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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1장 빌레몬서의 복음적 메시지

LNCK 2022. 6. 21. 09:25

◈빌레몬서의 복음적 메시지               몬1장                여러 설교 정리

 

빌레몬서, 이 책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글로써,                  주1) *중요

신약에서 가장 짧은 서신입니다. 그러나 짧다고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데요.

바울이 쓴 글 가운데, 가장 파급력이 큰 글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이 서신의 세부 내용을 종합해 보고, 알 수 있는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부유한 로마시민이었는데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중일 때,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 같습니다.

 

그 후 바울의 동력자 에바브라가 골로새에서 교회를 시작했을 때

빌레몬은 그의 집에서 모이는 골로새 교회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빌레몬은 로마의 여느 가부장처럼 종들을 거느렸는데

그 중 한 명이 오네시모였죠.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물건을 훔쳤든지 그를 속이든지 해서

무언가 손해를 끼치고 나서 달아나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데요.

 

그 이유는, 18절 때문입니다.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갔다.

2)오네시모의 도망으로 인해 해야, 종으로서 할 일을 하지 못한 데에서 손해가 발생했다.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합니다. 전자는 추론(추측)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도망 자체로 인해서 생겨난 손해를

오네시모의 아버지로서 회계할 것임을 빌레몬에게 밝힙니다...

 

▲참고로, '빌레몬의 집에서 시작된 교회'는 골로새 교회라고 봅니다. :2

왜냐면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에바브라(골1:7), 아킵보(골4:17)가, 골로새서에도 등장하기 때문이죠. 

 

2절에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로 봅니다. 왜냐면 빌레몬 이름 바로 다음에 등장하니까요.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봅니다.

우리와 함께 병사된’이란 말에서 그는 골로새 교회의 ‘설교자’였다고 봅니다.(골4:16)

 

 

◑적용 / 빌레몬서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보여주는 책"

 

바울은 오직 이 서신에서만,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을 분명히 언급하지 않는데요.

이건 실수가 아닙니다.

 

그가 십자가를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11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무익한 자 useless'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유익한 useful'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복음적 요소를, 이 짧은 서신이 담고 있으므로, 빌레몬서가 정경에 포함된 거죠.

 

이 사실이 중대한 것은, 진정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실은 일평생 '무익한 자'로 삽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서, 일평생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그래서 남을 해치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삽니다.

그걸 못하게 막는 것이 강력한 '법과 제도'의 시행이죠.

그렇게 무익하게 useless 일평생 살다가 최후 심판을 받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 만나고 회개하게 되면, 그는 이제 앞으로 유익한 useful 사람이 됩니다.

가정에서도 유익하고, 사회에서도 유익하고, 교회에서도 뭔가 자기 사명이 있고,

뭔가 남들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존감'도 높아집니다. 자기 자존감이 높으므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죠.

오네시모가 그 극명한 예입니다. '전에는 무익하였으나, 지금은 유익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11 

 

2. 우리 각자는 복음안에서 하나님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12절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의 헬라어 '스플랑크나'는 문자적으로 '심장, 내장'을 의미합니다. *heart, bowel

이 말의 의미는 '나의 가장 소중한, 나의 아끼는' .. 이런 뜻입니다.

흔히 대중가요 가사에도 '내 심장을 다바쳐' .. 자기 진심을 다하여 그를 사랑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개역에 '심복'으로 번역한 것은, 의역한 것이고,

다른 성경에는 '내 심장, 내 진심' 이라고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즉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에 대해

'내 심장'이라고 말함으로 마치 자신이 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음으로 인해, 오네시모 같은 우리 각자는

무익한 자에서 유익한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11

'바울의 심장', 즉 '예수님의 심장'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아주 소중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바울은 고후5:20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권대사 ambassador' 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바울이 오네시모 없이는 사역에 차질을 빚게 되었고,

하나님도 우리 각자가 없이는, 수족이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레몬서가 정경에 포함된 또 다른 이유입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오네시모 같았던 우리가 '하나님의 심장'같은,

부모에게 아주 소중한 내 아들, 내 딸이 된 것입니다.

 

요즘 딸바보 아빠, 아들바보 엄마가, 자녀를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합니까. 그게 바로 본문의 '내 심장'이죠!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0

 

3. 우리의 죄의 빚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 갚아졌습니다.

 

18절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그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하나님과 화목해지고

서로 화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의 빚은, 바울 자신이 갚겠다고 합니다.

 

이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네시모가 갚을 수 없는, 즉 우리 각자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하시고,

정말 그 빚을 (성경은 우리 죄를 '빚'이라 말합니다. 마6:12 등)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4. 그래서 오네시모는, 또한 우리는, 종에서 자유인이 되었으며, 서로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아닙니다.

 

16~17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복음의 핵심은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요, 사람 사이의 화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화목 제물이 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그분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고후5:19등

 

따라서 빌레몬서 상황에서 바울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모형(그림자)이 됩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이 모든 형제들이, 주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는 의미로

이제는 교제하는 사이가 된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 (코이노모스)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7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코이노니아)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6

 

이제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바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그들은 모두 다 용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관계가 평등하며

이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더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님을 의미하죠.

 

그들은 이제 한가족 이자, 주님에서 형제간입니다.

이런 관계는 사실 육신의 혈통적 형제보다 더 진한 관계가 됩니다.

우리가 누리며 살아야 할 '복음적 가족 교제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에는,

헬라인과 유대인도,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않는 자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형제로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16

 

주님안에는 새 사람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를 공유하는

동등한 동역자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빌레몬서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5. 진정한 회개에는 보상이 뒤따릅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4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8

 

그냥 말로만 회개가 아니고, 오네시모가 진정 회개한 증표는, 

자기가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것을 보상하고 갚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정신적 피해를 입힌 것은, 정중히 사과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것이죠.

 

바울은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을 충실히 섬겼습니다.

바울로서는 이런 그를 계속 곁에 머물게 하고 싶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한다면

먼저는, 이 갈등을 풀고 화해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위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갖고 도망갔다'는 것은 추론(추정)입니다.

본문에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그런데도 바울이 '손해가 있으면 내게 계산하라'고 한 것은,

오네시모가 종의 자리를 비운 그 사이에 발생 가능한 인건비적 손해 .. 이런 뜻일 것입니다.

 

어쨌거나 빌레몬서가 보여주는 '복음'이 요소에는

'진정한 회개에는 자발적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어물쩡 넘어가도 되겠지...' 하지 않습니다.

 

만약 피해자가 그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사망했다든지)

그 유족에게나, 아니면 제 삼자를 통해서도.. 보상할 수 있겠습니다.

그 보상은 먼저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절별 해석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바울은 일반적으로 다른 서신들에서는 자신을

1)'예수 그리스도의 종'(롬 1:1, 빌 1:1, 딛 1:1),

2)'사도로 부르심을 받은자'(롬 1:1, 고전 1:1, 갈 1:1,2),

3)'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고후 1:1, 엡 1:1, 골 1:1, 딤전 1:1)등으로 소개하는데 반해

 

본서에서는 자신을 '갇힌 자'로 소개한다.

이런 자기 소개는 본서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사도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호소'를 통해서 권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혹자는 '갇힌 자'라는 것을 신비 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이해하여

신자가 자신이 섬기는 신에 의해서 성전에 구류(拘留)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본서의 문맥이나 그 어구에서 이 견해가 성립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결국 '갇힌 자'는 말 그대로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A.D.53-58)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갔다가 붙잡혀서

약 2년 이상의 호송 기간을 거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바로 그 감옥에서 본서를 기록하였다(1,9,10,23절).

 

한편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스투 예수'는 바울이 갇히게 된 이유를

시사하는 것으로, 본 어구에 사용된 '속격'은 그리스도가 갇힌 자 된 바울의 주인임을 나타낸다.

 

‘형제 디모데’ - 바울이 자신과 함께 '디모데'를 본서의 송신자(送信者)로 언급하는 것은

디모데와 빌레몬 사이에 친분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디모데는 3년 동안 에베소에 거주하면서 바울과 함께 사역하였다(행 19:22, 고후 1:1).

아마도 이 기간 동안에 디모데는 빌레몬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빌레몬에게 호소하는 수단으로서 갇힌자로서의 자신은 물론

친분 관계가 있었던 디모데를 언급하게 된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 - '빌레몬'은 본서의 수신자로서 두 가지 호칭을 갖고 있다.

1)'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이다. 이 호칭은 바울이 로마 교인들과(롬 1:7)

고린도 교회(고전 10:14, 15:58, 고후 7:1, 12:19)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빌 2:12, 4:1) 편지할 때

사용한 것으로서 대부분 '단체'에게 사용된 반면에, 본절에서는 '개인'에게 사용되고 있다.

 

이는 빌레몬이 서로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과거에 사랑을 실천한 적이 었었음(5, 7절)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바울이 이 사실을 상기시킨 이유는 바울 자신이 '사랑하는 형제'로 생각하는 오네시모를

관대하게 대해주기를 요청하기 위해서다(16, 17절).

 

2)'동역자'이다. 이것은 바울이 사용한 독특한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는 곳에 가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전하는 동료를 가리킨다.

 

이는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역을 하는 동안 빌레몬이 그 사역을 도왔으며,

바울이 떠난 후 그 사역을 계승(繼承)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자매 압비아’ - '자매'는 바울이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주안에서' 자매임을 나타낸다. 또한 '압비아'의 이름이 빌레몬에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사실로보아

'압비아'를 빌레몬의 아내로 추정하기도 한다.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 - '군사 된 자'라는 호칭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방해하는 자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대적자에 대항하여 싸우는 자로서,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바울을 도와주며 박해와 시련 심지어 투옥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자를 가리킨다.

 

한편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아킵보에게 '직분을 충실히 행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골 4:17).

여기서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안'은 '설교사역'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에서 '목사'는 '디아코노스'를, '목사의 직무'는 '디아코니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를 목양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네 집에 있는 교회'는 빌레몬의 집이 가정 교회(house church)였음을 나타낸다.

신약 시대 초기의 '가정 교회'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1)한 도시의 전체 회중이 한 가정에 모일 만큼 적을 경우 예배를 위해서

교회의 한 회원 집에 모였다. 고린도에 있던 가이오의 교회가 이에 해당된다(롬16:23).

 

2)보다 큰 그룹 내에서 교제를 위해 작은 회합을 가졌다.

라오디게아에 있던 눔바 집에 있는 교회(골 4:15)와 본절의 빌레몬의 집에 모인 교회가

이에 해당된다.

 

한편 바울이 빌레몬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정 교회에 모인 성도들에게도 편지를 한다고 밝힌 이유는

도망간 노예인 오네시모의 문제가 단순히 빌레몬 가족만의 이해와 사랑으로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며,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본 절은 바울이 빌레몬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린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바울이 '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들음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온'은 현재 분사로서

바울이 빌레몬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듣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빌레몬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경로에 대해서 혹자는 에바브라(골 1:7,8, 4:12)만을 생각하고,

혹자는 오네시모만을 생각한다(Meyer).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의 소식을 전해 들었던 사람은

아마도 에바브라와 오네시모 둘 다였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사랑'과 '믿음'이 동시에 주 예수와 성도들을 향한 것으로 본다.

 

2)혹자는 본절을 '교차 대구법' 형식으로 이해한다.

위의 두 견해 중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 이유는 첫째, 교차 대구법 형식이 바울 서신에서 많이 나타난다(빌 2:3,8,12, 골 1:10,16).

 

둘째, 일반적으로 바울은 '믿음'을 '사랑' 앞에 기술하나 본절에서는 의도적으로 역순을 취했다.

이 사실은 바울이 본서를 쓸 때, 빌레몬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런 해석이 골로새서 서두의 '감사'와도 일치한다(골 1:3,4).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이로써’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포스'는 '중재'의 내용을 언급한다.

 

‘믿음의 교제’ -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믿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고전 1:9, 고후 13:13, 요일 1:3,6,7).

2)믿음에서 나오는 자비로운 사랑의 행위이다(빌 1:5).

두가지 중 본절의 의미와 같은 것은 후자이다.

이 '교제'는 단순한 '구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용'이나 '마음의 후함'을 말한다.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4절에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또한 바울은 감사의 근거로 인해서 앞절들에서 밝힌 '하나님께 감사하는 문제'에서

'오네시모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고 있다.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너로 말미암아'는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베푼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5절)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으로 인해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아주 담대하게’

1)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개방성'과 '솔직성'을 나타낸다(고후 3:12, 7:4, 엡 6:20, 딤전 3:13).

2)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에 근거한 '정직'을 나타낸다(고후 3:12, 엡 3:12, 빌 1:20).

본절에 나타난 '파르레시안'은 전자의 의미로서 바울이 타인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마음을 열어 놓고 있음을 시사한다.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마땅한 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아네콘'은 일반적으로 유용한 '도덕적 계명'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뜻하는 것으로,

뒤에 언급하고자 하는 오네시모 문제를 가리킨다.

 

한편 '명할 수'의 헬라어 '에피탓세인'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한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에 대해서 제정(制定)하고 가르치며

다스릴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반복하여 밝히고 있다.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사랑으로써(디아 텐 아가펜)’

'사랑'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의 사랑이나 빌레몬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덕목으로서 이해하지만

 

그러나 본절의 '사랑'은 빌레몬의 사랑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미 앞절에서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5, 7절),

더욱이 본문의 관사 '텐'은 앞에서 언급한 빌레몬의 사랑에 대한 재언급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을 재차 말함으로써, 오네시모에 대해 빌레몬이 관대하게 대해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나이 많은 나 바울은 - '나이 많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사신'(ambassador)을 의미한다.

2)문자 그대로 '나이 많은'을 의미한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프레스뷔테스'가 신약성경에서 '사신'으로 사용되고 있으며(고후5:20, 엡 6:20),

더욱이 목회를 하고 있는 아킵보의 아버지인 나이 많은 빌레몬에게

바울이 자신의 나이를 언급하는 것은 어색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앞절과 본절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 인하여 자신의 간청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또한 공적인 관계에서만 '프레스뷔테스'를 '사신'으로 사용하였으므로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즉 본절에서 바울은 연장자의 입장에서 또한 개인적인 관계에서

빌레몬에게 보다 설득력있게 호소하고 있다 하겠다.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 - '갇힌 중에서'는 1, 9절에서처럼

바울이 옥중에 있음을 나타낸다. 본절의 '낳은 아들'은 랍비적 표현으로

선생인 랍비와 토라를 배우는 학생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해산의 고통을 통해

오네시모를 개종(改宗)시켰음을 나타냄(고전4:14-17, 갈 4:19, 딤전 1:2,18, 딤후 2:1)과 동시에

오네시모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헬라어 본문에서 본절의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바울의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도망하였기에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나쁜 인상을 염려하여 먼저 오네시모가 변화되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자임을 언급한 후에 오네시모 이름을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이다.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갔을 뿐만 아니라 도망가기 전에도 유익하지 못했다.

바울은 그런 무익한 오네시모의 개종 전후의 변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무익하였으나'(아크레스톤)와

'유익하므로'(유크레스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두 단어는 비슷한 음을 가졌으나 정반대의 뜻을 나타내고 있어

오네시모의 변화 상태를 언어적으로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더욱이 바울은 '전에는...이제는'(포테...뉘니 데)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오네시모의 변화 상태를 빌레몬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의 헬라어 '스플랑크나'는 문자적으로'내장'이나 '핵심'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마음'(heart, NIV, RSV)을 뜻하며
동시에 '바울 자신'을 의미한다.

즉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에 대해

'내 마음'이라고 말함으로 마치 자신이 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 이 말은 바울이 서신을 쓰던 때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1, 9절).

'복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유앙겔리우'는 속격으로서 바울이 갇히게 된 원인을 시사한다.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 '네 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수'는 상황이 가능하다면

빌레몬이 흔쾌히 자신을 섬기기를 원할 것이라는 바울의 가정(假定)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대신하는 대체물임을 말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대신에'(instead of)나

'너의 위치에서'(in thy place)를 의미하는 헬라어로는 '안티'가 사용되며

본절의 '휘소기르'는 '위하여'를 의미한다(Vincent).

 

즉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대체물(代替物) 이상이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가 더 이상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사역의 짐을 지는 대등한 관계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이는 바울이 오네시모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빌레몬의 동의가 없이는 절대로 함께 있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결정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나 압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은총하에서 자발적으로 선택되기를 원한다.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앞절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한편 '타카'('아마도')를 사용한 것은

오네시모의 도망 사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암시하고자 했다.

 

‘떠나게 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리스데'는 '코리조'('분리시키다')의 부정 과거수동태로서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가 오네시모의 도망 사건 배후(背後)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히브리어에서는 이런 수동태를 소위 '하나님의 수동태'라고 부른다.

이는 이미 행해진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인격자로서의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도망간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떠나게 된' 것이라 묘사함으로

오네시모 개인의 잘못에 대한 빌레몬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뿐만 아니라

빌레몬의 관심을 오네시모 사건에서 잘못된 일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옮기고 있다.

 

‘영원히 두게 함이니’ - '두게 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케스'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인 한 형제로서의 관계를 의미한다(16절).

 

또한 '아페케스'는 '영원히'(아이오니온)와 상관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영원히'에 해당하는 '아이오니온'은 '프로스 호란'('잠시')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오네시모의도망이 극히 짧은 시간에 불과한 반면에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진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한 형제 관계는 영원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 부르고 있는 데서 분명히 나타난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빌레몬에게 당연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권고한다.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하물며'(포소 말론)라는 부사를 사용하면서 부연 설명한다.

'포소말론'은 '말리스타'보다 더 강한 뜻으로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사랑해야 함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육신과 주 안에서' 서로 상관된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신 안에서'는 '인간적 관계' 즉 '주인과 종'의 외적 관계를 의미한다.

반면에 '주 안에서'는 '영적 관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시사한다.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 '내게 하듯'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에메'를 통해서

바울은 자신과 오네시모를 동일시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동일하게 오네시모를 영접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영접이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서로 영접하라고 권면한 바 있다(롬 15:7). '영접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2)'동역자'로서의 영접이다. 바울이 빌레몬과의 관계를 '동역자'로 밝히고 나서 오네시모를

자신과 같이 영접하라고 빌레몬에게 권면하는 것은 오네시모를 바울의 동료로서 영접하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오네시모가 자신을 돕고 있었음을 암시하였기 때문이다(11-13절).

 

따라서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료로서 영접하기를 호소하고 있다(Bruce).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이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호소한 후 이야기를 발전시켜서 오네시모가 도망가면서

빌레몬에게 끼쳤을지도 모를 재산상의 손해에 대한 책임에 대해 언급한다.

 

‘저가 만일...내게로 회계하라’ -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갔다.

2)오네시모의 도망으로 인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데에서 손해가 발생했다.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는 추론(推論)에 불과하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도망 자체로 인해서 생겨난 손해를

오네시모의 아버지로서 회계할 것임을 빌레몬에게 밝히고 있다.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이, 바울이 오네시모로 인해서 빌레몬에게 갚겠다고한 빚보다

더 큰 빚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바울이 빌레몬을 믿음 안에서 낳은영적 아버지임을 암시한다.

 

빌레몬의 개종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파송한 에바브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본절에서 빌레몬의 개종의 직접적 원인자로 자신을 강력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빌레몬을 직접 만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서 빌레몬의 개종의 빚에 대해 언급함으로 오네시모가 개종될 때에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하였다는 사실을 빌레몬으로 하여금 이해시키고 있다.

즉 이러한 사실들을 이해시킴으로써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고

한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한다.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본절은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해 빌레몬에게 변호하고 호소해왔던 것에 대한 결론이다.

 

‘오 형제여! - 바울은 결론적으로 호소를 끝맺기 전에 다시(7절) '형제'라고 부름으로 애정어린 말로 빌레몬에게 호소한다.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기쁨'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나이멘'은 일반적으로 '자식의 도리'를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서 빌레몬이 '주 안에서' 낳은 아들로서

영적 아버지인 자신의 호소에 순종함으로 기쁨이 되게 하기를 바라고 있다.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게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빌레몬이 순종할 것이라고 바울이 확신했던 것은 구속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실천을 간청한 것에서 오는 확신이었다(O'Brien).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 바울은 '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네시모의 법적인 노예 해방뿐만 아니라, 복음 사역에의 참여에 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개역성경에는 '하마'('동시에')가 생략되어 있다. '하마'는 앞절에서 바울이 간절히 기대한 것과 동시에

또 다른 바울의 요구가 본절에 있음을 시사한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 '처소'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안'은

본래 '환대'나 '대접'을 의미하나 본절에서는 '손님이 거할 방'을 의미한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신이 머무를 방을 부탁하는 것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즉 당시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후에 자신이 빌레몬을 방문할 때에

빌레몬이 바울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는 상태에 있게 되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것을 암시한다.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바라노라'에 해당하는 '엘피조'는 바울이 곧 감옥에서 풀려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방법과 때는 불확실하나 중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행 12:4-19),

풀려나기를 바라는 이런 바울의 소망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함이었다.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본절에서 에바브라에게 사용된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호칭은

골로새의 '아리스다고'에게도 적용된다(골 4:10).

이 호칭이 '그리스도에 의해 사로잡힌 자로서의 동역자'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본절에서는 '에바브라'가 바울과 함께 실제로 감옥에 갇혔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본절의 '쉬나이크말로토스'('함께 갇힌 자')는 다음 절에 언급될

'쉬네르고이'('동역자들')와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에

굳이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에 파송(派送)된 바울의 대표자로서

골로새의 복음 전도자이며,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였다(골 1:7ff., 4:12ff.).

 

한편 바울은 동역자로서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언급하는데,

이들은 골로새서에서도 문안 대상으로 나타난다(골 4:10,14).

이것은 빌레몬의 가족이 골로새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동역자들의 문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동역자들간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본절에서 서신을 끝맺기 전에 빌레몬과 그의 가족 그리고 교회에 축복하고 있다.

 

................................

 

주1)

1) 빌레몬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감옥은, 행28장에 나오는 ‘로마의 셋집 감옥’(가택연금, 행28장)으로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로마의 감옥설을 반대합니다.

왜냐면 현실적으로 빌레몬이 종으로 살던 골로새는, 로마와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골로새가 로마까지 도망쳐 갔고, 그 일로 서신을 왕래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고,

도망자 신분인 오네시모가, 로마까지 자유롭게 갔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봅니다.

 

2)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에

당시 팔레스틴에 로마 총독부가 있던 가이사랴에 2년 갇혀 있었는데 (행21~24장)

이 시기에 빌레몬과 만났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보다는 가깝지만, 골로새에서 가이사랴까지도 아주 먼 거리입니다.

 

3) 그래서 요즘 떠오르는 이론은 ‘에베소 감옥’설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감옥에 갇힌 일은 성경에 직접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고후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베소가 그 중심도시)에서 당한 환난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위 구절에 근거, 바울이 에베소에서 짧은 기간이라도 구류되어 있었을 수 있었다고 추론합니다.

에베소는, 골로새와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본문에서 예루살렘인가, 가이사랴인가, 에베소인가?

하는 지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본서의 주제도 아닙니다.

 

주제는, 바울이 (거기가) 갇힌 상태에서도, 전도와 가르침을 쉬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제자를 삼았다는 그 열정이며,

그런 가운데서도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의 허락과 동의를 구하는 태도와,

 

무엇보다도 오네시모와 같은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 같은 바울을 만나서, 죄용서 받고, 자유하게 되는 것이.. 본서의 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