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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3장 목사, 장로가 되는게 인생 목표이면 안 됩니다

LNCK 2022. 6. 7. 21:40

◈목사, 장로가 되는게 인생 목표이면 안 됩니다        딤전3:1~16            여러 설교 정리

 

딤전3장은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자세히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4장은 그리스도 주님의 좋은 일꾼은 경건에 이르도록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본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3장과 4장은 오늘의 교회에게 주는 리더십 매뉴얼입니다.

 

<3장의 분해>

목회자의 자격 1~7절

집사의 자격 8~13절

바울 자신의 근황 14~16절

 

 

◑적용 / 목사, 장로가 되는게 목표이면 안 됩니다          -이 단락 출처-

딤전3장 '감독(목사)의 자격, 집사의 자격'은 
오늘날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본문입니다.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어서, 이건 정말 교회를 망치는.. 
아주 손꼽히는 '본문의 잘못된 해석, 잘못된 이해'가 여기 바로 오늘의 본문이에요. 

3: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감독 직분을 얻는 것은, 선한 일이니까, 그걸 사모하라' 
이렇게 권장하는 것으로.. 이 본문 1절을 이해(오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1절을 항상 목사 장로 임직식 때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또 임직자 교육 할 때, 청지기 세미나 할 때도 이 본문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래서 '직분 얻기를 사모하라' 이런 설교도 많이 하고요. 
'직분 얻는 일은 선한 일이니까 사모해야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런 말씀을 받는 신자들이 꿈을 꿔요. 

'내 남편을 반드시 장로 만들어야지!' 이런 꿈을 꿉니다. 
또는 '내 아들을 반드시 목사를 만들어야지!' 라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왜요? '직분을 얻는 것이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는데 
직분을 얻어야죠. 

그래서 '내가 지금은 집사지만, 죽기 전에 권사는 달아야 
그래도 내가 장례식장에서 명패에 <故 아무개 권사> 이런 소리를 듣지, 
장례식 할 때, 그저 '성도 아무개, 집사 아무개' 하면, 자기 위신이 좀 줄어들까봐 염려합니다.

이런 분도 계시고, 그래서 많은 교회가 '명예 권사'직을 많이 드립니다. 혹은 남발합니다. 

왜냐하면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이름이 '故 아무개 집사'로 끝나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에서 장로 못 된 분들을 모아다가
그런 분들에게 '장로'라는 직함을 쉽게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면 장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분이 돌아가실 때 장례식장에 '故 아무개 장로'라고 써드리는 것을 
굉장히 뿌듯하게 생각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직분을 얻는다'는 말 때문에 
목사가 되는 것이, 마치 벼슬을 얻는 길인 양, 그렇게 포장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좋은 일이기만 할까요? 
장로가 되고, 권사 직분을 얻는다는 것이, 
정말 선하고 사모할 만한 일일까..  라는 것을 우리가 좀 알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란, 
초대교회 당시의 분위기와, 지금 우리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하늘과 땅차이로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에서 장로 투표를 하면, 
과열이 되고, 전화를 돌리고, 심지어 선물을 돌리고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를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유대교에서 출교당하고, 
유대교에서 어떻게든 기독교를 말살시키려고 유대주의자들이 
사도 바울 같은 지도자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시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테러 당할 일순위였던 시절에 
이때 당시 에베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
그리고 그 당시 헬라파 영지주의자들이 
에베소에서 제일 먼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였던 디모데 목사였습니다. 
그 다음 순위로는,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를 이끌어나갔던 당회원들이겠죠.

(1994에, 교계신문에 이란의 홉세피안 목사, 미카일리안 목사의 순교가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란에도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기독교가 있는데 (아르메니안 기독교, 앗시리아 기독교로 불림)
이란의 극렬 회교도들이 이란교회의 총회장을, 해마다 몰래 테러,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란에서 총회장이 된다는 것은, 곧 순교를 의미했죠.
그렇지만 홉세피안 목사 등은,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의 대표'(총회장)이 되었습니다. 
뻔히 당하게 될 순교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순교를 당했지요.)

즉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목사가, 제1순위로 먼저 순교할 대상들인거에요.


로마의 황제가 제일 눈에 가시로 여기는 게 기독교이거든요. 
왜냐면 기독교는, 누군지도 잘 모르는 십자가의 죽은 예수를 자기네들 주라고 섬겼어요. 

주는 황제인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자기네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 Lord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다 없어져야 될 사람들인 거죠. 척결해야죠. 다 죽여야되는거죠. 

그러니까 로마 황제는, 눈이 시뻘개서 기독교도들을 잡으려고 하는데 
에베소에서 그 1호가 누구냐? 디모데이고, 그 당시에 에베소의 감독들, 장로들이 제1순위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감독의 직분을 얻는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내가 장로다' 하며 어깨에 힘주고, 
'내가 우리 교회의 어른이다. 내가 주인이다' 라고 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에요. 핍박 1순위였어요!

'내가 담임목사다. 그러니까 다 내 말을 들어야 돼!' 여러분 이런 직분이 아니에요. 
지금 한국 교회의 직분 문화는 굉장히 잘못됐어요.

이 당시에 직분이 뭐냐? 
당시 '감독'이라는 말은 '목숨을 건다'는 말이에요. 
'목숨을 걸고 교회를 책임지겠다'는 말이에요. 

우리나라도 초기에 한국교회는 그랬어요. 
목사가 된다 그러면, 순교할 준비부터 해야한다고 그랬어요. 

목사는 세 가지 준비를 해야하는데 
첫째, 설교할 준비를 해야 되고 
두 번째, 이사할 준비를 해야 되고 
세 번째는, 죽을 준비를 해야 돼요. 순교할 준비!

그러니까 이 땅은 목적지가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목사는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목사가 돼야 되는데 
요즘은 죽을 준비가 안 돼 있잖아요. 

목사 그러면 누가 죽는다고 생각해요? 잘 산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이게 당연히 잘못된 거죠. 
요즘 목사들이 죽을 준비를 안 해요. 

그러면 장로님들은 좀 나은가? 
많은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와 장로가 싸우는 거에요. 

왜 그러냐면, 여러분 담임목사 되는게 자기 비전, 목적이 돼버렸어요. 
장로가 되는 게 인생 목적이 되어 버렸어요. 

'나는 반드시 장로가 될 거야, 우리 남편을 장로를 만들거야!' 
여러분 그러다 보니까 
장로되는 게 꿈인 분들이 장로가 되니까 잘못되는 거고요, 
담임목사가 되는 게 꿈인 분들이 담임목사가 되니까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감히 말씀드리면 
장로되는 게 꿈인 분들은 장로되면 안 됩니다. 
담임 목사되는 게 꿈인 분들은, 담임목사가 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사역의 시작인데 
안수 받고 나면, 이분들은 꿈을 이루어버렸어요. 

그럼 담임목사가 되는 게 꿈인 사람은, 담임목사가 됐으면 
이제 꿈을 이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기 쉬워요. 

이제 또 목표는 은퇴입니다.
'내가 은퇴하는' 그때까지 

본인의 인생도 허비하고, 남의 인생을 갉아먹는 사람이 돼버려요. 

장로도 마찬가지죠. 장로가 됐으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쳐 일하는 게 감독(장로)인데,  
그거 하지 않고, 
장로가 되면 그때부터 모든 봉사 끝! 모든 헌신 끝!
그때부터는 주인 노릇하려고 하니까, 교회가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감독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은 
'죽을 준비를 한다, 교회를 책임진다'
'우리 교회가 로마군인, 극렬 유대인들이 쳐들어와서 다 죽일 때, 그때 내가 맨 앞에서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게 감독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의 당시에 의미였어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말은 뭐냐? 
'이게 좋은 일이니까 다 직분을 나눠가져라' 라는 얘기냐? 아니에요. 

'선한 일'이 뭐에요? 
여기서 '선한'의 칼로스 라는 말은, 구약으로 말하면 토브 입니다. 

여러분 누가 선합니까? 하나님만 선하십니다. 
즉 '선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요. 
우리는 '선한' 을, 쉽게 '착한' 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보다 훨씬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하는데, 이 말도 '착한 목자'라는 뜻이 아니고요, 
이 말은 '완전한 목자'입니다. 

오늘날 목사들도 '선한 목자'이신 '완전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되는데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요10: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그저 착한 목자가 아니에요. 
그 뜻은 '완전한 목자'인데, 누가 완전한 가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완전한 목자, 곧 선한 목자이예요. 

우리가 자주 부르는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이 찬송도, 결국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시는 예수님, 
날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거죠. '착한 예수님'을 찬양하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죽어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0:11~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즉 예수님이 우리의 완전하신 목자인데, 그분의 선하심(완전하심)을 따르지 않는 모든 목자는 
삯꾼 같아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서도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거죠.

즉 감독/장로/목회자가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것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른다는 것이고, 

그 말은, 예수님처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순교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즉 '선한 일'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러면 교회는 교회 답지 못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은 다 약탈당하고 흩어지게 되고, 
그 영혼들은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는 거에요. 굉장히 두려운 말씀입니다.

3:1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사모하는' 것은 또 뭐냐?
헬라어로 '에피쑤메오' 라는 말인데, 
'탐한다'는 뜻이에요. 영어로 lust, covet 이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갖기 위해서
다른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것만 간절히 바라는 것.. 
그런 간절한 사모함을 의미합니다. 

마5: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탐한다)'할 때, 이 말이 쓰였고,
눅22:15절에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죠.

 

이렇게 간절히 사모함을 뜻합니다.
3:1절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에서 '사모함'이 그런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직분을 얻는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선한 일'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 '선한 일'이 뭐라고 했나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로 따르는 일'
그 일을 간절히, 정말 탐할 정도로, 사모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모든 유익과, 나의 모든 야망과 계획과, 내 모든 뜻을 다 외면하고 
나는 하나님의 일에만 뛰어들겠다' .. 이게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뜻인 거예요. 

자기 명예, 자기 존경받음을 그렇게 탐할 수도 있고, 그렇게 열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악한 일을 사모함'이 되는 거죠.

여러분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순교를 해요? 
하나님의 일도 중요하고, 내 일도 중요하고 
내 거, 이것 저것이 다 중요하고,
거기에 보태서 하나님도 좀 중요하고... 
이러면 이런 사람은 순교 (또는 매일 일상의 순교) 못 해요. 
그러면 감독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디모데한테, 뭐 교리적인 것을 설명하는게 아니고 
아니면 '이런 사람이 감독으로 세워져야 된다'라고 이렇게 당부를 하기 전에,

본문 3:1절은 무슨 말이냐면 
'너 지금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라고 하는 말이에요. 
'너 죽을 준비 되어 있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교회를 위해서 너는 죽을 준비 되어 있지?'
라고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 말은 '미쁘다' 즉 믿을만한 말이다는 거예요!  3:1

그래서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3:1
이 말씀을 제대로 풀면 무슨 뜻이냐면, 

'참으로 맞는 말, 신뢰할 만한 말을 내가 (편지로) 말하는데 
곧 사람이 교회에서 목사, 장로가 되는 직분을 얻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신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며, 
즉 순교의 각오로 따라가는 것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그분만 생각하고, 그분만 위하고, 그분께만 영광돌리는 것을 위해서 
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오직 그 일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야!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맨 앞에 서서 
교회를 위해서 죽는 자리에 나아가는 거야!' 라고 확인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이 본문을 오해하고 
이걸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여서 
'그래 직분 얻는 게 선한 일이니까, 나는 직분을 얻을 거야'
그걸 '사모한다' 하였으니, 내가 직분 얻기를 사모할거야!

라고 잘못 오해하고 뛰어드신 분들이, 일부 목사가 되었고, 일부 장로가 되어서 
지금 일부 교회에서 죽도록 피 터지게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수많은 양떼들이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목사와 장로들이 서로 자존심 싸움하고, 서로 밥그릇 싸움하고, 서로 한자리 하려고 죽도록 싸워요. 
그래서 교회가 사분오열되고, 쪼개지고 있어요. 

여러분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른 믿음을 가질 것인가?
내 자신을 돌아봐야 돼요.

 

그럼 누가 목사, 장로가 되어야 하는가요?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소명을 받고, 이끄심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목사, 장로가 되어야지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그게 좋게 보여서, 내 인생 목표가 되어서' 자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절별 해석

 

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미쁘다 이 말이여’ - 2장에서 교회에서 남녀 성도의 처신 (또는 공중 예배의 지침)을 말한 바울은

본 3장에서 직분을 맡을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감독의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페스'는 '내려다 보다', '돌보다', '감독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에피스코페오'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단어는 벧전 2:25에서 '양떼를 돌보는 사람'으로 쓰였고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관하도록 선택된 목사와 장로들과 기타의 사역자들을 포함한다.

 

초대 교회 당시에 감독이 되는 것은 온전한 헌신과 희생이 요구되었던 만큼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스런 일이 되었기에 '선한 일'로 간주되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바울은 감독에게 요구되는 품성으로 15개 조항을 열거하고 있다.

 

1) 그 첫 번째 자격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들고 있는데,

'책망할 것이 없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필렘프톤'은 '공격을 받지 않는'이란 뜻으로

레슬링 선수나 권투선수가 공격하는 선수에게 몸을 노출시키지 않는데서 유래되었다.

본 절에서 이 말은 감독의 신령한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비행(非行)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바울이 이런 말씀을 준 이유는, 당시는 일부다처제나 축첩제도가 유행하던 사회였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이 '한번 결혼한 후의 재혼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교부 시대부터 한번 결혼한 이후 독신자가 되어버린 성직자들의 재혼을

금지시킨 관례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성직자들의 금욕주의를 내세웠던 예에서 영향을 입은 듯하다.

 

그러나 이 말은 목회자는 꼭 결혼한 자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아니며

재혼을 금지하는 내용도 아니다. 이것은 다만 일부 일처제(monogamy)와,

감독은 자기 아내에게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결혼 상대가 죽었을 경우 재혼을 반대하지는 않았다(롬7:2, 3, 고전7:9).

 

3) ‘절제하며’ - 감독의 세번째 조건은 '절제'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팔리온'은

본래 '술 취하지 않은 상태'란 의미를 가지며

후에 '온전한', '신중한'등의 광범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원어의 의미를 염두에 둘 때 감독은 술이나 다른 육적인 쾌락을 삼가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시사한다.

 

4) ‘근신하며 - '소프로나'(*)는 '건전한 정신의', '자제하는', '차분한'의 의미를 가진다(딛 1:8,2:2, 5).

감독은 갑작스런 충동으로 좌지우지 하지 않고 매사에 분별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discreet, JB).

 

5) ‘아담하며 - 헬라어 '코스미온'은 '질서 있는', '예의 바른', '명예로운'(respectable, NIV)이란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행위에 있어서 도가 지나치지 않고 점잖으며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6) ‘나그네를 대접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로크세논'은 '나그네를 사랑하는'이란 뜻이다(딛1: 8, 벧전4:9).

1세기에 여행을 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異敎) 분위기에 싸인 여관을 피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룻밤을 유숙할 그리스도인 가정을 찾아다니곤 했다.

이로 말미암아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신자들이 서로 알게 되고 우애와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와 같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미덕이었다.

 

7) ‘가르치기를 잘하며 - 일곱번째 자격인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디다크티콘)은

수다스러운 혀로 달변하는 것을 의미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시켜 영적으로 가르칠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또한 불신자를 전도하고 자신이 맡은 양떼를 말씀으로 잘 양육할 능력을 말한다(마 9:35).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 '술을 즐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로이논'은

'술 곁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뜻하는 '파로이니오스'의 후기 단어이다. 감독은 무절제하게

술을 즐기며, 술을 통해서 마음의 안위와 쾌락을 누리는 자가 아니어야 한다.

 

9) ‘구타하지 아니하며 - 이는 성질이 급하여 폭력을 즐겨 쓰는 행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주장만 일삼는 언어의 폭력까지를 포함한다.

 

10) ‘오직 관용하며 - '관용하며'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피에이케'는 정확히 번역하기 힘든 단어로

'호의적인', '친절한', '참을성 있는', '동정심 많은','관대한', '다정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말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어떤 손해나 아픔이라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11) ‘다투지 아니하며 - 이 말은 본절과 딛 3:2에만 나온다. 이것은 '관용'과 통하는 말이며,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아니하고 타인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한다.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 이 말은 부정적인 태도로 치부(致富)하지 않으며(딤전3:8),

재물을 모으는 것을 생의 첫번째 목표로 삼지않는 자를 가리킨다.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13)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감독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가정의 흘륭한 가장(家長)이 되어 자녀들을 복종시켜야 한다.

'다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스타메논'은 '앞에 서다' 또는 '앞에 두다'를 뜻하는 동사

'프로이스테미'의 현재 분사로 '앞서서 행하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감독이 모든 일에 자녀들의 모범이 될때에 자녀들은 신뢰를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며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다. 이는 또한 감독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데 있어서

그 품위를 잃지 않고 자녀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에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단정함'(셈노테토스)은 '방탕'과 반대되는 말로서 행동이 정숙하고 기품과 규모가 있는 것을 말한다.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본절에 괄호가 있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없는) 앞절을 설명하는 삽입구임을 암시한다.

가정은 사회 집단의 최소단위이다. 이 최소 단위를 잘 다스릴 수 없는 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잘 돌볼 수 없다. 한편 '교회'의 헬라어 '엑클레시아스'는

'엑칼레오'('불러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본래 '정규로 소집된 시민의 정치적 집회'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이스라엘의 종교적 집회에도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이는 건물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교회는 가정과 유사점이 많다. 복음의 사역자에 대한 권위가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비슷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인 형제와 자매가 있는 것도 그렇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큰 가정이라 할 수 있다.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14)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 '새로 입교한 자'의 헬라어 '네오퓌톤'은

'새롭게 씨를 뿌린'이란 뜻으로 최근에 개종하여 교회가 받아들인 자를 가리킨다.

바울이 새로 입교한 자들에게 감독직을 맡기지 말라고 한 이유는

새 신자에게 그와 같은 중직(重職)을 맡길 경우 오만과 야심에 곧장 휩쓸리기 때문이다.

 

‘교만하여져서 - '교만하여져서'로 번역된 헬라어 '튀포데이스'의 문자적 의미는

'연기에 싸이다'이다. 확실한 소명의식이나 지휘 능력이 없는 새로운 개종자는

갑자기 확보된 지위에 의하여 교만의 연기에 싸이기 쉽다. 그 자만심은 높은 지위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하며, 그 결과 타락의 길로 가게 할 가능성이 많다.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 본 구절은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서 '마귀'에 해당하는 '디아볼루'를 '사단'으로 볼 것인가 '중상모략자'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1) '사단'으로 볼 경우에는 '마귀가 당할 정죄'의 뜻이다.

이는 사단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창조되었으나(창 1장) 자신의 교만으로 타락하게 되었고

자만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교만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심판을 받게 된다.

 

2) '중상모략자'로 보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세움을 받은 자가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

마귀가 가져오는 정죄, 즉 마귀가 놓은 올무에 빠진다는 뜻이다.

이러한 견해는 마귀를 주격 소유격으로 보는 이론이다.

 

그러나 '정죄'라는 단어가 '중상모략'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성경상의 표현으로 보아마귀가 정죄의 올무를 놓는다는 의미보다는

마귀가 정죄를 받는다는 전자의 의미가 타당하다(창3:15, 사14:12, 슥3:2, 마4:10, 롬16:20).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15)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교회가 필요없는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한 요구 사항이었다.

'외인'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외부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은

바울이 가졌던 관심으로 여러 곳에 나타난다(고전10:32, 골4:5, 살전4:12).

 

교회 지도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할 때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벧전 2:12).

 

여기서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감독이 세상 사람들에게 아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모범적으로 행동하여 인정받으라는 것이다.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외부인으로부터 선한 증거를 얻지 못한 사람은 쉽게 비방을 받게 된다.

'비방'이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이다. '마귀의 올무'를 혹자는

'마귀가 잡힌 덫' 즉 '교만'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귀가 순진한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 설치하여 놓은 올가미로 해석해야 옳다.

마귀는 환난을 통하여 믿음이 연약한 자를 잡으려고 올무를 설치한다(벧전5:8).

'올무'에 해당하는 혤라어 '파기나'는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설치한 '덫'(눅21:34), '함정'(롬 11:9)을 뜻한다.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집사들도 단정하고 - 본절부터 13절까지는 집사의 자격에 대한 기술이다.

집사의 자격 요건은 앞서 언급한 감독의 자격 요건과 흡사하다.

이는 초대 교회의 집사들이 장차 감독이 될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집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누스'는 '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식사 때 시중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초대교회에서는 '섬기는 자', '봉사하는 자'의 의미로 발전하였다.

 

'집사'라는 표현은 행 6장에서 최초로 나온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불우한 교인들을 물질적으로 돌보는

구제 사업을 맡을 일곱 집사를 선택하였다(행 6:1-6).

 

집사직은 제도화되기 전까지 두 측면에서 언급되었는데,

첫째는 교회의 영적 생활과 재정업무를 돌보던 사람에게 사용되었고(빌 1:1)

둘째는 비공식적인 입장에서 봉사하는 자 모두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엡6:21).

 

이처럼 집사는 군림하는 자가 아님 돌보고 섬기는 일에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다.

'단정하고'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 '많은 술에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는'의 뜻으로 술에 탐닉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 '더러운 이를 탐하지'의 헬라어 '아이스크로케르데이스'는

'부끄러운'을 뜻하는 '아이스크로스'(엡5:12)와

'유익'을 뜻하는 '케르도스'(빌1:21)의 합성어로

'비열한 수단으로 사소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뜻한다.

 

부정으로 취한 것은 항상 더러운 것이다.

또한 정당한 이익이라고 할지라도 과도한 욕망으로 인한 것은 더러운 것에 포함된다.

 

본문은 앞서 언급한 초대교회 집사직의 역할에 비추어 볼 때 분배할 구제품을 횡령하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남기려고 이리저리 유용하는 행위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깨끗한 양심 - 이상과 같이 그리스도를위하여 맡은 바 직분을 감당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깨끗한 앙심을 가진 자이다. '깨끗한 양심'은 '선한 양심'과 같은 의미로(1:5, 19)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앙심이다(히 10:22).

혹자는 이를 '보석을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상자'에 비유하였다.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마침내 사람들에게 공개되거나 선택된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의 비밀'은 '성령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비밀'이다.

따라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좇아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지식을 소유한 자'이다.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 '시험하다'의 헬라어 '도키마제스도산'은

'금속을 시험하다'를 뜻하는 '도키마조'의 명령형이다.

 

'시험하여 보고'에 의거, 한국 교회에는 '서리집사 제도'를 전통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매년 1년 임기의 집사를 임명하는데, 외국에는 없는 제도라고 한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시험하여 보고'라는 말에,

'엄격히 꼼꼼히 따져보고'라는 말은 있지만, '추천된 사람을 기간을 설정해 놓고

합격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성과 구원에 관한 확고한 믿음의 도리를 가졌는지를 시험하라는 것이다.

 

8, 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집사가 될 사람을 판단할 때는

떠돌아다니는 풍문(風聞)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교회 전체를 통한 조화나 관찰을 거쳐야 한다.

이 시험은 세 단계를 갖는데, 그것은 시험과 시험에 대한 증명, 그리고 시험의 결과에 대한 인정이다.

여기서는 이 세단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 '여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나이카스'는

'여자'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여자들'이 어느 집단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집사들의 아내라는 주장

즉 전후 문맥상 8-10절, 12, 13절이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집사의 아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2) 일반적인 여자라는 주장.

이 주장은 8-12절의 문맥상 합당하지 않다.

 

3) 여집사라는 주장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본절의 '여자들'을 감독이나 집사처럼 교회에서 특별한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자들로 이해한다. 다만 여기서 여집사의 자격 요건에 대해 분리된 문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여집사가 제2의 직분이라는 차별 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세 번째 주장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참소하지 말며’ - '참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볼루스'는 '비방하는', '거짓으로 고발하는'의 뜻이다.

특별히 목회 서신에만 나타나는 이 말(딤후3:3, 딛2:3)은

초대 교회에 요구되는 사항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필요한 경고이다.

 

‘절제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팔리우스'는 2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 '모든 일에 충성된 자'는 포괄적인 필요 조건이다.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여받은 직분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혹자는 '모든 일에 충성된 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로 해석하였다.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이제 집사에게도 감독과 마찬가지로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남편된 책임과 자녀를 잘 다스려야 할 것이 요구된다.

'다스리는'(프로이스타메노이) 것은 글자 그대로 '머리가 되는 것'이다.

롬12:8과 살전5:12에서는 이 단어가 교회의 영적 지도자에게 쓰였다.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아름다운 지위'는 교회에서 직분을 훌륭하게 감당했을 때 얻게 되는 첫번째 결과이다.

'집사의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디아코네산테스'는 여자 집사(롬 16:1)와

바울 자신과 바울의 동역자들에게도 사용되었다(고전3:5, 고후3:6, 6:4, 11:23, 엡3:7, 골1:23).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일반적인 봉사의 직분를 칭한다고 할 수있다.

따라서 본문은 '집사 직분을 잘한'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직분을 한'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이 말은 교회에서의 직위 승진을 시사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교회에서 성실히 직분을 감당했을 때 사람들에게 높은 평판을 얻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들에게 오는 두 번째 결과이다.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된다.

 

'담력'(파르레시안)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있어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담대한 것을 말한다.

이 담력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연결되는 것은 담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데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이것'은 2:1-3:13에 기록된 내용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 교회에 가기를 원했으나(1:3)

지체되는 경우를 생각해서 목회 서신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디모데에게 직접 이러한 지침들을 전하지 않고

서신으로 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혹자는

디모데가 너무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이유라고 볼 수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의도에서 이 지침들을 서신으로 전했을 것이다.

 

첫째, 본 서신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말로써 충고하였던 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둘째, 바울이 디모데에게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수신자인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디모데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하여 서신을 기록하였다.

 

셋째, 바울이 에베소를 서둘러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미처 알려주지 못했던 지침들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본 절에서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청지기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몇 사본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헬라어 사본에서 '행하여야'라는 동사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이 동사의 주어는 일반적인 사람이나 디모데가 포함될 수 있다.

 

비록 본 동사('알게 하려')의 주어가 디모데이나 앞의 구절에서 열거되었던 지침들을 살펴보면

문맥상 일반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러러보는 그리스도인 전체의 가족'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는 지상에 있는 보편적 교리를 가리킨다. 교리를 집이라고 일컬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되는 가족들을 소유하고 계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 계셔서 주관하시는 하나임의 소유이다.

바울이 이처럼 교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유라고 말한 것은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이 지킬

거룩하고 흠없는 생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 여기서 '기둥'은 '터'에 의해 더욱 강화되는 지주(支柱)의 개념을 갖는다.

그리고 본문 전체를 볼때 '기둥'과 '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는 '진리'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강조한다.

혹자는 본문을 '하나님께서 각지역 교회의 신앙의 증인들을 사용하사

교인들의 삶의 터전 위에 진리를 강화시켜 나가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 이 구절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찬양이다.

'경건'의 헬라어 '유세베이아스'는 원래 '영혼의 자질이나 상태'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이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삶 속에 나타난 경건을 의미한다.

 

곧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참되게 헌신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경건의 본질이다. 이경건은 비밀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 이제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6행으로 찬송한다.

이 6행의 찬송은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영광스러운 승천으로 끝을 맺는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행하던 찬양의 형태로서 풍부한 운율과 의식적(儀式的)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먼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는 그리스도의 비하(卑下)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 이처럼 저주를 받아 연약해진

인간의 육신을 스스로 입으셨으므로, 이를 통하여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명백히 드러났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앞에서 예수의 인성(人性)을 묘사한 반면 본문은 예수의 신성(神性)을 언급한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 예수는 그의 모든 생애를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본문에서의 의미는 부활에서 나타내 보이신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자들의 구속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벧전1:12).

 

‘만국에서 전파 되시고’ -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마 28:18-20).

인간의 연약함과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해 친히 낮아지사 고난의 생애를 보내신 그리스도는

이제 세상의 구주로서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 이제 세상 가운데 전파되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로 받아들여 지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역사를 말한다. 참된 복음의 권세는

그 복음을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를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져다 준다.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언급이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하늘로 오르셨다(행 1:9).

지상에서의 사역을 승리로 종결지으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셔서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빌2: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