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NCK
2022. 5. 20. 07:52
◈자연주의적 영성 시29:1~11 여러 설교 정리
시편 23편을 대관령 목장에 가서 양떼를 바라보면서 읽는다면,
목자가 되어서 양들을 돌보면서 묵상한다면 더욱 와 닿을 것입니다.
시편 3편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 지은 시입니다.
시편 3편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싶다면 도망가면서, 또는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읽으면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엄한 해돋이를 보면서는 시편 19편을 묵상하면 좋을 것이고,
밤하늘에 별들이 많이 보일 때는 시편 8편을 묵상하기 좋을 것입니다.
그럼 본문 시29편은 어떤 상황에서 읽거나 묵상하기 좋은 말씀일까요?
천둥, 번개, 폭풍우가 내릴 때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말이 11절로 구성된 이 시에서 총 18번이 나옵니다.
시의 주제가 바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시로서 기록하게 된 동기가 바로 다윗이 경험한 폭풍우입니다.
1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권능 있는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브네이 엘로힘'으로 이를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입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서로 견해가 다르죠.
1) 천사들(Delitzsch, Craigie)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관용구,
2) 이방인들(Michaelis, Doderlein, Kay).
이 견해는 '엘로힘'이 '이방 신'의 의미로 사용된 용례들(95:3, 96:4, 출15:11, 18:11)에 근거합니다.
3) 통치자들(Calvin, 유대 랍비들).
그런데 자연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오묘한 사역을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정확히 살필 수 있는 존재는 그중에서 ‘천사’라고 설명한 델리취의 해석이 *1)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그 어떠한 것이든 본 구절은 평범한 인생들 뿐만 아니라
권세있는 자들까지도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합니다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거룩한 옷을 입고’ - '거룩한 옷'이란 축제 때에 제사장들(또는 악사들)이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 입는 특별한 옷(대하 20:21)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먼저 그 앞에서 거룩해야 한다는 예배의 원리를 강조한 시적 표현입니다.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 '여호와의 소리'란 뇌성에 대한 다윗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뇌성은 하나님의 진노(18:1 3)로 이해되나,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다윗은
이를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의 차원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물'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의미합니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이는 뇌성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묘사한 것으로 뇌성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드디어 뇌성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레바논의 백향목이 꺾여졌습니다(18:14).
본 구절에서 다윗은 백향목까지도 꺾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이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한편 레바논의 백향목은 교만한 자, 거만한 자(사 2:13), 또는 흥왕하는 자(92:13; 104:16)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단순히 자연 현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권세를 상징합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본절은 권세있는 교만한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하에 멸망당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어지는 6절을 보면, 그냥 나무가 부러진 것을 뜻합니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 여기서 다윗은 뇌성과 함께 몰아닥친 폭풍우로 인해
산이 마치 지진으로 흔들리는 것과 갈이 요동하는 듯한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 '시룐'은 헤르몬 산의 다른 명칭입니다(신3:9).
레바논 산은 갈릴리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헤르몬 산은 레바논의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산들은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들이며, 이 산들이 들 송아지 같이 뛰었다는 표현은
하나의 과장법으로서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이는 벼락에 대한 시적 표현입니다(18:8) '화염'은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언급되는 용어로서
여기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가데스는 에돔 서쪽에 위치한 오아시스 지역으로 시내 산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레바논에서 가데스를 연결하면 팔레스틴 전역을 포함하게 되죠. 따라서 본 구절은 5,6절과 함께
하나님의 소리가 팔레스틴 전역에 걸쳐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 '낙태케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훌'은 '진통을 일으키다',
'새끼를 낳다'는 뜻입니다. 이에 근거해서 혹자는 뇌성으로 놀란 암사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몸의 일부에 경련을 일으키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본 구절에서는 암사슴들이 뇌성에 놀라 분만 예정일보다 빨리 새끼를 낳았다는 의미가
문장 구조상 더 적합하죠. 이런 표현은 그 뇌성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반영해 줍니다.
‘살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 이는 폭풍우로 인해 나뭇잎과 가지들이 꺾이며
심지어 나무들이 뿌리 채 뽑힌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 여기서 '전'이 구체적으로 어느 것을
의미 하는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1) 혹자는 하늘의 성전이라고 주장하며(Delitzsch, Kraus),
2) 혹자는 지상의 성전이라고 주장합니다(Kidner).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본시 자체가 계속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것'이란 하늘의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0~11절은 그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언급합니다.
'홍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불'은 창세기 6-11장의 노아 홍수 사건에 유일하게 사용된 용어입니다.
따라서 이 홍수는 직접적으로 노아의 홍수를 가리키며,
상징적로는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시는 심판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편, '좌정하셨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세상의 왕으로 임하셨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암시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 여호와는 노아 시대뿐 아니라
영영토룩 온 세상의 왕이시죠. 그리고 이 표현은 단순히 왕으로서 권위만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왕권을 행사하심을 뜻합니다.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홍수는 악인들에게는 형벌이지만, 의인들에게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홍수(심판)로 악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의인들에게 진정한 평강을 허락해 주십니다.
여기서 '힘'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의인들이 그 심판을 벗어날 수있는 용기와
소망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힘은 환난과 핍박 중에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베풀어지는 하늘의 능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평강의 복’ - 델리취는 그의 주석에서 이 말을 가리켜 '전 시편 위에 드리워진 무지개와 같다’
고 표현하였습니다. 다윗은 홍수 이후의 무지개와 같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이후에 있게 될 선택된 백성들의 영원한 복을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적용 “자연주의적 영성”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게리 토마스 저, 윤종석 역,
책에서 저자는 신자의 신앙 스타일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스타일로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각자는 자기 스타일의 장, 단점을 파악하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신앙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단 전체를 개관하면,
1. 자연주의 영성 -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Nature
3. 전통주의 영성 - 전통 의식과 상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Traditional
3. 금욕주의 영성 -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Stoic
4. 행동주의 영성 - 참여와 대결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Action
5. 박애주의 영성 -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Compassion
6. 열정주의 영성 -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Passion
7. 묵상주의 영성 -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Meditation
8. 지성주의 영성 -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Knowledge
우리 신앙이 극단적 성향에 빠지면 안 됩니다.
큐티를 강조하는 사람은, 마치 큐티가 신앙생활의 전부이며,
큐티를 하지 않는 사람을... 중죄인 취급할 수 있죠.
통성기도, 전도, 구제,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은사가 있으면 그 분야에 열심히 참여하되,
그렇다고 그 분야에 미지근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다른 분야에 뜨겁기 때문입니다.
교단적으로도,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빈주의, 재침례파 등
모두 하나님을 사랑했으나, 신앙의 표현 방식이나 강조점은 각자 독특했습니다.
스타일이 달랐습니다.
과거에 크리스천들은 서로의 차이를 배우기보다는,
서로 분리를 택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는... 점차 서로 관용하고 서로 배우는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자연주의 영성 : 야외에서 자연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Nature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자연주의자들은 강가에서 숲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야외로 나갈 때 한껏 치솟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구약과 복음서의 많은 예화와 비유는 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며,
따라서 자연 속에서 그 의미와 힘이 되살아납니다.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현현’, 즉 그분이 임하신 사건은 대부분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하갈을, 산에서 아브라함을,
강나루에서 야곱을,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 주셨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은 전혀 새로운 캐스팅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는 마귀와 유혹을 나타내 주며,
바다로 흐르는 강물은 만물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들을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저자)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자연주의 영성이 되었습니다.
스케줄 때문에 마음대로 자주 밖에 나갈 수는 없지만
내게 있어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기에, 자연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음을 나는 배웠습니다.(인용 끝)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도, 자연을 거닐며 기도하고
거기서 설교의 소재를 늘 얻곤 했습니다.
후대에 그의 자연에서 영감 얻은 설교를 ‘농장 설교 Farm Sermons’라고
특별히 분류했는데, 한 편 한 편이 매우 영감스런 설교들입니다.
시편 8편, 23편, 29편, 42편을 지은 다윗도 ‘자연주의적 영성’을 가진 분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분야의 영성도 가졌지만요.
그리고 당시에는, 아무래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보다
‘대자연’을 접할 기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대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교제하며, 그 분의 임재를 체험할 기회가 더 많았던 거죠.
▲폭우와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 했던 사람
필립 얀시,「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Church, Why Bother?
이 책의 서문 中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비바람 치는 폭풍우 속에서, 일부러 미송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
존 뮤이어 John Muir 이다. *오늘날 미국 서부에 유명한 <John Muir 트레킹 코스>가 있음
존 뮤이어는 19세기 후반부에, 미국 대륙의 탐험가였다.
그는 수 십 년간 도보로 여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경이를 보았다.
캘리포니아 시에라 사막에서 알래스카 빙하지대까지, 광대한 거리를 주파하며,
관찰하고, 글을 쓰고, 찬양하고, 경험했으며,
아이 같은 천진한 기쁨과 진지한 경외심으로 그 일에 몰두했다.
1874년에 그는, 시에라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친구의 오두막을 방문했다.
한동안 그는 그 오두막을 근거지로, 거친 대자연을 탐험했고,
돌아오면 오두막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어느 날, 태평양으로부터 폭풍이 밀어닥쳤다.
깊은 산속의 향나무, 전나무, 소나무, 미송나무 등 튼튼한 나무들도
마치 풀잎처럼 눕혀버릴 듯한 기세가 대단한 폭풍이었다.
그 오두막은 바로 그런 폭풍에 대비해 지은 것이었다.
밖에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도, 마치 폭풍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두막 내부는 끄떡없이 평온함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독자들은,
뮤이어와 그의 친구가 벽난로 옆에서 따뜻한 커피를 즐기는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뮤이어는 벽난로 불 속으로 장작을 하나 툭 던져 넣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마루에 올라, 광풍의 변화무쌍한 소리와 바람을 즐기더니,
그것도 모자라, 더 높은 곳을 찾아서 주변 나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찾아낸 거대한 미송나무에 올라갔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그는, 필사적으로 나무를 붙들어 안은 채
온 몸으로 폭풍우를 맞이했다.
그는 무엇을 바라고 폭풍 속에 위태롭게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칼날 같은 바람에 온 몸을 내맡겼는가? (당시는 12월이었다.)
폭풍을,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위대한 폭풍우를 맛보고자 했다.
조물주가 내뿜으시는, 그 원시적 생명력과 강력한 에너지를 체험하고,
거기에 압도당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같은 초보자는, 밖에 나가 비 맞는다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동산과 꽃밭에 나가 있어도.., 창조주의 솜씨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것을 잘 느끼려면, 오랜 수련을 통한 깊은 내면화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가 아니라, 성경에 '바람 같은 성령'도 나옵니다.
‘영spirit’이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바람’, ‘숨’과 동의어이죠.
그 실체는 안 보이지만, 그 작용과 영향력은 분명히 보입니다.
모든 생명이 창조된 것도, ‘바람’에 의해서였습니다. (삼위일체로 역사하셨죠) 창1:2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 성령의 역사는 ‘바람의 役事’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를 탄생시킨 것도, ‘급하고 강한 바람’의 역사였습니다. 행2:2
존 뮤이어의 자연주의적 영성
보통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면 모두 피하여 숨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로, 비바람 앞으로 나아갔죠.
그것을 더 잘 느껴보기 위해서,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바람’같이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느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바람이 ‘성령의 바람’은 아니지만,
‘바람’은 분명 하나님이 불게 하시며,
간절히 하나님의 현존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바람으로 그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의 영(호흡, 바람)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히1:7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주말이 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 원하는가요?
대부분 일상을 떠나 어딘가로 기분전환을 위해 돌아다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큰 안식, 가장 큰 평안이 어디에 있는가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대면할 때 오는 평안과 기쁨이 아닌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대자연 속에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여행이 자꾸 주님을 피해서.. 더 멀리 도망가고자 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자연에 나가서, 찬양을 불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실력이 안 되지만) 짧은 신앙시를 한 편 지어 보십시오. 다윗처럼!
그 시의 수준에 관계없이, 그 시가 아주 형편하더라도
주님은 그 시를 지은 시도 자체를 보시고, 아주 당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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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현대 철학사조 중에 하나로 ‘자연주의’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자연을 신으로 섬깁니다. 대자연을 ‘어머니’로 숭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상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산, 태양, 바다, 큰 나무, 큰 바위 등을 제사하며 섬기는 토테미즘 같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 영성’은 그것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