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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1장 성도가 겪는 환난에 대해 정리해 주다

LNCK 2022. 5. 31. 20:45

◈성도가 겪는 환난에 대해 정리해 주다       살후1:1~12           여러 설교 정리

 

◑데살로니가후서 기록 목적

 

▲1. 첫째로, 사도바울은 교회의 상황을 정리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과 이단과 나태라는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살후1장에서 ‘환난’에 대해서

살후2장에서 ‘종말론의 이단’에 대해서

살후3장에서 ‘나태’에 대해서 (재림이 가까웠으니 일하지 말자는 나태)

본 서신을 통해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세 가지 상황을,

본 서신을 통해 정리하면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를 설명해나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둘째로 사도바울이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도에서 어려운 형편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이 (살후3:2)

사도 바울의 (고린도에서) 복음전도를 심하게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이들을 바라보면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을까요. (살후3:2).

 

이같이 험악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후서는 기도요청을 위한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기도에 힘입어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살후3:1)

 

 

◑살후 1장의 적용 "바울이 성도의 환난에 대해 정리해 주다"

 

바울은 3주간 동안 데살로니가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으면, 반드시 핍박도 겸하여 받게 된다'고 미리 가르쳐 주었습니다.

 

살전3: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특히 본문 살후1:7절에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라는 표현은,

우리(바울, 실라, 디모데)가 받는 환난을, 너희도 똑같이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 일행도, 데살 교인들도, 환난도 함께 받고, 위로도 함께 받게 될 것이라는 거죠.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 첫째 편지를 보낸 후에 환난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그는 데살 교회가 만난 심각한 상황을 가리켜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라고 표현했습니다. 1:4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이란 말을 썼는데,  *약1:2

여기서는 모든 입니다.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환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데살 교회는 이같은 환난과 핍박 앞에서, 실족하고 와해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이같은 핍박과 환난을 극복하도록

본서 데살로니가 후서를 보내서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참에 바울은, ‘환난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1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1. 환난은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표식 token 입니다.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5절은 퍼뜩 의미가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시 묵상이 필요합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 신앙'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제자들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일례로, 지금 밀고 밀리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데, 눈 앞에 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지휘관은 누구를 내보내겠습니까? 아무나 내보내지 않습니다.

가장 믿을만한 군인, 가장 잘 싸우는 군인, 가장 잘 훈련된 부대를 편성해서 내보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난(십자가)을 통해 전파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그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믿을만한 신자, 가장 잘 싸우는 성도, 가장 잘 훈련된 제자들을 편성해서, 전투에 내보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장서서 받아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는' 일인데, :5

쉽게 말하면 '베스트, 정예 용사'로 인정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확하게 판단하셔서, 고난을 받을 사람을 공정하게 잘 뽑으셨다 ..는 뜻입니다.

아무나 고난을 받게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죠. 공정하게 판단해서, 정예병을 뽑으셨는데, 그 증거가 뭐냐?

'고난 받음'이라는 것입니다.

 

레너드 레이븐힐, 잭 푸닌의 워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 적어도 이런 말은 듣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OOO야, 내가 네게 시킬 일이 많았고, 해 줄 말이 많았는데,

네가 감당하지 못할까봐, 네가 소화하지 못할까봐 말을 못했어!'

 

본문에 적용하면 이런 뜻이죠.

'얘야, 내가 너로 어떤 특정한 고난의 십자가 길을 가라고 부탁하고 싶었는데,

네가 감당하지 못할까봐.. 내가 말을 못 꺼냈어, 내가 시키지 못했어!'

 

그런데 데살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counted worthy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주님이 특별히 뽑은 사람들, 합당한 사람들, 정예병만 고난을 겪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간혹 '오늘날은 서구권에서 예수 믿는데 고난이 없고, 중동 같은 선교지에만 있습니다'라는

말이 들리는데,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아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터 한 복판에서,

최일선에 나가서 적과 교전을 벌이고, 적진을 수색하고... 이런 군사가 '훈장 받는' 군사이지,

후방에서 군화에 흙도 묻히지 않는 군인이, 자기 편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울은 데살 교인들에게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서 귀하게 여김을 받았다 counted worthy.

왜냐면 너희에게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환난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는 지금 귀하게 여김을 counted worthy 받고 있나요?

 

어떤 장애아를 기르는 부모는 매일이 전쟁이고, 매일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자녀에게 무슨 진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만이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OOO야, 내가 장애아(네 자녀)를 세상에 보내려고 했는데, 아무에게도 쉽게 맡길 수 없었단다.

그런데 네 가정이 생각이 났다. 네 가정은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능히 감당할 것 같아서, 너희 집에 보냈다!'

 

여전히 장애야 양육은 힘들지만, 그 뒤로 그 일을 특권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주는 그들에게, 환난으로 갚으실 것을 가르칩니다.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대접하는 대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우리 삶에 정말 일어나는 '황금률'입니다.  마7:12

꼭 그대로 되는 것을 일상에서 늘 체험합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들 중에서 특히 박해를 많이 받은 것은,

그가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가장 근본적 밑바탕에서 작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조카에게 호된 반발과 무례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당했습니다.

왜냐면 자기도 젊었을 때, 삼촌에게 무례하게 도전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어떤 노부부가, 자녀가 자기들을 잘 찾아오지 않는다고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자기들도, 부모를 잘 찾아가지 않았거든요.

 

남에게 환난을 주는 자는, 환난을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요,

황금률 때문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장로님이 당뇨로 병원에서 입원해 계신다고 해서, 병문안을 갔습니다.

가보니, 무슨 치료법인지, 환자(장로님)를 침대 밑에 튼튼한 줄로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러니 부침개 뒤집듯이, 환자를 침대에 눕혀서 180도로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바닥을 바라보고 침대에 매달려 있게 된 것이지요. 마치 고문같아 보였습니다.  

 

장로님은 그 자리에서, 담임 목회자에게 자기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일전에 당회에서 자기가 언성을 높이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젊은 전도사를 세워놓고

오래도록 야단을 치고, 망신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장로님은 자기 지병으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그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그 고생을 하는 중에 '자기 허물'이 자꾸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죠.

 

이 얘기는 '주의 종을 건드리면 후환이 두렵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참 자녀에게 환난을 주면, 반드시 환난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

 

그런 체험을 직/간접적으로 다들 겪은 적이 있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나는 누구에게 환난을 주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봅니다.

 

3. 결국 신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여기서 '안식'은 이어지는 구절

:7b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과 연결해서 보면, '재림 때의 안식'을 의미합니다.

 

즉 핍박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고난, 멸망,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핍박 중에 인내로 견딘 데살 교인들은 안식, 평안, 천국,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소종말'로 우리 각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핍박자와 핍박을 받은 자들은, 극명하게 불안/평안의 심리적 차이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후 심판의 그림자로서

오늘날에도 작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 심판의 그림자로서!

 

4. 그 모든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는, 결국 주님의 재림에서 완벽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7b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절별 해석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 전도와 설립에 모두 기여한 인물들이다.

누가는 데살로니가로 오기 직전에 전도했던 빌립보에 남겨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데살로니가에서 그의 복음 전도를 받은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개종하여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행17:1-9).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한 지역 교회에 불과했지만

바울은 그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카리스)'는 헬라식 인사법의 표현이며, '평강(샬롬, 에이레네)'은 유대인 인사법의 표현이다.

 

혹자는 바울이 이 두 가지 인사법을 한데 결합시킨 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과 유대인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써 사용하기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즉 '은혜, 카리스'는, 엡2:8, 9에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진술한다.

이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며

이는 적대감이 그쳤거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좀더 깊은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행복 또는 화목을 말한다.

 

회개하기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다(롬5:1).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하셨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은혜' 와 '평강'의 상태에 이르기를 원했다.

이에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에서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구체적 사실은

바로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었다.

 

여기서 '더욱 자라고'의 혤라어는 휘페라욱사네이는

'풍성하게 성장하다',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에 대하여 이토록 감사한 배경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고(살전3:5)

그들의 믿음의 부족을 온전케 하기위하여 주야로 힘써 기도한 사실(살전3:10)에서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서로 넘치도록 기도했는데(살전3:12)

그 응답으로 그들의 사랑이 모든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지고 있었으며

개인 서로간에도 오고가고 있음을 보고 감사하게 되었다.

 

'풍성함'의 헬라어 '플레오나제이'는 '풍부하다', '증가하다'의 뜻으로서

사랑에 대해서 사용될 때는 충만함에 이르도록 점점 더하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은 그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한다.

즉 믿음은 사랑의 시작이며 근원이다. 또한 사랑은 믿음의 결과이다.

그리고 성도들의 생활의 정점은 그 사랑안에서 완전케 된다고 할 수 있다(요일4:20, 21).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너희의 견디고 있는 모든 핍박과 환난중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때 당했던 고난과 핍박(행17:5-7)이

바울과 그 일행이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계속되고 있었다.

 

이처럼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행11:19), 또한 불가피한 것이다(요16:33).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내는 믿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 중에서 굳건한 인내를 발휘하게 된다.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끝가지 지켰다.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롬16:1).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극심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보여준

인내의 모습은 당시 고난을 받고 있는 많은 교회에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이는’ - 바울은 이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앞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5절이하 10절까지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고자 하고 있다.

 

즉 본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함축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앞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전개하기 위한 전환점이 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

현재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자신들의 환난과 핍박을

악한 박해자들의 번영이라는 현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참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시행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구약 선지자 하박국도 하나님께 가졌던 적이 있다(합1:2-4).

그러나 바울은 미래에 각 개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변증하고 있다.

 

즉 데살로니가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은

바로 그들이 장차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영광을 받는 증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극심한 핍박속에서 지켜 주신다는사실에 대한 보증이 된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함이니’

본 구절은 앞문맥과 동격절로서 접속사 '이는'에 대한 수식적 설명이다.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뒤따른다(빌1:29).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당하셨으며(벧전 2:21-25),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도 당하고 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 필연적인 것이다(요16:33).

그런데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은 것이어야 한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된다(벧전 2:20).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이 정금보다 귀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되는 것이다(벧전 1:7).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보여준다.

'갚으시고'의 헬라어 '안타포두나이'는 '합당한 것을 돌려 준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살전3:9에서는 '보답할꼬'라고 번역되어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롬11:35),

본문에서처럼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롬12:19, 히10:30).

 

아무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원칙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으로(히10:30)

반드시 그들의 행한 악을 따라 갚으신다(롬1:27).

그러므로 핍박받는 성도들은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여야 한다'(살전 5:15).

그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태도로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야 한다(벧전 3:9).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그외 동역자들도

그들과 같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고후11:23-28).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 '안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네신'으로

본래 팽팽하게 당긴 활의 줄을 원래의 상태로 느슨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역경에서 해방되다', '수고를 그치고 쉬다'는 휴식(休息)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이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10절)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마16:27).

 

그가 '불꽃 중에' 오신다고 진술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주권과 영광과 위엄을 나타낸다

(출3:2, 사66:15, 계1:13-15).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멸망'의 헬라어 '올레드론'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다'란 의미로서

단순히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몰락하여 삶의 의욕이 송두리째 박탈된 상태를 말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그 날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 헤메라 에케이네'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사2:11, 17).

성경에는 '그 날'의 시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직 '그 날'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으로(마 24:36) 언급되며

예수께서는 '그 날'에 대한 징조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다(마24:3-51, 눅21:10-36).

 

‘모든 믿는 자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라’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그날에 성도들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놀랍게 여김을 받으시리라’

경탄을 받으시리라, 찬사를 받으시리라, admired 라는 뜻이다.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 나가며(엡4:13-16),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는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기초하여 간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구원을 얻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모든 선을 기뻐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안 아가도쉬네스'는

직역하면 '선의 욕구'란 의미로 성도들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 중 한 부분이며(갈 5:22, 23)

올바르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활동적인 성품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 구절에 대해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 있는 선한 의지를 일깨우셔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시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다음에 이어지는 '믿음의 역사'란 표현과 부합된다.

 

‘믿음의 역사’ - 살전 1:3에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졌던 처음의 믿음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

 

믿음은 결코 정지(停止)하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행위를 동반한다(약2:20-26).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 바울은 앞에서 언급된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즉 모든 선한 성품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모든 선한 마음과 믿음의 일 둘 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했다.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노마'는 그리스도를 지칭할 경우,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위엄과 주권과 능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성도들은 주안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속에 계시고 그들이 주 안에 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롬6:11, 23;고전1:5).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롬4:16, 11:5, 6, 엡2: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