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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5장 '주의 말씀’으로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LNCK
2022. 5. 28. 22:17
◈‘주의 말씀’으로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살전4:13~5:11 여러 설교 정리
본문 살전살전4:13~5:11절은 ‘종말에 관한’ 사도바울의 교훈입니다.
◑적용 ‘소종말을 준비하는 매일의 삶’
살전4:13~18절은 종말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제가 알기로, 구약성경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가장 비슷한 구절은 단7:13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도 살전처럼 자세하지는 않죠)
예수님도, ‘급하게 오시리라,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라며 종말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셨지만
이렇게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강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등
본문 살전4:13~18처럼 자세하게 종말과 재림에 일어날 일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은, 원 출처가 바울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 어디서,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살전4:13~18절
그렇다면 바울은, 구약성경도, 예수님도, 다른 사도들도 가르치지 않은 이 (귀한) 내용을
어디서 알게 된 것일까요? 출처가 어디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본문4:15절에서 바울은 출처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 바울이 말하는 종말론의 권위는 '주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예수의 묵시적인 가르침(apocalyptic teaching)을 총칭한다는 주장. (소위 짬뽕해서 재해석함)
15절 서두에 '우리가'라고 언급한 점을 볼 때, 이 해석이 맞아 보입니다. *'내가'가 아니라
-정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교회를 통해 구전口傳되어 오는 예수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거나, 혹은 예수로부터 바울이 직접 계시를 받은 말씀이라는 주장
갈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가서 배웠거나, 이에 대해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견해
그러나 무엇이든지, 본서 데살로니가 전서가 정경에 포함된 것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나 교부들이, 바울의 종말론을 검증해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히려 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참 젊은 나이에 ‘종말론’을 가르친 바울
바울은 약 62세 경에 로마감옥 2차투옥 후 순교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 약간 차이 있음
지금 본서를 쓸 때는 약 46세 경으로 봅니다.
지금 2차 전도여행 중이고, 앞으로 3차전도여행 마치고,
바울은 행28장에 보면, 로마에 가서 가택연금(1차투옥)을 당하며 재판을 받습니다.
이때 가택연금 중에 목회서신서들을 기록하죠. *엡, 빌, 골, 몬
그 후에 풀려나서, 성경에 안 나오는 4차전도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여정이 사도행전에 안 나옵니다)
이때 디도서,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합니다.
어쨌거나 본서 데살로니가 전서를 쓸 때는,
바울의 사역의 전성기요, 한창 때입니다. 나이로도 그렇습니다. (46세 경)
이때 뜬금 없이 ‘종말론’이 왜 등장하는 겁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한국의 목회자들도 보면
40대는 대부분 패기가 넘쳐 흐릅니다.
그래서 그때는 설교의 주제가 보통은 ‘성장, 비전, 미래, 선두주자’
뭐 이렇게 ‘현세적인’ 주제의 설교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60세, 70세가 지나서
설교자도 이제 자기 몸에 여기 저기에 이상이 오고, 약을 먹는 가짓수가 늘어나면
비로소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며, 차츰 ‘내세적인’ 설교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한창일 때에 ‘내세적인’ 주제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에도, 베드로사도의 설교에도.. 내세주의가
현세주의와 더불어 균형을 이루면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나이 드신 목회자’의 설교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젊을수록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세주의적 주제’가 강조되고
목회자가 늙을수록 ‘내세주의, 천국의 주제’가 강조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 내세’ .. 이런 주제를,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런 주제가 나오기만 하면, 팔짱을 끼고.. ‘거 참 죽으면 다 천국 갈 터인데, 무슨 걱정이야?’
하는 안일한 자세로 나옵니다.
이들은 회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회개하고, 회심하고, 심령의 변화를 체험하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내세적인 주제를, 현세적인 주제보다 더 선호하고, 더 관심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참 신앙은, 천국을, 영원을 늘/오늘/매일/계속해서 사모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지옥)을, 영원을 늘/오늘/매일/계속해서 사모하지 않으면.. 아직 거듭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늘 ‘세상 성공’만 보입니다. 예수 신앙도 자기 성공을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종말론엔 대종말과 소종말이 있는데,
대종말은 ‘파루시아’ - ‘(예수님의) 오심', 즉 재림을 뜻하며
소종말은 ’나의 죽음‘을 뜻합니다.
내 생전에 파루시아가 이르지 않더라도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나에게는 파루시아 (Jesus’) coming 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소종말 (개인적 종말)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평안'(에이레네)은 내적인 '마음의 평온'을 뜻하며
'안전'(아스팔레이아)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뜻합니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하여
예수께서 '인자의 오심'에 대해 하신 말씀 (눅17:26-30),
즉 노아의 때와 소돔 성의 멸망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 이 비유는 예기지 못할 때
갑자기 멸망이 덮쳐오게 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으로서
구약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13:8, 21:3, 렘4:31 등)
목회자들은 '개인적 종말'에 대한 설교 하기가 꺼려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합니다.
왜냐면.. 마치 우연의 일치랄까요?
개인적 종말에 대한 설교를 하고 나면,
그날 밤이나, 그 주간에, 교인들 중에 종말을 맞이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수요일 설교에 ‘오늘 밤에도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가야 합니다.
그래서 깨어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했는데,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전화가 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OOO성도가 어제 밤에 몸이 안 좋더니, 오늘 새벽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혹시 그날 즉시는 아니더라도, 그 한 주간에, 멀쩡하던 분이 소천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그에게 ‘마지막 설교를 듣고 오라고’ 기회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가 여러 번 일어나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죽음의 정의 - 갑자기 맞이하게 되는 일
우리는 TV등을 통해서 유명 인사들의 죽음을 보고, 전해 듣습니다.
이때만 해도 ‘남의 일’ 같습니다. 나랑은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다가 친지들, 친구들의 죽음을 접합니다.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중대한 심적인 타격을 줍니다.
작년 연말에 송년회를 같이 했는데, 그때 건강하시던 분들이 갑자기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사람마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데, 그 날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죠.
(사실 그 전 날이나, 그 날 아침에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파도 저러다가 낫겠거니.. 하죠)
대부분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본능적으로 싫고 무서운 것입니다.
죽음은 미지(알지 못하는)의 세계입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만,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만 나와 있고, 그 외는 우리가 모릅니다)
누가 이렇게 ‘죽음’을 정의했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죽음이란 -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순간적으로 갑작스럽게 맞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교회를 다닌 성도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해서 쩔쩔 매거나 당황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일평생 ‘영광스런 죽음과 영생’을 준비하며,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매일 밤 잠 들기 전에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품에 부탁드립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의 아침으로 깨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혹시 그날 밤에, 주님의 부름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전도사가 ‘A성도 집을 오늘 심방해야 된다’는 강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저 주저 하다가, 그 집 대문 앞에까지 갔다가,
결국은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A성도가 황당해 할까봐요.
전화로 말하기에도 뭘 자기가 정확히 100% 아는 것이 없으니,
전화로 안부만 물을 뿐이지요.
그냥 강한 성령의 이끌림만 받았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그 집의 30살 아들이, 천국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침대에서 자는 중에 심장발작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전도사는, 참으로 회개하고, ‘심방 예배라도 한 번 드리고 기도라도 한 번 간절히 했더라면..’
하고 후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30세 건강한 청년이 하루밤 사이에, 자다가 심장발작이 일어나서, 천국의 부름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잠들기 전에, 항상 천국에 가는 종말론적 기도(소종말을 맞이하는 기도)를 드리며,
또한 아침에 깨어나면 ‘부활’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매일이 종말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때’를 가르쳐 주십니다.
최근에 믿음이 신실한 권사님이 건강하게 80대 중반을 사시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노트에, 자기 유언을 몇 장에 걸쳐 길고 자세하고 자필로 적어 두셨습니다.
그 분의 자녀들은, 그 유언대로 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국내외 각지로 흩어진 자녀들이 다 한데 모이기도 힘들 때는, 이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신실한 하나님의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때’를 대강 가르쳐 주십니다. (예외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준비하게 하십니다.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 '다른 이들'은 '비그리스도인'을 언급한 말이며,
여기서 사용된 '자다'의 헬라어 '카듀도멘'은
도덕적인 무감각 상태를 나타냅니다. 경건하지 못한 삶을 뜻합니다.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 '깨어'(그레고로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깨어있음을 뜻하죠.
예수께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여 재림 시의 각성에 관해 말씀하셨죠(마24:42, 막13:35 등).
'근신하라'의 헬라어 '네포멘'은 원래 '술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을 가지라'는 뜻으로
경건하고 단정한 생활을 강조한 말입니다.
앞서 살펴 본, 살전4:1~12절에서도
바울은 ’예수를 믿으라‘는 ’마음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믿는 바 대로 살아라'는 '행하는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삶인 것입니다!
◑절별 해석 살전4:13~5:11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잠자다'는 표현은 '죽는 것'에 대한 완곡 어법으로
고대에서나 헬라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었다. 그 증거로 왕상2:10에는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헬라인들은 '죽음의 잠'을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잠'으로 인식한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깨어날 것으로 믿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장래의 운명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문은 디모데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바울은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소망 없는 다른 이’ - 부활의 믿음을 갖지 못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총칭한다.
그 당시 이교도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가졌던 생각은 그들의 문학 작품이나 비문(碑文)에 잘 반영되어 있다.
데오크리투스는 그의 글에서 "희망은 산 자를 위한 것이며 죽음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 바울이 말하는 권위는 '주의 말씀'에 있다.
'주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묵시적인 가르침(apocalyptic teaching)을 총칭한다는 주장.
2) '주의 말씀' 앞에 전치사 '엔'(안에)이 있으므로 '주의 말씀으로'가 아니라
'주의 말씀 안에'로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파루시아'(Parousia)
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리킨다는 주장.
3) 예수의 이름을 빌어 말한 바울 자신의 예언적인 발언이다..라는 주장
4) 정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교회를 통해 구전(口傳)되어 오는 예수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거나, 혹은 예수로부터 바울이 직접 계시를 받은 말씀이라는 주장
1) 과 2)의 견해는 예수께서 '파루시아' 때 죽은 성도들이나 살아 있는 성도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바가 없으므로 타당성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에 대하여
1) 바울이 자신이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고 보는 견해
2)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살아 남아 있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혹자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고전6:14절의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와
고후4:14의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를 제시한다.
또한 본절에서는 살아 있는 자로서 2인칭 복수 주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지칭하는 것은 바울을 포함한 그리스도인 전체를 언급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은
살아서 '파루시아'를 목격은 하겠지만,
참여하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영광은 얻지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죽은 자들에게도 살아 있는 자들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영광이
하늘 나라에 간직되어 있음을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이런 확신에 찬 말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렸을 것이다.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호령과’ - '호령'은 '자는 자'들을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이다(요5:25).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공중에서’ - '공중'에 대해서는 두가지 개념이 있다.
즉 '아래 공중'(아에르)과 '윗 공중'(아이데르)이 있는데, 본절에 쓰여진 '공중'은 전자이다.
신약성경에서 '공중'은 사단의 거처로 인식되었다(엡 2:2).
따라서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성도를 만나는 것은
그의 완전한 주권(主權)의 회복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구절은 휴거 rapture 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죠.
한자로 휴거나 영어로 렙춰나 모두 '(위에서) 잡아채진다'는 뜻입니다.
휴거에 대한 극단적 잘못된 이론들이 있지만,
휴거 자체는 비성경적이 아니라, 성경적입니다.
마20: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바울이 언급한 '이 여러 말'은 실제로 '주의 말씀'을 지칭한다(15절).
따라서 이 말씀은 그들에게 참된 위로를 줄 수 있는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 '때와 시기'는 행 1:7에도 언급되었다.
'때'는 헬라어로 크로노스이며, '시기'는 카이로스이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 '때와 시기'에 대하여 쓸 필요가 없는 이유는
바울이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일어날 사건에 대하여
이어지는 2절에 보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살후2:5참조).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주의 날’ - '주의 날'은 구약에 나오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움과 심판을
나타내시는 날이다(욜2:31, 암5:18, 말4:5).
이는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주'(퀴리오스)로 인식되면서
'주의 날'(살후2:2, 벧후 3:10), '그리스도의 날'(빌1:10, 2:16),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1:6),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1:8), '그날'(고전3:13, 살후1:10; 히10:25)등으로 불렸다.
(구약의 개념이 바뀐게 아니라, 보완된 것이다)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 이것은 '인자의 오심'에 대한 예수의 교훈(마24:43, 눅12:40)에
근거해서 한 말이다. 이 비유의 요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눅12:40, 17:24, 벧후1:10, 11, 계3:3, 16:15)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평안'(에이레네)은 내적인 '마음의 평온'을 뜻하며
'안전'(아스팔레이아)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뜻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하여 예수께서 '인자의 오심'에 대해 하신 말씀(눅17:26-30),
즉 노아의 때와 소돔성의 멸망(창6, 19장)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 이 비유는 예기지 못할 때
갑자기 멸망이 덮쳐오게 됨을 생동감(生動感)있게 표현한 것으로서
구약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사13:8, 21:3, 렘4:31, 호13:13, 미4:9).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 '어두움'(스코테이)은 '불신앙의 상태,
'임박한 멸망에 대한 무지, 무감각한 도덕심'등을 의미한다.
롬13:12에서 바울은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권면한 바 있다.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빛의 아들이요’ -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요12:36의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와
엡5:8의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서 찾을 수 있다.
‘낮의 아들이라’ - '낮'을 '빛'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간주해
'빛의 아들'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견해와 '주의 날'을 그의 '재림의 날'로 확대 해석하여,
'낮의 아들'을 '파루시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다'의 헬라어 '카듀도멘'은 4:13-15에서 사용된 '자다'(코이마오)와는 다른 의미로서
도덕적인 무감각 상태를 나타낸다.
'근신하라'의 헬라어 '네포멘'(*)은 원래 '술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을 가지라'는 뜻으로
도덕적으로 단정한 생활을 강조한 말이다.
NIV는 이 말을 '자제하다'(self-controlled)로 번역하고 있다.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믿음과 사랑의 흉배’ - 바울은 '근신'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군대 장비의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
밤에 근무하는 초병(哨兵)에게 효과적인 경계를 위해 맑은 정신이 필요한 것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 '근신'이 필요한 것을 바울이 연계시켜 말한 것이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신앙의 3요소이다.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구원의 소망을 강조하므로 주의 재림에 초점을 둔 본 서신의 주제와 일치시키고 있다.
여기서 구원은 예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되는 종말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노하심'(오르겐)은 '파루시아' 직전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종국적인 구원으로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 근거한 것임을
본 절과 다음 절에서 밝히고 있다.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 이 말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하여
여기에 단 한 번 언급되었다. 바울이 본 서신을 쓰고 있을 때
그는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관해 증거하고 있었다(고전2:1-10, 15:3-19).
그리고 본 서신보다 나중에 쓰여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 네개의 중요한 서신에서
바울은 이 주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본 서신에서 이것이 간략하게 한마디로 언급되어있는 것은 바울이 이 주제를
그의 신학의 기초로서 이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행17:2, 3).
‘깨든지 자든지’
1) '거룩한 행실로 경건이 준비되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로 해석하는 것이다.
2) '살았든지 죽었든지'로 해석하는 것이다. 둘 다 필요하다.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 '살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소멘'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얻게 된 '부활의 생명'을 의미하며
9절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