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0편은 전쟁에 나가기 직전의 시입니다. 이 시는 전쟁이 나면 출정했던 왕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고대사회는 전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전쟁사(史)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끝도 없는 전쟁을 치릅니다. 그런 전쟁 속에서 하나님께 승리를 간구하는 기도가 이 시 안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6월은 보훈의 달입니다. 세계사에서 유명했던 6.25를 경험했고 지금도 전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은 휴전상태입니다.
핵문제나 이념의 전쟁은 아직도 뜨겁습니다. 이런 전쟁 외에도 경제 전쟁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입시전쟁을 치르고 있고, 젊은이들은 취업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들은 생존의 경쟁, 생존전(戰)에서 아주 힘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은 위기, 위기상황을 말합니다. 전쟁의 직전은 두려움, 불안정합니다. 왜냐면 전쟁의 승패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격언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해라. 그리고 바다를 항해할 때는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할 때 세 번 기도하라!” 미래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함 때문입니다.
전쟁 직전은 마치 폭풍전야와 같습니다. 전쟁의 관건은 승리입니다. 승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시편에는 승리를 기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7절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병거, 말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전력이었습니다. 2차대전으로 치면 기갑부대입니다. 전쟁의 때에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가장 위기의 순간에 어떤 것을 의존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가? 내가 믿을만한 것을 믿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합니다. 눈에 보이는 전쟁을 치르는 사람에게 병거, 마차는 매우 중요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준비하지 않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하는 그런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군사적인 준비,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전략이 있어야 하고, 전술이 있어야 하고, 또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입니다.
▲본문 7절의 하반절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전쟁의 특징은 성전(聖戰), 거룩한 전쟁이라는 겁니다. 성경 속에 전쟁이 참 많이 나오고, 전쟁에 대한 이해, 해석이 첨예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성경 속의 전쟁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신이다.”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전쟁 속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다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 전쟁 속에서 개입하시면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군사적인 전력만으로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전쟁사(史) 속에서 나타나는 교훈입니다.
7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검증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군사력과 상관없이 주변의 강국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군사력을 의지하면 주변의 나라들이 강세를 띠면서 이스라엘을 지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것은 군사적인 면이기보다는 영적인 면이었습니다.
출애굽 역사와 가나안을 정복하는 역사를 보아도 전력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결정이 났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이기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면 정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 마병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다윗은 아주 큰 실수를 한 경험이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인구조사였습니다.
인구조사를 신하들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행합니다. 그 인구조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노(大怒)하십니다. 전염병으로 백성 7만 명이 갑자기 죽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대노(大怒)하셨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강력해진 군사력을 확인하여서 인간의 힘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더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외적인 조건들과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그 순간 하나님이 민감하게 그 부분을 지적하시고, 징계하셨습니다.
다윗이 칼의 힘을 믿고 의지하려고 했던 것을,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와 교회가 세상의 힘을 의지하는 것, 세상의 힘을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불신앙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속기 쉽습니다. 우리가 자주 속는 것은 자꾸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할 것으로 내 주변에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줄을 만들고, 힘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해서라도 엮어 자신의 힘을 쌓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존현장은 매우 치열합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힘의 각축장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인맥을 만들고, 학맥을 만들고, 있는 줄 없는 줄 다 대야 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신자는 유혹을 받습니다.
성공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힘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공이 위험한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또 다른 전쟁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지 않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을 쌓으려고 하는.. 끝없는 전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힘을 가져도 더 많이 가진 자가 나타납니다. 그 순간 그 힘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것은, 전쟁에 외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데에는 물맷돌 하나면 충분했다는 겁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얼마나 명료하고 확신에 찬 태도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전적 신뢰입니다. 다윗은 무기의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의지했습니다. 거대한 물리적인 힘 앞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허공을 치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골리앗의 단칼에 죽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어린 소년이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 거대한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넘어뜨리는 사건은 하나의 동화가 아니라,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삶의 원리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여호와의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볼품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그리고 대상이 거대한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을 늘 받습니다. 힘을 자꾸 숭배하려고 합니다. 어디를 가나 힘자랑을 하는 겁니다. 누가 가장 강자인지 경쟁합니다.
센 사람에게 줄을 대기를 위해서 애를 씁니다.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 힘 앞에 위축을 당하고 그 힘을 숭배하려고 합니다.
철학자 몽테스키외의 <로마의 성공, 로마제국의 실패>에서는 거대한 로마제국이 몰락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로마의 번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부족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이 쌓일 때, 잘될 때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은 잘될 때 자신을 신뢰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신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망하는 길로 가는 첩경이라는 겁니다. 가진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세우고 그 힘으로 다시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아사 왕의 기도가 유명합니다. 역대하 14장 11절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도와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이 정직한 고백, 이 아사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삼하22:30절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다윗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적진을 향하여 달려가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성벽을 뛰어넘는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 가운데 무엇을 의지하느냐가 우리의 삶의 전쟁에서 승패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요인임을 알고 내가 가진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전쟁 전의 첨예한 폭풍전야의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시20:2절과 3절을 보면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셀라)”고 합니다.
왕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지금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자신의 힘의 유한성, 상대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준비할 게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계획으로 밤잠을 지새워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소제와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적군들이 지금 반대편에서 깃발을 흔들어 대며 진을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성소에서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저쪽에 있는 군사들의 적군이 아닌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이것을 낭비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저기에 에너지를 빼나?
지금 전쟁을 치러야 할 첨예한 시간에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예배적 행위는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면 낭비로 보일 것입니다.
▲마르바 던(Marva Dawn)은 자신의 책 <고귀한 시간 낭비, 예배>에서 예배에 대해서 “거룩한 시간 낭비”라고 정의합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예배가 낭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젖혀두고 예배를 드림으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위험한 일이 있어도, 아무리 중대한 일이 있어도 우리는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세상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빠져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하므로 우리의 시야에 하나님만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드리는 제물과 시간들은 낭비가 아닙니다. 예배는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기억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전선의 저편에는 새까맣게 적군이 진을 치고 진군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 두려움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차 있으면 그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시편의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가 예배입니다. 시편의 곳곳에서는 예배의 처소에 대한 동경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배를 열망하는 모습들이 시적 표현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까? 폭풍 전야와 같은 인생이고 수없는 전쟁과 같은 미래를 점칠 수 없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몰아내고 이기게 하는 모든 에너지가 예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린다면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때 우리는 초월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나를 가두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초월적 경험을 합니다. 왜냐면 초월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사로잡힐 때 세상이 주는 힘에 굴복당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주목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만사를 젖혀두고 하나님에게만 주목하기로 하는 시간을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 시간은 결코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와 번제는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전쟁에서 승리케 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시20:4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모든 계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한국을 위해서 기도할 때 바로 이런 부분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이야말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 민족은 시련의 민족이었습니다. 꽤 많은 세월이 지나 우리가 망각했지만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기, 6.25를 겪은 시련의 민족이고 여전히 열방의 틈에 끊임없이 견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국민의 한사람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야곱의 하나님일까요?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전쟁터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환란의 연속이었고 싸움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셀 수 없는 위기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러 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야곱의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치열한 환란 가운데 도우셨던 하나님, 끊임없는 위기 속에 개입하시고 함께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특히 보호를 강조할 때 ‘야곱의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다윗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압니다.”
여기 ‘구원하신다’는 이 단어는 원어로 보면 완료시제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이미 전쟁을 이겼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 확신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쟁을 치르기 전에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믿었던 것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다고 믿고 기름 부은 자를 구원하신 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많은 일을 하시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구원입니다. 건져내시는 하나님, 구출하시는 하나님, 살려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동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응답은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그 행동은 구원이라는 겁니다.
성경 가운데 시편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 *‘구출’을 의미 “구원”이라는 단어가 로마서나 다른 복음서에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시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환란 가운데서 건져 올리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다윗이 믿고, 구원을 이미 이루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확신에 찬 시를 지금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서 구원과 승리를 확신하며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누가 기도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면 알수록 기도는 강렬해집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인은 승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 늘 앞장을 서면서 기도하는 왕이었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는 전쟁에 능한 군사였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속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기에 다윗은 기도하였습니다.
한 치도 앞을 전망할 수 없고, 기도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를 배웁니다. 교실에서 배운 기도는 허약합니다.
안정된 직장, 문제없는 삶에서 기도를 배우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한 삶의 희비곡선을 건너고 불안정한 직장 등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이는 한가운데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구축한 권력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5장 10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바로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1절과 5절과 7절 세 번입니다. 시편은 여호와의 이름에 주목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요새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성루시요” 등의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것은 모두 구원을 상징하는 단어들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언급된 단어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험이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광야를 피신할 때 수없는 바위들이 있었습니다. 그 바위에 그가 숨었고 그곳은 은신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바위시다” “반석이시다”는 말은 자신의 삶을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바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제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7절 하반절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할 이유입니다.
다윗의 왕권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번영이 목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통하여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을 위한 싸움이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전쟁은 모두가 하나님을 위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 있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 악착 같이 싸우는 전쟁은 끝도 알 수 없는 전쟁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 일은 덧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령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나 사업을 할 때 싸워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생존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와 지도자를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위엄과 권세 아래 굴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순복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한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그 일을 위하여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20장은 기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시편 자체가 기도의 책입니다. 시편 자체가 찬양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의 언어는 기도여야 합니다.
본문 9절 마지막 구절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 우리에게 응답하소서”입니다. 마지막 간구하는 것은 딱 하나, 승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구원하십시오! 그리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언제나 갈망해야 하는 단어가 이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폭풍전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속수무책이고 예측불허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 우리가 가진 힘으로 이 전쟁에서 싸워 이길 자신이 있는가?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환란 날에 도우시는 야곱의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전쟁 같은 인생 속에, 수시로 변하는 끊임없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재주와 능력만을 의지한다면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고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가 우선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십니다. 전쟁에 능한 신이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승리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이름이 높아지는 일에 생명을 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승리케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