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장 32~42 깨어 있는 기도가 힘든 이유
◈깨어 있는 기도가 힘든 이유 막14:32~42 2022.02.06.스크랩
예수님은 변화산에 가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참 황홀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는 고뇌하는 그리스도,
고통 속에서 절규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첫째로는 다가올 고난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에게도 큰 시련의 시간이지만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올 환란을 영적으로 준비하도록 데리고 가셨습니다.
2) 둘째로는 기도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도 기도, 마침도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3) 셋째는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기도로 마음을 모아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기도함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이기도록 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인 모습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로 승리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곧 기도의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막14:38
그리고 세 번이나 잠을 자는 제자들에게 가서 깨우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잠이 듭니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짜는 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치 기름을 짜듯이 쥐어짜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힘없이 잠을 자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기도의 자리가 참 중요합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의 자리에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하면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실패한 모든 자리에 가보면 틀림없이 그 안에 기도가 없습니다.
기도가 약해지면 시험이 다가오게 됩니다.
기도와 시험, 이것은 항상 연결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기도에 실패했던 제자들은 나중에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1.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을까요?
결정적인 요인을 주님은 본문 막14:3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님이 제자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고 이해하십니다.
본문 38절 말씀은 우리가 쓸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정당화하고 기도하지 않아도 됩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큰소리를 많이 친 인물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이렇게 무참하게 무너지고 잠을 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모습이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단계까지 가게 됩니다.
큰소리치며 장담한 베드로가 힘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릇된 자신감입니다. 큰소리를 칠 때는 뭘 모를 때입니다.
무지몽매할 때 큰소리를 치게 됩니다. 지나친 자기 과신입니다.
우리가 열심히만 해서 됩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그런데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누가 깨어있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누가 기도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막14:38b
제자들이 마음의 원함보다 몸의 요구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아직 훈련이 안 되어 있습니다. 훈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과 마음의 일치를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게 훈련된 몸인데,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기도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아직 성화된 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롬7:19-20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선을 행하고 싶은데 악을 행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 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원함보다 몸의 원함이 더 세면, 몸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언제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움직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지배를 받으면,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심하고 또 해도 무너집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몸이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지속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무기력한 몸, 사고뭉치의 몸이 되고 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얼마 못 가서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상황이기에 잘 때가 아닙니다.
피곤하지만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육체의 한계에 갇혀 일어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몸으로만 따진다면 예수님이 더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수면욕은 강력합니다. 때로는 예배 때도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잠깐 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 주일, 항상 존다면 육체의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훈련된 몸은,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합니다.
훈련된 몸은 몸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습니다.
잠든 영혼을 깨워 자신의 몸을, 의지적으로 기도의 자리에 나가게 합니다.
경건이 몸에 배어 있는 삶입니다.
딤후3: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신앙은 겉모양만으로는 안 됩니다.
경건의 능력은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몸에 영적인 습관이 잡혀있어야 가능합니다.
▲요즘 다양한 형태의 중독환자들이 많습니다. 중독이 무엇입니까? 자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입니다.
나는 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안 따라 줍니다.
연초마다 술과 담배를 끊겠다고 작정하지만 실패를 반복합니다.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는 일에 길들여진 몸으로는 이겨내기가 힘든 것입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결국 마음도 몸도 같이 망가지게 됩니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마음이 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두 갈래 길입니다. 결국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의 진위는
영적으로 약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이 육을 이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삶의 변화는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꾸준히 영성을 닦아 가야 합니다.
경건이 자기의 몸에 익어 가도록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몸은 결코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로 교회생활로만 생각한 경향이 많았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시네요?”라는 말에는 신앙이 외적인 행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외적인 활동으로만 본다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훌륭했습니까? 경건이란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는 삶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습니다.
그들은 깨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육체적인 문제가 아닌 결국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려면,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의 요구에 저항해야 합니다.
육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 아래 가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마음의 소원은 너무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으로 살아내는 일상이 없다면
마음의 소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실력은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의 원함을 따라 살아가는 몸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경건의 훈련'에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원함이 원함으로 그치지 않고 행함으로 바뀌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깨어 기도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았고,
그 정도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거리가 영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니다.
얼마나 떨어져 있길래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는데도 몰랐을까요?
눅22:41절을 보면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그렇다면 그렇게 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의례적인 기도를 드리는 게 아닙니다. 통곡과 눈물로 그 동산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 기도는 평소의 기도와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둔 기도입니다.
제자라면 예수님의 그 기도에 반응했어야 합니다.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된다고 할 정도면 느껴야 했습니다.
예민하게 반응했어야 할 때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그냥 잠잤다고 하기에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돌 던질 정도의 거리에서 스승이 절규하며 기도하는데 무반응입니다.
제자들은, 육신적인 거리로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지만,
영적인 거리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제자들은 십자가와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핵심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대한 영적인 무지입니다.
영적인 무지는 영적인 무감각을 가져오게 합니다.
영적 무감각한 상태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이미 단절되어 있습니다.
영적 무지는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십자가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십자가를 부정했습니다.
제자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십자가에 대한 부정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
왜 그들을 깨우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 안에는 세속적인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각오나 정신적인 각성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지금 당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빵의 메시야를 찾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는.. 그들의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절박한 시간에, 쿨쿨 잠을 잔다는 것은.. 결국 영적 무지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부정입니다.
중요한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현실의 삶에 살아다가 보면 십자가는 사라져 버립니다.
형통의 복음에 취하면 십자가와 나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예수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배가 부르면 영혼은 잠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마귀가 거는 시험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거부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말고 다른 길로 가라고 속삭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돌들이 떡이 되라고 하는 것도, 빵의 메시야가 되라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극히 당연해 보이고 논리적으로 들려집니다.
▲오늘도 십자가는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영적인 잠입니다. 영적인 잠에 빠지면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가장 무서운 상태입니다.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그 상황에 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할 때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주님이 왜 저토록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시는지 전혀 모릅니다.
좋은 길이 있는데 왜 지금 저렇게 죽느냐는 소리를 계속하느냐고 오히려 답답해합니다.
영적인 무지가 무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 속에 절규하는 기도를
그들은 듣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집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영적인 무지로 오직 나 자신의 문제에만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는..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지, 사후 처리가 아닙니다
본문 막14:37절에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님은 잠든 제자들을 계속 깨우십니다. 주님이 무리한 요구를 하신 게 아닙니다.
한 시 동안만이라도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은 언제 찾아오는 것입니까? 깨어 기도하지 않을 때입니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수많은 시험이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나 잠들고 있는 동안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시험에 들기 전 전조증상이 있습니다.
기도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대충합니다.
깨어 있지 않다는 것은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영적으로 둔감하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이 나서 알람이 울리는 데 못 들으면 큰 사고가 나고 맙니다.
신자가 시험에 들면 결국 혹독한 대가를 치릅니다.
때로는 타락으로 인해 삶 전체가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문제가 터지기 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는 사후 처리 방식이 아닙니다. 사전 방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41-42절에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 상황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닥치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 나를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상황이 지나고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터지고 난 다음에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터지기 전에 대비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역할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기도하기 딱 좋은 시간과 장소입니다.
최적의 장소와 시간에 그들은 실패하고 맙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이 기도하라는 사인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미루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기도의 부담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시험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때를 놓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그다음 나를 깨우는 것은 혹독한 시련의 바람입니다.
그 시련이 잠든 나를 깨우는 것입니다. 그때는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밀려 떠다녀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되 기도에 민감하게 하시고
기도의 때를 알게 하시고 사건과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우리를 기도하게 하심으로
위기를 뛰어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42절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탄의 충돌이 일어나는 거대한 시간입니다.
가룟 유다가 배신자의 모습으로 스승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잠을 자는 제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곧 예수를 두고 도망칠 제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대할 것이 없는 제자들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관계 정리를 하고 끝낼 수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십자가 이후에도 다시 찾아주십니다.
이미 막14:28절에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제자들이 도망친 곳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은 제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살펴보면 한심합니다. 너무도 무기력하고 연약합니다.
마지막까지 실패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도 예수를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칩니다.
사실 이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제자들 자체만 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절망해야 합니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우리 자신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나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졸고 또 조는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만나주시고 회복해주신 주님,
그 주님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오늘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들려지는 음성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도 예수를 얼마든지 부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팔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깨어 있는 신앙, 깨어 있는 기도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듭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영적인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마음의 소원대로 따라갈 수 있는 성화된 몸으로 훈련되길 바랍니다.
경건의 능력이 몸에 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저항하고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신자가 되시길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