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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2장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처신

LNCK 2022. 6. 5. 17:58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처신       딤전2:1~15    여러 설교 정리

 

<분해>

딤전2장은 기도에 대해서,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처신에 대해서

바울이 권면하고 있고,

그 중에 7절은 삽입구로 들어가 있습니다.

 

2:1~6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자께 기도하라

2:7  그 일(전파)을 위해 사도가 된 바울 자신 (삽입)

2:8~15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처신

 

◑적용 

 

딤전2장은, 몇 가지 중대한 신학적 논쟁 argue 이 있는 장이라서, 해석하기가 꽤 까다롭습니다.

1)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는 '만민구원설'의 논의   *2:4

2)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 남자를 주관함을 허락지 않는다..는 '여성 목사안수' 논쟁  *2:12

3)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 이거 남녀차별이 아닌가? 하는 성경해석상 문제  *2:15

 

이렇게 한 장 chapter 에, 어쩌면 논문 수 백 쪽의 방대한 연구자료가 있는 논쟁의 주제가

3가지가 등장하고 있어서, 매일 한 장씩 성경을 해석해 나가는데 있어서, 큰 산에 가로막힌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피해갈 수는 없으므로, 한 주제씩 간략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1.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 원한다'는 만민구원설에 대한 변증             -이 단락 출처-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면 이게 잘못 해석하면 '만인구원론'이 돼요. 
여기서 오해를 하면 '어 그러면 우리가 모두 다 구원받겠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열심히 신앙생활할 필요 없겠네.. 
하나님이 다 구원받기 원하신다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에 가겠네.. 
하나님이 다 구원해주시겠네.. 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 구원하길 원하신다면,
이게 예정론, 하나님의 만세전 선택, 이런 칼빈주의 신학과도 정반대로 대치가 되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이 본문에 4번 나옵니다. 그런데 맥락이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1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도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해라고 1절에 나옵니다. 

2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6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모든 사람'이 1, 2, 4, 6절에 4번 반복되고 있어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은 모두 다 구원한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무도 지옥 안 간데.. 모두 다 천국간데,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데...'
여러분 이것처럼 달콤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을 한 구절만 딱 떼서 이해하면, 이렇게 되기 쉽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많은 경우 우리가 잘못 이해하는 게, 
성경에 이런 한 구절이 있으면 그렇다고 확신해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맥락을 봐야 돼요. 맥락!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가 중요해요. 

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지금 이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을 4번이나 재차 반복해서 하고 있을까요?
이게 포인트에요. 

그럼 이게 과연 무슨 맥락의 말씀인가요?

딤전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어요. 에베소(터키)에서 삼 년간 열심히 목회하다가  
이제 마게도냐(그리스 북부)로 가게 되었어요.

과거에 데살 교회를 떠나면서 디모데를 거기 남겨두었듯이
이번에도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거기 남겨두어 목회하게 합니다. 

여기서 '다른 교훈'이란 신화와 끝없는 족보인데 1:4
한 마디로 다른 복음, 비복음을 뜻합니다. 그 당시로는 영지주의죠.
(영지주의는, 영적인 깨달음만 얻으면 방탕하거나 제 마음대로 살아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어요.)

이런 1장의 배경을 가지고, 본문 딤전2장의 '모든 사람'을 해석하면, 
'모든 사람'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당시 헬레니즘 문화에서 영지주의가 꽃 피었죠)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사람만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 라는 의미죠

또한 '(유대인) 족보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주장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그게 아니라는 거죠. 1:4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를, 바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2:4

그러니까 영지주의자들처럼 특별한 사람들, 영적으로 정말 큰 뭔가 신비한 걸 깨달았다는.. 
즉 구원이 뭔가 특별한 사람들만 받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거예요. 

2:
1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그러니까 기도도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죠.
어떤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만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문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당시는 로마제국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헬라인들도 반감이 있을 수 있죠.

그럼 신자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저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 없다.' 

즉 '로마의 황제들, 지방 관리, 통치자들... 저들은 우리와 적이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우린 구별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이니까 
저 로마의 나쁜 놈들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바울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된다'는 거죠. 이건 정권에 아부가 아닙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을 위해 구원의 문이 열려 있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니까요' 2:4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본문 2장에 4번 쓰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인구가 다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만민구원설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럼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이 말은 맞아요. 

구원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 이 말도 맞아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 이건 틀린 거에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 못 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 원하시지만, 구원하지 못 하셔요.
왜냐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은 
누구도 방치하지 않고, 누구도 외면하지 않고,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거죠.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문은 똑같이 열려있다는 거죠. 

누구든지 구원받지만 아무나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관련글 요일2:2절의 해석 A. W. Pink
주님의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만, 즉 따르기로 결단하는 사람만 구원받는 거죠.

그러니 2:4절도 '구원의 초대'가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 초대가 이어서 2:5~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2:5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2:6 

 

여기도 또 '모든 사람'이 나오죠. 
그래서 우리는 2:1절, 2절, 4절, 6절을 같은 맥락으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가 너무 특별한 한 구절이 나왔다. (본문의 2:4절같은)
그러면 여러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아~ 내가 특별한 보물을 발견했어, 성경에 이런 색다른 구절이 있네?' 

그게 아니에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있는데 
그걸 벗어난 정말 엉뚱한 구절이 나왔다... 그러면 내가 성경을 잘못 본 거예요. 100%입니다.

성경 전체의 뜻과 어긋나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가 아니며, 내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2.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의 처신에 관해 (여성 안수 포함)

 

https://blog.daum.net/rfcdrfcd/15980043  참조하세요.

  

바울은 이 단락에서 '유교 윤리'와 비슷한 잔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녀라, 머리를 땋고 다닐 때 이런 것을 조심해라...'

이것은 바울이 데살 교인들에게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처럼,

다소 '듣기에 귀찮은 잔소리'처럼 들리면 면이 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1:5절에서

'이 교훈(설교, 가르침)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우리가 잘 하는 '이신칭의' 신학과 잘 부합됩니다.

즉 '내면적 신앙'이죠.

 

그렇지만 바울은 내면적 신앙과 아울러 실천적 신앙을 강조합니다.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굳이 이해하기 쉽게 분류한다면 '기독교 교육'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과 아울러 기독교 교육을 둘 다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만 강조하고, 기독교 교육은,

마치 그게 복음이 아닌 것처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질까봐 민감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공교육을 가르치는 학교도, 지식만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인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치고, 교통 교육을 가르치고,

심지어는 젓가락질을 올바르게 하는 법, 양치하는 법도 가르치고, 생존수영법도 가르친다고 합니다.

지식과 아울러, 바른 생활을.. 두 영역을 다 가르치는 것이 잘 하는 것이죠.

 

▲3.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해석

 

 https://blog.daum.net/rfcdrfcd/15980031 

 

 

◑절별 해석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하되

 

'간구' '데에세이스'는 '긴박한 상황에서의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을 의미한다.

 

'기도' '프로슈카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뜻한다.

 

'도고' '엔튜크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딤전4:5과 본절에서만 언급되는 단어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는 '중보 기도'를 가리킨다.

 

'감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티아스'는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뜻한다.

 

*추천설교 2:1 간구 기도 도고 감사 - 링량탕 區永亮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당시에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네로가 기독교를 극심하게 핍박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바울의 명령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권세자들을 위한 기도는 나라의 안녕과 사회 질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와 사회가 평안한 상태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안정된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갈수 있다.

 

이는 단지 위정자들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밀착되어서 자신들의 이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서와 안녕의 축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2: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모든 사람을 위한 선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흔쾌히 응답하여 주신다(요일 5:14).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본 구절은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의 주요 쟁점이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본절을 두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보편 구원론적 해석은 타당치 않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예비되었지만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그래서 칼빈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받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겔 33:11)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 바울이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만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며, 진정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실은 개역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본문에 나오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앞절 내용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가르'는 하나님께 드리는 선하고 받으실 만한 기도(1-3절)가

구원의 소망을 확고히 해준다는 점을 나타낸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바울 사도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사람이신'이라는 말을 부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성을 소유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신격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구원주를 하늘 저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사 우리의 친구되신예수(요 15:13, 14)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속전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대속물'의 헬라어 '안틸뤼트론'은

노예나 죄수의 '몸값'을 나타내는 '뤼트론'과

'대신'을 뜻하는 헬라어 '안티'가 합성된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값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그의 속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죄의 멍에로부터 풀려나게 된다(롬10:10-13).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다’ - 본 구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리스도의 구속은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가 증거해야하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르러 일어났다.

 

본 구절의 '기약이 이르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이스 이디오디스'가 문자적으로

'그 자신의 때에'를 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두번째 견해가 타당하다.

 

2: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이를 위하여'라 함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친히 자신을 속전으로 내어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는 의미이다(6절).

 

'전파하는 자' '케뤽스'는 원래 '임금, 군주, 행정 장관, 총독, 군대 장관 등의 공식 통신문을

배달하거나, 공공문서를 전달하고 기타 여러 가지 의무를 이행하는 배달인 또는 사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고

이 일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다(행 9:15; 20:24).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 바울이 복음선포에 대한 그의 직무의 진정성을

이처럼 강력하게 밝히는 것은 1:3, 19, 20에서 시사되듯이 에베소 교인들 중에

유대주의 거짓교사들이 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바울이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의 스승이 된 것'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과 동격을 이룬다.

 

특별히 바울의 사도직이 많은 도전을 받은 이유는 사도란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그 본 것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이 '믿음과 진리 안에서' 된 것임을 강조하여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나 디모데의 권위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고자 한다.

바울은 주 예수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사명을 받은 자였다(행 26:15-18).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특별히 바울 사도가 '분노와 다툼이 없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본 구절의 문맥을 살펴볼 때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선민 의식(選民意識)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분쟁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교인들 가운데서 종식되어져야 했다.

 

한편 본절에는 기도의자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성경에 기록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서서 손을 들고 손바닥은 위로 향하여 펴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기도의 자세가 꼭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하는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는 손'이다.

몸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태도가 더 중요하다.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소박함’ '아이두스'는 본래 '예절', '고상함'을 의미한다(decency, NIV).

본절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예절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삼가하는 것',

'여자다운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숙함'이다.

 

또한 '정절’ '소프로쉬네스'는 '마음의 확고함', '빠른 이해력'을 의미하는 말로 '확고한 판단'

또는 '명석한 판단력'으로 번역할 수 있다.

바울사도가 이처럼 주장한 것은 당시에 여자들이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외적인 화려함에

더 치중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배에 참석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하여 옷치장을 하는 것은 헌신적인 신앙과 거리가 멀다.

 

2: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선행'은 '자선 행위'를 가리킨다(5:10, 고후9:8, 9, 골1:10).

바울은 당시에 교리와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자선 행위의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인 선행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석이나 값비싼 옷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있는 요소이다.

 

2: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순종함으로'는 개인의 권리의 포기나 무조건적인 굴복을 의미하기보다는

조직된 권위, 예를 들어 교회의 법규와 질서 및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2: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도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당부하였다(고전11:2-6).

 

이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기능 차이와 창조 질서를 언급한 것이다.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갈3:28).

본절의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교회의 공공 집회에서 금하는 것이지

자신의 가족들과 가정에서하는 가르침까지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맡겨주신 가르치는 직분을 강조하고 있다.

 

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법으로 제정하셨다는 점(13절)과

여자가 범죄함으로 인한 처벌로 여자에 부과하였다는 것(14절)이다.

 

여기서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았다고 해서 남자가 우월하고 여자가 열등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창조의 순서일 뿐이다(창 2:18-25). 그러나 이 순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다.

 

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여자가 남자를 주관치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행위를 인함이다.

여자가 사단의 유혹에 빠진 것은 모든 인류를 죄의 노예로 만들었다(창3:1-6).

이러한 사실은 여자는 가르치는 일을 맡길 수 없을 정도로

쉽게 꾀임을 받는다는 주장을 가져왔다.

 

사실 하와의 타락은 그녀에게 정해주신 위치를 무시하였을 때 일어났다.

그녀는 복종하는 것 대신 앞장서는 것을 택하였다.

그녀의 범죄는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그녀는 그녀 자신의 죄악된 본으로 인해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하며,

남자를 주관해서는 안된다.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하와'라는 개인으로부터 이제는 일반적인 여자에게로 주제를 바꾸로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 여성에게 있어서 네 가지 미덕을 소개한다.

즉 '정절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뛰어날 수 있는 적절한 품성들이다.

자세한 해석은 https://blog.daum.net/rfcdrfcd/15980031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