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부터는 신명기 12장부터 강론을 하고자 합니다. 왜냐면 제가 2년 전에 은퇴할 때, 신명기 11장에서 설교를 마쳤고 신명기를 다 설교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에 오늘부터 신명기 12장부터 설교를 해서, 기회가 닿는 대로 끝까지 하고자 합니다.
신명기를 하도 오래전에 설교했기 때문에, 서론적으로 약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고 하는 의미로서 -모세가 율법을 두 번째로 받았다 라는 의미가 아니고, -모세가 한 번 받은 율법을, 다시 강론했다 하는 의미입니다.
-시내산에서 출애굽 1세대를 향해서 먼저 강론을 했고 -이제 가나안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출애굽 2세대를 향해서 강론한 것이 신명기 입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후에 40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고 가나안 땅 입성 직전에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일간 애곡을 했습니다.
모세는 120 세로 죽기 직전까지,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아서 모압 평야에서 출애굽 제 2세대를 향해서 세 편의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70일 전에 설교가 시작되었고 40일 동안 설교하고 모세는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간 애곡을 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가 모세의 세 편의 설교인데 1~4장은 첫번째 설교입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회고한 것입니다. 5~26장까지는 두 번째 설교이고,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다시 가르친 것입니다. 27~33장까지는 세 번째 설교로서,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이 오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온다는 내용입니다. 34장은 모세의 사망 기사를 후대가 첨부한 것입니다.
△34장에 모세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있다고 해서 신명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사람이 책을 기록하게 되면 마지막 부분에 후대학자가 사망기사를 첨부하는 그런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5장~26 장까지가 [모세의 두 번째 설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5~11장, 12~26장
1) 첫째 부분 5장~11장은 율법에 가장 근본이 되는 십계명을 다시 설교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어떤 정신으로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강론한 것입니다.
감사와 겸손을 이야기한 것은, '너희가 잘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너희는 목이 곧고 반역하는 백성이지만, 열조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통해 구원 받아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감사와 겸손의 정신, 이 세 가지 정신으로 십계명을 지키면 가나안 땅에서 너희의 삶이 축복될 것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우상을 사랑한다든가 감사하지 않고 배은망덕 한다든가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게 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너희 삶이 복되지 않을 것이라.. 하는 말씀이 두 번째 설교의 첫번째 부분인 5~11장까지 입니다.
2) 둘째 부분 12~26장은 이것은 십계명을 삶의 특수한 상황, 혹은 특수한 영역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판례 혹은 사례, 즉 Case law (판례)에 관한 것입니다.
첫째 부분(5~11장)은 기본적인 명령이고 둘째 부분(12~26장)은 <구체적인 사례의 적용>인 것이죠.
16:18절~18장까지는 <재판관, 왕에 관한 규례>인데 가정생활에 관한 제5계명을 사회생활과 국가생활까지 확대해서 적용한 것입니다.
19장~26장까지는 <대인관계에 관한 규례>들인데, 제6계명~ 제10계명까지를 적용한 것입니다.
◑1.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12:1
오늘 본문 신12:1~7절에 보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십계명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첫번째 경우입니다. 제1, 제2, 제3 계명을 적용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규례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예배 생활에 실제적이고 풍부한 교훈을 줍니다.
물론 '구약 제사 형식을 신약예배에서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소나 양을 잡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 예배의 정신은, 신약의 예배에서도, 적용되고 존중되고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됩니다.
제1계명 '너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제2계명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마라' 제3계명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마라'
그러면 이런 제1, 제2, 제3계명, 이 중요한 계명들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 application 할 수 있는가요?
모세는, 예배를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태도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드리는 것이 제1, 제2, 제3 계명을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규례와 법도의 구분
12:1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모세는 순종해야 할 율법의 종류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규례 statutes 와 법도 judgments 입니다. *KJV
이 두 가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규례 .. 히브리어 호크인데, '돌에 새겨진 왕의 명령' 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시대의 왕들은, 나라의 법을 큰 돌에 새겨서 그 법은 변개할 수가 없는 영원한 법이라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새겨진 나라의 법' 그것이 규례(호크)입니다. 그 형태는 You shall~ 혹은 You shall not~ 이런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너는 ~하여야 할지니라' 혹은 '너는 ~하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는 형태를 띤 말씀은 규례 statutes 입니다. *decree로 번역하기도 함
그러니까 대부분의 십계명은 '규례'입니다. You shall~ 혹은 You shall not~ 이런 형태를 취하고 있죠.
법도 .. 판사가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에서 판결한 판례 입니다. (판례는 영어로 case law, precedent 라고 하는데, 성경에는 judgments, 히. 미쉬파트)
판사가 내린 판례도,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것이고 그 후에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는 동일한 판결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형태는 영어로 'If~ then~' 입니다. 성경말씀에 'If 만일 이러이러 하다면, then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야 한다' 라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24:7 'If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유인하여 종으로 삼거나 판 것이 발견되면, then 그 유인한 자를 죽일지니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위 구절은 'If 만약 그렇게 한다면, then 이렇게 할지니라' 이런 형태가 법도 judgments입니다.
또 성경에 제4계명이죠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 이것은 '규례'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누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그러면 그 사람을 죽일지니라' 이 말씀은 If~ then~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법도'인 것입니다.
(*시편에도 '규례', '법도'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하는데, 모세오경을 기초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런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시편도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율법은 '규례' 혹은 '법도' 이 두 가지 종류 중에 어느 한 가지에 다 해당이 됩니다.
신4:1절에도 이 규례와 법도가 명백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규례와 법도는, 형태의 차이는 있어도, 그 구속력이나 권위는 전혀 차이가 없는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규례와 법도를 향한 인간의 의무>는 무엇인가요? 모세의 의무는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11:32 '내가 오늘날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모세는 백성들에게 규례와 법도를 베풀었습니다. 즉 가르쳤습니다. 그럼 백성들의 의무는 뭔가요? 백성들의 의무는 규례와 법도를 지켜 observe 행하는 obey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를 잘 공부해서, 먼저는 배워서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엔 그것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규례와 법도가 아닌 것은 배척하라' 하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이 규례와 법도를 어디서, 얼마동안 지켜야 되는가요?
신12: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즉 이 규례와 법도는 가나안 땅에서 지켜야 될 규례와 법도 인 것입니다.
광야생활과는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규례와 법도를, 더욱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얼마 동안 지켜야 되는가요? 평생에 지켜 행하라 그랬어요. 12:1 땅 위에서 목숨을 가지고 사는 동안, 매일, 평생 동안 지켜 행하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신12:1절 말씀이,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두 가지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신12: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1) 말씀을 지켜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해야 되는가요? 단순히 지적인 관심만 가지고 많이 알아서, 남과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것인가요? 소위 interectualism, 지식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알고, 믿고,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의 자세가 없는 사람은, 예배생활에 기본이 안 된 사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예배는, 헛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지키고, 행하고, 순종하기 위한 목적으로 알고자 해야 됩니다.
2) 하나님의 율법가운데 모세가 신명기에서 중점적으로 강론하고 있는 십계명, 즉 도덕법은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하는 항존법 입니다. *standing law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신자들도, 십계명을 지켜야 되고 불신자들도 십계명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법을, 광야 상황과 가나안 땅의 상황에 따라서 적용(법도)을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법(규례)은 변하지 않지만 적용되어야 될 컨텍스트(상황)는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이 만일 살인을 했다면, 그를 죽일지니라' 이런 If~ then~ 의 구조를 가진 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도는, 개인 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 국가생활이라는 정황에 따라서 그 적용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국가는 사형 시킬 수 있어도, 교회가 그를 사형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 자기 자신이 자기를 사형시킬 수는 더더구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정에서 그를 사형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법도'라 할지라도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 적용은 다른 것입니다.
또 문화적인 상황, 그리고 언약적인 상황에 따라서도 적용이 달라집니다.
'사람이 만일 안식일을 범한다면, 그를 죽일지니라' 그러나 가나안 땅에 신정통치 국가라고 하는 상황과 신정 통치국가가 아닌 현대국가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달리 적용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대국가에서, 주일날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규례와 법도라고 하더라도 법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즉 적용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이 가나안 땅에서 지킬 규례와 법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알맞게, 그 정신을 살려서 시대적 정황에 알맞게 적용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배의 장소와, 태도와, 정신에 관한 규례와 법도도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지혜롭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 그런 부분인 것입니다.
◑2. 12:2~7절은 공예배의 규례와 법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공예배를 드렸는가요?
이 공예배에 대해서 모세는 두 가지 근본 원칙을 말합니다. 모세가 가르친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공적인 예배 public worship 입니다.
개인적인 예배도 중요하죠. 그러나 모세는 개인적인 예배 이전에 공적인 예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인 예배만 드리고, 공적인 예배를 무시하는 일은 모세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공적인 예배에 있어서 두 가지 근본원칙이 뭔가요?
▲1. 첫째 원칙은, '예배에 관한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정하신다' 라는 하나님의 주권의 원리입니다. Sovereignity of God over public worship
신12:8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너희 소견대로 하지 말지니라' 그랬습니다. 예배장소와 방법에 관해서, 인간이 원하는 대로, 임의대로 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배의 규정적인 원리'라고 합니다.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주1)
개신교회의 개혁교회나 우리 침례교회는, 이것을 '예배의 근본원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본주의적인 예배의 기본 원리인 것입니다.
'규정적인 원리' 혹은 '규제적인 원리'라고 번역됩니다. 이에 반해서 좀 인본주의가 섞인 예배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규범적 원리'라고 하는데, 이 '규범적 원리'는 "성경에 없는 것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라는 다소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입니다.
침례교회는 '규범적인 원리'를 배척하고, *Normative principle of worship '규정적인 원리', 즉 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그대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2. 두번째 원칙은, 하나님을 향한 공적인 예배에서 이방 종교의 예배와 조금 더 혼합되거나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라는 분리의 원리 principle of separation 입니다.
분리의 원리입니다. 이방 종교의 모양이나, 그런 음악이나, 그런 형태의 어떤 의식이나 이런 것들이 조금도 도입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오늘날은 '교회연합 운동 ecumenical movement'이라고 하는 미명 아래 이방 종교와 기독교를 혼합시키는, 소위 종교혼합주의 syncretism 이 많이 시행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인 것입니다. WCC는 이런 일을 금지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위의 두 원칙에 근거한, 모세의 명령은 뭔가요?
하나님의 주권의 원리, 그리고 절대적인 분리의 원리에 근거한 모세의 명령도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명령은, 가나안 땅에 이방 종교에 관련된 것은 그 장소가 되었던, 우상이 되었던, 우상의 이름이 되었던, 완전히 다 파괴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공적인 예배에 들여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12:2~3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우상 예배와 이방 종교의 예배와는 완전히 단절하라는 말입니다. 2~3절에 나오는 여섯 가지 동사를 보면 모세가 얼마나 단호하게 명령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파멸하며/ 헐며/ 깨뜨리며/ 불사르고/ 찍어서/ 멸하라!
도끼도 동원되고, 불도 동원되고, 망치도 동원되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래서 이방 우상 예배에 관련된 그것은 모조리 파멸하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택하신 곳만을 '예배의 장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place of worship 이제는 가나안 땅에 가면, 아무데서나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12: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광야에서는 장막을 따라 예배 장소가 변동되었습니다. 장막은 구름기둥, 불기둥에 인도를 따라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의 상황은 다르다는 겁니다. 이제는 이동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예배의 자세'에 관해서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attitude of worship
12: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가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라 하는 것이죠. 물론 7가지 제물이, 레위기에 나타난 모든 재물을 다 총망라한 것은 아닙니다. 일곱 가지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사입니다. '드리라' 이스라엘의 공적인 예배는,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받으려고 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은혜 받으려고 예배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축복을 받으려고 예배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예배는 반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받고자' 하는 것은 예배의 태도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예배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려고 예배를 드리라는 거에요.
예배의 태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공적인 예배는 '무엇을 받겠다'는 자세를 갖지 말라는 겁니다.
예배에서 무엇이든지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 영혼에 불만이 쌓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으려고 하다가 못 받을 수도 있고... 받을 때는 좋아하다가, 못 받을 때는 불평불만이 쌓이고... 그럴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의 문제는 뭔가요? 그것은 그 사람의 예배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은, 그 영혼에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죄와 마귀와 지옥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을 더 못 받아서 불평불만을 갖겠습니까?
그런 엄청난 구원을 받고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깝다거나, 아무것도 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건 무슨 심보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예배의 자세는, 이미 받은 구원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자원해서 드리는 겁니다. 찬양도 드리고, 감사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고, 헌물도 드리고, 헌신도 드리고,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자세로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게 되면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3. 모세는, 예배의 정신에 관해서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Spirit of worship 어떤 정신으로, 마음가짐으로 공적인 예배를 드려야 되나요?
12: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복 받은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겁니다. 인위적으로 기쁜 얼굴을 하라는 게 아니죠. 인위적으로 웃으면 오히려 어색하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주신 구원과 영생 부활의 은혜를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하나님 주신 모든 축복을 생각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잔칫집처럼 드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공예배를 무슨 초상집 장례식처럼 드린다든가 아귀다툼 하는 전쟁터 같이 드린다든가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거죠. 즐거움과 기쁨의 시간이 되어야 된다.. 하는 말씀이죠.
▲4. 모세는 '예배의 참여자'에 관해서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Pariticipant of worship 예배에 누가 참여해야 되나요?
예배는 인도자가 있고, 또 예배자가 있습니다. 인도자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소명을 주신 레위인 들입니다.
12:18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19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레위인을 학대하고, 막말하고, 멸시하고, 그리고 굶어죽게 하지 마라.. 하는 얘기인 것입니다. 이것은 공적인 예배에는 조직과 질서가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있고, 그리고 예배참여자가 있다는 말씀이죠.
공예배의 참여자 가운데 크게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12절에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라'
온 가족이 함께 공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노비까지도 함께 공예배를 드리라 하는 말씀이에요.
레위인이 인도하는 공예배를, 온 가족이 함께 드리라!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예배에는 조직이 있고, 질서가 있고, 또 가족에 대한 화목이 있고 그리고 서로 먹고 마시는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이것이 구약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이제 모세의 이러한 명령을 현대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요?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죠. 구약의 공예배와 신약의 공예배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근본 원리는 같은 것입니다.
1) 첫째, 하나님은 공적 예배의 장소, 예배의 요소, 예배의 질서 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정하십니다.
'예배의 규정적인 원리'는, 우리가 고수해야 될 원리인 것입니다.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예배를 사람이 마음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공적인 예배는 모든 이방 종교의 색채나 음악이나 사상이나 그런 예배방식과는 완전히 단절되어야 된다, 그런 것을 도입해서는 안 된다.. 하는 얘기죠.
무당 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는 없습니다. 무당 노래를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습니다. 힌두교 방식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힌두교의 쿤달리니 (뱀또라리 트는 모양의 양반다리 명상) 같은 방식으로 은혜를 받겠다고 기도하면 그것은 그때부터 성령이 아니라, 악한 사단의 역사가 거기에 개입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공적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는, '무엇을 받아야되겠다' 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기도와 예물을 드리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공적 예배에 참여해야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경박한 웃음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에서 나오는 깊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됩니다.
예배에 나와서 교인끼리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목회자를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5) 다섯 번째로, 공적 예배에서는 가족 간의 유대감이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온 가족이 함께 드려야 한다는 원리가 신약에서 변경되거나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생 목회하고 설교하면서, 이 문제를 깊이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제 어른들 예배가 따로 있고, 청년 예배가 따로 있고, 또 고등부 중등부 뭐 이런 예배가 따로 있는 것이 저의 오랜 목회생활에 좀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말씀을 듣고 그래야 '아~ 저 사람은 누구 아들이구나, 저 사람은 누구 딸이구나' 하고 알 수도 있고 가족 간의 유대감도 강화되고, 또 가족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인데
이게 다 예배가 따로따로 분리되다 보니까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배를 함께 드리고 나서, 교제를 한다든가,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별도로 나눠서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적인 예배만큼은, 가족들이 함께 드리는 원리가 회복될 필요가 있다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6) 여섯 번째, 신약 시대에는 공적인 예배장소로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장소에서만 예배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요4:21절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르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신약 시대에는 예배에 장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장소는 지리적으로 국한된 장소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 예배의 장소입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엡2:22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그것은 성도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에서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모일 때에 사용하는 곳을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중요하면, 예배당도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경적인 조직이나, 성경적인 말씀 선포나, 성경적인 교회 의식이나 성경적인 권징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성도들이 공적인 예배를 드려야 될 처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를 멸시하지 말아야 되고 교회라고 하는 단어를 아무데나 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공적인 예배는, 멸시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합니다.
헬라 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알렉산더 대왕은 BC 333 년에 전 유럽과 아시아를 통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10년 만에 죽고 나서, 헬라 제국이 넷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시리아를 차지한 왕조가 있었습니다. 영어로 셀류시드 라고 발음하고, 헬라어로는 셀류쿠스 라고 발음하는데 이 셀류시드 왕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제우스 신이 현현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에피파네스' 라는 말이 '신의 나타남 appearance of god'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름을 지으면서 '나는 신이 나타난 존재다'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심히 정신이 좀 잘못된 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그는 헬라 문화에 깊이 심취되고, 헬라 문화가 최고의 문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BC 168년부터 유대교에 예배를 금지시키고 모독을 했습니다.
돼지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뿌리도록 강요했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고 그리고 공예배(성전 제사)를 파괴했습니다.
BC168~165년까지 3년 반 동안에, 유대인 4만명을 죽였고, 4만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BC167년, 모두인 이라는 마을의 제사장이던 맛다디아스와 그의 네 아들은 (*혹자는 다섯 아들이라 함)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마카비 혁명'인 것입니다.
BC165년, 드디어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성전을 정결케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우리의 성탄절과 비슷한 시기에 '수전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이것은 성전을 마카비가 청결케 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동방에서 다른 나라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싸우다가 정신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정신이 돌았습니다. 그리고 BC164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피파네스, 신의 현현'이라는 이름을 '에페마네스' 라고 바꿔서 불렀습니다.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이렇게 파괴하고 멸시하고 금지시키다가 결국 그의 인생과 그의 나라가 파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1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마지막 때에 소위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서 도전받았듯이
마지막 때에도 적그리스도에 의해서 도전받을 것이다.. 라는 단12장의 예언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공적인 예배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을 너무 기뻐하고 그리고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is a Christian doctrine, held by some Calvinists and Anabaptists, that God commands churches to conduct public services of worship using certain distinct elements affirmatively found in scripture, and conversely, that God prohibits any and all other practices in public worship. The doctrine further determines these affirmed elements to be those set forth in scripture by express commands or examples, or if not expressed, those which are implied logically by 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 The regulative principle thus provides a governing concept of worship as obedience to God, identifies the set of specific practical elements constituting obedient worship, and identifies and excludes disobedient practices.
The regulative principle contrasts with the normative principle of worship, which teaches that whatever is not prohibited in scripture is permitted in worship, as long as it is agreeable to the peace and unity of the Church. In short, there must be agreement with the general practice of the Church and no prohibition in scripture for whatever is done in wor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