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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3장, 바울의 현실적인 종말론

LNCK 2022. 6. 3. 05:30

◈살후3장, 바울의 현실적인 종말론         살후3:1~18           여러 설교 정리

 

살후3장을 분해하면,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바울의 부탁 : 1~5절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6~12절

마지막 당부와 인사 : 13~18절

 

◑적용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10

 

데살로니가 후서의 가장 핵심적 메시지는 ‘종말론’입니다.

바울이 전한 종말론에 대해, 교인들이 동요했고,

이제 곧 종말이 있을 것이라고.. ‘임박성’에 너무 몰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살후2:2

 

그 이유는 2가지인데,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2:3

그러니 아직은 종말이 아니니, 너무 분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살후3장은, 2장의 연장선상에서

“종말이 속히 이르렀다고, 놀고먹지 말고, 열심히 일을 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살후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그런데 솔직히 이런 메시지, 즉 ‘게으르게 놀지 말고 일해서 밥 벌어 먹으라’는 명령과 권고

솔직히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바울은 이런 내용을 명령했습니다.

3:6절에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명령한다’는 말은, 이런 내용을 주님께 받았다는 것입니다. 놀지 말고 직업을 가지라고요!

주님이 이런 명령까지 주시나요? 의아스럽습니다.

 

왜냐면 과거에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이 있었고,

거기에 슬로건이 ‘근면, 자조 self-help, 협동’이었거든요.

 

성경은 주로 ‘내면적인 메시지’입니다.

믿음, 신앙, 산상수훈, 사랑, 기도, 성령... 다 근본적으로 ‘내면적’인 특징입니다.

 

그 내면적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외적인 행실, 행위가 나온다고 해도

믿음의 행동, 오래 참음,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이렇게 “신앙적”인 행위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놀지 말고 일해서 밥벌어 먹으라, 남 신세지지 말라’

이런 교훈은 당혹스럽고, 솔직히 당황하게 만듭니다.

이건 신앙운동이나 성경이 아니라, ‘새마을운동’ 또는 ‘국민교육헌장’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종말론의 특징은,

현실적인 종말론’을 강조한 것입니다.

‘종말이 왔다고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성도로서 남에게 얻어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란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말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종말을 맞이하는 신앙적, 영적 자세’에 대해서 그리 강조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바울은 ‘종말을 맞이하는 현실적, 실천적 자세’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마24~25장의 예수님의 종말론을 보더다도,

예수님은 종말론 강화(설교)에서 주로 ‘영성, 신앙, 믿음’을 주로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보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종말론에 있어서 ‘현실적, 실천적 교훈’을 주셨더라고요.

 

예수님의 ‘현실적, 실천적 종말론’은

마24장과 마25장에 각각 한 번씩 나옵니다.

 

1) 예수님은 종말이 더디게 오리라 생각하여, 방만하게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데살 교회와 반대입니다. 데살 일부 교인들은 종말이 급속히 오리라 생각해서 현실을 포기했지요.)

 

마24:48~51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마25장에는 3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모두 종말에 관련된 비유입니다.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가.. 주로 신앙적, 영적인 종말의 자세를 다루고 있다면,

세 번째 양과 염소의 비유는.. 종말을 맞이하는 실천적, 현실적 삶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등을, 먹이고 돌보라는 교훈입니다. 마25:44

 

종말을 ‘마음으로, 믿음으로, 신앙적으로, 영적으로’만 준비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실천적으로, 현실적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묵상글의 주제는, 종말론에 있어서

(*사실 성경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 영적, 내면적 주제들만 다루지 않고

현실적, 실천적 주제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런 현실적 실천적 종말론의 본을 보였다는 것이죠. ↙

 

살후3:7~9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10

이 내용을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십니다. ☞김용기 장로

이런 운동을 펼쳤던 분중에 덴마크에 그룬트비 목사가 있습니다. (1783~1872)

 

그리고 과거에 YMCA, YWCA 운동 등이 일어나서

기독교인들이 사회 계몽과 국민 생활교육 훈련에 앞장 섰던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농민운동, 사회계몽운동이

기독교의 ‘내면적, 신앙적, 영적’ 특징과 맞지 않는다고 보고, 멀리 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런 기독교 사회운동, 사회계몽운동에 치중하다보면,

‘내면적, 신앙적, 영적’인 면이 약화되어, 결국은 기독교가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신앙부흥운동으로 시작했다가,

용두사미처럼, 새마을운동이나 시민운동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YMCA, YWCA 이런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은,

그런 운동은 ‘교회’가 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것이 직접 ‘복음 전파’와 관련 없는 일기기 때문에, (간접적인 전파는 되겠지요)

그런 일에 치중하다 보면, 교회 본연의 사명을 희석시키거나,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내용을 ‘하나님께 받았다’고, 그 권위를 부여합니다.

3:6절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한다’는 말은,

이런 내용을 주님께 받았다는 것입니다. 놀지 말고 직업을 가지라고요!

 

그룬트비 목사님, 김용기 장로님,

이런 분들이 기독교 사회운동, 농촌계몽운동에 힘쓴 것은

주님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도 주님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했음을 들어,

노동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좀더 설득력 있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르고 나태한 행동을 싫어하십니다(시128:2, 잠10:4).

그리고 노동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창1:28)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교리로 자신들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의 떡을 나눌 자격이 없습니다. ‘먹지도 말게 하라’ :10

 

그런데 오늘날 사역자들이

그룬트비 목사님, 김용기 장로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혹시 주님께 그 명령(사명)을 받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분들은, 혹시 주님께 다른 명령(사명)을 받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바울도 ‘일하기 싫거든 먹게 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다른 교회에는 주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주었습니다.

당시 데살 교회는, 그 메시지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농어촌선교를 강조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농어촌선교의 사명을 받지 않은 분들이, 그게 좋아보여서 따라했다가는

큰 열매가 없이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되는데, 자기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명령(사명)을 받았는데, 자기는 다른 명령(사명)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노동의 명령'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론에 있어서, 아니 더 확장해서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쳐서,

내 신앙이 너무 사변적, 이론적, 머리의 신앙에 치우쳐 있지는 않는지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노동의 신앙, 근면의 신앙을 무시하지 말고, 균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절별 해석

 

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을 위한 기도를 특별히 부탁하고 있다.

그것은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다른 곳에서도 복음의 진보가 계속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퍼져 나가달음질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트레케'는 경주와 관련된 용어다.

바울은 때때로 자신의 사도적 노력을 경주로 비유하였다(고전 9:24, 갈 2:2, 빌 2:16).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이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계속적인 복음의 진보로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본 구절은 믿음이 없는 바울의 대적자들에 대한 묘사(2절)와 대조적으로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참되심(롬 3:4)이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미쁘사'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신앙 고백적 표현으로서 그의 서신을 통해 자주 언급되고 있다(고전 1:9, 10:13, 살전 5:24).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본 구절은 바울이 주기도문 중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를 회상한 것으로 짐작된다.

 

'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포네루'는 주석가들 사이에서 세 가지 견해로 나타난다.
1) 이 명사를 남성으로 취급하여 '악한 자'(the evil one) 곧 사단의 대리자로 보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이 말이 롬 12:9와 살전 5:22에는 중성 형용사로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는 남성형용사로 쓰인 것이 중성 형용사로 쓰인것보다 4배나 많기 때문이다.

 

2) 이 명사를 중성으로 취급하여 롬 12:9에서처럼 '악'(evil)로 보는 견해이다(AV, RSV).

 

둘 다 보면 된다.

 

4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도적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갈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 확신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확신은 '주 안에서'라는 신앙의 기초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롬 14:14, 갈 5:10, 빌 2:24).

그들은 주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가 그들에게 권고한 것을 행할 것이다.

 

나아가서 그 일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완성시키시는 주님의 신실성(빌 1:6)에 의해서도

그들은 바울의 명령을 준행하게 될 것이다.

 

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이것의 원래 뜻은 길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버리고 '직행하게 하다'의 뜻이다.

 

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께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냐로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Calvin, Meyer, Hendriksen)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바울이 그 서신서에서 사용하였던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롬 5:5,8, 8:39, 고후 13:13).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문맥상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Alford, Hiebert).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의 개념으로 분리된 의미가 아니라

이 두 가지 개념 모두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의 대상으로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지배 원리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내 -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넨'은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의 특징이다.

 

본 구절도 앞 구절과 같이 두 가지, 곧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의 인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모든 박해를 참고 견디신 그리스도의 인내를 의미하며,

이차적으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아 인내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이 명령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인만큼

반드시 정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게으르게 행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탁토스 페리파툰토스'로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노는 것'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단어이다.

 

여기서 헬라어 '아탁토스'는 원래 군사 용어로 '대열을 이탈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릇된 재림관과 임박한종말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불성실하며

무위 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살전 5:14).

 

‘우리에게 받은 전통’ - 전통은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교훈', '가르침'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체류할때 그들을 향해 선포했던 복음을 비롯하여

본 서신을 통해 제시한 교훈과 권면까지도 포함한다(살전4:11, 12, 5:14).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여기서 의미하는 '떠남'은 출교와 같은 공적 추방이 아니라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멀리하라는 말이다. 즉 이것은모든 교제의 단절이 아니라

의심받고 있는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멀리 떼어 놓으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바울의 경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어 부패하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6절 및 12절에 대조되는 구절로 게으르게 행함에 대한

바울의 분명한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본 구절은 바울의 삶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이고 간결한 표현이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의 모범적 삶을 따라야 했었다.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양식을 값 없이 먹지 않고’ -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으로서 단지 식사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생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삼하 9:7).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 '권리'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수시안'으로 '능력' 또는 '권위'를 의미한다.

문자적으로는 내가 하고 싶어하면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여

법적 권리와는 대조되는 의지적 '권리'를 가리킨다.

 

이 '권리'는 예수께서 친히 그의 제자들의 위임식 때 주신 것이며(마 10:9,10, 눅 10:7, 8),

바울도 실제로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자들이 당시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같은 권리를 고린도 교회에 주장하기도 하였다(고전 9:1-18).

그러나 바울은 한정적인 조건을 달아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경우에만

교회들이 자신을 돕는 것을 허락했다(고후 11:7-11, 빌 4:15b).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수고하고 애썼던 것은 그의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든 믿는 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특히 이 모범은 잘못된 종말사상에 미혹되어 게으름과 나태에 빠진 자들에 대한 교훈적 의미를 지닌다(10절).

그러나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자급 자족의 원리가

다른 사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실제 사용한 권리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복음 사역자들이 누릴 권리에 누를 끼치지 않게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이러한 바울의 명령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수 있고'(창 3:19)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짐작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함축성있는 교훈을 통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했음을 들어,

노동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좀더 설득력 있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르고 나태한 행동을 싫어하신다(시128:2, 잠10:4).

그리고 노동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창 1:2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교리로 자신들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의 떡을 나눌 자격이 없다.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 소문은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로 온 여행자들에 의해 전해진 소식으로서

'주의 날'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잘못된 종말사상을 가리킨다.

 

‘너희 가운데...일만 만드는 자들’ - 바울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바울이 비난하는 대상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을지라도 본절에 언급된 구체적인 사실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일만 만드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참견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 중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하지 말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설득하고(참견하고) 다녔다.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권하기를 -

'명하고...권하기를'이란 표현은

명하고 : 바울이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 객관적으로 엄하게 경고조로 말하는 반면

권하기를 :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훈계조로 호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갈 6:9에서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권면한 후 글을 맺기 전에

본 구절과 같은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바울은 게으른 자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성도들은 요동하지 말고

각자 행동에서 하나님 계명에 의하여 최고 선을 행해야 함은 물론

어떤 어려운 국면에 처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의 말에 순종치 않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권면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기 때문이다.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 바울은 불순종하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지목하여’는 문자적으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표를 붙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지목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자들의 행동을 주목하여 본 후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멀리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목적은 이처럼 죄인을 회개의 부끄러움으로 인도하여 그를 돌이키도록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앞절과 본절에서 징계자에 대한 바울의 일관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규모 없이 행하고 빈둥거리며 참견만 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여기고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기독교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라고 권고한다.

 

'권면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데테이테'는 '훈계',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장로들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다(살전 5:12, 13).

 

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바울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증하신 약속을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마 28:20, 히 13:5).

실제로 주의 평강은 주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마 1:23).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빌레몬서와 같은 짧은 서신에 있어서는 전문(全文)을 바울 자신이 직접 쓰기도 했다(몬 1:19).

그러나 고린도전서(고전 16:21)와 골로새서(골 4:18)는

본서와 같이 끝부분에 자신의 친서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친필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의 이름으로 위조된 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