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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5장 새 가족 공동체인 교회

LNCK 2022. 6. 9. 20:38

 

◈새 가족 공동체인 교회           딤전5:1~25             여러 설교 정리

 

딤전5장은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태도,

또는 성도가 성도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말에 '남녀노소'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에도 나옵니다. 

늙은 남자 (1절), 젊은 형제 (1b),

늙은 여자 (2), 젊은 여자 (2b),

과부 (3~16), 장로 (17~22, 장로에 대한 권징 포함), 종과 상전 (6:1~2) 을 대하는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딤전 4장에서 가장 핵심적 주제이자 내용은, 교회 지체들을 “가족처럼 대하라” ..입니다.

 

늙은 남자, 젊은 형제, 늙은 여자, 젊은 여자, 과부, 장로들을 (심지어 종과 상전까지도)

다 “가족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실로 꿰면, 본문 딤전5장이 다 꿰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 공동체는 ‘영원한 가족’과 같다는 것이 성경적 시각입니다.

 

우선 디모데전서 5:1-2절을 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라고 합니다.

이런 자에게는 자기 아비에게 하듯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자기 가족 중의형제에게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늙은 여자는 자기 어미에게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기 자매에게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적용 1. “새 가족 공동체인 교회”

 

교회란 단지 일주일에 몇 번 만나서 예배드리는 집단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정은 우리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정입니다.

 

그러나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맡형님으로 모신 ‘주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을 ‘주님과 함께 된 공동상속자’라고 말했죠. 예수님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롬8:17, 막3:35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가족인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가 성도에게 대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성도가 성도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가족인 교회에서의 질서를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만드신 새 가족

 

막3:33~35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은 영적인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영적인 가족을, 혈통적 가족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10:29~3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그러니까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고 했듯이, 복음을 위해서는

형제, 자매, 어미, 아비를 일시적으로라도 멀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팽개친다는 뜻은 아니고요.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을 백 배나 받는다고 하는데... 난해 구절입니다.

혹자는 ‘주 안에서 형제, 자매, 부모, 자녀들을 백 배나 받는다’고 해석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안에서 교제하는 새로운 영적인 가족들이 백 배로 많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2. 초대교회는 가족 공동체

 

행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렇게 초대교회가 유무상통 하는 공동체가 된 것은

‘주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음’을, 그들이 서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족의 필요를 챙겨주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21세기 신풍속도에 의하면

부부지간에도 따로 지갑을 쓰는가 하면,

형제지간에도 서로 남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남’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돌이켜야 될 부분입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는 안 볼지 몰라도, ‘가족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33절에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abundant grace was upon them all’ NASB

이렇게 초대교회가 한 가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넘치는 은혜가 그 위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NASB

 

오늘날 가족간 불화를 겪는 가정이 있다면 ‘은혜가 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전화하고, 대화해서 풀려고 하다가.. 더 크게 싸우고 갈라집니다.

쌍방 간에 ‘넘치는 은혜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쪽만이라도 ‘넘치는 은혜가 임하면’ .. 가족이 갈라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넘치는 은혜 받은 한 쪽이 참고 감내해 내니까요!

 

위 두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만들어내신 새 가족인 교회가

현세에서 미리 천국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과 겸하여 받는 것입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서 가정에서 핍박을 받아 쫓겨나서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니

형제자매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버린 것들을 백배나 현세에서 받은 것입니다.

 

▲3. 새 가족 공동체에 생긴 현실적인 문제

참과부를 돌보는 문제, 장로의 권징에 관한 내용인데

아래의 절별 해석을 참조하세요.

 


◑적용 2. 크리스천의 직업 목적

 

자기 가정을 돌보고, 교회의 식구들을 돌보고, 참과부들을 구제하려면..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직업이 없으면.. 가정과 교회에서 '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1. 크리스천은 직업을 통해... 자기 가족을 돌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5:8   

 

살후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크리스천이 자기 가족을 돌보고, 영적인 가족을 돌보려면.. 직업을 통해 경제활동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자기 친족'까지 돌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목적의 노동은 의미가 있고, 아름다우며, 귀천이 없습니다. 

 

2. 크리스천은 직업을 통해... 교회의 가족을 돌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6:10

오늘날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이고,

요즘은 '돈이 피보다 진하다'고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돌아보라'고 명하시는, 믿음의 가족이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내가 그를 돌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 그를 돌보실 것입니다. 에4:14참조

그렇지만 나는 '주님의 지시에 불순종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그런 사명에서 앞으로 탈락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직업 목적) 3. 직업을 통해... 사회의 빈자를 돌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직업의 의미는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입니다.
또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잠23:4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4:28

어떤 분들은 '구제를 목적으로'

공휴일에 몇 시간 알바를 뛰거나, 잔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리얼 크리스천 들입니다.  

 

4.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주인에 대한 성실한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엡6:5, 딛2:9                                              -이 단락 출처-

 

▲관련 예화 1. / 주 안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난 백낙준 부자

평안북도 정주군에 한 시골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가 갑자기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배당을 증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의 면면을 보면 다 가난하였습니다. 제대로 사는 교인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농민들이라 교회를 증축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가운데 백사겸 집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너무 가난해서 건축헌금 낼 형편이 되지는 못해서 늘 기도로 돕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없는 돈 내려 하지말고, 있는 돈을 내면 될게 아니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그래서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드디어 그 음성의 뜻을 깨닫고는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인 논 3마지기를 팔아 건축헌금으로 바쳤습니다. (반드시 음성 듣고 하십시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마음과 충성 헌신을 칭찬하기는커녕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주제도 모르고 헌금을 그렇게 많이 하다니" 

 

동네사람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쟁이가 되더니 논까지 팔아 바치는군. 내년부터는 머슴살이를 해야 되겠구먼.."

 

소문이 교회 안에 동네에 자자하게 되자 이윽고 선교사님이 백사겸 집사를 불렀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논을 팔아 헌금했는데 후회되지 않습네까?"

 

백집사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선교사님은 이 집사님의 믿음과 충성과 헌신에 감탄하게 되어

그를 교회 사찰집사로 일하게 하고, 그의 아들 백낙준은 신성학교 주1)에 보내 공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성학교 교장인 선교사님이 그를 끔찍이 사랑해 자식처럼 돌보아 주고

그를 중국에 유학을 보내 주었습니다. 주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입니다.

 

그 후 백낙준은 중국 유학에 이어 미국에 가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또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1927년 귀국하여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다가,

해방이후 문교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1957년도에는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어 섬겼습니다.

 

백사겸과 백낙준 부자는, 미국 선교사와 영적인 가족관계가 되어서,

더 하나님을 마음 중심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주1) 신성학교(信聖學校)는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 설립한 기독교 중등 사립학교였다.

1897년 선천읍교회의 양전백, 노효준, 그리고 나병규등이 중심이 되어서 설립되었는데

휘트모어, 베어드 등이 선천에 상주하면서 교회가 성장하였다.

1905년 7월 양전백과 김석창을 중심으로 선천중학회라는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시작되었고

1906년 9월 초대 교장으로 선교사 휘트모어(Norman C. Whittemore, 위대모)가 추대되었다.

평북 선천읍의 교회당에서 26명의 학생들로 시작하였다. 1942년 9월 선천중학교로 개명하였다.

이 학교출신으로는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백낙준, 박형룡, 박윤선,

김창인, 고병간, 계훈제등이 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이 학교가 발상지였다

 

 

◑절별 해석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늙은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로'는 다른 곳에서 교회의 직책을 나타내는

'장로'(elder,presbyter)로 사용되었으나(17, 19절, 딛 1:5)

여기서는 문자적인 의미가 그대로 적용되어 '노인'(older man, NIV)을 뜻한다.

 

'꾸짖지'의 헬라어 '에피플렉세스'는 본래 '주먹으로 치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말로써 때리다'는 뜻으로 공격적인 심한 질책을 나타낸다.

디모데는 비록 연소하였으나(4:12), 한교회의 목회자로서 때에 따라서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연장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어야 했다.

그럴 경우 바울은 온유한 태도로 권할 것을 충고하였다.

 

'권하되'의 헬라어 '파라칼레이'는 '올 것을 요구하다', '충고하다', '위로하다'의 뜻으로

자신에게 오게 하여 충고하며 위로하는 따뜻한 권면을 의미한다. 이러한 권면은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디모데가 그의 교인들을 향해 지녀야 할 태도로서 2절까지 이어진다.

 

‘아비에게 하듯 하며’ - 연장자를 권면할 때에는 모든 예의와 겸손함을 갖추고 신중히 해야 함을 말한다.

인간적인 예의 범절은 종교나 시대, 공간을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영속적인 규범이며

특별히 노인을 존대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기본적인 윤리이다(레 19:32).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 '형제'(아델푸스)라는 말속에는 기독교의 '평등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교회 내에서 누구를 불문하고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교회의 구성 상태를 가장 적합하게 나타내는 말이다(고전 12:26, 27).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한 형제이며 따라서 서로간에 분열과 반목을 피하고 선을 이뤄야 한다.

 

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늙은 여자’ - 이것은 1절의 '늙은이'와 서로 짝을 이루는 말로서

그 말이 '장로'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노인'을 뜻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깨끗함'(하그네이아)은 '성적 순결'을 뜻하는 말로 바울이 디모데가 젊은 여자를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성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체를 통틀어

아무 흠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참과부인 과부’

'참과부'란 남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과부를 말한다.

당시에는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과 더불어, 일부다처제의 성행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려져 혼자된 여인들도 많았으며, 당시 교회는 이들을 돕는데 적극 참여하였다(행 6:1).

성경에서는 이곳뿐 아니라 과부를 보살펴 줄 것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과부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으며(신 10:18, 24:17, 시 68:5).

특별히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하였다(사 1:17).

 

신약성경에서도 과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막 12:42, 43, 눅7:11-17, 18:3-5)

 

더욱이 초대 교회안에 집사 제도가 생기게 된 큰 원인으로서 과부를 보살피는 일을 들 수 있다(행 6:1-6).

 

그런데 때로는 과부를 돕는 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므로(행 6:1)

교회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에 대한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존대하라’ - 헬라어 '티마'는 '존경하다'의 뜻으로 명사 '티메'(*)에서 파생되었다.

'티메'는 '가치' 혹은 '값'을 의미하며 영어의 '사례금'(honorarium)은 이에서 파생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에서 과부들의 당연한 권리로서 그들이 받아야 할 연금(pension)을

바울이 언급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본구절은 과부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존경하라는 의미와

아울러 그들에게 필요한 경제적 도움을 주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 본절의 '과부'는 '참과부'가 아닌 자들로서

자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손자'의 헬라어 '에크고나'를 KJV에서는 이 단어를 '조카'(nephew)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17세기 이전의 용법으로 그 당시에는 '조카'가 일반적으로 '손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 '부모'의 헬라어 '프로고노이스'는 부모 이상의 조상들을 포함한다.

또한 '보답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이바스 아포디도나이'의 문자적인 뜻은 '되돌려 줄 것을 주다'이다.

 

이러한 의미에 따라 '그들이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보상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특히 '되돌려 주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아포디도나이'는 현재 능동 부정사로서

되돌려 주는 행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 - '외로운 자'는 '홀로 남겨진'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참과부'의 특성으로서 돌보아줄 자녀나 친척도 없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어린 자녀를 둔 과부도 여기에 포함시킨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바울은 참과부의 또다른 자격을 제시한다. 그것은 육신적으로 자신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참과부의 실례는 눅2:36, 37에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한 과부 안나를 들수 있다.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일락을 좋아하는 이 - '일락을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파탈로사'는 '방탕하게 살다'의 뜻이다.

당시에는 사회 전체가 물질적으로풍요롭지 못하였으며 고용의 기회도 거의 없었던 때이므로

많은 과부들은 매춘등의 부도덕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바울이 '스파탈로사'를 사용한 것은 당시 생활이 궁핍했던 과부들이

매춘의 유혹을 받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것을 뜻한다.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 '또한'(카이)은 본절이 6절과 연결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이것을'(타우타, '이것들')이 6절에만 국한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3-4절의 내용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참과부를 존경하며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과(3절),

자녀들이나 손자들은 과부인 어머니나 할머니를 잘 봉양(奉養)할 것과(4절)

연고자가 아무도 없는 참과부로서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별할 것(5, 6절) 등을 포함한다.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혹자는 기독교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인데

자기의 직계가족조차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못한 자로서

전혀 복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본 구절을 해석한다.

 

또한 여기에서의 '믿음'은 개인의 주관적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고백되는 신앙 고백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여

'믿음을 배반한 것'을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본 구절은 일반 성도 전체를 향한 교훈으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이 어떻든 간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할 만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원초적인 책무를 무시하는 자이므로 정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9 과부로 명부에 오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 나이를 육십으로 제한한 이유에 대하여 혹자는

재혼할 의도나 재혼할 가능성이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노령으로 인해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규정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 - 본문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고대에는 과부들에게 특별한 정절(貞節)을 요구하여 재혼을 삼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거로 눅 2:36, 37의 과부 안나가 84년 동안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한 남편 외에는 재혼한 경험이 없는 과부를 말한다.

 

2) 혹자는 바울이 14절에서 젊은 과부에게 다시 시집갈 것을 권면하면서

본절에서 재혼한 경험이 없는 과부만을 참과부의 명단에 올리라는 것은 모순이 되므로

1)의 견해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2)의 견해가 전후 문맥상 타당성을 가진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결혼 생활 중에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관계가 없던 자로

결혼 생활에 충실했던 자를 뜻한다.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받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과부의 명단에 올려 구제해야 할 참과부의 조건으로는 구체적 선행이 제시된다.

 

‘자녀를 양육하며’ - 본절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어머니다운 품성을 지녔는가 하는 점을 강조한다.

혹자는 바울이 참다운 모성애를 실천하는 것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 초대 교회에서는 나그네를 접대하는 일이 하나의 공식적인 일이었으므로

이런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필요하였다. 나그네를 대접한 과부의 실례로서

사르밧의 과부(왕상 17:9), 수넴 여자(왕하 4:8-11), 루디아(행 16:40) 등을 들 수 있다.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 이것은 종이나 하는 천한 일로서

여기서는 이웃과 나그네를 위한 겸손하고 헌신적인 봉사를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정신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통해 가르치신 바이다(요 13:14).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 '환난'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앙으로 인해 받은 박해를 가리킨다(살전 1:6, 살후 1:4).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 '좇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콜루데센'은

'추구하다', '헌신하다'의 뜻이다. 결국 '선한 일을 좇는다'는 것은

단순히 선한 양심과 신앙을 갖는다기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선행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11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 '젊은 과부'는 60세 이하의 과부들을 지칭한다.

바울이 이들을 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일단 명부에 이름이 오른 과부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온전한 헌신이 요구되었는데

젊은 과부는 다시 재혼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젊은 과부가 남편을 원하여 재혼하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나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된다.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 과부의 명부에 이름이 오르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재혼하지 않고

평생 동안 그리스도께 헌신할 것을 서약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처음 믿음'(텐 프로텐 피스틴)이란 '젊은 과부들의 처음 서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말은 젊은 과부가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는 서약을 파기(破棄)한다는 의미이다.

 

‘심판을 받느니라 - '심판'(크리마)은 KJV에서 '저주'(damnation)로 번역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소 과격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는

'심판'(judgment, NIV)으로 해석하여 그들의 잘못을 책망받는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13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집집에 돌아다니고 - 명부에 올라 있는 과부들의 임무 중에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신앙적인 상담과 조언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악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그들이 가정에 매이지 않은 홀몸으로서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기 때문에 행해진

쓸데없는 방문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여기서 '마땅히 아니할 말'이란 교회에 덕이 안되는 해로운 말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모두 게으름을 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 중의 일부는 신앙 생활과 자신의 일상 생활을 게을리 하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긴장되어 있지 못하고, 쉽게 남의 말이나 교회 전체의 문란을 초래하는 악담을 하고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사적인 이야기들을 집집마다 하여 교회 내에 문제를 야기시켰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젊은이는’ - 본절이 접속사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바울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11절의 '젊은 과부'(네오테라스 케라스)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젊은이'(네오테라스)는 '젊은 과부'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시집가서 - 바울은 여기서 젊은 과부들에게 재혼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것은 고전7:25-29의 내용에서 결혼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7:26)고 한 말과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1) 혹자는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할 때와는 달리 지금 본 서신을 쓸 때에는

그의 인생의 말년으로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2) 이와는 다른 견해로 본절의 '젊은이'는 이미 자제심을 잃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2~3세기의 교회에서는 금욕주의의 결과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가치있게 생각하였으나

바울은 금욕주의에 반대(4:3)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출산하는 일과 집안을 관할하는 일을 바울은 적극 추천하였다.

 

혹자는 '집을 다스리고'(오이코데스포테인)라는 말에서 아내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영향력이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 '훼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이도리아스'는

'욕하다', '매도하다', '조롱하다'의 강한 뜻을 갖는 말로서

젊은 과부들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교회가 받을 수 있는 비난에 대한 바울의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15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 '사단'에 대하여 글자 그대로 '대적자'의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11절의 '그리스도'와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복음을 통해 얻은 자유를 남용하여 젊은 과부들이

천박하고 부도덕한 행위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따라서 본 구절은 젊은 과부 중에 일부는 이미 '처음 믿음'(12절)을 저버리고

여러 부도덕한 행위에 빠져 교회에 물의를 일으켰음을 나타내며,

아울러 믿음의 생활을 떠난 자는 반드시 사단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다스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에스토테스'는 교회의 감독권을 시사하며

주로 행정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장로'의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이'는 딛 1:7에 나오는 '에피스코폰'('감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혹자는 이에 대해 교회의 행정적인 임무를 강조할때는 '감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나이든 어른으로서 받아야 할 존경을 강조할 때는 '장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존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메스'는 원래 '가치', '가격'을 의미하는 말로서

'보상'으로 번역되거나 '사례금'으로번역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여기서는 물질적인 '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보고

정신적인 '존경'(honor)만을 주장한다.

 

2) 물질적인 의미와 정신적인 의미를 함께 수용하는 견해도 있다.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

본 구절은 교회를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장로들과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는

장로들이 초대 교회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들은 아마 오늘날의 '목사'에 해당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본 구절은 신 25:4로부터 인용된 말씀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타작방법은 곡식단을 풀어 타작마당에 펴 놓고 그 위를 소가 지나가게 하거나

소가 끄는 타작 기구가 지나가게 하였다.

그때 주인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고 일하는 동안 그 곡식을 마음대로 먹게 하였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 본 구절은 눅 10:7의 인용이다.

마 10:10에도 동일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후자에서는 '먹을 것'(테스 트로페스)으로 나온 반면

여기서는 '삯'(투 미스두)으로 기록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바울은 누가복음을 인용하였다고 본다.

 

특히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처음 투옥되었을 때 그와함께 있었다(골 4:14, 몬 1:24).

또한 혹자는 누가복음이 그때에 기록되었을 것으로보고 바울이 그것을 인용하였거나

그것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결국 본절의 요지는 일하는 짐승에게도 충분한 곡식을 제공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고전 9:9, 14).

 

그러나 이런 장로에 대한 사례는, 오늘날처럼 매달, 매년 어떤 일정액을 정한 것이 아니라,

비정기적인 감사의 사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고정급'을 정하거나, 받은 흔적이 없다.

오늘날 같은 '고정급 사례'는 기독교 공인 이후 4~5세기 기독교가 국교화 된 이후부터 시행된 것으로 본다.

 

19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모세 율법에 의하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죄를 판결할 수 있었다(신 19:15, 민 35:30).

이와 같은 규정은 초대 교회에서도 적용되었다(고후 13:1).

 

두세 명의 증인을 두는 제도는 장로만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백성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방지책이기도 하다.

 

특히 장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교회 안과 밖에서 늘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악의와 근거없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두 세 명의 증인이 요구되었다.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 '범죄한 자들'은 장로들을 가리킨다(19절).

'모든 사람 앞에'로 번역된 헬라어 '에노피온 판톤'은 '모든 장로들 앞에'를 뜻할 수도 있고,

혹은 '온 교회 앞에'를 뜻할 수도 있다(Guthrie).

일단 장로의 범죄가 발견되었을 때는 그에 대한 징계를 공개적으로 행하여야 했다.

구약의 속죄제는 평민과 족장과 제사장의 제물이 달랐다(레4:3, 13-14, 22-23, 27-28).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의 죄는 더 무겁게 다루었다.

신약에서도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약 3:1).

 

그런데 20절에서 ‘범죄한 자들’은 복수로 되어 있다.

19절의 ‘장소’는 단수이며, ‘두 세 증인’은 복수이다.

이렇게 보면 ‘범죄한 자들’은, 위증을 한 자들 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범죄한 자들’은, ‘장로’나 ‘위증한 자들’ 이렇게 둘 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로의 가르침처럼 장로의 죄도 온 회중에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장로에 대한 치리는 다른 장로들을 포함하여 온 회중에게 경종을 울리는 방법이다.

사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령한다. :21

어조가 천상의 어전에 있는 듯 사뭇 엄숙하다.

 

하지만 마18:15-17에서 형제가 범죄하는 것을 보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 말씀과 조합해서 20절의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를 해석하면,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에게, 즉 끝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는 말이다.

장로에 대한 권징도, 5장을 관통하는 ‘가족 개념’ 안에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이와 같은 표현은 예배의식적인 표현으로서,

여기에 언급된 것은 이 세 존재가 최후 심판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상에서 기인한다(눅 9:26, 계14:10).

 

특히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란 말은 바울 특유의 표현으로 자기 초소를 떠난

타락한 천사들(계 18:1, 19:17, 20:1, 21:9)과 대조를 이루는 말이다.

 

‘내가 엄히 명하노니’ -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엄숙히 단언하다', '엄숙히 선언하다'의 뜻을 갖는 강의 복합어로서

교회 지도자들의 징계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중해야 함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명령은 바울개인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하는 엄숙한 것이었다.

 

‘편견이 없이’ - '편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클리신'은 '저울을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다'는 뜻의 동사

'프로스클리노'에서 파생된 말로 '편애'(favoritism, NIV)로 번역될수 있다.

 

즉 디모데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개인적인 편견이나 편애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랑과 의에 입각한 공정한 판결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교회안의 치리 문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치리나 재판은 언제나 주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을 이어지는 21절에서 권면하고 있다.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 본절의 '안수'(에피티데이)가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 타락한 장로들을 다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으로서의 안수이다.

2) 장로를 비롯한 다른 성직을 임명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진 것이다.

3) 본절은 장로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 것으로서 장로를 임명할 때 행한 공개적인 의식이었다.

 

2)번이 가장 지배적이다.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기기 위해 안수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품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중직자들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 '간섭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네이'는 '함께 나누다',

'동반자가 되다'의 뜻을 갖는다. 이에 대해

 

1) 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타락한 일부 장로들이 짓는 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한 것으로 보는 견해,

2) 어떤 사람을 안수하여 장로로 임명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증하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 안수의 중요성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송사나 재판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직분 자를 함부로 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거나 장로를 세우고 안수집사나 권사를 세울 때

과연 무슨 목적으로 세우고 있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금욕주의적인 계율이 있었다.

즉 나실인 서약자는 포도주나 포도로 만든 것을 먹지 않았으며(민6:1-21),

레갑인들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렘 35:5-8).

 

따라서 디모데는 이러한 유대 계율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22절에서 바울이 요구한 대로 자신의 정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나름대로 금기(禁忌) 사항을 마련해 두고 오직 물만 마시고 포도주는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근동 지방의 물들은 대개 병균들로 오염되어 있었으므로 끓이지 않고 계속 마실 경우

이질이나 위장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디모데는 위장병과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바울은 그의 질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였다. 한편 당시의 포도주는 도수가 약하였고

특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된 포도주는 흔히 물이 섞인 포도주였다.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이 죄는 그 뒤를 따르리니

 

바울은 본절에서 다시 17절 이후에서 그가 다루어 왔던 문제로 돌아가

장로의 임직뿐만 아니라 교회의 규율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혹자는 23절에 기록된 대로 디모데가 병약하였으므로 교회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

미비한 점이 있었을 것으로 가정한 바울이 처리에 도움이 되는 말을 디모데에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밝히'의 헬라어 '프로델로이'는 '이미 알려진' 혹은 '명백한'이란 뜻으로서

그들의 죄는 판단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명백한 죄들이다.

 

또한 '좇나니'의 헬라어 '에파콜루두신'은 '뒤를 따라 가다'의 뜻으로

'어떤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죄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앞의 '밝히 드러난 죄'의 전철을 밟아 밝혀지게 된다.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성급한 판단을 피하라는 의미로 본 구절을 쓴 것으로 본다.

 

즉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은 처음에는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본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므로 경솔한 판단을 삼가하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