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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편 1~6 복있는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는 자
LNCK
2022. 4. 11. 07:30
◈복있는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는 자 시1:1~6 여러 설교 정리 시편설교모음
★시편1권, 2권, 3권의 특징 비교 (강추)
<시편 1권>은 1~41편인데, 거의 대부분 다윗이 기록한 시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그림자처럼 보여주는 왕 다윗이 기록한
이 시편 1권을 통해서
먼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훈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권을 읽을 때면,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구나' 라는 것을 연관지어서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2권>은 시42~73편까지 입니다.
시편2권의 시작은 '고라 자손의 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라'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반역의 이름이요, 저주의 이름이요, 형벌의 이름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자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고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고라 자손들은 그 이후에 하나님 편에서 서게 되었고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에 의해서, 성전에서 섬기게 되었어요.
성전 문지기로도 섬기고, 성전 봉사자로도 섬기면서 *레위인임
그들은 조상 고라 와는 달리,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편 2권을 시작하는 이 고라 자손들의 시를 통하여서
시편2권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그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련해서 이 시를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2권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련된 내용, 교훈들'을 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시2권, 42~72편의 시를 읽을 때는
'아 이게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연관해서 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3권>은 시73~89편까지입니다.
이 시편3권을 시작할 때, '아삽의 시'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3권은 대부분 아삽의 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73~83편까지가 아삽이 기록한 시거든요.
그러니 시3권은 거의 전체가 아삽에 의하여 기록됐는데
아삽은 누구입니까?
다윗왕에 의하여 성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름 받은 예배인도자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권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과 관련해서
그리고 '예배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3권을 읽을 때면 여러분들이
'아 예배에 관해서, 그리고 예배자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시편 3권에 있는 시들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절별 해석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은'
여기서 복은 히브리어로 '에쉐르'인데, 행복 happiness 을 뜻합니다.
이 단어를 70인역은 헬라어 '마카리오스'로 번역했는데, 팔복에 나오는 '복'과 같은 단어죠.
마5장의 팔복과도 연결선상에 있습니다.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악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사'는, '유죄한 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들의 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과는 상관 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죄'는 표적을 빗나간 것이고, '죄인'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1절의 '악인'과 '죄인'의 반대인 복있는 자는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란 교만한 자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더 자세한 뜻은
'조롱하는자'를 의미한다. *히, 레침
여기서는 하나님과 그의 법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 사28:15, 말3:14 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나타내는데
곧 '좇다'(할라크), '서다'(아마드), '앉다'(야솨브)입니다.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 복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여기서 '묵상'의 히브리어가 ‘하가’인데,
그것은 조용하고 엄숙하게 어떤 사상을 음미하는 것이기 보다는,
사자가 자기 먹잇감을 획득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떤 기쁨, 흥분, 그래서 소리 지르고, 먹잇감을 이리 저리 돌려서 빨아먹고,
그 향기를 맡고, 그것을 은밀히 감추어두었다가 다시 꺼내 먹는 등
<어떤 것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묵상’이 매우 밋밋하고 고요한 뉘앙스라면,
원래 ‘묵상’은 매우 역동적이고 흥분적인 뉘앙스입니다.
시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우리는 ‘묵상’을 소가 먹이를 다시 꺼내서 씹는 반추의 이미지를 생각하지만,
단순히 반추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보다는 말씀이 주는 흥분, 즐거움, 기쁨, 맛 등, 푹 빠져듦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을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고, 시19:10
전리품을 나눠 갖는 일처럼 기쁘다고 했고, 시119:162 *당시의 최대 기쁜 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시34:8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이 말은, 단순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을 때 내게 찾아오는 즐거움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
이것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사실 이 시편 1편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겁니다.
신앙의 놀라운 비밀들이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죠.
신자의 즐거움, 그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느냐?
율법을 순종할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또 순종할 때 그 순종의 결과를 통해 내게 주어지는 기쁨!
그러니까 순종과 관련 없이 생긴 즐거움은, 모조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키 key 는 뭐냐면
말씀을 우리가 읽기도하고, 묵상도 하고, 암송과 큐티를 하기도 하는데
물론 성경을 읽을 때, 묵상할 때의 즐거움도 있죠.
참 성경 읽는 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그러나 최고의 즐거움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주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이게 즐거움의 클라이막스 입니다.
읽을 때도 즐거움이 있고요, 묵상 할 때도 즐겁고
성경공부할 때, 뭔가 배울 때도, 깨달을 때도 즐거움이 있어요.
근데 최고 정상의 즐거움은
그 말씀 대로 살 때 주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이거는 그외 다른 즐거움과는 비교가 안 돼요!
여러분, 스포츠에서 중요한 게 있는데요.
스포츠 경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게 뭐냐면,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설명하는 중
운동경기가 즐거워지려고 하면 규칙 rule 을 지켜야 합니다.
선을 그어놓은 그 안에서 해야 되고,
네트를 정확하게 넘겨야 되고
서브를 할 때는 뭐 라인을 지켜야 되고...
축구에도 아주 중요한 룰 들이 있죠.
근데 만약 룰을 어기면, 축구경기할 때도, 레드카드를 줘서 퇴장시켜 버립니다.
경기가 경기다워지려면, 모든 경기에 룰을 지켜야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버리면, 경기가 되지 않는 거죠.
그 게임이 즐겁게 되기 위해서는, 룰을 철저하게 지킬 때만 즐거워집니다.
그래서 국제대회일수록 매우 엄격하게 룰(규칙)을 적용합니다. *말씀의 법도에 비유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지켜야 할 의무들이 있어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책임을 져야할,
어떤 책임을 지는 것 안에서 일어나는 거죠.
각자가 져야 할 책임, 역할,
또 살아가면서 서로가 맺은 어떤 약속들을 지켜 갈 때
사랑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결혼했는데.. 당신은 알아서 하고, 나도 내 맘대로 하고...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자유롭고,
집에 안 들어와도 괜찮고... 그러면 가정이 아닌 거죠.
남편이 집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10시면,
약속을 지켜야 됩니다. 쉽지 않은 거예요.
근데 그런 약속을 지켜 가는 거지요.
그때 그 안에 뭐가 있어요?
가정에, 부부 관계 안에 즐거움이 유지가 되는 거지요.
자 여러분, 오늘날 신앙의 현주소를 좀 살펴보면,
신앙이 좀 가벼워지는 면이 있어요.
말씀을 듣긴 하는데, 그 말씀을 그냥 듣고 끝내버리는 겁니다.
요즘 핸드폰이 참 좋아졌어요. 유튜브로 들어가면
설교를 늘 들을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저도 주중에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여러편 듣거든요.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 게 좋아요.
근데 문제는, 마치 찬양을 한 곡 듣고 즐기고 마는 것처럼
설교를 듣고, 그것으로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아~ 좋은 설교다. 너무 은혜 되네'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는 거죠.
그 순종함으로 내 즐거움을 삼아야 된다는 것이죠. 시1:2
근데 진짜 설교를 듣고서 큰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그 설교가 계속 기억이 나면서
그 말씀대로 기도하게 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시로 듣고 잊어버리는 것은, 설교가 별로 은혜가 안 되면 그렇습니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시편이 씌어졌던 팔레스틴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물기 없는 땅에 심겨져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강이나 오아시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이니까요.
그런 나무들은 마음껏 자랄 수도 없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반면, 어떤 나무들은 팔레스틴 땅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냇가에 심겨집니다.
그 나무들은 뿌리를 통해 물을 마음껏 흡수하여 한껏 자라납니다.
때를 따라 새순을 내고, 푸른 잎을 자랑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습니다.
일조량이 여기보다 좋으니까, 열매의 과즙도 풍부합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 안에는 풍성한 생명력이 넘쳐흐릅니다.
시절을 따라 꽃으로 향기와 아름다움을 뽐내며
푸른 잎사귀로 사막의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며,
당도가 높은 과일을 제공해 줍니다.
중동에서 나무가 시냇가에 심기기만 하면,
한국과 미국의 나무보다 훨씬 더 생명력이 넘칩니다.
햇볕이 더욱 뜨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축복을 나누는 일로
늘 신바람이 납니다.
신앙은 뿌리를 강화하는 작업입니다.
뿌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평소에는 뿌리를 소홀히 여깁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신경을 쓰지 않고, 껍데기만 포장하려고 합니다.
겉모습에만 치중하고, 뿌리내리는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오는 것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이 녹아들어야 그것이 뿌리가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란,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해 얻는, 경건한 삶에서 오는 성령의 열매(갈5:22~23)일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이기 때문이죠.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말씀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씀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계속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물과 거름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강해집니다.
말씀을 많이 들은 사람은 누구도 당할 수 없습니다.
시편 1편은 묵상을 많이 강조합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런데 왜 주야로 묵상하라고 할까요?
말씀이 내 영혼이 깊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가장 많이 묵상하는 사람이 뿌리가 가장 깊이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는 강도만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어떤 일이 생겼을 때에 말씀이 가장 먼저 생각나게 됩니다.
시험 당했을 때에 말씀이 생각나고, 어떤 사건과 문제가 생겼는데 말씀이 생각난다면,
평소에 말씀을 깊이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셨을 때에 주님의 입에서 말씀이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냥 입에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말씀이
자신의 안에서 튀어나오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게 됩니다.
내 영혼이 그 말씀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흔들면 무엇이 나올 것 같습니까?
흔들었을 때에 나오는 그것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이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뿌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는 금방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와 기쁨의 차이
세상 재미를 다 보고 나서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영적 생활에
세상 재미(fun)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영적 생활에서 얻는 재미를 ‘재미’라고 이름 붙이기 어렵습니다.
‘기쁨’(joy)이라고 이름 붙여야 더 옳을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재미’는 보통 얄팍하고 스쳐 지나가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재미는 그 순간을 즐겁게 해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공허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진한 재미를 추구하게 됩니다.
반면, ‘기쁨’은 마음을 깊이 적셔주는, 좀 더 오래 가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 기쁨은 내적 공허감을 채워주고 삶에 신선한 활력을 제공해 줍니다.
‘재미’와 ‘기쁨’의 차이는 우리의 언어습관을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밤새도록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래하고 놀았다 칩시다.
이른 새벽에 술집을 나오면서 “아, 기쁘다!”라고 말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오늘, 재미 좋았네!”라고 말합니다. “기분, 째지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몇 시간을 자고 깨면 극심한 두통과 공허감을 씹게 됩니다.
헛된 재미로 인해 기분이 째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삶에는 ‘재미’보다 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에 깊이 들어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고 난 다음,
일어나면서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재미 좋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 참 기쁘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읽으며 묵상에 깊이 빠져서 송이 꿀보다도 더 단 말씀의 맛을 보고 나면
우리의 영혼이 기뻐 뜁니다.
영감이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어떻습니까?
영혼 깊은 곳에 터치를 받으면 우리는 재미가 아니라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내 물질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어 봉사할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기분을 째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째진 기분을 통합시키고 치유하며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생명력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세상 재미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얻는 일입니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3절에 묘사된 의인의 행복과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실패 및 불행을 기록한 부분이죠.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곡식을 까부를 때(체 질할 때) 낱알은 지면에 떨어지나, 겨는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겨'란 악인의 사라져 버리고 말 허무성을 비유한 말이죠.
이러한 개념은 3절의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견고성과 대조를 이룹니다.
'겨'는 성경에서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말로서 자주 언급됩니다.
(시35:5, 욥21:18, 사5:24, 17:13, 눅3:17등)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하는 악인입니다. :1
이렇게 볼 때, 악인을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자가 됩니다.
'견디지 못하며'는 원래 '서 있지 못하며'란 뜻인데, 심판정에서 당당하게 서 있지 못함을 뜻하며,
결국은 유죄 판결을 받아서, 끌려나갈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會中)에 들지 못하리도다'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이들은 곧 1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소극적으로는 악인의 행동에서 구별된 자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이를 생활화하는 자들입니다. :2~3절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복과, 악인의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인정하시므로 그가 복을 받는 것이며
반대로 악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멸망을 당합니다.
여기서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는 '소멸하다'라는 뜻으로 악인의 최후를 암시합니다.
즉,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입니다.
◑관련설교 스크랩 "행복한 사람" -출처-
인간의 행복의 조건으로 철학자 플라톤은 다섯 가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사람들이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이 다섯 가지가 있으면 행복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백 퍼센트 만족이 없습니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성실히 노력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종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좋은생각, 2005, 57쪽 참조).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이만 하면 남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년 2005년 2월 28일자 타임지에서는 "행복학"(the science of happiness)에 대한
전문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소개하였습니다.
지난 20세기에 심리학자들은 주로 인간의 병리적인 현상들인 노이로제나 히스테리, 우울증,
편집증, 정신분열증 등에 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해왔는데,
지난 1980년대 이후로는 그 방향을 바꾸어 좀 더 인간의 "행복"에 관해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화란의 롯테르담에 있는 에라스무스대학에서 행복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뤼뜨 베인호우번(Ruut Veenhoven) 교수는 이 특집 기사에서
"당신은 천국에서도 불행할 수 있다... 행복의 비밀은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좋아하는 것이다."
You can be miserable in paradise... The secret of happiness is liking the life you have.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조건이 좋고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도,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의 삶을 지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하지 않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현재 여러분이 하고있는 가정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에서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 천국에 가서도 행복을 느끼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금년 2005년 4월 3일 로마 천주교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면서 남긴 말이
대중매체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라는 짤막한 내용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꿰뚫은 말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21세기 인류는 그 무엇 보다 행복에 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도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믓한 상태"에 있습니까?
아니면 행복과는 반대로, 충분한 불만과 슬픔을 느끼며 원망과 짜증나는 상태에서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요즈음 "웰빙"이란 말이 유행하는 것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내용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웰빙이란 영어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행복을 느끼거나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웰빙밥상, 웰빙음식이란 먹어서 만족스럽고 그 음식을 먹는 것이 기쁘고 흐믓한 그런 밥상을 말합니다.
앞서 소개한 타임지의 행복에 관한 연구보고서에서는, "자고 일어날 때 대체로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라는 질문에 미국인들은 80%가 그렇다고 응답한 반면,
14%는 아니다, 나머지 6%는 모르겠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행복도 조사에서는, 가장 높은 행복도를 보이는 나라가,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며, "South Korea" 한국은 헝가리나 그리스, 크로아티아 등과 함께
약 73%로 중상위권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필립핀, 인도네시아, 싱가폴이 한국보다 높은 행복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감을 가져다 준 것 한 가지를 말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가장 많은 35%의 사람들이 자녀나 손자, 손녀라고 했고,
가족이 17%,
하나님, 신앙, 종교가 11%,
결혼의 배우자가 9% 등의 순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행복학의 심리학자들은 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다음의 8가지 단계를 실행하라고 권고합니다.
1) 받은 복을 세어 보라(Count your blessings).
이것은 우리 찬송가 489장의 가사에 나오는 말로서, 교인들은 이미 다 아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일주일에 한 번 쯤 자기 전에 현재 감사하는 것을 3-5개씩 적어 보라는 것입니다.
2) 친절한 행동을 연습하라.
3) 삶의 기쁨을 맛보라.
4) 스승에게 감사하라.
5) 용서하기를 배우라
6) 가족과 친구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라
7) 자신의 몸을 돌보라.
8) 스트레스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하라.
행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대 심리학자들의 이러한 행복학 연구 결과도 흥미가 있고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아침 유명한 시편 1편을 통해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히브리어에서 복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바라크"가 있는데,
시편 1편 1절에 사용된 첫 단어인 히브리어 "아쉬레"는 복을 받아 누리는 만족한 상태,
즉 행복한 삶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우리 한글 개역 번역 전통에서는 "복있는 사람은 ... "이라고 옮기고 있으나,
"아쉬레 하이쉬"는 우리말로 "행복한 사람은..."이라고 해야 그 맛이 살아납니다.
시1편 1절에서 보면,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무엇을 해야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 반대입니다.
▲먼저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아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1) 첫째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즉 악한자들의 의견(또는 충고, 조언, 계획)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은 히브리어로 "라샤"인데, 이 단어는 "의인"의 반대말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하나님을 떠난 사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따라가는 세상지혜를 버리고(요일 1:16),
하나님을 경외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평소에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 "안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살면,
결코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주색잡기 뿐 아니라, 교인들 중에서도 도박, 마약, 가정폭력, 조직범죄 등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습을 벗어 버려야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 조선왕조 시대에 이덕무라는 학자는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 4가지를 자랑하였습니다.
"바둑과 장기를 두지 못하고, 소설을 볼 줄 모르며, 여색에 대해 말할 줄 모르고, 담배를 피울 줄 모른다"
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네 가지 것은 비록 죽을 때까지 못하더라도 해될 것이 없다.
나로 하여금 자제들을 가르치게 한다면 마땅히 먼저 이 네 가지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들을 인도하겠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땅히 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꼭 같이 속이고, 싸우고, 폭탄주 마시며 방만한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고 말씀했습니다.
악한 일을 떠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사는 것이 곧 행복한 삶입니다.
2) 둘째로, 행복한 사람의 조건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은 히브리어로 "하타"인데, 그 의미는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
가야할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죄라는 뜻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의 길, 영생의 길을 따를 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선 학생이 학교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불행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터키에 가면 옛 에베소 유적지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도시의 중심지에 번화한 상가가 모여 있는 시장인 "아고라"라는 광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당시의 도서관 건물 유적도 남아있고, 그 주변에는 유흥가와 홍등가도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여행 안내인이 설명하는 옛 기록에 의하면, 고대 에베소 사람들은 아고라에 있는 홍등가나 유흥가에
갈 때에는 으레 "도서관에 간다"하고는 놀러 다녔다고 합니다.
가야할 길은 가지 않고, 가지 말아야 할 다른 길로 다니는 것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도,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벧후 2:15).
3) 셋째는,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만한 자"는 히브리어로 "레츠"인데,
그 의미는 비웃는 사람, 냉소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말라기서 3장 15절에서 오만한 자들은,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오만한 자들은 말로써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빈정대며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어릴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고 교회를 비방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만한 자들입니다. 말라기서 2장 17절에서도, 오만한 자들은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비꼬는 말을 하면서 비웃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터무니없이 교회를 비방하고 예수 믿는 것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때때로 이러한 오만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오만하고 냉소적인 말로써
교회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괴롭게 하지 않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만한 사람들처럼 하지 않아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시1편 2절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세 가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데 있으며,
그래서 그 사람은 야훼의 율법(토라, 즉 가르침)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나의 사랑하는 책이요 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가까이 하며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묵상한다는 히브리어 동사 "하가"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 비둘기가 구구 소리를 내다"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며 반복하여 공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양의 경우로 표현하자면, "學而時習之 不亦悅乎"(배우고 때로 그 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그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그 말씀에서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맛볼 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한국 개신교인의 기도와 성경읽기 빈도에 관한 조사통계에 따르면,
하루 한차례 이상 기도하는 사람은 59.3%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읽기는, 매일 한 번 이상이 21.9%, 가끔 생각날 때마다가 제일 많은 39.7%,
전혀 읽지 않는다가 11.1%로 나와 있습니다.
통계 수치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기대 이하의 성적이 나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호흡과 같고, 성경 말씀은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기도하며, 성경읽기와 성경공부에 힘쓰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제대로 호흡을 하고 좋은 음식을 섭취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무엇으로 기뻐하며 만족하고 흐믓해 하십니까?
어거스틴은 오랜 방황과 방탕한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기까지는
진정한 만족이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될 때
거기에 참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잘 믿는 것이 행복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목사님들만 잘 믿으면 됩니까? 저는 이 시간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예수 잘 믿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시1편 3-4절에서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직유법으로 비교하였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마치 관개수로에(시냇가에) 따라 심겨진 과실수처럼 제 때에 열매를 맺고 번성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마치 타작마당에서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세상은 가벼운 것은 띄워 올리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도 무엇이 "뜬다" 든지, 아무개가 "떳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대체로 쭉정이나 겨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행복은 이리 저리 세상풍조에 따라 날리고 떠다니는 쭉정이 같은 삶이 아니라,
좋은 과실나무와 같이 주어진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 맺는 삶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세상 행복을 쫒아 이리 저리 바쁘게 자리를 옮기며 떠돌아다니지 마시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자리를 잘 지키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시편 1편의 마지막 5-6절은 행복한 의인과 불행한 악인으로 구별되는
인생의 두 갈래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삶이 행복했느냐 불행했느냐의 최종판단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서 가려지게 된 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판단할 때는 불행한 생을 살았다고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기준으로는 성공했고,
행복했다고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결국 멸망하게 되고,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알아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는 시편 1편을 통해 행복한 사람에 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읽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에 떨어져서, 혹은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못해도,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알아주시는 것으로 여러분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기뻐하지 마시고,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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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 시편 Psalms 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찬양"을 의미하는 "테힐림"(tehillim),
또는 "찬양의 책"을 의미하는 "세페르 테힐림"이란 제목으로 사용되었으며,
70인역에서는 "시가의 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저자 : 본서는 여러 명의 기자들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총 150편 중 75편 가량은 다윗, 3편은 솔로몬, 11편은 고라의 자손, 12편은 아삽,
1편은 헤만, 1편은 에단, 1편은 모세가 각각 작시했습니다. 나머지 46편은 익명의 작품입니다.
익명의 작품인 몇몇은 신약성경에서 다윗의 글로 인정되고 있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힘듭니다.
기록시기 : 본서에 수록된 150편의 시들은 모세 시대로부터(B.C.15세기)
늦게는 포로귀환 후인 에스라 시대에 이르기까지(B.C.6세기)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기자들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시편들은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통일왕국 시대에(B.C.1050-930년)
작시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본서는 전체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수집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수집 과정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되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권은 다윗의 사후 솔로몬에 의해,
2권은 고라 자손에 의해,
3권은 히스기야 시대의 아삽에 의해,
4, 5권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각각 수집된 듯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때는 에스라 시대였을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