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러면 과연 이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거예요. 

'아~ 내가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걸 받을 수 있을까? 
그걸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게 아니고요. 

은혜로우신 그 하나님  gracious God 을 믿는 거에요.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의 여러가지 속성 가운데 크게 세 가지를 믿는거에요. 

1) 첫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고요. 
2) 두번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고 
3) 세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에요.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그분의 선하심의 일관성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신실하신 분,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에요. 
이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합3:16 '그 소리를 듣고 내 뱃속이 뒤틀립니다. 그 소리에 대해 입술이 떨립니다. 
내 뼈가 썩어들어가고 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하려고 오는 백성들에게 닥칠 재앙의 날을 조용히 기다릴 것입니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미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면 
바벨론을 통해서, 민족이 고난을 당하는, 그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과거를 이렇게 돌이켜보고, 또 미래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 
이런 걸 바라보면 떨리는 거예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리는 거예요. 

그러나 그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야만 
결국에 우리를 괴롭혔던 그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구원을 다시 경험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날을 나는 조용히 기다리겠다.' 
더 이상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겠습니다.'라고 고백했어요. 

고난 이후에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고난 이후에 하나님의 승리가 여러분의 삶가운데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은 
고난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을 기다리는 지혜인 거죠. 

여러분, 사탄의 거짓말은.. 
우리 안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인생경영, 역사경영을 왜 이런 식으로 하시지?' 
'하나님의 의도가 안 좋은 거 아니야?' 

이게 사탄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제가 한 가지 단순한 예를 들어볼게요. 

여러분, 대학입시를 보게 하는 교육 당국이나 대학 당국의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대학입시시험 (수능)을 보게 하는 목적이 
대학에 신입생을 들여보내기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탈락자들을 양산해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인가요? 

이 대학입시, 이 합격과 탈락의 두 갈래 길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나뉘집니다. 
그러나 교육 당국과 대학 당국에 의도는 당연히 전자인 거예요. 절대로 후자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왜 고난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시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하시는 것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드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구원자 되셔서 
승리를 허락하시고자 함인 줄로 믿습니다. 
절대로 삐뚤어진 사탄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이 시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