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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23-27, 모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간 이유

LNCK 2022. 6. 25. 08:40

 

◈모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간 이유              신3:23-27              출처

 

(*원제목 : 성도의 역할과 짐)

 

미국 6대 침례교 신학교 중에 가장 먼저 설립된 곳은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남부침례교신학교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입니다.

이곳에서 19세기에 설교학을 가르쳤던 존 브로우더스(John A. Broadus)라는 교수님은

‘설교의 준비와 전달(A treatise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이라는 저서를 남겼는데,

이 책은 19세기 설교학의 기본 교과서로 사용될 만큼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브로우더스 목사님이 오늘 본문으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The unanswered prayer)’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했습니다. 그 설교 가운데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브로우더스 목사님이 한 어린 아이의 장례식 예배를 집례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한 소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심각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대로 무엇이든 다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가요?”

어려운 질문을 받은 브로우더스 목사님은 금방 대답할 말이 궁색해져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이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죽은 아이는 저의 사촌 동생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제 사촌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제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비록 소년의 입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우리 신앙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No”라고 대답하실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브로우더스 목사님은 소년에게 이런 말로써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얘야. 너의 아버지가 너를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보내면서

‘뭐든지 필요한 것은 아빠가 다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치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네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나, 네게 합당치 아니한 것이나

네게 최선이 아닌 것까지 보내주시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 않겠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니?”

 

그러자 이 소년은 “알 것 같습니다(I think I see)”라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한 후에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2:2)고 했습니다.

 

또 잠언에도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15:29)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yes’라고 응답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No’라고 응답하십니다.

‘No’라는 응답을 받은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바울입니다. (구약은 본문의 모세)

 

사도바울은 지극히 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받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너를 자고치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네 몸에 사단의 가시를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사단의 가시’로 인해 괴로워서, 하나님께 이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No’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좀 약해질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네가 워낙 은혜를 크게 받았는데

건강하기까지 하면 너는 교만해져서 네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네 몸이 조금 약해야 네 마음이 겸손해지고 내가 마음껏 너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기도는 더 이상 하지마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No’라는 응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서 방황을 했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이 때 모세의 소망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모세야.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모세는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3:25)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3:26)

 

하나님께서는 “모세야. 그런 기도는 이제 그만해라. 그만해도 족하다.

너는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답을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했는지

1~4장까지에 기록된 모세의 첫 번째 설교에서

이 말을 무려 세 번(1:37, 3:26, 4:27)이나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셨을까요? ←문제 제기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어떤 영적인 원리를 배울 수 있을까요?

 

 

◑1. 모세 개인의 죄 때문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거절당한 첫 번째 이유는

모세 개인의 죄 때문입니다.

특히 므리바 사건(민 20:10-11)이 바로 모세의 개인적인 죄입니다.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물이 떨어지자 백성들은 “우리와 짐승을 다 여기서 죽게 할 셈이냐?

왜 이런 악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였느냐?”고 부르짖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는 이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위를 향해 “바위야.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주1)

물은 나오고 백성들은 해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가 백성들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죄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약간의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면 모세의 중요한 인격적 특징이 바로 온유함(meekness)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2).

이는 모세가 온유함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므리바에서 저지른 모세의 죄는 사실상 온유함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불같은 성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 애굽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온갖 좋은 교육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히브리인을 치는 애굽 사람들을 보자 그만 화를 이기지 못해 죽이고

시신을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얼마나 불같은 성격입니까?

 

이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40주야를 금식하며 받은 십계명 두 돌비를 가지고 내려올 때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두고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모세는 화를 내면서 돌비를 산 아래로 던져서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저 같으면 두 돌비는 옆에 잠시 내려두고 화를 낼 것 같은데

불같은 성격의 모세는 돌비를 던져서 박살을 내고 만 것입니다.

 

므리바의 사건도 불같은 분노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곳에

기도응답을 막고 있는 허물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모세 같은 큰 인물이라도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신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모세의 우상화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심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신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이몬드 브라운 박사는 <The Bible speaks today, 신명기 주석> 편에서

이러한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지만, 이것은 모세 개인에게만 유익이었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굉장히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신34:8절을 보면 모세가 죽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꼬박 한 달 동안 울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한 시간 울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새는 장례식에 가도 우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무려 한 달 동안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34:10절에도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 사후에 이스라엘의 긴 역사 가운데에도 모세처럼 위대한 선지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나라에 옮기셨습니다. 만약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숭배했을 것입니다.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모세를 따르는 사람, 여호수아를 따르는 사람이 갈려서

다투는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모세를 우상화하려는 이런 위험들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러한 영적인 위험을 막고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신34:6절은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모세의 무덤이 존재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모세를 우상화하고

모세 무덤에 모여 예배하였을 가능성이 다분히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미리 차단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자리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와 같은 위험이 모두 사라진 후에 비로소 가나안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마17: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로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보았습니다.

모세는 예수님께서 오시고, 모든 위험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 땅의 변화산을 밟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실 때에

하나님을 향해 섭섭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섭섭한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나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더 큰 유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3. 모세가 맡은 역할은 짐을 수반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바로 모세가 맡은 사명에는 모세가 질 수 밖에 없는 짐, 부담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보호)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모세는 시내산과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은혜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상징에 큰 혼동이 오게 된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모세를 생각하면서 갈보리 언덕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상징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시내산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가나안 땅을 건너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의 상징에 혼동이 오기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자가 뽕나무에 올라간 인물에 대해 설교할 때에

그만 실수로 이 사람을 ‘니고데모’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설교 한 후에야 이 사람이 니고데모가 아니라, 삭개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 중간에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난처하여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나?’ 고민하던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니고데모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데 갑자기 삭개오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니고데모를 보고

‘니고데모여! 왜 당신이 거기 올라가 있습니까?

당신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야 이야기가 맞지 않습니까? 어서 내려오시오.

내가 올라가야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실수를 모면한 후에 설교를 계속했다는 확인이 안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서) 갈보리 언덕에 올라가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세야. 거기는 네 자리가 아니다. 내려와서 시내산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모세의 역할과 상징은, 시내산이 있는 광야에서 끝나야 합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그 역할상 가나안 땅을 건너가면 안 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여호수아의 역할입니다.

계주 달리기를 할 때 1번 선수가 아무리 잘 뛴다고 해도

바턴을 2번 주자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잘 뛴다고 해서 전 구간을 다 뛰어버리면 그 경기는 무효가 됩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모세가 아무리 기도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옳다는 근거는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3:27-28“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 성도들에게도 각각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짐을 거둬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언제든지 ‘No’라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목사님에게 주신 영권의 7배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목사님의 7배나 되는 역할을

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의 목회보다 7배 더 큰 목회를 하는 역할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 영권의 7배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쾌히 여기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역(易)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에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위엄에 압도되어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 자리를 사표 내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맡긴 역할과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맡은 역할과 사명에 맞지 않는 기도를 드릴 때,

혹은 우리가 맡은 역할과 사명의 짐을 지고자 하지 않을 때,

그런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No’라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는 말

 

우리의 기도에 ‘No’라고 답하시는 것은 단편적인 우리의 시각보다

더욱 뛰어나게 전체적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전체의 유익을 위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No’라고 응답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은혜를 거두시거나 유익을 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비록 가나안 땅을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구약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비록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사도 중의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성경의 계시를 가장 많이 기록한 위대한 은혜를 누리는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절에 섭섭해 하지 마시고

이미 주신 은혜와 유익을 생각하여 감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성도가 맡은 역할은 각각 다릅니다. 저는 목사로서의 역할, 어떤 분들은 장로로서,

어떤 분들은 권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할에 따른 능력과 짐을 주시므로 우리는 그 짐을 잘 지고 가야 합니다.

 

각각 다른 역할을 맡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각 다른 역할 속에서 악역을 맡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배우들이 왜 좋은 역을 맡기 위해 노력하는 줄 아십니까?

좋은 역할을 맡아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기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욘사마 배용준 씨를 비롯한 많은 배우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악역을 맡게 되면 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실제로 길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이 악역 맡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배우들이야 연기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신앙과 인생의 역할은 그 자체가 현실입니다.

악한 역에는 짐만 따르고, 은혜가 따르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가 맡은 역할이 얼마나 악합니까?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고마는 악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살이라는 비참한 짐을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가룟 유다를 평가했습니다.

그는 비참한 짐도 지고 예수님께 나쁜 평판도 받은 악역의 최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연극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은 현실의 역할입니다.

건설적인 역할, 밝은 역할, 자타에 유익을 주는 역할, 은혜로운 역할을 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역할이 주는 짐을 기꺼이 지시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와 유익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모두 좋은 역을 맡아 큰 은혜와 유익을 얻고

짐도 함께 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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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모세와 아론은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친 사건은 성경에 두 번 나옵니다.

 

1) 출애굽 직후 '르비딤'에서도 식수가 없다는 이유로 해서 백성들은 불평한 적이 있었죠. (출 17:1-7).

두 사건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입니다.

 

이때는 신광야인데, 출애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직 시내산에 도착 전이죠.

이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때는 반석을 (한 번) 쳤습니다.

 

출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그런데 문제는, 17장의 사건과, 20장의 사건이 별개 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므리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출17:7, 민20:13

왜냐면 그 단어가 ‘다툼, 분쟁’을 뜻하기 때문이죠.

백성들이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2) 민20:1~12절 상황으로, 같은 신 광야이지만, 여기는 가데스 바네아와 가까운 지역으로

1차 사건보다 약40년 세월이 흐른 후입니다. (민20:1절의 ‘1월’은, 출애굽 40년 후 1월을 가리킴)

 

민20: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결국 두 번째 므리바 물가에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쳐서

하나님의 진노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를 (다분히 영해로) 해석하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모세가 첫 번째 므리바 사건으로 반석을 친 것은, 그래서 거기서 물이 나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람들을 살리는 생수가 터져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므리바 물가 사건입니다. 광야 생활 끝무렵인 40년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고 했지, ‘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민20:8

 

그런데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민20: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가 홧김에 반석을 두 번 쳤을 수도 있죠.

‘근데 그게 뭐 모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갈 정도로, 중대한 실수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보는 이유는 (다분히 ‘영해’인데)

1차 사건 때, 모세가 반석을 침으로써, 십자가 사건이 단회적으로 완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차 사건 때,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완성된 십자가 사건을 훼손하는 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 십자가에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세는, 중대한 죄를 지은 것이 되고,

그래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징계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