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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0편 왕의 대관식을 축복하는 축시

LNCK 2022. 5. 9. 18:43

◈왕의 대관식을 축복하는 축시           시20:1~9            여러 설교 정리

 

이 시편이 다른 시편과 다른 것은

대명사 ‘내’가 아니라 ‘네’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의 표제가 ‘다윗의 시’인데,

정확하게는 ‘다윗을 위해 회중이 하나님께 드린 시(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만 다윗의 시, 회중의 기도에 대한 다윗의 응답)

 

이 시편은 전쟁에 나가는 왕을 위해 드린 기도로써,

신하들 또는 백성들이 드린 중보기도입니다.

기록은 아마 전쟁을 마치고 나중에 되었겠죠.

 

일부 학자들은 ‘왕의 대관식’때 불리웠던 시라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전쟁은, 그가 닥칠 미래의 전쟁에 대한 승리를 기원하는 형식이라는 거죠.

아무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는 왕을 위해 온 회중이 도움을 구하는 기도 (1~5절)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환난 날'은 대적들의 공격이 임박한 때를 일컫는데

이 때는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하는 때입니다(18:6).

 

2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성소에서 ... 시온에서’

병행법이죠. 성소와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데,

이스라엘의 승리의 원동력이었습니다.(수4:7, 11, 18, 삼상4:3-5)

 

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소제...번제’ - 이 제사들은 전쟁에 나가기 직전에 드린 것으로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제는 번제를 드린 후 반드시 드리는 곡물 제사로 번제와 거의 동시적으로 드려졌습니다.

 

음악적 지시어인 ‘셀라’는 그 뜻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쉬어라’,

‘(곡조를) 올려라’의 의미입니다.

 

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 '마음의 소원'이란 임박한 전투에서의 승리를 뜻합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자기 욕심, 자기 야망의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너의 승리로 인하여’ - '승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슈아'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이란 말은, 광범위하게 ‘전쟁에서의 승리’도 포함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대적 마귀에 대한 승리도 구원입니다.

 

‘기발을 세우리니’

적들의 요새나 성(城)에 자기들의 기를 꽂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병행법으로 보면 '개가를 부르며'와 병행되므로

‘승리’에 대한 시적인 표현입니다.

 

 

◑승리의 확신 (6-9절)

 

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본 구절의 '구원'이란 표현은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내가 아노니’ - 본 구절에서만 인칭이 바뀌었습니다.

즉, 지금까지(1-5절)는 기도의 주제가 1인칭 복수였으나

여기서는 1인칭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뀌어진 화자가 누구인가요?

회중의 기도를 다 들은 본시의 저자인 다윗 자신입니다.

 

지금까지 회중의 기도는 다윗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이에 대한 화답을 다윗 왕 자신이 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병거'와 '말'은 아람 연합군의 병력을 대표합니다(삼하8:4;10:18).

 

이와 달리 이스라엘에는 병거와 말이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주로 산지로 형성되어 말을 사용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신정국가의 왕에 대한 계명에, 말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이죠(신 17:16).

그러나 다윗 이후 솔로몬과 다른 군주들은 말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는 상반절과 대구(對句)를 이룬다.

대적들은 병거를 의지하나,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할 뿐입니다.

여호와의 참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병거는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8장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다윗이 소바왕 하닷에셀과 전쟁을 하여, 그로부터 마병 1700명과 보병 2만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마병이 1700명이라 함은, 말도 1700마리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1700마리면 이스라엘의 국방력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중에서 100마리만 남기고서 나머지 말들은 발의 힘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전쟁을 말의 힘, 즉 무기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겠다는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삶과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그들'(대적)과 '우리'가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엎드러진다'와 ‘서도다’도 대조되어 있습니다.

 

‘비틀거린다’는 서 있음을 전제하며,

‘바로 서도다’는 움츠리며 비틀거림을 전제하는 말이죠.

 

따라서 본 구절은 전쟁초기의 상황이 대적들에게 훨씬 유리하나

전세가 역전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왕은 응답하소서’ - '왕'은 여기서 하나님입니다.

사사 시대 이후 왕정(王政)이 시작되어 명목상으로 다윗 계열이 왕이 되었으나

이스라엘 사회의 실제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습니다.

 

 

◑적용 "십자가 방식의 승리가 안전한 승리"

 

여러분, 아이들에게 시편을 좀 외우게 하시기 바랍니다.

‘너 시편 한 편만 외우면 10만원 줄게’ 해봐요.

10편 만 외우면 놀라운 자산이 될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 몇 십편 외웠는데

20편 외우면 200만원인데, 200만원이면 200억 재산보다 더 귀한 겁니다.

 

재산을 가지면 인격이 무너지고 타락할 수 있지만

시편을 여러분 자녀의 가슴속에 심어 놓으면, 이 말씀은 항상 살아나는 겁니다.

내 자녀에게 일평생 능력이 될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외우려고 해도 안 되지요.

그러니 어릴 적에 외워 두면, 평생 80세가 되어도 잊어버리지 않을 거니

10만원을 상금(장학금)으로 내 걸고 외우게 해도.. 좋은 신앙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펀 글)

 

▲1. 왕을 존대하라     벧전2:17

이 시는, 지난 2천년 역사를 보면,

왕의 대관식이나 감사절의 설교에서 많이 사용된 본문이며,

이 중에는 왕에게 아부하는 엉터리 설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왕들 중에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설교를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폭군을 성군이라고 부르며, 폭군 앞에서 쩔쩔맸던 것입니다. 

 

그들이 통치자의 비위를 맞추는 설교를 할 때, 본문 시20편이 인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훌륭하고 선한 통치자들을 위해서도, 본문이 인용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항상 정권에 대해서 좀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본 시20편을 읽기가 좀 꺼려질 수도 있습니다.

너무 통치자에게 아부하는 분위기가, 이 시20편 전체에 흐르니까요.

 

그리고 혹시 그가 아프리카나 제삼세계의 독재자, 전체주의 국가의 통치자라면,

우리가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오늘날 그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을까요?

 

△페르시아에 고레스 왕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귀환시킨

‘고레스 칙령’을 발표한 왕으로서, 성경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 *Cyrus the Great

 

그런데 성경에는 그를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라고 까지 극찬하고 있습니다.

사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기름부음’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시는 왕, 선지자, 대제사장만 받는 것인데

이방 왕인 고레스를 ‘기름부음 받은’이라 칭한 것은.. 혹시 아부가 아닐까요?
성령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 ‘아부’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부터 외람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사 왕 고레스가 특별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믿음이 있었다든지, 믿음이 좋았다든지.. 하는 힌트는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다른 이방 왕들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을 포로귀환 시킨 것은, 여호와-신앙심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제국을 잘 다스리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다른 민족들도 똑같이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그 외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목적’이 덤으로 있었습니다.

 

그럼 성경이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자기 제국을 위한 유화정책을 펼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배후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그를 통해 펼쳐나가시며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위해서, 그를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있든지/없든지에 관계 없이요.

 

왕과 통치자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만이 의롭고 공평하고 정확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왕과 통치자를 판단할 때, 자기가 낀 안경에 의해서 이러쿵 저러쿵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때로는 많은 경우, 가장 공평하다는 언론의 판단도 편향적인 때가 많습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보더라도, 통치자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아직도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제 각기 자기가 낀 안경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성장한 배경에 의해서 판단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사실입니다. *단2:37

우리는 나의 호/불호에 관계 없이, 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마땅합니다.

거기에 도전하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딤전2:2등

 

그가 믿음이 없더라도... 바사 왕 고레스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기름부음 받은 고레스’라고 칭하지 않았습니까. 사45:1

어쨌든 그가 한시적(일시적)이라도,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포로귀환’을 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안경과, 나의 성장 배경에 따라서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호/불호를 선택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신중하게 그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든지간에!

 

무조건 아부가 답이란 뜻은 아니고요, 적어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역대 통치자들 누구라도요!

 

우리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가 왼쪽이든지 오른쪽이든지, 매파든지 비둘기파든지 상관없이

그를 축복하고, 중보기도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의무입니다. 딤전2:1~2

나의 호/불호에 상관없이요. 자기 색깔을 계속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요.

 

▲2. 십자가 방식의 승리가 안전한 승리

 

5a절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우리 깃발을 세운 장대, 깃발의 색깔, 그리고 깃발의 장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요?

깃발을 매단 장대는 그분의 십자가,

깃발의 색깔은 피와 물,

그리고 깃발의 문장도 십자가입니다.

 

"승자의 저주"라는 말을 아시죠?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승리가 승리가 아니고, 오히려 승리가 저주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일례로 세계1차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 중심의 승전국들은

독일을 전범국으로 몰고, 도저히 갚기 어려운 천문학적인 전쟁배상금을 부과했습니다.

국경선도 많이 축소시켰다고 합니다.

  

이에 독일은 결국 히틀러를 중심으로 규합하게 되었고, 절치부심하며 다시 힘을 키워서

자기들에게 모욕과 무거운 배상금을 부과한 나라들에 대해서 다시 보복전쟁을 일으킨 것이 2차대전이었죠.

 

1차대전이 끝나고 (1914~1918) 얼마 되지도 않아, 21년 후에

2차대전이 발발해서 (1939~1945)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이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런 역사의 교훈 때문이었을까요? 승전국인 미국은 (1차대전 때 와는 달리)

마셜 플랜 Marshall Plan 또는 유럽 부흥 계획 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을 세워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황폐화된 유럽을 재건하는 일에 적극 도왔습니다.

거기엔 독일도 수혜국으로 포함되어 있었고, (원래 취지는 서유럽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목적이었다고 함)

 

어쨌거나 수혜국인 독일도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독일도 소위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나라를 재건했고, 이제 유럽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죠.

아니었으면, 독일이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적대국으로 현재도 남아있을 뻔 했습니다.

   

본문 시20편은 '왕의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적군을 묵사발 내어버리는 승리'를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승자의 저주'에 휘말린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이긴 것 같았는데,

결국은 둘 다 지는 게임이 되고 맙니다. 윈-윈이 아니라, 패-패가 되고 만다는 거죠.

 

그래서 본문을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십자가 방식의 승리, 내가 죽는 방식의 승리, 남도 살리는 방식의 승리'

를 추구해야 ... 진정한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역적으로 몰리면 3족이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왜 3족까지 멸해야 했나? 너무 심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만

그 이유 중 한 가지로, 그 자손이 나중에 '호랑이 새끼가 커서 보복할까봐, 그게 두려웠나' 봅니다.

그러니 아예 씨앗까지 다 멸해야 했던 것입니다. 전형적인 '십자가 방식의 승리'가 아닌 거죠.

 

오늘 내가 승리하고 있는 분야는 무엇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십자가 방식의 승리를 추구해야

'안전한 승리'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하여 '원수도 친구로 삼고, 내 동역자로 삼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내 주위에서 세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이겼어도, 그를 섬기며

그의 체면을 세워주고,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각오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나를 도와 주십니다!

    

▲3. 승리는 무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https://blog.daum.net/rfcdrfcd/15980007 - 이 설교를 참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