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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30편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LNCK
2022. 5. 22. 21:10
◈(다윗이 자기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6 시30:1~12 여러 설교 정리
시편 30편은 표제어가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입니다.
표제어 대로라면, 본 시편은 성전이 완공되어 하나님 앞에 봉헌하며 부른 찬송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때에 성전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a Song at the Dedication of the House of David’
‘다윗의 집의 낙성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70인역에도 ‘다윗의 집의 낙성식 노래’로 나옵니다.
'성전'이란 말이 안 나옵니다. 보통 쓰는 히브리 사본에는 '성전'이 아니라 그냥 '집(베이트)'입니다.
‘집의 낙성식’에 지은 시인데,
더욱이 1~12절까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성전을 낙성하고 부른 내용이 아닙니다.
내용적으로는 ‘병이 낫기를 기원하고, 병이 나은 감사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주1)
그런데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표제어에 너무 많이 시간을 할애하면 안 되지만)
이 시는, 다윗의 인구조사로 촉발된 하나님의 징계인 역병으로 인해
왕국을 거의 황폐화시켰던 그 지독한 역병이 그친 후에 (다윗도 그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성전 부지로 정하여, 봉헌하면서 지은 시라고 합니다.
(삼하 24:25, 대상21:26).
이 시편의 모든 부분들이 이 추정과 부합됩니다.
다른 어떤 가설보다도 그의 추정이 너무나 타당하므로,
이 원칙에만 입각하여 주해를 전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절별 해석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 여기에서 '끌어내사'에 해당하는 히. '달라'는
'우물에서 끌어내다'(출2:16, 19, 잠20:5)는 뜻으로
다윗이 우물과 같은 깊은 곤경에 처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내 원수’
어떤 학자들은 다음절과 연결시켜 다윗을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고간 '역병'이라고 주장합니다.
삼하24:15절에 의하면, 이 역병으로 7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 다윗은 '부르짖으매' 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자신의 질병이 단순한 의술로써 회복된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의 교만으로 인한 영혼의 질병에서 치유된 것을 뜻합니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 죽음에서 건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쉐올'은 무의식 상태로 있는 '지하의 세계' 또는 ‘무덤’입니다.
‘무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르'는 '쉐올'의 동의어입니다(28:1 주석 참조).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본절은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에 함께할 것을, 다윗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장면입니다.
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잠깐’과 ‘평생’이 병행법으로서 대조되어 있습니다.
'노염'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은총'이란 하나님의 자비하신 속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나
인간의 통회함을 보시고 그 분노를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다윗은 고난을 극복한 그의 경험적인 삶을 통해, 이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6절부터 ~ 12절까지에는 다윗의 (인구 계수로 인한) 실수와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그의 삶의 한 과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이는 다윗이 한때 자기 자신을 신뢰한 자만심을 고백한 구절입니다.
자만은 불경건이며 어리석은 자의 특성입니다. 이 자만심은 율법에서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이것의 결과는 멸망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신8:11-20).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 여기서 '산'은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내 산’ - 나라가 견고하여지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만을 꺾으시기 위해 잠시 진노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로 다윗에게 임한 것은 평강 대신 '근심'이었으며, 건강 대신 '죽음의 질병'이었습니다(9절).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주께 부르짖고’ - 역병으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하는 다윗의 간구입니다.
다윗은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고통에 처하자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입니다.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다윗의 논리는 자신이 일찍 죽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 문장에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다윗은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고, 주의 진리를 온 세상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그가 죽는다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은 불가(不可)한 것이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간구가 단순히 생명의 연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편, 다윗이 자신의 이러한 논리적인 간구 그대로 회복된 이후 임종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였던 사실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대상22-29).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다윗이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호소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4:1; 9:13; 23:6,16; 27:7).
그는 자신의 공로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깨달았던 것입니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진정한 회개를 통해 그의 건강이 예전처럼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단순히 건강의 회복 때문에 춤을 춘 것이 아니라
그간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그의 심령이 회복되었기에 춤을 춘 것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을 때,
또는 축제 때에(출32:19, 삿21:21)춤을 추었습니다.
따라서 이 춤은 극도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베옷'은 구약 시대의 성도가 회개할 때 자신의 통회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입었던 옷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진정한 통회를 보시고 베옷 대신 기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5절).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자만하던 때에 다윗은 주를 찬송하지 아니하고 잠잠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과 육체가 회복된 이후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확고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입니다;
본 구절은 기도 응답을 받은 다윗의 서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대한 서원은 신실한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시였습니다.
◑적용 “(다윗이) 자기는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6
본문 시30편은 다윗의 말년 상황에 비추어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합니다.
그는 백성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고, 하나님은 교만한 그를 징벌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비를 베푸사 천사로 하여금 그 칼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삼하24:26~27
이때 시인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영감을 받아 이토록 탁월한 송가를 지었습니다.
이 시는 인구조사와 관련된 시편이며, 역병을 멈추게 한 사실을 기념하며
성전부지 (오르난의 타작바당)을 봉헌하는 내용의 시편으로 봅니다.
▲1. 사람이 잘 나갈 때, 교만하면 징계를 당합니다.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절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6절은 다윗이 자기 교만을 자백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강성대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왕국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영원히 강성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렇게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능력으로 그렇게 된 줄 알고,
하나님이 얼굴을 숨겨버리시매(가리시매), 원수(:1)가 역병을 보냈고, .
다윗은 그 팬데믹으로 인해서, 국가적 재난을 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7만명이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삼하24:15
사무엘하나 역대기에는 다윗이 이 병에 걸렸다고 나오지 않지만,
본문을 보면, 다윗도 이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것입니다.
시30: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7b절에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면(숨기시면) 우리는 근심해야 합니다.
주께서 얼굴을 숨기셨는데도, 아무 근심 걱정이 없으면.. 재앙과 우환이 내 삶과 공동체에 계속되는 거죠.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마치 햇빛을 못 본 꽃이나 농작물들처럼
내 영혼이 시들해 집니다. 찬송과 기도가 점점 사라지게 되고, 혹시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는 9달 20일이 걸렸습니다. 삼하24:8
그러니 사건 전후 발생일을 다 포함하면, 다윗의 교만과 그로 인한 주님의 얼굴 숨기심은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되었다는 얘기고,
다윗은 자기 교만에서 돌이킬 기회가 1년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기는 커녕, 그 기간동안 계속 내리막 길을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찬양을, 기도를, 제사를 형식적으로 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리고 자신이 이룬 업적과 성취를, 만족하고 자만하고 자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같은 위대한 신앙인도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면, 우리는 오죽할까요.
다윗은 1년 동안이나 신앙이 시들어있다가, 펜데믹 징계를 받았는데,
우리도 몇 년 동안 영적 침체가 계속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외적으로 모든 게 잘 나갈 때..
하나님이 내게 얼굴을 가리시는(숨기시는) 증거가 뭐라고요?
내 입술에 찬양이 사라지고, 여가시간이나 운전시간에 주로 뉴스나 스포츠, 다른 오락거리를 봅니다.
그 시간에 전에는 기도하고 찬양했는데 말입니다.
기도에 힘이 없고, 예배나 사역이 형식적이 됩니다.
하기는 하는데, 간절함이나 절박함 같은 게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죠.
'(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6
그러므로 팬데믹을 맞기 전에, 징계를 당하기 전에
간절함, 절박함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1년 가량을 늦추시고 늦추시다가
다윗의 인구조사가 끝났을 무렵, 즉 그의 교만이 정정peak을 찍을 무렵에 펜데믹을 보내셨습니다.
다윗 자신부터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오늘 나의 영적 침체를 벗어납시다. 주님이 얼굴을 숨기지 마시고, 내게 그 얼굴 빛을 비춰주셔야 합니다.
그럴려면 다윗처럼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2. 부르짖고 찬송한 다윗
시30편 전체를 흐르는 맥락은 단연코 '찬송'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찬송이 튀어나온게 아니라, '부르짖었더니..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1절은 찬송,
2절은 부르짖음
3~5절은 찬송
6~10절은 부르짖음 (특히 8절)
11~12(끝)절은 찬송입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으로 인하여, 전염병(역병)이 예루살렘 전체를 다 덮치는 것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삼하24:16~17
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그런데 내게 영적 침체가 찾아왔고, 그걸 돌파하기 위해서는 '부르짖어야 되겠는데'
도저히 부르짖어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자 부르짖지 못하면, 부르짖을 수 있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몇 분과 함께 기도하면,
갑자기 부르짖어집니다. 기도의 동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국내외 온라인 기도회도 있습니다)
전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장작불은 연합할수록 갑자기 살아납니다.
다 꺼져가는 장작불도, 타는 숯 몇 개만 집어넣으면 확 살아납니다.
너무너무 힘든 상황에 처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확 살아나려면,
기도의 동역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아니면 찾아가서
3일~1주일을 작정하고 같이 기도회를 가져보세요. 거기에 참석한 모두가 확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목소리만 큰 걸 뜻하지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뜻합니다.
목소리만 크게 부르짖으면.. 그런 기도는 옆사람이 들으면 시끄럽기만 하고, 오히려 기도에 방해됩니다.
대개는 큰 목소리가 부르짖기에 좋지만, 꼭 아니더라도 중요한 것은 마음이 부르짖어야 됩니다.
자신의 싸늘해진 심령을 애통해하며, 주님이 숨기신 얼굴을 다시 보여달라고, 간절히 애원해야 됩니다.
그런데 혼자서 '돌파'하려고 할 때는,
지금 뭔가 가로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술술 안 나오지요.
1) 어떤 때는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결단이 필요합니다. 다시는 그 죄를 다시 짓지 않겠다고요.
2) 어떤 때는 기도하기 전에 성경을 펴고 30분~1시간 읽습니다. 말씀의 약속이 없으면
기도가 잘 나오지 않거든요. 그러니 말씀을 받고 믿음이 생길 때까지 계속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말씀의 은혜와 약속으로 가득차게 될 때, 부르짖는 것입니다.
3) 어떤 때는 찬양을 오래 합니다. 기도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요.
혹시 망치 없이 못을 박을 수 있나요? 혹시 렌치 없이 나사를 조일 수 있나요?
뭐든지 도구가 없으면, 일이 힘듭니다.
'찬양'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쉽게 데려가는 도구입니다.
찬양이란 도구가 없어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찬양은 그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때는 이 방법, 어떤 때는 저 방법을 쓰면서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아예 하나님이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지 않도록,
늘 스스로 자신을 영적으로 늘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3. 그러면 기쁨의 띠(허리띠)를 띠게 됩니다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베옷"은 헐렁하게 두르는 옷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꽉 죄이도록 두르는 띠이며, 좀처럼 느슨해지지 않죠.
따라서 그것을 내게서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주1) 시30편의 표제어에 관하여
시편 30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전 봉헌을 위한 노래라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표제를 보고 다윗이 쓴 시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성전 봉헌은 그 아들 솔로몬 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봉헌한 이 성전은 어떤 성전일까요?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①다윗이 새 궁전을 짓고 봉헌했을 때
②성전 지을 땅을 봉헌했을 때 (인구 계수로 인한 교만으로 역병이 돌았고,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 드렸을 때, 역병이 그쳤고, 그 땅을 성전부지로 봉헌했습니다.
이 주장이 맞다고 봅니다. *표제에 ‘성전’이라는 말이 안 나오고, 그냥 ‘다윗의 집’으로 나옴)
③압살롬에게 더럽힌 궁전을 다시 되찾아 봉헌했을 때
④마카비시대의 수전절 때 첨가한 것 등의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그냥 ‘집’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그 많은 역경 가운데 드디어 왕궁을 완성하게 되었을 때나
혹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왕궁에서 쫓겨나서 왕궁을 잃어버렸다가
반란이 진압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린 시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이 성전 봉헌을 위해 쓴 시편으로 보기도 합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성전 부지를 취득하기 전에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는 (교만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여호와께서 그 땅에 심각한 전염병을 내리셨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번제 드렸을 때, 역병이 그쳤고,
그 땅을 성전부지로 봉헌했습니다. 이때 쓴 시로 보면, 문맥이 잘 이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