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어서, 이건 정말 교회를 망치는.. 아주 손꼽히는 '본문의 잘못된 해석, 잘못된 이해'가 여기 바로 오늘의 본문이에요.
3: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감독 직분을 얻는 것은, 선한 일이니까, 그걸 사모하라' 이렇게 권장하는 것으로.. 이 본문 1절을 이해(오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1절을 항상 목사 장로 임직식 때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또 임직자 교육 할 때, 청지기 세미나 할 때도 이 본문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래서 '직분 얻기를 사모하라' 이런 설교도 많이 하고요. '직분 얻는 일은 선한 일이니까 사모해야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런 말씀을 받는 신자들이 꿈을 꿔요.
'내 남편을 반드시 장로 만들어야지!' 이런 꿈을 꿉니다. 또는 '내 아들을 반드시 목사를 만들어야지!' 라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왜요? '직분을 얻는 것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는데 직분을 얻어야죠.
그래서 '내가 지금은 집사지만, 죽기 전에 권사는 달아야 그래도 내가 장례식장에서 명패에 <故 아무개 권사> 이런 소리를 듣지, 장례식 할 때, 그저 '성도 아무개, 집사 아무개' 하면, 자기 위신이 좀 줄어들까봐 염려합니다.
이런 분도 계시고, 그래서 많은 교회가 '명예 권사'직을 많이 드립니다. 혹은 남발합니다.
왜냐하면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이름이 '故 아무개 집사'로 끝나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에서 장로 못 된 분들을 모아다가 그런 분들에게 '장로'라는 직함을 쉽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면 장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분이 돌아가실 때 장례식장에 '故 아무개 장로'라고 써드리는 것을 굉장히 뿌듯하게 생각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직분을 얻는다'는 말 때문에 목사가 되는 것이, 마치 벼슬을 얻는 길인 양, 그렇게 포장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좋은 일이기만 할까요? 장로가 되고, 권사 직분을 얻는다는 것이, 정말 선하고 사모할 만한 일일까.. 라는 것을 우리가 좀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란, 초대교회 당시의 분위기와, 지금 우리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하늘과 땅차이로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에서 장로 투표를 하면, 과열이 되고, 전화를 돌리고, 심지어 선물을 돌리고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를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유대교에서 출교당하고, 유대교에서 어떻게든 기독교를 말살시키려고 유대주의자들이 사도 바울 같은 지도자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시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테러 당할 일순위였던 시절에 이때 당시 에베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 그리고 그 당시 헬라파 영지주의자들이 에베소에서 제일 먼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였던 디모데 목사였습니다. 그 다음 순위로는,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를 이끌어나갔던 당회원들이겠죠.
(1994에, 교계신문에 이란의 홉세피안 목사, 미카일리안 목사의 순교가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란에도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기독교가 있는데 (아르메니안 기독교, 앗시리아 기독교로 불림) 이란의 극렬 회교도들이 이란교회의 총회장을, 해마다 몰래 테러,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란에서 총회장이 된다는 것은, 곧 순교를 의미했죠. 그렇지만 홉세피안 목사 등은,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의 대표'(총회장)이 되었습니다. 뻔히 당하게 될 순교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순교를 당했지요.)
즉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목사가, 제1순위로 먼저 순교할 대상들인거에요.
로마의 황제가 제일 눈에 가시로 여기는 게 기독교이거든요. 왜냐면 기독교는, 누군지도 잘 모르는 십자가의 죽은 예수를 자기네들 주라고 섬겼어요.
주는 황제인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자기네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 Lord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다 없어져야 될 사람들인 거죠. 척결해야죠. 다 죽여야되는거죠.
그러니까 로마 황제는, 눈이 시뻘개서 기독교도들을 잡으려고 하는데 에베소에서 그 1호가 누구냐? 디모데이고, 그 당시에 에베소의 감독들, 장로들이 제1순위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감독의 직분을 얻는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내가 장로다' 하며 어깨에 힘주고, '내가 우리 교회의 어른이다. 내가 주인이다' 라고 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에요. 핍박 1순위였어요!
'내가 담임목사다. 그러니까 다 내 말을 들어야 돼!' 여러분 이런 직분이 아니에요. 지금 한국 교회의 직분 문화는 굉장히 잘못됐어요.
이 당시에 직분이 뭐냐? 당시 '감독'이라는 말은 '목숨을 건다'는 말이에요. '목숨을 걸고 교회를 책임지겠다'는 말이에요.
우리나라도 초기에 한국교회는 그랬어요. 목사가 된다 그러면, 순교할 준비부터 해야한다고 그랬어요.
목사는 세 가지 준비를 해야하는데 첫째, 설교할 준비를 해야 되고 두 번째, 이사할 준비를 해야 되고 세 번째는, 죽을 준비를 해야 돼요. 순교할 준비!
그러니까 이 땅은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목사는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목사가 돼야 되는데 요즘은 죽을 준비가 안 돼 있잖아요.
목사 그러면 누가 죽는다고 생각해요? 잘 산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이게 당연히 잘못된 거죠. 요즘 목사들이 죽을 준비를 안 해요.
그러면 장로님들은 좀 나은가? 많은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와 장로가 싸우는 거에요.
왜 그러냐면, 여러분 담임목사 되는게 자기 비전, 목적이 돼버렸어요. 장로가 되는 게 인생 목적이 되어 버렸어요.
'나는 반드시 장로가 될 거야, 우리 남편을 장로를 만들거야!' 여러분 그러다 보니까 장로되는 게 꿈인 분들이 장로가 되니까 잘못되는 거고요, 담임목사가 되는 게 꿈인 분들이 담임목사가 되니까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감히 말씀드리면 장로되는 게 꿈인 분들은 장로되면 안 됩니다. 담임 목사되는 게 꿈인 분들은, 담임목사가 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인데 안수 받고 나면, 이분들은 꿈을 이루어버렸어요.
그럼 담임목사가 되는 게 꿈인 사람은, 담임목사가 됐으면 이제 꿈을 이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기 쉬워요.
이제 또 목표는 은퇴입니다. '내가 은퇴하는' 그때까지
본인의 인생도 허비하고, 남의 인생을 갉아먹는 사람이 돼버려요.
장로도 마찬가지죠. 장로가 됐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쳐 일하는 게 감독(장로)인데, 그거 하지 않고, 장로가 되면 그때부터 모든 봉사 끝! 모든 헌신 끝! 그때부터는 주인 노릇하려고 하니까, 교회가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감독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은 '죽을 준비를 한다, 교회를 책임진다' '우리 교회가 로마군인, 극렬 유대인들이 쳐들어와서 다 죽일 때, 그때 내가 맨 앞에서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게 감독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의 당시에 의미였어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말은 뭐냐? '이게 좋은 일이니까 다 직분을 나눠가져라' 라는 얘기냐? 아니에요.
'선한 일'이 뭐에요? 여기서 '선한'의 칼로스 라는 말은, 구약으로 말하면 토브 입니다.
여러분 누가 선합니까? 하나님만 선하십니다. 즉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요. 우리는 '선한' 을, 쉽게 '착한' 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보다 훨씬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하는데, 이 말도 '착한 목자'라는 뜻이 아니고요, 이 말은 '완전한 목자'입니다.
오늘날 목사들도 '선한 목자'이신 '완전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는데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요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그저 착한 목자가 아니에요. 그 뜻은 '완전한 목자'인데, 누가 완전한 가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완전한 목자, 곧 선한 목자이예요.
우리가 자주 부르는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이 찬송도, 결국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시는 예수님, 날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거죠. '착한 예수님'을 찬양하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죽어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즉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하신 목자인데, 그분의 선하심(완전하심)을 따르지 않는 모든 목자는 삯꾼 같아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서도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거죠.
즉 감독/장로/목회자가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것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는 것이고,
그 말은,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순교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즉 '선한 일'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러면 교회는 교회 답지 못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은 다 약탈당하고 흩어지게 되고, 그 영혼들은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는 거에요. 굉장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3:1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사모하는' 것은 또 뭐냐? 헬라어로 '에피쑤메오' 라는 말인데, '탐한다'는 뜻이에요. 영어로 lust, covet 이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갖기 위해서 다른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것만 간절히 바라는 것.. 그런 간절한 사모함을 의미합니다.
마5: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탐한다)'할 때, 이 말이 쓰였고, 눅22:15절에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죠.
이렇게 간절히 사모함을 뜻합니다. 3:1절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에서 '사모함'이 그런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직분을 얻는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선한 일'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 '선한 일'이 뭐라고 했나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로 따르는 일' 그 일을 간절히, 정말 탐할 정도로, 사모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모든 유익과, 나의 모든 야망과 계획과, 내 모든 뜻을 다 외면하고 나는 하나님의 일에만 뛰어들겠다' .. 이게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뜻인 거예요.
자기 명예, 자기 존경받음을 그렇게 탐할 수도 있고, 그렇게 열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악한 일을 사모함'이 되는 거죠.
여러분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순교를 해요? 하나님의 일도 중요하고, 내 일도 중요하고 내 거, 이것 저것이 다 중요하고, 거기에 보태서 하나님도 좀 중요하고... 이러면 이런 사람은 순교 (또는 매일 일상의 순교) 못 해요. 그러면 감독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디모데한테, 뭐 교리적인 것을 설명하는게 아니고 아니면 '이런 사람이 감독으로 세워져야 된다'라고 이렇게 당부를 하기 전에,
본문 3:1절은 무슨 말이냐면 '너 지금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라고 하는 말이에요. '너 죽을 준비 되어 있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교회를 위해서 너는 죽을 준비 되어 있지?' 라고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 말은 '미쁘다' 즉 믿을만한 말이다는 거예요! 3:1
그래서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3:1 이 말씀을 제대로 풀면 무슨 뜻이냐면,
'참으로 맞는 말, 신뢰할 만한 말을 내가 (편지로) 말하는데 곧 사람이 교회에서 목사, 장로가 되는 직분을 얻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신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며, 즉 순교의 각오로 따라가는 것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그분만 생각하고, 그분만 위하고, 그분께만 영광돌리는 것을 위해서 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오직 그 일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야!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맨 앞에 서서 교회를 위해서 죽는 자리에 나아가는 거야!' 라고 확인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이 본문을 오해하고 이걸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여서 '그래 직분 얻는 게 선한 일이니까, 나는 직분을 얻을 거야' 그걸 '사모한다' 하였으니, 내가 직분 얻기를 사모할거야!
라고 잘못 오해하고 뛰어드신 분들이, 일부 목사가 되었고, 일부 장로가 되어서 지금 일부 교회에서 죽도록 피 터지게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수많은 양떼들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목사와 장로들이 서로 자존심 싸움하고, 서로 밥그릇 싸움하고, 서로 한자리 하려고 죽도록 싸워요. 그래서 교회가 사분오열되고, 쪼개지고 있어요.
여러분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른 믿음을 가질 것인가? 내 자신을 돌아봐야 돼요.
그럼 누가 목사, 장로가 되어야 하는가요?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소명을 받고, 이끄심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목사, 장로가 되어야지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그게 좋게 보여서, 내 인생 목표가 되어서' 자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별 해석
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미쁘다 이 말이여’ - 2장에서 교회에서 남녀 성도의 처신 (또는 공중 예배의 지침)을 말한 바울은
본 3장에서 직분을 맡을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감독의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페스'는 '내려다 보다', '돌보다', '감독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에피스코페오'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단어는 벧전 2:25에서 '양떼를 돌보는 사람'으로 쓰였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관하도록 선택된 목사와 장로들과 기타의 사역자들을 포함한다.
초대 교회 당시에 감독이 되는 것은 온전한 헌신과 희생이 요구되었던 만큼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스런 일이 되었기에 '선한 일'로 간주되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바울은 감독에게 요구되는 품성으로 15개 조항을 열거하고 있다.
1) 그 첫 번째 자격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들고 있는데,
'책망할 것이 없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필렘프톤'은 '공격을 받지 않는'이란 뜻으로
레슬링 선수나 권투선수가 공격하는 선수에게 몸을 노출시키지 않는데서 유래되었다.
본 절에서 이 말은 감독의 신령한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비행(非行)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바울이 이런 말씀을 준 이유는, 당시는 일부다처제나 축첩제도가 유행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이 '한번 결혼한 후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교부 시대부터 한번 결혼한 이후 독신자가 되어버린 성직자들의 재혼을
금지시킨 관례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금욕주의를 내세웠던 예에서 영향을 입은 듯하다.
그러나 이 말은 목회자는 꼭 결혼한 자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며
재혼을 금지하는 내용도 아니다. 이것은 다만 일부 일처제(monogamy)와,
감독은 자기 아내에게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결혼 상대가 죽었을 경우 재혼을 반대하지는 않았다(롬7:2, 3, 고전7:9).
3) ‘절제하며’ - 감독의 세번째 조건은 '절제'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팔리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