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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8장 11~20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

LNCK 2022. 6. 25. 16:50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              신8:11-20             2008년 설교, 출처

 

서론

 

오늘은 신명기 8:11~20절 말씀을 중심으로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출애굽의 사건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건으로의 의미 보다는 우리의 구원 경험을 예표(typology)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세상이고 바로왕은 마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것은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금방 들어가지 않고 원래 열 하루면 갈 길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한 것은

영적인 훈련 과정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상징되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때로는 성공도 하고 때로는 실패도 하며, 영적으로 성장해갔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이 광야 과정의 목적과 목표는 뭐냐?

로마서 8: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 그 목적과 목표가 뚜렷이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신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나 타락해서 그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특징이 자기를 낮추시는 겸손함이라고 했습니다.

 

빌2: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는 겸허함(humility)이 근본 원료가 되어서

예수님의 인격이요 형상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다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훈련의 모든 과정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특별히 훈련의 목적을 요약한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은 복을 주려고 광야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런데 복은 마침내 오는 것인데

선 조건으로 먼저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광야 훈련 전 과정의 목적입니다.

 

오늘은 광야란 무엇인가, 또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방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광야(Wilderness)는 무엇인가?

 

사람이 살 수 없는 半사막지대와 같은 땅을 광야라고 합니다.

광야에는 불뱀과 전갈과 같은 짐승만 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나는 식물은 사람을 찌르는 가시나 찔레뿐으로 먹을 수도 없는 식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부적합한 곳입니다. 미국의 짐 베르크(Jim Berg) 목사는

광야(Wilderness)는 영어 W로 시작되므로

W로 시작되는 네 가지 단어로 그 특징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방황하는 곳(Place of Wandering)입니다.

광야에서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광야에서 방황을 하다가는 죽겠구나’ 해서

모세에게 자꾸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둘째, 부족한 곳(Place of Wanting)입니다.

광야에서는 물과 양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마실 물과 음식도 구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백만 명이 광야에서 사십년을 먹고 마셨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백만 명을 먹이고 마시게 한 것입니다.

 

셋째, 전쟁하는 곳(Place of Warring)입니다.

가는 곳마다 친구는 없고 모두 다 원수들뿐입니다.

'일가친척' 인가해서 찾아가면 다 적이 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에돔, 모암, 암몬

광야에서는 가만있으면 죽습니다. 전쟁에서 이겨야 사는 곳입니다.

 

넷째, 기다리는 곳(Place of Waiting)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누구하고 약속을 했는데 상대방이 늦어 10분만 기다리게 되어도 성질이 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었습니다.

광야는 기다림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방황의 장소요, 부족한 장소요

전쟁해야 되는 장소요, 한없이 기다려야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2.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

 

그런데 하나님은 왜 택하시고 사랑하신 백성을

이렇게 험한 광야에서 40년이나 헤매고 다니게 하셨느냐?

목적이 있으시니까 그랬습니다.

 

신명기 8장에 2절, 3절, 16절에서 “너를 낮추시며”라는 구절이 3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반석을 쳐야 물이 나오고 하나님이 물을 주셔야 물을 마시며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야 밥을 먹고

하나님이 메추라기 고기를 내려야 고기를 먹으며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를 해 주셔야 갈 길을 알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한 가지 사실을 가르치시려고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리를 배우기도 어려웠고, 또 속히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20세 이상의 남자가 60만 명 이상이나 죽는 대가를 치르고

가까스로 이것을 배우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도로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담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5: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You can do nothing)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광야 40년을 걷게 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떠나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예수님을 떠나도 나는 공부도 할 수 있고

직장도 가질 수 있으며 돈도 벌 수 있고 자식도 낳을 수 있으며

가정도 이룰 수 있고 잘 살 수 있어. 예수님 없이도 나는 잘 사는데

목사님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라는 사람은

 

아주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고, 광야 40년을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며,

지금 애굽의 노예,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고,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광야 40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인생은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돈을 벌어 먹고 살지만 그것도 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인데

이걸 가리켜 일반은혜 혹은 보통은혜 (Common Grace)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와 양식을 주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죄를 짓고 자기 다리로 담장을 넘어갔고 건강해서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 할지라도

그 힘과 건강마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자기 힘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리켜 ‘보통 은혜(일반 은총)’라고 합니다.

 

이처럼 불신자들도 ‘보통 은혜’를 받고 있는 거고

우리 신자들은 ‘보통 은혜’에 더하여 구원받는 ‘특별 은총(Saving Grace)’을 같이 받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특별은총을 못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일반은혜를 다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산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3. 목적을 이루시는 방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시는데

이런 목적을 이루시는 방편이 뭐냐?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기 위해 쓰신 방편 가운데

제일 중요한 도구가 만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8: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고

 

16절 전반에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나는 출애굽기 16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게 없다 하니 하나님이 광야지면에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가 하나님의 백성을 낮추기 위한 시험(test)이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얼마나 낮아졌나하는 것을 알아보는 시험이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시험을 봐야 그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척 하고 있어도 시험 봐서 0점 맞는 학생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학생은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해도 집중력이 없어 아무것도 못합니다.

 

반면 공부 못하는 것처럼 놀고 다녀도, 시험을 보면 100점 맞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이런 학생은 늘 노는 거 같아도 자세히 보면 공부할 때 집중해서 잘합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낮추어졌는가를 시험하는 겁니다.

만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시험입니다.

 

1) 첫째, 내 삶의 모든 자원은 그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믿느냐는 시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가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만나는 그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를 먹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오늘도 만나를 주셨구나.

이 만나가 없으면 나는 죽는데 이 만나로 말미암아 나는 사는구나.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인간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반기를 들 수가 없는 겁니다.

반기를 들어 만나가 그치면 굶어 죽는데 어떻게 반기를 듭니까?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심히 교만하고 사악한 언어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먹고 살고 호흡하는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는 시험에 0점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지금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신자, 무식한 사람이라도 성경이 2,000년 동안 원수, 마귀, 마귀의 종들에게

무수한 공격을 받았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원수, 마귀의 공격에도 살아남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성경이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원받고 문화와 지식이 발전하며

사회가 밝아지고 마귀, 귀신, 우상들이 떠나가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가 뭘 안다고 성경을 공격합니까?

왜 성경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공격하고 기독교를 공격하느냐?

자기가 먹고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

하나님이 자기에게 햇빛과 비와 물과 양식을 주고 지식과 건강도 주어 직장도 얻게 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신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신이 없이 어떻게 하늘에 태양이 뜹니까?

신이 없이 어떻게 하늘에 구름이 뜹니까? 신이 없이 어떻게 이 땅이 존재하고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걸어가도 무너지질 않습니까? 신이 없이 어떻게 공기가 있습니까?

신이 없이도 그런 게 다 저절로 있다는 자는 우둔한 자입니다.

 

야고보서 1:16~17절 전반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모든 좋은 것은 빛들의 아버지께로 온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저가 그걸 어떻게 받습니까?

 

행17:25절에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에게 헌금이나 물질을 내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나한테 뭘 줬다고 나보고 섬기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든 불신자든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을 친히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맥추감사주일에 신명기 8장을 설교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건강, 직업, 가정, 지식, 권위 이 모든 것은

100%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감사를 해야 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은 맥추절이 되면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 년에 두 차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은 더욱 감사할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나의 시험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100점,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0점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하나님 말씀의 규율대로 사용하느냐는 시험입니다.

만나는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만나의 규율(Regulation of Manna)이 있습니다.

만나는 하루에 나가서 한 오멜만 걷어야 됩니다.

 

내일 먹을 거 모래 먹을 거를 미리 걷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다음날 다 썩어버리고 냄새가 납니다.

하루 먹을 한 오멜만 걷고 다음날 아침까지 두면 안됩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에는

두 오멜을 걷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주겠다는 것이 만나의 규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도 나가서 잔뜩 취합니다.

한 오멜을 갖다 숨겨놓고, 또 한 오멜을 갖다 숨겨놓고 해서 내일도 먹고 모래도 먹고

밤참도 먹고 사이사이도 먹고 이렇게 해야겠다 해서 실컷 남겨뒀는데

그 다음날 아침이 되니까 다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 먹게 되어 집안을 다 버리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 거두러 나갔다가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모세에게 진노를 사고 야단만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을 바르게 사용하는 규율을 주고 있는 겁니다.

돈은 좋은 겁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돈은 좋은 수단이지만 돈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돈을 사랑하고 쫓아가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돈을 의지해도 안됩니다.

어느날 다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사랑해서도 안되고 의지해서도 안됩니다.

 

돈은 좀과 동록이 해하는 이 땅에 쌓아둬도 안되고

좀과 동록이 해하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에 쌓아두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써야 됩니다.

 

또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자원이므로 낭비하지 말고 기회를 잘 활용해서 사용해야 됩니다.

헌금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됩니다. 어떤 분은

‘내가 돈 많을 때 헌금할 걸 이제 다 망해가지고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다’고 후회합니다.

 

또 어떤 분은 병들어 가지고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주의 일이라도 조금 할걸’하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런 뒤늦은 후회는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건강이 있을 때

기회를 살려서 사용해야 됩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자원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손으로 일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려 의의 병기로 쓰임 받도록 하라는 것이 규율입니다.

 

지식과 기술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하나님이 주신 규율대로 쓰지 않으면 결국은 썩고 벌레가 생기며

냄새가 날 것입니다.

 

만나가 제 맛을 내려면 규칙대로 사용해야 됩니다.

그래야 단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첫째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믿고,

둘째로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하나님의 규율대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시험에서 수시로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는 경우는 세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불평과 원망을 하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불평이 많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감사가 많습니다. 아침에 밥 한 그릇 먹는 것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밥을 앞에 놓고 투정하는 아이들은 몇 끼만 굶겨봐도 곧 감사하게 됩니다.

 

군대 가서 처음 훈련 받을 때 밥과 반찬이 마음에 안든다고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훈련을 받고 배가 고프게 되면 똑같은 밥과 반찬이 너무나 맛있어 집니다.

 

저는 가격이 비싼지는 않지만 아내가 만들어준 김치찌개를 먹을 때

그리고 자장면과 라면, 두부찌개 등을 먹으며 정말 맛있어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길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해도

‘척추가 안 부러지고 갈비뼈만 부러졌으니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저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성공자이고 불평하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자기 힘으로 얻은 것처럼 자만하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본문 17절로 18절 전반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먹고 살만하게 되면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손으로 했어도 그 손의 능과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 겁니다.

‘내가 다 했도다. 내가 이루었도다.’하며 자만에 빠진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ignoring) 잊어버리는(forgetting) 자는 실패자입니다.

만나를 두 오멜, 세 오멜 거두고 있어서

하나님이 한 오멜만 거두라고 했는데 왜 그러냐고 하면

‘아이고, 잊어버렸네.’라고 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고 있어서 왜 나왔냐고 하면 ‘아이고, 잊어버렸네.’라고 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규율을 잘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4장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승리하는 인생은 오직 감사, 오직 겸손, 오직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를 따르는 인생은 승리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영원토록 광야만 걷게 하진 않으십니다.

40년이 지나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네가 짓지 아니한 집에 살 것이고 네가 심지 아니한 과일 나무의 과일을 먹을 것이며

네가 갈지 아니한 밭에서 농사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론

 

광야를 지나면 마침내 복이 옵니다. 그런데 광야를 지날 때 자신을 낮추는 걸 배워야 됩니다.

자신을 낮추는 걸 배우면 마침내 복이 옵니다.

모세도 광야 40년 양치는 목자훈련 이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낮아지고 깨어지며 부서지는 훈련을 한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빛나는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침례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메시야로 공생애 사역을 성공하셨습니다.

 

이처럼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하면 마침내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첫째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셨다 하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둘째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의 규율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높이고 나는 낮추어 마침내 복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