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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10:13~19 네 행복을 위한 명령과 규례

LNCK 2022. 6. 20. 16:30

◈네 행복을 위한 명령과 규례            신10:13~19        출처, 정리

 

신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기 '행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히브리어로 '토브' 라고 되어 있어요. 
'토브'는, '선하다, 보기 좋다, 아름답다' 등의 의미인데 

이 '토브'라는 말이 최초로 쓰여진 곳은 창세기 1장 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하나하나 설계하고 만들어 가실 때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할때 '좋았더라'는 그 단어가 바로 '토브'입니다. 

이 '토브'를 본문 신명기 10:13에는 '행복'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pleasant, agreeable, good, excellent, rich, valuable


▲이와 반대로, 지금 대한민국은 '우울 공화국'이라는 별명이 있죠. 
'행복 지수'를 다른 나라와 비교 수치로 볼 때, 우리 나라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분석됩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가 세계 10~12위 권에 속합니다. 
옛날보다 더 풍요해졌고, 더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데 
국민들의 스스로의 평가는 '과거보다 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해요. 

그리고 '행복 지수'를 설문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국민들 스스로가 '행복하지 못하다'고 답한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 를 연구했습니다.

1) 첫째, 대한민국이 우울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행복 하지 못한 데는, 우리 민족의 특유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주위 사람들과 비교 의식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어느 민족보다도 깊은, 그런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의 가치관이 문제가 개입돼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어떤 거예요.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을 자로 재가지고 수치화 할 수 없습니다.

이거는 결국 다분히 주관적인 어떤 '자기 만족감'으로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주관적인 행복의 기초가,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경쟁 사회에서 (인구 밀도가 높기 때문)
'네가 행복하면 내가 불안해지는' 이상한 사고 구조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다른 민족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크다는 거예요. 

멀쩡하게 잘 살다가도, 동창회 한번 갔다오면 괜히 심란해지는... 
그 원인 모를 짜증.. 이런 것들이 생긴다는 거죠.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특이하게 갖고 있는, 어느 민족보다도 강한 기질인 상대적 박탈감이 
우리 국민 개개인의 행복감을 뺏어간다는 거죠. 

그래서 어느 민족이 행복한가? 통계를 들여다 보면 
의외로 아프리카의 이름도 모를 나라 사람들,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다니는데, 설문을 받아 보면,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주 행복하다고 답해요. 

또 어떤 조사에 의하면, 최고로 행복한 국가의 백성들이 아이슬란드로 나왔어요. 
거긴 겨울에는 20시간이 밤이에요. 몹시 춥고, 물고기 잡아서 생활 해야 되고... 

근데 진짜 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최고의 여행지로 아이슬란드를 꼽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오로라도 있고,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대자연의 장관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사실 환경적으로는 굉장히 척박해요. 
근데 최고로 행복하게 산단 말이에요. 거기엔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왜 한국 사람들은 우울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떨쳐내지 못하는가? 
또 한 가지 이유는, 이제 (인생 역전) 드라마가 불가능한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거죠. 

옛날 같으면 '개천에서 용난다' 는 말이 맞았어요. 가능했고요. 
이제는 아무리 청년들이 뛰고 열심히 살아도 
이제 (인생 역전) 드라마가 가능한 시대는 지났다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헛발질만 하는 그런 자괴감, 망연자실함! 
이런 것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거지요. 

▲네 제가 얼마 전에 김형석 교수님이 쓰신 유명한 책 <백 세를 살아보니>를 읽어보았습니다.
교수님은 100세가 아닌 97세에 이 책을 쓰셨어요.   *1920~생존

이 책에 보면, 물론 이것도 이 분의 주관적 행복론 입니다. 
근데 여기에 귀담아 들을 내용이 있어요. 

"행복은 인격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인격이 최고의 행복이라는데, 그 인격이라는 과연 뭘까요? 
인격이 고상하면 다 행복하다는 얘기일까요? No

그분의 인격론에 대한 해석이 좀 독특합니다. 두 가지로 설명을 했어요. 

1) 첫째로, "인격이란,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성실하게 대하는 것이다." 

2) "두 번째는, 이웃에 대해서 사랑을 가지는 것이다." 

즉 사랑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관점입니다. 

본문 13절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해서 쭉 마지막 22절까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약 다섯 가지 요구를 해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 모든 도를 행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요청 이에요. 

과거에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에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뭐냐? 아무것도 없다. 
단지 뭐 뭐 뿐이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단지 뭐뭐 뿐이라는데, 그게 자녀입장에서는 참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가 '난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다. 단지 뭐 뭐 뿐이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의 패턴이나, 
육신의 부모의 자녀를 향한 간절함이나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사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원하는 게 뭐냐? 아무것도 없다. 단지 뭐 뭐 (5가지) 뿐이다.' 
그 다섯 가지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간단간단하게 살펴볼 터인데요..

▲월터 브루그만 의 『안식일은 저항이다』 책에 보면, 이런 얘기를 해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애굽에 살 때는, 그 삶의 라이프스타일이 
무슨 의미가 있고, 철학이 있고, 행복이 있는 삶이 아니었어요. 

무한경쟁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과 
또 벽돌의 갯수를 채우지 못 했을 때 등짝에 날아오는 매질... 

그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부르짖었고, 하나님 앞에 그 기도가 상달되었다고 했어요.
그들의 고통을 하나님이 알고, 보고, 들었다... 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어요.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으며, 삶의 질이 보장되어 있었겠어요?
오늘 이 벽돌 숫자 못 채우면, 당장 어떤 날은 밥도 굶었을 거예요. 매질도 당했을 거예요. 

그런 하루는 얼마나 끔찍 했을까요? 
내 개인적인 인생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북한에 31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풀려나신 임현수 목사님 간증을 2시간 넘게 우리가 들었습니다.
그 분이 거기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 게, 매일 여름이나 겨울이나 나가서 노동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 노동이 내게 아무 의미가 없는 노동이었다" 라는 거예요. 

언 땅을 딱 직사각형으로 그려놓고, 1.5미터 깊이로 파라는 거예요. 
언 땅을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에도, 나가서 파는 거예요.

임목사님이 매일 8시간 노동이 힘들었던 게 아니라 
자기가 어제 하루 종일 노동해서 팠던 땅을 
다음날에는 '다시 흙을 덮어라' 그러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무의미' 라는 형벌입니다. 

사람은 '고통'은 참는데 
'무의미'는 그렇게 견디기 힘들다고 그래요. 
의미가 없는 삶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낸다'는 겁니다. 
문제는 '살아야 될 이유가 사라질 때, 내게 부귀영화가 다 있다 할지라도 
사람은 허무해지고, 불행해진다'는 거죠.

그러면 과연 나는 '내가 살아야 되는 이유를 뭘 가지고 있을까?' 
과연 하나님께서 '너희 행복을 위하여' 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얘기일까요? 

애굽의 삶은 의미 없는 역사의 무대였지요.
그런데 이제 막 신명기서를 받아든 첫번째 독자인,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될까요?

거기서도 애굽의 패턴과 애굽의 라이프스타일로, 애굽의 가치관으로 살아야 될까요?
아니라는 거죠.

본문의 다섯 가지를 시간 걸려서 다 말씀드릴 수가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 모든 도를 행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그걸 한 묶음으로 만들어서 딱 한 마디로 정리해 드릴게요. 18~19절입니다.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기독교인들이 구제를 하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구제를 하는 것은 근본적인 토대가 다릅니다.
왜 우리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해서, 본성적으로 눈이 열려 있어야 되느냐? 

고아, 과부, 나그네의 공통점은.. 이 땅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과거에 그 자리에 있었어요. 
하나님의 건지심과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었던 불행한 위치에 있었어요. 

근데 우리는 건짐을 받았고, 부유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이제 그 분 안에 누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런 너희와 과거의 모습과 똑같은 이웃들을 
즉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섬김으로써 
새로운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고 행복을 경험하라는 거예요. 

원래 우리가 창세기에서 지음 받은 원형이 '토브'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던 대상들이었어요.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죄가 들어오면서 
그 토브의 질서와 원리가, 또한 우리 속 내면 세계가 무너졌어요. 병이 들었어요. 
파멸이 찾아오고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새언약을 통해서, 이 백성들을 그분의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하셨어요. 
구원해서 기뻐하신 게 아니에요. 성경의 순서는 달라요. 15절을 보십시다.

10:15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출애굽 광야 40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온통 불순종, 목이 곧음, 반역으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그런 모습(꼬라지)을 보면,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죠.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그래서 그들이 순종해서, 겸손해서, 헌신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선택'이라 그러죠.

일단 먼저 그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시고...

그다음에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가나안에 들여보내시는.. 구원의 여정을 이어가십니다.  

   

자 여기 보시면 '구원'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기뻐하심, 사랑하심, 택하심'이 먼저 입니까?
'기뻐하심, 사랑하심, 택하심'이 먼저입니다. 언제 선택했느냐? 바울은 '창세 전에' 선택했다고 했어요.   

   *신10장에 나타난 '선택' https://blog.daum.net/rfcdrfcd/5412388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이 있어 택한 게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보시기 이전에  
그냥 우리를 기뻐하셔서 선택하셔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요. 

그래서 너희가 이웃을 도울 때도 마찬가지 순서라는 것이죠 '무조건적 선택'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야 됩니다. 무조건적 선택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구원입니다.
그게 우리가 회복해야 될 진짜 행복 이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약한 자들의 이웃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배워가는 여정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 (우리) 행복을 위하여'
이런 일들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이 사라지면 행복하다고 그래요.
또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이 누려지고, 많이 가지고, 풍성해지면 행복하다고 그래요. 
그것도 행복일 수 있겠죠. 그러나 아주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행복입니다. 영원한 행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의 기준을 다르게 제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복을 받았다'는 건 뭘까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이웃을 갖게 된 게 복이에요. 

우리 교회는, 이렇게 본성을 바꿔야 돼요. 
이제는 내 교회, 내 교회만이 아니라
내 교회를 넘어서 옆 교회를 좀 돌아보고, 

이 땅에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기반도 없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데 우리가 긍휼사역을 할 때 보면, 
자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도우려고 합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재기의 가능성 있는 사람보다는, 
가능성 없는 사람을 도와줘야 된다고 봅니다. 그들이 더 불쌍한 처지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도울 사람을 선택할 때, 무조건 적으로 선택해서 긍휼을 베풀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고를 좀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안 돼, 도와줘야 소용 없어!' 

그 사람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근처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반대로 생각을 해요. 
진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행해야 되는데,

그것이 열매로 나타나는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돕는 일입니다.   :18~19

근데 어떤 이웃입니까?
내게 도움을 주는 이웃이 아니라, 
내게 도움이 안 되는 이웃이나 친구를.. 즉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나 친구를 가져야 돼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전화도 골라서 받는데,
전화기 목록에 아예 플러스, 마이너스 기호를 매겨 놓은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플러스 표시가 된 사람의 전화는 받고, 마이너스 표시가 된 사람은 전화도 받지 않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행복이 뭐라고요?
내가 도울 이웃과 관계를 맺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나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