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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56편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LNCK 2022. 4. 3. 05:25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56:1~13         여러 설교 정리

 

시편 56편은 다윗의 비탄에 잠긴 시입니다. 
다윗은 34편과 마찬가지의 배경, 즉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로 가는 중입니다. 
다윗의 시편들 중에 34편과 본문 56편, 이 두 편은 같은 배경을 두고서 쓰였습니다.
 

본문인 시편 56편에는 <표제어>가 세 가지나 붙어 있습니다.

1) 첫째가 ‘다윗의 믹담’입니다.

시편에는 ‘믹담’이라고 표제어가 붙어 있는 것이 6편이 있습니다. 16편, 56~60편까지 5편입니다.

 

‘믹담’은 그 뜻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2가지 정도로 정리 됩니다.

-하나는 ‘황금시’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돌비에 새겨진 노래’입니다.

 

모두가 기억해야 할 시편이기에 돌에다 새겼다는 의미입니다.

믹담의 의미가 황금시이든, 돌비에 새겨진 노래이든 그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시편을 마음에 새겨서 읽고 들어야 합니다.

 

2) 표제어 둘째 표현이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입니다.

이것은 운율의 표현인데 ‘먼 느티나무 위의 비둘기 한 마리’라는 뜻이며, 노래의 곡조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처지을 묘사하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게 처량하고도 고독하게 도망을 가야 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다윗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마치 우리나라 가곡 ‘울밑에서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는

노래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노래를 누군가가 부르면 그 사람은 참 처량한 지경에 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도 다윗의 개인의 경험이 국가의 경험이 되고,

개인의 처량함이 민족의 우울함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3) 표제어 세 번째는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

 

이것은 사무엘상21:10-15절이 그 배경입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은

망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죽였던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보고는 “저 사람은 다윗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여인들이 다윗이 행한 일을 보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순간 다윗은 잘못 왔다고 생각하고,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하며

성문짝에 아무렇게 글씨를 쓰기도 하고, 자신의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그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 때에 지은 시가 바로 시편 56편입니다.

 

 

◑절별 해석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1절과 2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표현이 ‘종일 삼키려 한다’입니다. 
참 기가 막히는 표현입니다. 다윗의 적대자들이 한 순간도 가만두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2절의 ‘원수’는 ‘나를 감시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루 24시간 우리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노이로제가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시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다수 일 때 
그 눌림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를 감시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내 삶을 보고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흠을 잡아서 세상에 다 알리려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눌림은 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도인 우리들에게도 '종일 나를 삼키려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특별히 자기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이런 위기를 겪을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이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때 

다윗이 취한 해결방법을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1~3절을 연속해서 보면,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다가 미친 척하고 풀려날 때에

그게 30분~1시간만에 되어진 사건이 아니라, 상당히 긴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기에, 다윗이 침을 흘리며 미친 척 한 것이, 길면 10분이었으리라 여기는데,

1절과 2절과 5절에는 '종일'이라고 했고, 6절에 '숨어서 엿본다'고 했는데, 

그 위기와 풀려남이 며칠이 걸렸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가 마르는 날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다윗이 그 위기에서 어떻게 탈출합니까? 4절과 10절입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시편 56편은 바로 이러한 위기 한 가운데에서 다윗이 쓴 시입니다. (물론 그 후에 썼죠) 

다윗은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원수들로부터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지금 다윗은 혼자입니다. 아무도 다윗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방은 다윗을 삼키려고 온 종일 치며 압제하는 원수들 밖에 없습니다. :1~2 

 

그야말로 다윗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4절입니다.

두려웠을 때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고백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이 구절에서 특이한 것은 다윗은 ‘말씀을 찬송한다’고 합니다.    *히, 할랄

 

하나님의 성품이나 역사를 찬송하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한다(?)는 것은 
빨리 와 닿지 않습니다. 4절 뿐만 아니라 10절에도 또 나타납니다.
10절에서는 두 번이나 ‘말씀을 찬송(할랄)한다’고 합니다. 시56편에 총3번 나오죠.

 

여기서 찬송한다는 '할랄'은 '자랑한다 boastful'는 뜻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자랑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찬양'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자랑하올지라' :4

 

두려움이 닥친 시간에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안전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또는 자랑)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공포에 휩싸이게 되면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마음이 혼란하여 동요하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힘입어서 그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더욱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줄 알고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 중에도 당신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뿐 아니라 그 입술에 찬송도 있게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자랑)하올지라’ :4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곧 그 말씀을 의지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다윗이/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갖지 못했다면 
매우 위협적인 상황에서 거의 속수무책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두려워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 자랑합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4

마르틴 루터도, 통치자의 칙령으로

아무 사람이라도 자기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살인죄를 묻지 않는)

 

그렇게 쫓기는 사냥감 신세가 되었지만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찬송하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늘 시46편 말씀을 찬양하고 자랑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면서,   요7:30. 8:20

당시 유대 권력이 자기를 해치려고 했어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사도바울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하며

죽음을 초월하고 담대하게 살았습니다. 빌1:21

 

백전노장은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워낙 경험이 많으니까,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에서도, 전혀 신경이 곤두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양, 자랑하는 사람은.. 위기를 만나도

그런 안정감과 평안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5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7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내 눈물과 고생)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혹자는, 세상에 살 동안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고 자타가 공인하지만...

그 날에 ‘눈물 병’이 증거품으로 제시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일한 양量을 보시기 이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또한 '눈물의 기록'이 주의 책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세상에 살 동안 아무 영광도 없이, 볼 품도 없이 살다 갔지만,

그 날에 그의 ‘눈물 병’이 증거품으로 제시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적 열매를 가지고 평가하지만,

주님은 내적 열매와 우리 마음(눈물)을 보시고 평가하십니다.

 

내 눈물 병에 '눈물'이 담겨 있습니까? 혹은 '탄식'이 모아져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착하고 충성된 종'입니다. 주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  눈물 병


'눈물과 고생'은, 우리 인생에 다 나쁜 것일까요?

만약 그게 무조건 '좋지 않다, 나쁘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쾌락주의적 관점>에 깊이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너무 거기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쾌락주의 관점이란 이런 거예요. 고난을 악이라고 해석하는 거에요.
 
'쾌락'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약간 좀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데 
'희락'이라고 고치셔도 돼요. pleasure 입니다.

그냥 인생이 즐겁고 행복한 것, 이 쾌락을 선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거는 쾌락주의적 관점일 뿐이에요. 

고난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리고 동시에 쾌락 자체가 선도 아닙니다. 
그것은 좋고/ 싫음의 기준일 뿐인 것이죠. 선/ 악의 기준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생에는 또 다른 기준이 있어요. 
그것은 옳고/ 그름, 또는 선 / 악의 기준이에요. 

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라는 것은 
'구시대적인 관점이다'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철학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절대주의적 관점'인 거예요. 

절대자가 계시고, 절대 기준이 있고,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있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을 쾌락주의 관점과 믹스해서 표현한다면 이런 거예요. 

진리는 불쾌할지라도 진리인 것이에요. 옳은 것이에요. 
거짓은 유쾌할지라도 그것은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미국의 한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는 사십 대의 백인 남성이 
대학 캠퍼스에 가서 현장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대학생을 붙잡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40대 백인 남성이, 대학생에게 마이크를 딱 들이대면서 
'제가 10 대 중국 소녀라고 스스로 주장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아~ 뭐 그렇게 생각해서 당신이 행복하다면, 그게 옳은 것이죠.' That is true.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냐? 그건 틀린 이야기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는데 
오늘날은 '쾌락주의적 관점'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유쾌하다면, 거짓이 진리로 둔갑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시대적인 핫이슈들을 
왜 이런 관점으로 자꾸 접근을 하는가? 

정치인도 그렇고, 대중도 그렇고.. 왜 이런 접근을 하는가? 
우리 전체가 쾌락주의적 관점으로 세뇌가 돼 있기 때문이에요. 

근데 오늘날의 극단적 무신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절대 진리(성경)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지켜야 되는 도덕률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겁니다. 

철저하게 유물론적 관점에 치우치다 보니까 
인생의 기준으로 남은 것은, 유쾌함과 불쾌함 의 기준만 남은 거에요. 

유쾌하면 선이고 
불쾌하면 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생의 소중한 것들 가운데 고난이 없는 것이 없어요. 
학생이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청운의 꿈을 꾸며 
그 일을 위해서 매진하는 것... 여러분 힘들지만 소중한 것 아닙니까! 

결혼해서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정말 바른 사람으로 양육해 가는 것,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지만, 이 어찌 아니 소중한 일입니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며 삽니까?' 

고생이 잘못되거나 나쁜 일이 아니라,

그건,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죠. 

인생의 과정과 역사의 과정 가운데 고난의 길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인 선을 향해서 가는 길은 
불쾌한 길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것은 악한 길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악한 분도 아니시고,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시려는 분도 아니십니다. 

오히려 자녀들이 이런 힘든 과정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분이세요. 

그러므로 쾌락주의적 관점으로 만약에 세상을 해석한다면 
성경이나 신앙만큼 어리석은 게 없는 거예요. 
성경이나 신앙은,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따에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거든요!   

 

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말씀을 찬송하리이다'는 '말씀을 자랑합니다'는 뜻도 됩니다.

4절에서 설명했지만 찬송(할랄)이란 말에는 '자랑 boastful' 이란 뜻도 들어있습니다. 

 

이 내용은 모두 시인 다윗이 인생에 겪었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은 대부분 다윗이 고통을 당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참 역설적입니다. 고통의 사건이 노래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고통이 가능한 없기를 기도합니다.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을 겪게 하시고, 
거기에서 신앙의 노래를 뽑아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돌아봐도 기쁜 때에는 기도는 단 두 마디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끝이지만, 
인생에 고난을 만나면 길게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인생이 성숙해서 
지금의 우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이 하나님을 신뢰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앞서 4절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했는데, 11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반복은 '강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철저히 의지하면, 그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윗은 그 비결을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27:1~3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코로나19 같은) 재앙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시91:5~7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성경에 종종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118:6

사도 바울도 롬8: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어떤 신앙인은, 자기는 순교도 두렵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는다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로 죽고, 암으로도 죽고, 노환으로도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인데, 그렇다면 주를 위해 죽으면 영광이라는 것이죠.

   

물론 자기가 원한다고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는, 한 번 배울만 합니다.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0

 

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참고로, '감사제'란, 번제나 속죄제처럼 어떤 제사의 종류나 형식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뜻합니다.

시107:22, 116:17에도 나오고, 그 근거는 레7:12~15절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 두 구절은 조금 놀랍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탄원으로 시작했다가,

감사의 서원으로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바뀌어도 너무나 180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하지 않다가,

병을 얻어서 입원했다가, 완치되어 퇴원할 때는, 건강에 대해 감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13

물론 다윗은 자신이 구출받은 후에, 이런 고백을 했겠지만

위기에 처한 바로 그 상황에서, 간절한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 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닥칠 미래적 상황이지만, 이미 응답 받았으니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할 때, '믿습니다'를 남발하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이루어진 현실로 '믿고서' 기도할 때가 있는데,  

이게 무슨 마법이나 주문처럼, 무조건 다 되는게 아니고,

하나님이 깊은 감동을 주셨을 때만, 닥칠 미래적 상황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다윗이 사울에게 피해서 블레셋 땅 가드로 도망할 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현 상황은,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과 달리, 적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주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결과를, 답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그런 약속이 있습니까?

일례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마28:20

 

그렇지만 데이빗 리빙스턴 아프리카 선교사에게는,

이 말씀이 '계시'로 자기에게 주어졌으므로,

그는 본문의 다윗처럼, 아프리카의 맹수가 전염병을 염려하지 않고, 그 오지로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위 말씀을 알고는 있지만, '계시'로 주어지지 않아서  *과거에 '레마의 말씀'이란 표현을 썼죠.

그저 지식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가 평생 애송하는 요절이 적어도 2~3개는 있을 것입니다.

그 요절이, 다른 신자에게는 일반적인 말씀이라도, 자기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도, 그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평생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의 환경이, 아무리 그 말씀의 약속과 정반대로 나아가도,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면..

시일이 지나면, 그 말씀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날 우리도, 앞으로 닥칠 미래적 상황이지만,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믿고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찬양 등)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