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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4장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LNCK 2022. 6. 8. 19:08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딤전4:1~16       여러 설교 정리       디모데전후서 설교모음   

디모데전후서는 ‘목회자 가이드북’, ‘목회자 핸드북’인데,
딤전1장에서 바울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침을 주었고, 1:5~11
2장에서는 ‘교회에서 남녀 성도의 행실’에 대해 지침을 주었고, 2:8~15 (2:1~15도 가능)
3장에서는 ‘교회의 직분자인 감독(장로)과 집사의 자격’을 가르쳤습니다.
   
본문 딤전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며,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하라고 말합니다. :5, 7
특히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본을 보이라고 합니다. :12

<4장의 분해>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 4:1~5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 경건의 본이 되라 4:6~18


◑적용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3:16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인데, 
영어로 piety (경건), godliness (경건), reverence (경외감) 등을 뜻합니다.

 

신약성경에 모두 15번이 나오는데, 그 중에 9번이 디모데전후서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디모데전후서의 키워드가 되겠습니다. 

딤전2:2, 3:16, 4:7, 4:8. 6:3, 6:5, 6:6, 6:11, 딤후3:5

그외 디도서에 1번, 베드로전후서에 4번 나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말은, 딤전에 18회, 딤후에 8회, 도합 26번이 나옵니다. 

그럼 '믿음' 과 '경건'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본질은 똑같습니다. '신앙'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지 정 의를 다 포함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마음, 생각의 측면'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은, '의지적 측면'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행동하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경건은 '훈련'하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훈련하라)' 딤전4:7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8

여기서 '육체의 연단 (운동선수의 훈련)'과 '경건'이 평행법으로 쓰였습니다.

둘 다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엉덩이로 하듯이, 기도도 엉덩이로 한다'는 말을 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하고, 기도도 '엉덩이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무릎 꿇는 훈련'이면 더 좋고요.

 

어떤 사람은, 초기에 기도훈련을 받을 때, 수첩에 자기가 기도하는 시간을 매일 기록합니다.

'아침에 15분, 점심 때 15분, 중간에 쉬는 시간에 10분, 저녁에 30분...'

이렇게 몇 달을 '기도 훈련'하는 법을 보았습니다.

수첩에 '기도 총량'을 기록하면서, 하루에 1시간이든지, 3시간이든지

자기가 목표로 한 기도 분량을 채우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습관이 안 된 사람에게는, 좋은 기도훈련, 경건의 훈련 방법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을 받는 사람은,

수첩에 자기 훈련량을 기록합니다. 마구잡이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매일 목표량을 정하고, 매 주 단위로 진도를 체크하면서

자신이 지금 behind schedule 인지, 만약 진도가 늦었으면 주말에 보충하든지 합니다.

이것이 '훈련'입니다.

   

▲딤전3:15절에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나옵니다.

거기서 말하는 '진리'란 무슨 의미입니까?

 

이어서 16절에,  '진리'의 내용이 이렇게 나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괄호 부분은 끊어서 17절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기서 '경건의 비밀'이란 무슨 뜻입니까?

경건 godliness 이란, 위에서 '믿음의 행위적 측면'이라고 했는데,

다른 말로는 '하나님을 닮음'입니다. 영어로 godliness가 그 말이죠.

 

그게 '비밀 mystery'이라는 것입니다. 

즉 경건이 중요한 줄.. 못 깨닫는 사람이 많고,

경건이 중요한 줄 ..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울이 '비밀이여!' 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경건에서 능력이 나오고, 경건에서 권세가 나오고,

경건에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데 *4:8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도,

경건이 중요한지 모르고 사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은, 지난 4세기 동안 교회에서 ‘경건한 성도’가 존경 받았습니다.
그 분위기가 16세기, 17, 18, 19세기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다들 농업이나 1차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큰 부자’도 없었습니다. 

부자라고 해도, 시골의 경작지를 좀 더 소유하거나
치는 양떼와 소떼가 조금 많은 부자였습니다. 다들 고만고만 했습니다.

또 종교개혁 이 일어난 16세기 이후, 
17, 18, 19세기에 교회들도 ‘큰 교회’가 거의 없었어요.

왜냐면 큰 도시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부분이 200가호, 300가호 정도의 마을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지 휫필드가,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을 타고 부흥회를 인도하던 시절은
대부분 고작 몇 백 명 모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전기도 없었고, 그래서 마이크도 없어서 육성으로 설교를 했고요, 19세기까지 그랬죠.
교회당에서도 저녁 예배 드릴 때는 촛불 켜놓고 예배를 드렸어요.

사람들은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라, 말을 타고는 멀리 가지도 못했고, 
그러니 다들 농사 지으면서, 큰 부자도 없고, 크게 가난한 사람도 없었고,
지금처럼 뭐든지 대규모로 하던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17, 18, 19세기까지 교회에서의 미덕은 ‘경건’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신앙생활 하고, 자녀들을 경건하게 양육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으며, 신사나 숙녀처럼 행동했으며, 
외설적인 것이라야 고작 마을 도서관에 가서, 연애소설 빌려서 읽는 정도의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세계도 판도가 바뀌고
기독교계도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경건한 성도’보다는
‘부자 성도’가 교회에서 존경받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경건한 성도’는.. 그가 가난하면, 무능한 성도로 인식되고 말았고,
‘부유한 성도’는.. 그는 믿음도 좋고, 신앙을 삶에 잘 적용해서, 교회의 본이 되는 성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에 점차 교회에서도 
‘경건’을 강조하는 설교의 흐름은 점차 잦아들었고,

‘부자’를 강조하는 설교의 흐름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부자이면서 예수를 잘 믿은 사람, (사실 그들이 예수를 잘 믿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음)

예를 들면 강철왕 카네기,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 자동차 왕 헨리 포드, 그 외 록펠러 등이
개신교 교인들이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가톨릭은 청빈의 전통이 아직까지 계속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점점 그 범위가 확대되어서, 유명 경제인에서
이제는 유명 정치인, 유명 스포츠 스타, 금메달리스트, 유명 방송인, 유명 셀럽...
이런 분들이 자의반/타의반으로 ‘설교 예화’에 단골 초대인사가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탈렌트, 개그맨까지 
전도집회, 간증집회의 강사로 초대받는 일이.. 하나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들의 신앙이 아주 모범적이고, 존경받을 만해서 그렇기도 하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성공한 것을 보니, 뭔가 잘 믿어서 그런가 보다..’ 하는
세속주의, 현세주의적 가치관이, 목회자나 교인들 가운데 딱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견고한 진’처럼!

그런 가운데서 ‘경건한 신앙인, 경건한 가장, 경건한 어머니, 경건한 장로님..’
뭐 이런 것은, 박물관에나 가서 찾아봐야 되는... 그런 기이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란 ‘그리스도교’를 한자로 표현한 것인데
이제 우리 스스로도 ‘기독-번영교’ 또는 ‘기독-성공교’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고,
사회적 인식도 그렇게 우리 기독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2021년 가을에 주식 폭등 광풍이 불 때도
교회에 와서 신자들은 ‘주식 정보’를 부지런히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어디에 투자해야 된데.. 누가 거기 해서 많이 올랐데...’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물어올 정도였습니다.
‘너희 교인들은 정보가 빠르게 유통된다던데, 교회에서 뭐 좀 들은 새로운 투자정보 없어요?’

부동산 폭등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님과 집사님의 입으로 전달 된 투자 정보들이 돌아다니면서,
집사님과 권사님이 함께 차를 타고 가서, 함께 매입 신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집사님들끼리 모여서 고스톱을 칠 때는, 정말 너무 순진했던 시절이었군요)

이 모든 일이 교회에서 “경건”을 강조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 바울은 앞서 7~9절의 내용, 
즉 경건이 주는 유익과 약속을 위해서, 수고하고 힘쓴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경건'을, 성도의 삶속에서 이루기 위해서,

바울은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쓴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믿음과 경건은 본질은 같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함'입니다.

1) 그런데 '경건'은, 그 중에서 '의지적 측면, 즉 행위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고,

2) '훈련'이 필요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몸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신앙과 믿음을 '마음과 생각으로만' 해나가려 합니다.

이게 대세입니다.

이가운데서 우리는 '경건의 비밀'을 갖게 되기 바랍니다.

'경건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비밀이니까요!

 

▲참고로, 야고보서에도 '경건'이란 말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1:26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이 단어는 헬라어로 세라스코스, 세라스케이아 인데, 영어 성경에는 religous, religion 으로 번역했습니다.

세라스코스는 '하나님을 두려워 떪'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경건인, 유세베이아 와 다른 단어를 썼지만, 

비슷한 말로 보면 되겠습니다. 한글 성경은 똑같이 '경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관련 예화 1 /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영웅이 있었다. 
린드버그 대위다.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다. 

린드버그 대위는 조그만 비행기를 몰고 서른 몇 시간 동안 대서양을 횡단했다.
그리고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다. 
그가 영웅이 된 다음에 파리를 한 번 방문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어느 담배 회사 사장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회사의 담배를 광고하고 
싶었다. 그는 린드버그에게 다가가 담배 한 개비를 주면서 말했다.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취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5만 달러라면 대단한 액수였다. 
그러나 엄격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린드버그는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한다. 
“선생님, 저는 침례 받은 교인입니다.” 

이 사연이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고, 
그의 말을 듣고 그 당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성금 10만 달러를 모아서 린드버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평소에 린드버그가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관련 예화 2 / 유명한 미국의 골퍼, 래리 넬슨의 잘 알려진 에피소드입니다.
우승과 준우승을 판가름하게 될 어느 대회의 마지막 퍼팅을 앞두고
래리 넬슨은 머리 숙여, 진지하게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되게 긴장이 되기는 했었나 봅니다...
어쨌든 밀레의 만종을 연상케 하는 보기에도 경건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비장한 짧은 기도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어서 시도한 마지막 퍼팅에서
하얀 골프공은 파란 잔디 위를 굴러 홀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우승한 것이지요.

그런데 승리의 감격과 환호성 후에
절친한 친구가 다가와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승리를 축하하네, 그런데 아까 자네가 진지하게 기도할 때
우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나?”

래리 넬슨의 대답입니다.
“아니야, 반대로 기도했네,
하나님! 우승컵을 갖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의 욕심을 없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지...”  정말 경건한 신앙인의 내공입니다. 

 

◑절별 해석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본장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를 명하고 있다. 
1-5절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금욕주의에 대한 교훈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의 거짓 예배가 하나님의 참된 예배를 더럽히고 있는 것을 경계시키고, 
이것이성령에 의한 예언임을 밝히고 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기르침을 좇으리라’
'후일'(휘스테로이스 카이로이스)은 묵시 문학적으로 '말세'(막13:5-37, 딤후3:1)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가까운 장래'를 의미한다. 즉 어떤 특정한 시간에 실현되는 임박성을 가리킨다. 

'미혹케하는 영'(프뉴마신 플라노이스)은 '거짓말하는 영'을 가리킨다(왕상 22:22). 
이 말은 방황을 뜻하는 '플라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방황하게 하다', '길을 헤매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공동번역: 이런 교설은 거짓말쟁이들의 위선에서 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의 양심에는 사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맞아서’ 
'화인맞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카우스테리아스메논'은 문자적으로 '인두로 도장을 찍은'이란 뜻이다. 
이 말은 노예 매매시 주인이 노예에게 신체 부위에 불로 지져서 자기 소유를 표시했던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이 부위는 점차 딱딱해져서 감각(感覺)이 없어지게 된다. 
즉 양심이 화인맞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서 감각이 무디어진 자들이다(엡 4:19). 
이처럼 그들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진리를 구별할 수 없게 하는 그들의 소유자는 사단이다.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 
이 말은 '마귀들로부터 조종받는 사람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 에베소 교회의 이단들은 금욕주의자였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한 것이며, 육적인 것은 악에 물들게 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혼인을 불쾌하게 여겼고 몇몇 음식을 먹지 않았던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다(롬14:1, 2). 

'혼인을 금하는' 풍습은 엣세네파(Essenes)에서 시작하여 테라퓨테파(Therapeutae)에서 유행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영지주의자(Gnostics)들의 교리가 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1세기에 교회에 들어와서 2세기 경까지 교회에 두루 퍼졌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 쾌락을 죄로 규정하였고, 
성결(聖潔)하게 되는 것은 금욕을 통해서만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창 1:10, 12, 18, 21, 25, 31). 
따라서 억지로 행하는 금욕주의와 금식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배치(背馳)된다.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특정한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모세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레 11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불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갈 5:1-6). 
따라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막7:5, 롬13:14, 딛1:15).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지 않는다(롬1:21).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본절은 앞절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1장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지으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스마'는 '창조하다'를 뜻하는 동사 '크티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창조된 피조물'을 뜻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말함으로써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다고 표현한다. 
사실 인류에게 아무 쓸모 없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따라서 본문은 '만일 감사함으로 받으면'으로 조건적 분사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버릴 것이 없다'는 원인, 결과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을 창조자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일용할 양식과 마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전제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필수적인 조건이다. 

혹자는 '말씀과 기도'가 음식물 자체를 거룩하게 한다고 하나 
그것은 지나친 해석이며 그것보다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스도인은 먹고 마시는 행위에 있어서 결코 세상 사람들처럼 쾌락과 만족을 추구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전10:31).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 '이것'은 1-5절의 내용을 지시한다. 
'형제'는 교회 안에 소속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벧전 2:17, 5:9).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의 형제들이요, 영적 식구들이다. 
바울이 여기서 이 말을 한 것은 결코 권위를 나타내려고 함이 아니라 
이단 세력으로부터 에베소 교인들을 보호하려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믿음의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참된 복음의 말씀이며, 
'선한 교훈'은 거짓 교훈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훈들을 말한다.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다. 
'허탄한 신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라오데이스 뮈두스'는 
늙은 노파가 어린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헛된 말을 가리킨다(old wives' tales, NIV, JB, Scott). 

즉 본절의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란 이단들이 주장하는 끝없는 족보와 신화를 나타낸다(딤전 1:4). 
바울은유대인의 신화와 족보를 이렇게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디모데에게 이런 것들을 내버리라고 권고한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유세베이안)은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 
이런 경건의 연습은 8절의 '육체의 연습'과 대조를 이룬다.

 

직전 6절은 디모데에게, 자신과 그의 교회가 거짓 가르침에 맞서 진리를 변호하도록 준비하라고 명했다. 
여기 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에 대한 실용적인 조언을 계속 제공한다. 

바울은 이전에 디모데전서 1:4에서와 같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언급했다. 
이러한 미신에는 4:1-5절에 언급된 영지주의 이단도 포함된다. 
거기서 바울은 특정 음식과 결혼을 정죄하는 사람들에 대해 논했다. 
  
당시 문화에는 미신과 험담이 만연했다. 
오늘날 우리는 미신적인 신화를 "늙은 아내들의 이야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이다. 

디모데가 피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신뢰할 수 없는 소문이다.

디모데는 대신 개인의 경건에 노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여기에 사용된 표현은 특히 가르침과 지시를 나타낸다. 

이 훈련은 단순히 지식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위한 훈련이었다. 
이것은 "오직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야고보서 1장 22절의 말씀과 비슷하다. 참된 경건은 항상 행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육체의 연습'이란 고대의 운동 경기자들이 경기에 나가기 전에 부지런히 훈련하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이것은 육체를 단련하기 위한 운동뿐만 아니라 외식적인 신앙 행위 
즉 철야 기도, 금식 기도 등을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습은 엣세네파에서 중요시하던 규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잠시 동안 유익이 된다. 
'약간의'에 해당하는 '프로스 올리곤'은 시간의 길이를 뜻하는 '얼마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삶을 사는 자는 금생(今生)에 하나님과 더불어 삶으로써 은혜가 넘치는 평화스러운 삶을 살며(시34:1, 2), 
내생(來生)에 있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막 10:30). 
이러한 삶은 잠시 동안만 유익을 주는 육체적 삶과 달리 항상 유익을 준다. 

이처럼 경건의 축복을 말하는 본절은 자신이 처한 세상 환경에 관계없이 
가장 풍족한 삶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실존(實存)을 잘 말해준다.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 관용적 표현은 1:15에서도 동일하게 나온다. 그런데 이 말이 8절의 경건과 관련된 것인지, 
10절과 관련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당시 10절보다 8절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던 사실 때문에 전자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경건의 주제를 다루는 8절보다 
소망의 하나님을 언급하는 10절이 더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또 10절 초두에 나오는 '이를 위하여'가 8절의 '경건'을 말하고 있으므로 후자가 타당할 것이다.

NIV는 후자가 타당하다는 견해에 따라 10절 초두, 
즉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을 괄호로 묶고 있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 바울은 앞에서 인용한 말씀, 
즉 경건이 주는 유익과 약속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여러 동역자들의 노력의 근거라는 말로 위로하고 있다. 

복음 때문에 현재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은 그들의 양심 가운데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교제가 있고, 장차 즐겁고 복된 날을 소망하기 때문에 고통을 이길 수 있다.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 이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수고하고 진력한 이유이다.

경건은 현재를 살아가는 삶뿐만 아니라 장차 영원한 삶을 확실히 보장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현재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다.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쳐라' - '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랑겔레'는 원래 군대에서 사용하는 명령어였다.

예수께서는 신적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실 때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마 10:5, 15:35, 막 8:6, 눅 8:29 ,9:21).

 

그리고 바울 사도는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하였다

(살전 4:11, 살후 3:4, 6).

 

본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확실한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가르치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바울이 6-10절에서 말한 모든 것을 지시한다.

'가르치라'(디다스케)는 현재 명령법으로 '계속하여 가르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 '연소함'(네오테토스)이란 '젊음'을 뜻하는

'네오스'에서 온 말로서 유대 사회에서 군대를 갈 만큼 자란 나이에서부터 40세까지 달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디모데의 나이가 매우 어렸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연소함'은 장로들이나 교인들 틈에서 경륜이 적은 디모데가

상대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기에 어려운 점을 의미하는 것이지

나이에 대한 연소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의 권위는 외부적인 치장이나 장식, 그리고 연령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가르침과 거룩한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말'이란 공개적인 연설뿐만 아니라 사적인 대화까지도 포함한다.

'행실'(아나스트로페)은 다른 사람과 관계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또한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세 가지 '사랑', '믿음', '정절'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적인 성품이며,

이것들도 결국 타인과 관계된 생활과 연결된다.

 

바울은 본절에서 디모데가 비록 젊은 사람이었지만 경험(經驗)이 충분한 인생을 산 사람처럼

말과 행실에 있어서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보살펴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음직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내가 이를 때까지' - 본문은 내용상 3:14의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와 일치한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 없는 중에 디모데가 대리자의 직무를 수행하여

공중 예배에 관한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읽는 것'은 공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말한다.

헬라어 성경과 개역성경에서는 그냥 '읽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NIV에서는 '성경'(Scripture)이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초대 교회의 유대교 회당에서는 모든 공적 예배에서 성경을 공식적으로 낭독(朗讀)하였다(눅 4:16, 행 3:15, 고후 3:14).

본절에서는 율법서와 선지서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과 바울이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적으로 읽는 것을 말하고 있다(골 4:16, Hendriksen).

 

'권하는 것'은 교리와 도덕에 어긋남이 없게 하기 위하여 충고하고 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눅 4:16-30)

'그릇된 사상에 미혹되지 않고 확고한 믿음 위에 설 수 있도록 해석하고 권유하는 것'을 뜻한다.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네 속에 있는 은사...조심 없이 말며'

본절은 디모데가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헛되게 묻어두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은사'의 헬라어 '카리스마토스'는 '카리스'('은혜')에서 나온 말이며,

이는 성령으로 부여받는 모든 영적 은혜와 능력을 의미한다(눅 7:42, 행 27:24, 롬 8:32).

 

본절의 '은사'는 교회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 안수를 통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절의 '은사'는 '직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적절한 해석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디모데에게 주어진 은사는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고,

안수는 초대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자에게 행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여기서는 일반적인 은사의 의미와 직분의 의미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가볍게 여기지 말며'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에게 목회자라는 위치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고

성별된 것이므로 소홀히 여기거나 헛되게 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

디모데가 안수를 받은 것이 언제, 어디서, 행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때에 루스드라에서 일어났던 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혹자는 이 안수 의식이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두고 떠날 때에 거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로의 회'는 장로들의 단체, 즉 교회의 공회를 가리킨다.

장로회는 그 이후 점차 성례전을 행하는 단체로 직제화(職制化)되었다.

아마 바울도 이 장로회의 일원이었을 것이다(딤후 1:6).

 

'안수'(에피데세오스 톤 케이론)는 고대로부터 유대 사회에 내려온 관습으로서

권위나 축복, 능력 등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그 대상자에게 전달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서는 장로회에서 실시되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인간의 의식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인 권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 '모든일'이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수행해나가야 할 일을 가리킨다.

'전심'의 헬라어 '멜레타'는 문자적으로는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지만

여기서는 '실시하다', '경작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바울의 관심은 디모데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디모데의 진보가 교회 내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접촉하는 모든 외인들에게까지 드러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 이 말은 '네 자신과 가르침에 유의하라'는 뜻이다.

이는 디모데가 스스로 조심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한편 '가르침'은 '교훈, 디다스칼리아'이라고 볼수 있다(doctrine, KJV).

따라서 본절의 '가르침'은 공적인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계속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메네'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의 옆에 계속 머물러 있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곳에 계속 머물러 내가 지시한 일들을 계속해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