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K
2022. 3. 29. 20:08
◈실천적 무신론자들 시53:1~6 여러 설교 정리
시편 53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4절, 무신론적 사상에 젖어 악행하는 자들의 어리석음
5절, 주님의 심판
6절,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기도
시편 53편은 14편과 매우 흡사합니다. 주1)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기도 사건에 관여한 것때문에 사형을 당한
괴들러(Goedler) 박사의 수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잠을 잘 이룰 수가 없다. 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있는가?
나는 그것을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십 만의 사람들이 공포과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백 만의 사람들이 공포의 풀무불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손 끝 하나 꼼짝하지 않고 죽게 버려 두었다."
이렇게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실까?’ 절망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일 것입니다.
시편 53편은 바로 그 탄식입니다...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다”(나발)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행위로 어리석은 때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무감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감각이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무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황상 본문의 '어리석은 자'는, 일차적으로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을 둘러싼 여러 이방 나라와 그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6절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발의 삶을 통해서 어리석은 자의 결말을 보게 되는데
그가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윗을 모욕했고(삼상 25:10),
자신의 재산을 보호해 준 자들에 대해서 배은 망덕했으며(삼상 25:70),
나그네 대접에 대한 율법(신 10:17-19)을 무시했으므로(삼상 25:11)
철저히 ‘실천적 무신론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 또한 나발의 어리석은 삶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세상의 주인이시고 살아계신 창조주라고 머리로는 믿고 받아들이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우리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생각하고
매사에 우리의 뜻을 관철시킬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우리는 갈등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삶에서 인정하기보다는 내 경험과 내 지식을 더 신뢰하다 보니
말씀과 내 판단과 대립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의 머리보다 앞서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굽어살핀다’는 말은 위에서 내려다보신다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평가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라는 말씀이 놀라왔습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을 정말 보는 것 같았습니다.
“굽어보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말씀하고 있어서
하늘을 향해 손이라도 흔들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시려고 하늘에서 굽어 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자” 고 설교하고 또 도전했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잘 따라 주시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힘들어 하기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막연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바로 그 사람이예요.” 하고 외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에 맞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찾고 찾으셨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로마서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롬3: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지만 저는 2절 말씀에서 놀라운 은혜와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려는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 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것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 뿐이었던 적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홍수 심판 전에 노아가 그랬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불심판으로 멸망할 때 롯도 그랬습니다. 혼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 안 믿어진다고 하여도 나는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믿어지고 갈망하게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혼자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에 올 때마다 우리는 감격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노아 때, 롯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 때문에 절망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 혼자 남았으니 죽여달라고 탄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가 7천 명이나 남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가 많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 허다하게 많은 증인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여러분, 문제는 세상도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 한번 진심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찾고 또 찾고 있는가?”
눈이 뜨이고 나면 혼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가 많음을 알게 됩니다.
러시아의 반체제 작가‘솔제니친’이 러시아에 실망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서방세계에 대한 경고]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나는 러시아의 혁명사만 50년 연구한 사람이다.
6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분명하다. 러시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온 비극이었다.”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길을 가는 것은 목표가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러시아가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실망해서 조국 마저 버리고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 보니까 러시아가 과거에 갔던 길을 미국이 지금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그러면 미국도 러시아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라고 해서 미국에 왔더니
실제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운 경고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고 했습니다.
렘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는 정말 하나님을 찾고자 갈망하고 있는가요?’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들을
굽어 살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1~4절은 어리석은 자로 불리는 죄인들의 특징과 그들의 죄를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1절)고 하는 것이죠.
이들을 가리켜 ‘실천적 무신론자 Practical atheism ’라고 합니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1~4절에 나오는 사람이 그러합니다.
이 말은,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며 겉으로 들어난 모습 속에서는 기독교인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손색 없는 기독교인 것 같지만
그들의 내면과 삶은 불신자와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오늘날의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배에 참석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대로 살지 않고, 복음의 증인의 삶을 전혀 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못하는 것이죠.
이들은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3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들은 이 부분이 더욱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저 교제의 장소요, 친목과 사교의 장소로 제공되는 셈입니다.
심지어는 부동산, 주식, 학원 등 각종 정보 교환 장소로, 또 새 직장을 얻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딤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는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합니다. 돌아서야 합니다.
결국은 그 결과가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그러므로 교회는 오롯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하는 것이 그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뒷전이고, 자신들의 친교와 교제의 목적으로
교회의 형태인 건물속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모임의 결과는, 아래 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5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5절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도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친 원수들의 뼈를 흩으셨음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그들이 패배의 수치를 당하게 되었구나.'
‘뼈를 흩으심이라’
표제어에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다윗의 예언인 것입니다. 주2)
모세 율법에 따르면, 처형된 악인의 시신도 정중하게 매장해야 했습니다.
신21:22~23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여 그를 나무에 매달았으면 그 시체를 밤새도록
그 나무에 두지 아니하고 장사할지니 목매달린 사람은 하느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시체(뼈)를 흩으시는 것은
엄청난 수치와 진노의 표시입니다.
이 선언은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예언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고 악한 자는 큰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의 성경 속의 극명한 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입술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서운 저주의 말을 선포하셨습니다. 마23장
본문에는 '뼈를 흩으시리라.. 그런 수치를 당하리라'고 나와 있죠.
물론 이런 일은, 오늘날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6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주3)
본문 시53편은 시14편과 내용이 매우 흡사한데,
시14편은 제 1권에
시53편은 제 2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델리취는 여호사밧이나 히스기야 때 살았던 후대의 시인이
그 시대에 일어난 극한 참상에 맞춰
원래 다윗의 시편(1권, 14편)에, 세계적인 심판을 선언하는 특징을 보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6절을 첨언했다는 주장입니다. 연구를 요합니다.
◑시53편 설교 / "현대의 실천적 무신론자들"
만약 초대 교회에 시간 여행자가 있어서, 그가 21세기 우리를 방문해서
월요일부터 ~ 토요일 저녁까지 몰래 당신을 따라다녔다면
그가 평가하기를 '당신은 기독교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천적 무신론자 practical atheist' 란,
하나님을 머리와 생각으로는 믿지만, (절대 하나님을 무신론자처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문제는 무신론이 아닙니다. 극소수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무신론자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날 구미 기독교 나라들, 또한 한국 기독교가 직면한 문제는
무신론이 아니라,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마귀는 교묘해서 '하나님을 부인하라, 하나님을 믿지 마라'고 유혹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얼마든지 믿어라, 그렇지만 형식적으로 대충 믿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유혹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현실의 삶에 거의 무의미한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속주의가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세속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묵살하게 합니다.
또한 신자의 믿음의 관심을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고,
그저 개인적이고 사적인 믿음의 문제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윈의 진화론으로 시작된 현대의 무신론도 위험하지만,
다윈의 진화론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사상에 근거를 제공했으며,
니체를 탐독한 인물이, 2차대전을 일으켰던 광기의 히틀러입니다. 또한 공산주의입니다.
그래서 진화론, 무신론, 공산주의도 위험하지만,
오늘 우리 현실에 실제적으로 더 위험한 것은, 무신론이 아니라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섬기며
복음의 생명을 나누는 증인의 삶을 사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그저 입술로만 봉사하며 lip-service
자기 개인의 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덕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 대해서 일찍이 Martin Luther King Jr.는 1950년대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자기가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스스로 속는 것이죠)
우리는 입술로는 그분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삶으로는, 마치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직면하는, 항상 존재하는 위험입니다."
'혹시 나는 실천적 무신론자인지/아닌지..' 이 5가지 비교를 살펴보십시오.
1.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시간이 없고 마음이 없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래 저래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신론자와 똑같습니다.
2. 무신론자들은 성경이 허구, 사기, 가짜라고 믿기 때문에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지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만, 지루하다고 거의 읽거나 묵상하지 않습니다.
이래 저래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무신론자와 똑같습니다.
3.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자랑하며, 자기 삶에 하나님 없이 매일같이 지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주일날 교회 가는 것만 빼고는, 월~토요일에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이래 저래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무신론자와 똑같습니다.
4. 무신론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정예배나 규티가 없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세속적인 일에 바쁘다 보니, 가정예배나 큐티, 개인기도가 없습니다.
이래 저래 주중에 기도하거나 예배하지 않는 것은, 무신론자와 똑같습니다.
5. 무신론자는 오늘을 위해 살고, 현실의 생에 집중하고, 보물을 땅에 쌓아둡니다. 내세는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재물관도 무신론자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세를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해서 사는 것도 무신론자와 똑같습니다.
이렇게 현실의 기독교에 '실천적 무신론자'가 많은 것은
진정한 회개 없이, 회심 없이.. 그저 값싼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17, 18, 19, 20세기에 일어난 모든 부흥운동은, 그런 '값싼 은혜, 값싼 복음'에 대한 반성이고,
참 성경적인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 회심, 성령충만을 강조했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매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예배하십시오. 당신의 믿음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살펴보세요.
마지막으로 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은밀하게 행하는 것들을, 남들이 알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면.. 당신은 실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나님이 아실까봐는 두려워하지는 않으십니까?'
“Doing things in secret that you are ashamed for others to know is practical atheism.
God’s knowing doesn’t count?”
♣본문 시53편과 관련된 예화 두 편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한 프란시스 쉐퍼는 십대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신학교에 가서 사역자의 길을 가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대단히 반대하였습니다.
갈등하던 프랜시스는 결심을 하고 가방을 꾸려 방에 나왔는데,
아버지가 현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프란시스를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말했습니다.
"나는 목사 아들을 원하지 않아. 네가 그 길을 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때 프란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하실로 내려가 몇 분간만 기도할 시간을 주세요.”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확실함과 두려움 가운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것온 아버지를 위한 슬픔의 뜨거운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몇 분내로 진로를 선택해야 했지만 하나닝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짧은 몇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필사적이고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길을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의 길을 알려 주세요.”
그리고 나서 그는 동전을 꺼냈습니다.
“앞면이 나오면 아버지가 목사의 길을 반대하셔도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전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앞면이었고 그는 다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더 확신을 주세요.
이번에는 뒷면이 나오면 아버지의 반대에도 목사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동전을 던졌을 때 뒷면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한 번 더 기도를 했습니다.
“한 번 더 하나님 아버지께 실수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다시 한번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오게 해 주세요.”
그는 기도했고 마지막으로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층으로 올라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그를 냉정하게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쾅하고 닫았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히기 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반학기 등록금은 보내 주마.”
그 후 수년 뒤 프란시스의 아버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그 순간이 아버지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동전 던지기로 알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 <God Told Me> 짐 삼라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을 쓴 A J 크로닌이 제1차 세계대전 후
젊은 의사로서 영국의 한 탄광촌에 있는 보건소에 부임해 갔습니다.
가보니 시설도 여건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올리브라는 간호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크로닌은 올리브의 봉급이 너무 적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올리브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급료를 더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곳 주민들도 하나님도 그렇게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때 간호사 올리브는 아주 엄숙하고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크로닌 박사님, 하나님께서 제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알아주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
주1)
시편 53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입니다.
마스길은 교훈, 곧 실용적인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뜻하며
마할랏은 곡조나 악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곡조나 악기가 어떤 분위기였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할랏이 그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질병이나 슬픔 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슬픔과 애원이 담긴 곡조나 악기로 추정이 됩니다.
정리하면, 시편 53편의 표제어는 인도를 따라 슬픔과 애원이 담긴 곡조나
악기에 맞춘 다윗의 교훈시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같은 내용이 반복해서 기록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반복은 단순 반복이기보다, 다른 관점에서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에 기록된 분열왕국의 역사도 그렇고,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반복되는 기록을 통해서 해당 사건을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약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도 됩니다.
그렇지만 내용상의 차이로 두 시편을 살펴본다면,
14편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강조하는 대신,
53편은 악인에게 임할 두려움을 보다 상세히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두 시편은
-53편의 5절에 해당되는 부분과
-14편에서 사용된 ‘여호와’가 53편에서는 모두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사소한 차이만 존재합니다.
아마 다윗은 시편 14편을 먼저 기록하고 후에 특별한 상황에 맞게,
아마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승리한 후에, 약간 수정하여 53편을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53편은, 14편에 비해 대적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심판의 메시지가
53:5절에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2)
5절을 다윗의 예언으로 볼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큰 공포를 경험하는 자들의 멸망을 묘사합니다.
이 구절은, 다윗의 예언으로 볼 때
앗수르 군대의 멸망에 대한 예언적 언급일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인 185,000명을 쳤을 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왕하 19:35).
그러니 그 많은 숫자를 정식으로 장례로 치르지 못하고, 앗수르는 도망치듯 물러갔고
시신들의 뼈는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공포는, 세상 끝에 마귀를 추종하는 군대를 겨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도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을 내리심으로 심판하실 때
그들은 뼈가 흩어지는 공포를 경험할 것입니다. 계20:7~9
하나님께서 흩으신 뼈, 즉 흩으신 시체에 대한 언급은
그분이 악인에게 내리실 무서운 치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5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큰 영광과 권능으로 다시 오실 때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고, 장차 세상 마지막에는 확실히 일어납니다.
주3)
6절은, 난해구절입니다.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의 해석 때문입니다.
표제어에 '다윗의 마스길'로 되어 있는데, 다윗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내다본 것처럼은.. 좀 비약입니다.
그럼,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것을 노래한 것일까요?
그래서 성경의 번역도 제각각입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포로'가 맞습니다. 다른 이중적 의미가 없습니다.
NIV는 When God restores the fortunes of his people, let Jacob rejoice and Israel be glad!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운을 회복하셨을 때'로 번역,
현대인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번영하게 하실 때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라'
이렇게 의역하고 있습니다.
다윗 때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힌 적이 없기 때문에, 돌아올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 다윗의 시를, 후대에 편집자가 6절을 삽입한 것일까요? 이것도 비약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