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시22편 나를 버리신 것 같아도, 제가 신뢰함으로 기도합니다

LNCK 2022. 5. 11. 16:13

◈나를 버리신 것 같아도, 제가 신뢰함으로 기도합니다 :1     시22:1~31   여러 설교 정리

 

▲서론 : 시22편은 "메시아시" 입니다

시편은 기본적으로 예언서는 아닙니다. 시편은 예배책이거나 기도서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처럼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은 아니지만 
시편의 어떤 말씀은 역사 속에서 왕을 통해 이뤄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시편 2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나오는데 
그는 다윗이나 솔로몬 등의 인간 왕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른다’ 2:8 는 말씀은 인간 왕으로는 성취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봐야만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그런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시편 16편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말씀도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질 말씀이고, 
왕이 승리해서 감사하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 왕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뤄진 말씀이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시편 22편도 그러합니다. 이 시는 다윗의 고난의 시편 중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저 그렇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는 한 사람이 경험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이 다윗이 병들었을 때 기록한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14절 말씀입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이같은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병들었을 때 쓴 시라고 보기에는 다른 구절들이 문제가 됩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병에 걸렸다면 이렇게 조롱당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것이 조롱당할만한 병이라 해도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12,13)라는 표현은 
주변의 공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 역시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편을 전쟁에 나갔을 때 많은 공격을 당해서 죽음에 이르기 직전 상황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다윗이 그렇게 많이 다쳤다면 성경 어느 부분에는 반드시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16절에서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기록되었는데, 
사람을 죽이려면 심장을 찔러야지 수족을 찌르다니요. 
다윗이 어떤 공격을 당해서 그런 상황에 놓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 시편에는 고난의 시편에 으레 등장하는 표현, 죄에 대한 고백이나 
원수에 대한 저주의 말도 없습니다. 즉 다윗의 생애에 있었던 어떤 경험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성경 주석가 보이스는 ‘시편 22편은 질병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처형에 대한 기록이다. 
특별히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문자 그대로 이뤄진 표현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뤄진 말씀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27). 

세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뤄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다윗을 통해 이뤄진 것은 일부이고, 이것이 온전히 이뤄진 것은 메시아를 통해서입니다.

  
△다윗이 죽은 것은 주전 970년 정도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주후 33년 쯤입니다. 최소한 1000년의 차이가 있는 기록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십자가’라는 처형 자체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범죄한 사람을 나무에 매다는 일은 있었으나 그것은 십자가 처형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로마인들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자기 인생 경험을 토대로요)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17,18).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았습니다. 
그들이 왜 굳이 그 옷을 제비뽑아 가져가려고 했을까요. 
당시는 오늘날처럼 옷이 흔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군병들이 제비뽑아 그 옷을 가져간 것은 성취된 말씀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 19:24). 

로마군인들이 그것이 구약성경의 기록임을 알았을 리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대로 행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성경의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 

마태는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조롱했는지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39-4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시편 22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셨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 

또한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그 말씀을 하셨다고 요한은 말합니다(요 19:28).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시22:15). 
이것은 극심한 갈증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죠.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2
히브리서의 기자도 22절의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습니다(히2: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1절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셔서 
말씀하셨고, 목마르다고 하셨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시편 22:31에 있습니다.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다 이루었다”와 의미상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은 시편 22편을 마음에 담아두셨음에 분명합니다. 어떤 분은 시22편을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을 참기 위해, 예수님이 마음 속으로 외우셨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비슷합니다.

 

◑본문 해석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표현은 고통의 심연(深淵)에서 울부짖는 듯한 외침입니다.

'어찌'란 표현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단순히 절망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하실지라도 신뢰의 표현)

 

'내 하나님...내 하나님' 이란 표현 자체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내 하나님이여'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다윗 자신에게 적용한 것으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나는 당신의 도움과 구원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본 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용하신 절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언약의 하나님의 신실성을 끝까지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Delitzsch).

 

한편 본절의 히브리어는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인데, 주께서 인용하신 절에는

'아자브타니'가 '사박다니'로 되어 있는 것은,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신 까닭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전승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이 시부터 암송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편 31:5에 이르러서 영혼이 떠나셨다고 합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 

혹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너무 숨쉬는 것이 힘들어서 암송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만
마음속으로라도 암송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본 절은 끊임없는 부르짖음과 애통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했음을 보여줍니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여기서 다윗은 고통 중에서도 불평하지 않는 신앙을 잘 보여 줍니다.

이는 설혹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실지라도

역시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이란 표현은

80:1, 99:1 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이란 표현과 매우 유사합니다.

 

다윗은 그룹위에 좌정하셔서 그룹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셔서 그 백성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연관짓습니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열조들의 신앙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스러운 과거를 회상함으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게 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하나님의 잠잠함에 대해 신앙적으로 항의한 다윗이

이제 인간들로부터 받은 수치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다윗은 1천년 후에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수욕을 앞서 당하고 있습니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머리를 흔들며’ - 이는 조롱의 몸짓입니다(44:14, 64:8).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조롱했던 무리들도 머리를 흔들었죠. (마27:39)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여기서 악인들은 그들 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사실은 다윗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이 순간에 다윗은 큰 모순을 발견하고서 애통하고 있습니다.

즉, 출생의 순간부터 다윗은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였으나

지금은 커다란 고난 중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신앙의 경험들은 지금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기에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본절은 9절과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런 신앙에 따라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님께서 속히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다윗은 탄식에서 간구로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바꾸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향해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악인들이 황소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의 황소들은 아주 난폭하며 야성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사자의 포효(咆哮)가 모든 들짐승에게 두려움을 주듯이

다윗의 대적들도 다윗을 삼키기 위해 큰 위협을 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 이는 다윗이 대적들의 핍박으로 인하여

완전히 탈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수7:5, 겔7:17, 21:12)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 본 절은 모든 뼈들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다윗 자신이 대적들의 위협 앞에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는 표현입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육체(뼈)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탈진해 버렸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원수들의 위협 앞에서 극도로 허약해진 다윗 자신이

마치 쉽게 부숴지는 질그릇 조각과 같이 회생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내가 목마르다'(요19:28)는 그리스도의 외침 역시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영육간의 상태를 점층법적으로 묘사해 오면서

본 절에서는 죽음 직전까지 몰린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을 진토에다 비유한 것은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창3:19).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 구절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다윗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피골이 상접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본 절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생애에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복음서의 저자들은 로마 군인들의 행위를 통해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직접 성취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7:35, 요19:24).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본절에서는 다윗의 탄식시에 전형적으로 언급되었듯이

또다시 절박한 상황 중에서 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장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내 유일한 것’ - 이는 영혼을 뜻합니다. 이 영혼이 '유일한 것'으로 표현된 까닭은

지금 다윗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형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 사자는 개와 같이 악인들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악인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단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에서도 사단이 우는 사자에 비유되었습니다(벧전5:8, 계10:3).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본 절은 히 2:12에서 그리스도께 적용된 구절인데,

이 경우에 형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일컫습니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본절에 언급된 세 절은 서로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함을

강조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21절).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이 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즉, 전에는 밤낮으로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으나(2절),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그에게 찬송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 이는 찬송시 내용을 일일이 하나님께로 부터 계시받아

작성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찬송의 모든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본 절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본 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의의 원리를 따를 때

영혼이 소생할 것을 예표합니다. (렘15:16, 겔3:1-3).

'여호와를 찾는 자'란 표현이 그와 같은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본절부터 마지막 절 까지의 내용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경험만을 기록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본시에서 예언적으로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이방인들은 우상 섬김으로 잊어버렸던 여호와를 기억하고..

여기서 '돌아온다'는 말은 곧 회개의 행위를 의미합니다(Briggs).

 

본 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창12:3, 28:14)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이는 이방의 나라들이 여호와께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그의 통치하에 있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이는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먹는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영적인 양식을 먹음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여기서 이들의 먹는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관련되어 진술되고 있습니다.

즉, 이 표현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만찬에 초대되어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을 암시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구원의 양식'(영적인 양식)을 먹은 부요한 자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임을 예언한 절입니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이에 대해 학자에 따라 견해가 서로 다르다.

1)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으로 간주하는 견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인간들이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예언

 

2) 이미 죽은 자로 해석 하는 견해.

이는 그리스도의 시대에는 죽은 자들도 죽음의 세계에서라도 그에게 절할 것이라는 주장

 

3) 죽어가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라는 견해.

 

4) 앞의 '풍성한 자'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4)의 견해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본절 전체가 부요한 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토'는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가장 '천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란 가난과 질병으로 스스로 살 수 없는 자,

즉 거의 죽어가는 인생을 의미할 것입니다(사9:1-4).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후손'은 직접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믿음의 자손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은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바라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모든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대대로 선포될 것임을 다윗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이는 한 세대가 새로 오는 다른 세대에게 구원의 도(道)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저들이 전하는 '공의' 란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는 자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신 의로운 행위를 의미합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즉, 이 절은 최종적으로 본시를 마무리 짓는 절로서

고난 당하는 다윗을 구원하신 개인적 사건 뿐만 아니라

모든 족속과 나라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全役事)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역사는 본시에서 예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본 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전 역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용 "나를 버리신 것 같아도, 제가 신뢰함으로 기도합니다"          -이 단락 출처-

   

시22편에서 다윗은 '어찌하여' 라는 탄식으로 시작하는데,

갑자기 찬송과 감사로 시편을 마무리하고 있어요.

하만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기뻐했던 분위기와 아주 비슷한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22편을 중요한 몇 구절을 보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을 보면 다윗은 처음에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만에 의해서 몰살당하기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거에요.   주1)

 

다윗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대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12절에 보면 이 대적은 바산의 힘센 황소같고요.

13절에 보면, 먹잇감을 향하여 포효하는 사자와 같고요.

16절에 보면 먹잇감을 두고 으르렁거리는 개들 같습니다.

 

다윗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대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겁니다.

곧 죽을 수도 있는 위기에 직면해 있어요. 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십니까?” 이렇게 탄식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그렇게 원망하고 탄식하고 있던 다윗이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22절을 보세요. (*시22편이니까 22절로 외우면 쉽죠)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2

갑자기 탄식에서 분위기가 바뀌어서 다윗이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겁니다.

 

자기만이 아닙니다. 23절에 보시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외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아요.

27절에 “땅의 모든 족속과 나라”에게도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그럽니다.

29절에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한 마디로 죽은 자도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노래하고요.

마지막으로 30절에 보면, 후손대대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그럽니다.

 

그러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누가 이 상황에서 다윗을 보면 이상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엉엉대며 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까 파안대소하고 있어요.

그러면 “저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울다가 갑자기 웃으면 이상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 다윗이 그러고 있습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셨나요?” 그러던 사람이, 22절부터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하니까 이상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연구를 하다보니까, 학자들도 이러한 22편의 내용변화가 신기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분위기 급변”의 시편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탄식에서 찬송으로, 원망에서 감사로 분위기가 급변하기 때문입니다.

 

▲1. 어떻게 1절의 탄식이 22절 이후의 찬송과 감사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분위기 급변을 보이는 다윗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탄식과 - 감사가 둘 다 있어요. 양면성이 있는 겁니다.)

 

무슨 얘기냐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시편 22편 1~21절을 “탄식시다. 혹은 탄원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글에서는 시편 22편을 탄식시라고 하지 않고 “의지 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시편 22편은 탄식형태의 문장으로 기록되었으나

이 시의 신학적인 내용과 성격은 탄식이 아니고

오히려 심각한 탄식을 할만큼 생의 절망과 죽음 직전의 곤경에 빠진 한 경건한 사람이

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용기를 얻고

다시 찬송과 감사의 시로 바꾸어진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탄식시가 아니라 의지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주장을 읽고 시편 22편을 다시 읽어보니까 맞는 것 같았습니다.

다윗이 절망의 상황에서, 그러니까 탄식의 상황에서, 22절부터 찬송으로, 감사로 급변한 것이 아니라,

아예 1절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 말씀을 통해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1) 대표적으로 1절을 보세요.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표현은 고통의 심연(깊은 연못)에서 울부짖는 듯한 외침입니다.

'어찌'란 표현은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은 단순히 절망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과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뢰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거죠.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이 애절한 표현 한 가지만 놓고 봐도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무한 신뢰와 사랑이 담긴 표현입니다.

일례로, 부부도 사이가 틀어지면 '그 인간, 그 친구, 그 자식' 이렇게 비하해서 부릅니다.

아니면 아예 호칭을 생략하고, 주어를 생략하고 대화를 하죠. 그를 언급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탄식의 밑바닥에는 결코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하나님이시지만(2절) 하나님 만이 거룩하시고(3절) 
의뢰할 수 있는 분이심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아버지를 계속 신뢰하겠나이다'가 1절의 행간에 생략되어 있는 거죠. (신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

(이런 예가 적절한지 모르지만) 애가 울거나 연인이 우는 것은, 뭔가 신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는 거죠.

정말 부모에게, 또는 상대방에게 아무 신뢰나 기대가 없다면.. 울지 않습니다. 그냥 차갑고 냉정하거나 무덤덤하죠.

   

2)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에 “의뢰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믿고 신뢰하니까 부르짖어 호소하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다윗이 지금 개인적으로 엄청난 위기의 상황입니다. 주변에 대적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곧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탄식하듯이 기도하는 다윗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과 확신이 있냐면요?

다윗의 조상들이,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림절과 같은 수많은 고난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의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부르짖었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의 기적이 그렇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넘게 고난을 받았어요.

그래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부르짖어 기도했어요. 출2:23~25

   

고난 중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거에요.

그러니까 구원의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이 조상을 통하여 다윗이 얻은 신앙의 교훈이에요.

 

그래서 “어찌하여?”라면서 탄식하는 다윗의 심정에는 “나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찌하여?”는 탄식의 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하나님은 저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의지신앙, 신뢰의 신앙을 표현하는 거에요.

 

3) 이제 6~8절을 보십시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 구절들은 대적이 다윗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대적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어요. 대적들은 그 상황을 즐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의지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러니 포기해라. 그러는 거에요.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다윗의 엄청난 신앙고백이 들려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가장 멋진 표현이 “주께 맡긴 바 되었다.”는 표현인데요.

이 말의 뜻이 “주께 던져졌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올 때에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품에 던져진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날 때부터 누구를 의지할 수밖에 없냐면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를 책임져 주십시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냐면요? 21절을 보십시오.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사자. 들소. 개. 이런 것이 대적의 위협을 표현한 말이었잖아요. 다윗이 이렇게 무서운 대적들에게서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다윗이 선언하는 믿음의 말이

“구원하셨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고백이 과거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미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thou hast heard me from the horns of the unicorns. KJV

 

그런데 학자들은 이 구절을 진짜 과거에 일어난 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이 확신을 가지고 고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어서,

자신의 대적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선포하는 거에요.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이 이미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는 거에요.

그래서 탄식에서 급변하여 찬송이 되는 거고요. 원망에서 급변하여 감사를 하는 거에요.

 

저와 여러분이 다윗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신앙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의지와 확신의 신앙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 나는 하나님 품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이 신앙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에 대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면,

부모님이 애타하시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자식을 위해 선한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애타게 만드는 의지의 신앙, 확신의 신앙으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2. 날마다 십자가를 묵상하라
‘시 22편은 시편의 모든 시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하고 훌륭한 시에 속합니다. 
이 시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겪었던 
심오하고 숭고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들어있으며,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이해를 넘어섭니다. 

어떤 시편도 이보다 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경건한 자들은, 이 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실 때, 
지옥의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 토해 내셨던 한숨과 탄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과 영적 투쟁을 겪었던 사람들이 
이 시를 가장 귀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시22편을 읽는 중에 회심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시22편의 어떤 점이, 루터를 회심하게 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1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4절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단 두 절만 여기 썼지만, 다른 구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절 구절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통을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마르틴 루터와 같은 회심자들이, 오늘날에도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버려지심을 통해서, 내가 ‘버림받음’으로부터 구원된 것입니다.
루터가 그런 점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회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한 절, 한 절, 본 시편을 깊이 묵상하면.. '십자가는 사랑'임을 깊이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려 1천년 전에, 다윗 시대에, 생생하게 예언되어 있고,
예수님에게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 고초와 고난을 겪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루터는, 또한 우리는... 그 신비를 깊이 묵상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게 되지요.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찬149장

기독교 신앙은 2천년의 역사를 갖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 긴 역사 가운데, 원래 신앙의 색깔을 변치 않고 전해지기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우리가 지금 계승하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십자가 묵상 신앙”입니다.

오늘날 현대 개신교인들은, 기독교를 ‘자기 삶에 보탬이 되는 종교’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교회 가서 설교를 들어도 ‘삶의 위로나, 삶의 요령을 가르쳐 주는 설교’를 들으면
‘오늘은 은혜 받았다’고 느낍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묵상’도, 오늘 내 현실의 삶에 크게 보탬이 되지 않으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현실과 상관이 없는 거라면, 내게 필요 없다!’는 식으로
오늘날 “십자가 묵상 신앙”은 그야말로 멸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거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신앙은 어떤 것이냐 하면,
교회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무릎을 꿇을 때 무릎이 아프지 않게 받치는, 
펴는 푹신한 보호장치가 장의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저 앞에 강대상 전면에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를 계속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의미, 그 은혜, 그 고통, 그 신비를.. 차근 차근 되씹고 묵상하는 것이지요.
그게 매일의 기도요, 그게 매일의 신앙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내게 필요한 뭘 주시옵소서’가 원래 기도의 주 목적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늘날, 이런 “십자가 묵상”신앙을 다시 복원하려는 귀한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기초요, 기본기 중의 하나인데, 우리는 1년에 한 번
고난주간 성금요일에 달랑 한 번 묵상하고.. 저 뒷마당 창고에 다시 쳐박아 놓는다는 거죠.

이 “십자가 묵상 신앙”에 대해 관련 설교를 한 편 소개해 드립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보라> https://blog.daum.net/rfcdrfcd/15978277

   

▲3. 겸손이 성령충만을 계속 유지하는 비밀입니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잭 푸닌은 그의 설교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에서   *설교보기 클릭

성령충만, 성령세례는 한 번 받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함이 관건인데,

그 계속 유지의 비결은 '겸손'에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 이유는, 1) 성령은 종종 '생수의 강'처럼 물로 비유되는데,

물은 그 특징상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라는 거죠.

또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는데, *약4:6

사실 우리가 받은 성령의 은혜를 놓쳐버리는 것은, 쉽게 교만해져서, 하나님이 물리쳐버리셔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성령충만, 은혜충만을 받는 비밀이 되고요, 

 

2) 또 한 가지는, 6절에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이렇게 비방과 조롱을 받을 때 꾸욱 참는 것입니다. 역시 겸손이죠.

이때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습니다.  

 

시141:5절에도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누가 나를 공격하고 말로 치더라도, 내가 잠잠하면,

그게 머리에 (성령의) 기름이 된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 22편의 저자 다윗이 이렇게 성령의 영감이 넘치는 시를 작성한 이유도,

사람들이 그를 벌레라고 욕하고, 사자처럼, 바산의 소떼처럼, 개처럼 에워싸며 자기를 공격해도

그가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주만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성령충만을 받거나, 혹은 받은 충만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은

누가 내게 '너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했을 때.. 일단 속으로 '아멘!' 하고, 

그의 평가가 성령의 음성인지, 사람의 음성인지.. 그 다음에는 분별하는 일입니다.

무조건 즉시 맞받아치며 싸우는 게 아니라요!

 

 

........................................................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인생의 질곡을 걸어가는 중에 기록한 것인데,

그 때가 언제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가

아니면 아들 압살롬에게 쿠데타를 당해서 피난을 다녀야 했던 서글픈 시절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의 처절함으로는 아들의 반란에 왕궁을 나가, 맨발로 감람산을 올랐던 때로 생각되지만

밧세바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장인인 사울왕에게 쫓겨 다닐 때의 참담함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표제어에 있는 ‘아얠렛샤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아래쪽에 보면, ‘사슴이라는 곡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NIV영어성경에서도 ‘아침 사슴의 곡조에 맞춘(to the Tune of the Doe of the Morning)’이라 말합니다.

‘사슴’이라고 하면 연약하고 슬픈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주1)

이번에 설교문을 준비하면서, 시편 22편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시편 22편이 유대인들이 부림절에 읽고 노래하는 시편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림절은 바사 왕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때에 에스더라는 여인이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이라고 하는 이방 사람이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때 에스더를 딸같이 키운 모르드개의 지혜와 에스더의 용기,

또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그 용기에 의해 몰살을 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림절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음모로 죽을 뻔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시편 22편을 함께 낭송하고 노래합니다.

왜냐면 시22편의 내용이 부림절의 상황과 꼭 맞아 떨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