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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7장12 힘든 세상을 살아낼 힘

LNCK 2022. 5. 10. 14:31

◈힘든 세상을 살아낼 힘           마7:12           2022.05.01.출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산상 설교에 가장 핵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참 어려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직접 어려운 성경을, 이렇게 알기 쉽게 요약해 주신다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을, 우리말에는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영어로는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마7:12

이것이 'sum up 완전히 요약한'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하죠. 
'구약성경을 요약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표준 새번역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 

어떤 책이든지 책을 쓴 저자는, 그 책을 쓴 의도가 있는데 
그 본래의 뜻이 있는데 
성경을 기록한 하나님의 본 뜻은 이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지난 주일에 저희 교회를 처음으로 방문해 주신 어떤 분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드신 여자분이셨는데, 그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천주교회도 다녀보고, 불교도 다녀보고, 교회도 다녀봤는데 
제가 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듣기 힘든 말이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시는 말씀이에요. 
'어느 교회를 방문했더니,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교회를 다녀라' 

근데 이분이 그 말을 듣고, 몹시 마음이 불편했다는 거예요. 
왜냐면 자기는 교회에 오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는 교인들만 보이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하나님을 보여주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맞아, 우리가 사람을 보면 우리는 신앙생활 못 해, 하나님만 바라 봐야 돼!'
저는 그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완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분입니다. 
이분의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이 되어서 떠나질 않습니다. 

'맞다. 이분의 말씀이 너무나 맞는 말이다.' 
그리고는 얼마나 내 자신이 부끄러운지... 

'내가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구나, 
우리 교회가 이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죠.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또 갈6:10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성도님들의 고민을 들어보고, 그분들의 기도제목을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그분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늘 "관계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아픔, 상처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실망, 아픔, 슬픔.. 그리고 고통 
아마 교회를 다니며, 이런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돈을 잃어버리는 것,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 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 믿었던 사람, 
그들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었던 사람이었기에, 또 내가 내 마음을 다 내어주었던, 사랑했던 사람이었기에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더욱 크고 깊고 오래갑니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은, 나의 행복, 나의 기쁨을 앗아갈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삶을 송두리째 파멸로 몰고가기도 합니다. 

▲어제 저는 어느 장로님과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케냐 사람들, 현지인들이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케냐인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그러는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교회에 다니는 바리새인같은 교인들이 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왜냐면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사람 같은데, 결국 비수를 꽂더라는 거죠. 

현지인들은 도둑질은 할 지언정, 거짓말은 할지언정, 비수는 꽂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잘 모르지만, '이분은 교회에서 깊은 상처를 받으셨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목사인 저도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받은 상처는, 모두가 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들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한 번은 제가 교회에서, '목회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랬더니 
우리 성도한 분이 '목사님, 성도하기도 힘들어요' 라고 대꾸하셨어요.

'그분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저 같은 부족한 목회자를 만나서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사실 제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예수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스스로 잘 믿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교인들 이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제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었던 분들은 
안타깝게도 목사님들 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면 돌아보면, 제 자신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제가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니까, 젊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젊어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제 자신이 성숙하지 못해서, 제 그릇이 너무 작아서 
상대방의 연약함을 품지 못했던 것.. 그게 그렇게 후회가 됩니다.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항상 내 입장에서 생각했구나.. 
내 관점에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했구나..' 라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제가 그렇게 괴롭습니다. 

이제 목회한 지 올해 23년째 입니다. 
왜 이제야 나는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왜 그때 내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제가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때 그 성도를 내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내가 무릎 꿇고 그 성도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 내가 지금 깨달은 이것을, 그때 내가 젊었을 때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목사인 저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함이 많은 사람인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그래서 나는 아프다고... (물론 아프죠)

그렇게 내 자신만을 생각하는.. 내가 얼마나 참 부끄러운 존재인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을 해도,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누가 제게 상처를 준다면 
저는 여전히 아파할 것 같습니다. 또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고, 정죄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과 죄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이렇게 깊이 들여다보면 
제 안에 철저히 이중적인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실수하고 내가 잘못할 때는, 
내 실수와 잘못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용납해 주기를 바라는데 
그런 내 자신이 분명히 내 안에 있는데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이 실수하고,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나는 그를 왜 이해하고 용납해주지 못할까?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이 내 죄를 덮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용서해 주기를 그렇게 바라면서도 
왜 나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 할까요?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 옛날에 제가 존경하는 박목사님께서 아주 낡은 봉고차를 몰고 다니실 때가 있었습니다. 

하도 봉고차가 낡았는데도, 그렇게 운전하고 다니시니까 
그것을 보던 몇몇 성도님들이 돈을 모아서 
'우리 박목사님에게 새 차를 사드리자' 이제 그렇게 하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새 차를 사주셨어요. 그런데 새 차를 선물받은 지 얼마 안 돼서 
그 차를 운전하던 청년이 사고를 내는 바람에, 새 차가 망가진 겁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 새 차를 사주신 분들과 식사하기 위해 
만나러 가기로 한 날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죠. 
그 사고를 낸 청년은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청년은 또 두려웠다고도 합니다. 
왜냐면 그 날 만나기로 한 분들 중에 한 분이, 아주 성격이 불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은 '난 이제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분들을 만나러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분들은 새 차가 망가진 것을 보고 흥분해서 
'목사님, 이 차 어떻게 된 겁니까?' 라고 당연히 물었겠죠. 

그때 박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운전하다가 그만 실수를 해서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청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제가 그 청년이 된 기분이에요. 
그러면서 제 안에 세 가지 감정이 동시에 교차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1) 남의 허물을 가려주시는 박 목사님 
그런데 그냥 가려주시는 게 아니라, 
그 남의 허물을 내 것으로 돌리셨어요.

그 목사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한 감동, 

2) 동시에 마치 제가 당사자가 된 느낌이에요.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나의 허물을 가려 주신 그 박목사님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그런 사랑의 빚을 진 것이다.. 

3) 그런데 또 한 가지의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내가 만일 박목사님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운전한 청년을 많이 나무랐겠죠.
제 자신을 생각할 때 그러면서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1938년에 하버드에 대해서 성인 발달 연구팀이 대규모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연구의 목적은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그들은 미국인 724명을 대상으로, 7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사람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그들의 가정생활, 그들의 관계, 그들의 건강, 그들의 직장생활.. 
모든 것을 다 파악하는 대규모의 프로젝트 였습니다.   *관련기사 

이 연구의 총책임자였던 하버드대 교수 로버트 윌딩거 교수는
하버드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였고, 하버드대 성인개발연구소 소장이었습니다. 
이 분은 하버드 대가 진행하는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습니다. 

이 교수는 이 방대한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1938년부터 우리는 724명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하버드대 학생도 있었고, 보스턴 빈민촌에 사는 소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75년 간의 연구를 통해 깨달은 것은 
인간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좋은 인간 관계 였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인간 관계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출신지, 직업, 재산.. 이런 것들이 행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윌딩거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1) 첫째 사회적인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좋은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행복하고, 더 오래 살아 있다는 것이죠. 

반면에 고립된 생활을 한 사람, 그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재정상태에 상관없이 
행복감을 훨씬 덜 느끼고, 건강이나 두뇌 기능이 일찍 감퇴해서 단명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2) 둘째, 친구가 몇 명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친구와 얼마나 질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3) 세 번째, 좋은 인간관계는 우리의 두뇌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사람의 경영은, 오랫동안 잘 유지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관계를 맺는 상대가, 내가 의지할 수 없는 상대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빠른 기억력 감퇴를 보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굉장히 두려워졌습니다. 
제가 빠른 속도로 기억력이 감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살면서 제 기억에 남는 격언이 있습니다. 
한때 제가 체이스 은행에서 발행하는 크레딧 카드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서 카드 회사에 전화를 하게 되면, 
연결된 전화에서 언제나 들려오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Right relationship is everything 옳은 관계가 전부입니다.' 
얼마나 성경적 말인지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른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도 올케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목회자로서 교회 안에 현실을 보면,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도 어렵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어려울까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정말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정말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이렇게 교인들이 힘들어 해 본 적이 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이 "이 힘든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런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레미제라블>이죠.
1789년 프랑스, 현실의 삶이 지옥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굶주림, 그리고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 민중들은 국왕 루이16세를 처형해버리고 맙니다. 

왕이 없는 나라, 프랑스는 공화정을 선포하지만 
굶주림을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민중들의 삶은 더 비참해지고 맙니다. 

치솟는 물가, 전염병, 술과 방탕에 빠진 가정들,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여자들, 부모로부터 버려진 고아 아이들.. 
이것이 당시 현상이었습니다. 

이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될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굶주린 누이와 7 명의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말도 안 되게 19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자기 인생을 다 망쳐버린 장발장, 

형기를 다 치르고 출옥했는데도, 전과자로 낙인이 찍혀서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받고 거리를 방황하며 살던 어느 날, 

갈 곳 없는 그를 따뜻하게 받아주고 
정말 정성껏 저녁을 대접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미리엘 신부님이었죠. 
얼마나 고마운 신부님입니까. 

이 신부님께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까? 고민을 해도 부족할 판국에 
장발장은 그날 밤 그 신부님 집에서 은 그릇을 훔쳐서 도망가다가 경찰에 붙잡혀 
다시 미리엘 신부님 앞에 서게 되죠. 

경찰이 묻습니다. '이 은그릇이 신부님 은그릇이 맞습니까? 
이 사람이 훔쳐달아나는 것을 우리가 붙잡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신부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을 하는데, 아주 우리 모두가 다 잘 아는 답변입니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은 그릇과 은 촛대를 모두 주었는데 
왜 은 촛대는 놓고 갔는가? 이 은 촛대도 가지고 가게!' 

이 대답에 충격을 받은 장발장, 그는 거기서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돼요. 
이름마저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고, 나중에 시장이 됩니다. 

그는 정말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결국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실천하며 사는.. 
그런 얘기들이 계속 되는 내용을 여러분 다 잘 아시죠. 

그때 그 프랑스의 극심한 고통과 깊은 절망,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그 가난속에서 
장발장을 바꾼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사랑과 용납이 아니었을까요! 

장발장에게 고통과 절망은, 삶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부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관문이 돼요. 

그에게 베풀었던 미리엘 신부님의 자비와 사랑은 
그를 거듭난 새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장발장의 죄는 절도죄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는 살인죄입니다. 

우리의 형벌은 징역형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형벌은 사형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시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형수들 앞에, 중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재판장님, 이들은 죄가 없습니다. 
이 모든 건 나의 죄입니다. 내가 바로 그 죄인입니다. 나를 처벌하시고, 이들을 살려주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1만 달란트의 죄값을 탕감받은 용서받은 죄인들이지 않습니까! 
평생 잊을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1백 데나리온어치 그 잘못한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자비를 베풀지 못합니다. 
당장 갚지 않으면 감옥에 쳐넣어 버리겠다고 그렇게 큰 소리를 칩니다. 

그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청천벽력 같은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이 악한 종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그리고는 마태복음에 계속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그리고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도 막11:29절에서 말씀하시죠.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주시는 것은 한 가지 조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줄 때! 

어쩌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아직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일은 본문 산상수훈 말씀은 아주 심플하지만 
대단히 파워풀한 말씀입니다. 성경 66권을 저자가 직접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요?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니라' 마7:12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여러분 이런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이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이 나에게 예의를 좀 갖춰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이 나에게 좀 은혜를 베풀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너, 네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대해줘라!' 

▲저는 굉장히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합니다. 경우가 밝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교양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제 마음이 상하고 
'저 사람은 인격이 좀 덜 된 사람 같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그렇게 제 속으로 그렇게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대하는 게 싫기 때문이죠. 
그런데 정말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되지 않겠는가? .. 이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게 66권의 전체를 요약한 말씀이라고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남의 너에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너도 그렇게 남에게 해라'

'남이 나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싫으면, 
너도 그런거 하지 말아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죠? 
바로 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 마7:14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죠.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문맥상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방금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해라'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문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런데 이 문을 찾는 자도 적고, 들어가는 자도 적다! 
그러니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게 사실은 제자들의 질문이었지 않습니까? 
눅13: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주님 말씀을 듣자하니, 구원받을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겠네요' 이 말이거든요.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답변하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13:24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사실 충격적인 말씀이죠. 
이 말씀에 대해서 설명할 시간은 오늘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문맥이 
아까 말씀하신 마7:12절과 연결되는 문맥입니다. 

그래서 그걸 연결해서 읽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기를 힘써라.' 

힘써라! 힘쓰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make every effort 
'무지하게 힘써라' 그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살기를 원해도, 그렇게 못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까 제가 하버드의 로버트 윌딩거 교수의 연구 조사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까?' 

그 교수는 그래서 조사 결과를 다 발표한 다음에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는 이분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생은 짧아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 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순간일 뿐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 교회를 처음 방문하셨던 어떤 분의 얘기를, 설교 서두에 나눴습니다. 
'교회 오면, 왜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교회를 다니라고 할까요. 
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오면 제 눈에 하나님은 안보입니다. 교인들만 보입니다. 
그분들이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분의 말씀이, 제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참 쉽지가 않구나. 

그런데 오늘 목사님의 설교에서 저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그렇게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겠다. 그러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은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도 않은 분입니다.
제가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오래 전 저희 교회에 한 성도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절대 기대할 대상이 아니더군요.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해보셨잖아요. 사랑이 됩니까, 되던가요? 안 됩니다! 
해보니까 일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제일 쉽다고 생각했어요... 

'왜 예수님이 명하신 사랑이 이렇게 힘들까?' 
제가 제 자신을 한번 돌아봤어요.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내 안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가 없구나!' 

내 안에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나요? 
내 안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용서도, 받아본 사람이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저와 여러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가장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영원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로 용서받은 죄인들 아닙니까? 

'우리 안에 그 놀라운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 채워지는 길 밖에는 없겠구나!' 
'그 길만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길이겠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은혜도, 죄로 찌들대로 찌든 우리 자신이 
용서받은 바로 그 십자가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겠다. 

날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난 여전히 이웃을 미워할 수 있을까?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나의 모든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씻어주는 피를 바라보면서 
난 용서 못해!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제 자신이 내린 결론입니다. 
저는 누구보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기 사랑!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것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자기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이것마저도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죽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달리기 입니다.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기다림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 길을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사인 저도, 늘 십자가앞에 엎드려 울 수밖에 없어요. 안 되니까요. 
할 수 없는 내 자신을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비와 궁휼을 구할 수밖에 없고 
십자가를 붙들 수밖에 없는 제 자신을 바라봅니다. 

제가 젊어서는 왜 그렇게 성도들을 그렇게 내리쳤는지요? 
왜 그렇게 못 사냐? 왜 순종 못하냐고... 

근데 이제 제가 좀 철이 되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그냥 힘들게 사는데.. 
제 설교가 특히 듣기에 힘들었지 않습니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런데도 떠나지 않고 붙어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랑마저도, 용서마저도..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거,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또 엎드립입니다. 매일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합니다. 
극휼을 구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용서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이게 저의 기도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이 하나 있는데, 가사가 이렇게 됩니다.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주여 내 영을 고요케 하사 십자가를 품게 하시며
주여 내 영을 잠잠케 하사 십자가로 만족게 하소서"

이렇게 찬양하시면서, 받은 말씀기억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