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주시는 것은 한 가지 조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줄 때!
어쩌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직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일은 본문 산상수훈 말씀은 아주 심플하지만 대단히 파워풀한 말씀입니다. 성경 66권을 저자가 직접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요?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 마7:12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여러분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이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이 나에게 예의를 좀 갖춰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이 나에게 좀 은혜를 베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너, 네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대해줘라!'
▲저는 굉장히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합니다. 경우가 밝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교양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제 마음이 상하고 '저 사람은 인격이 좀 덜 된 사람 같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그렇게 제 속으로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게 싫기 때문이죠. 그런데 정말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되지 않겠는가? .. 이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게 66권의 전체를 요약한 말씀이라고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남의 너에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너도 그렇게 남에게 해라'
'남이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싫으면, 너도 그런거 하지 말아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죠? 바로 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마7:14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죠.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문맥상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해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문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런데 이 문을 찾는 자도 적고, 들어가는 자도 적다! 그러니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게 사실은 제자들의 질문이었지 않습니까? 눅13: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주님 말씀을 듣자하니, 구원받을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겠네요' 이 말이거든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하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사실 충격적인 말씀이죠. 이 말씀에 대해서 설명할 시간은 오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문맥이 아까 말씀하신 마7:12절과 연결되는 문맥입니다.
그래서 그걸 연결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기를 힘써라.'
힘써라! 힘쓰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make every effort '무지하게 힘써라' 그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살기를 원해도, 그렇게 못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까 제가 하버드의 로버트 윌딩거 교수의 연구 조사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까?'
그 교수는 그래서 조사 결과를 다 발표한 다음에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생은 짧아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 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순간일 뿐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회를 처음 방문하셨던 어떤 분의 얘기를, 설교 서두에 나눴습니다. '교회 오면, 왜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교회를 다니라고 할까요.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오면 제 눈에 하나님은 안보입니다. 교인들만 보입니다. 그분들이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분의 말씀이, 제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참 쉽지가 않구나.
그런데 오늘 목사님의 설교에서 저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겠다. 그러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은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도 않은 분입니다. 제가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오래 전 저희 교회에 한 성도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절대 기대할 대상이 아니더군요.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해보셨잖아요. 사랑이 됩니까, 되던가요? 안 됩니다! 해보니까 일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제일 쉽다고 생각했어요...
'왜 예수님이 명하신 사랑이 이렇게 힘들까?' 제가 제 자신을 한번 돌아봤어요.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내 안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가 없구나!'
내 안에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나요? 내 안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용서도, 받아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저와 여러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가장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영원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로 용서받은 죄인들 아닙니까?
'우리 안에 그 놀라운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 채워지는 길 밖에는 없겠구나!' '그 길만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길이겠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은혜도, 죄로 찌들대로 찌든 우리 자신이 용서받은 바로 그 십자가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겠다.
날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난 여전히 이웃을 미워할 수 있을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나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씻어주는 피를 바라보면서 난 용서 못해!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제 자신이 내린 결론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기 사랑!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자기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이것마저도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죽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달리기 입니다.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기다림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사인 저도, 늘 십자가앞에 엎드려 울 수밖에 없어요. 안 되니까요.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비와 궁휼을 구할 수밖에 없고 십자가를 붙들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바라봅니다.
제가 젊어서는 왜 그렇게 성도들을 그렇게 내리쳤는지요? 왜 그렇게 못 사냐? 왜 순종 못하냐고...
근데 이제 제가 좀 철이 되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그냥 힘들게 사는데.. 제 설교가 특히 듣기에 힘들었지 않습니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런데도 떠나지 않고 붙어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랑마저도, 용서마저도..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거,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또 엎드립입니다. 매일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합니다. 극휼을 구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용서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이게 저의 기도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이 하나 있는데, 가사가 이렇게 됩니다.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주여 내 영을 고요케 하사 십자가를 품게 하시며 주여 내 영을 잠잠케 하사 십자가로 만족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