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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15:22~27, 신본주의 사회의 이상과 현실 1

LNCK 2022. 7. 13. 13:35

7월 7일 아침기도회 - 신본주의 사회의 이상과 현실 - YouTube

 

◈신본주의 사회의 이상과 현실      출15:22~27      2022.07.07. 출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신본주의 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신정국가
신본주의라 함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회의 지도자가 종교인이었죠. 
선지자 모세가 그들을 정치적으로 지도했고 
그 국가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종교적인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이 민족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신본주의 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임재인 불기둥과 기름기둥이 그들을 인도했다는 사실이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중심으로, 그들이 장막을 쳤다는 사실이 
신본주의 사회임을 잘 드러냈습니다. (어쩌면 실험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그들은 완벽한 사회와, 완벽한 사람이 되었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신본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신봉하고, 이루기 위해 그렇게 힘썼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벽한 사람들이 되고, 완벽한 사회를 이루었느냐? ... 그건 아니에요!

그같은 사실을 바로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가 가장 멋있고, 
가장 미래가 창창하게 보일 때였어요.  (*오늘날 갓믿은, 새롭게 거듭난 새신자가 그러죠)

그때는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고, 이 믿음이 영원할 것 같고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모든 것이 핑크색이고, 모든 것이 희망적이고, 모든 것이 창창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이 경험한 것은 
마실 물이 며칠 없게 되니까, 즉시 그들의 불만이 모세를 향하게 되고 

홍해를 건넜을 때 그 기쁨과 감격은 온데간데 없고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면 
이후에 먹을 양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크게 불평하게 될 것이고 

그들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결국은 모세를 원망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후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때 
모세가 눈에 안 보이니까, 그 사이에 이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었어요? 
금송아지를 만들었죠. 

선민, 신본주의 사회,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허물이 많은 사람, 아주 연약한 사람들..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덕적이나 인격적으로 비교했을 때 
히브리 민족이 애굽 민족보다 더 나았으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그들을 그들 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사실 뿐이지 

그 이외에는 질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히브리 민족이, 애굽 민족이든 블레셋 민족이든 
어느 민족보다도 더 낫다는 보장이 없었어요. 

그들이 주위 민족들보다 더 나았기 때문에, 주님이 선택하신 게 아니고 
주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선민의 자격을 얻은 것이죠. 

▲그렇다면 주님이 이들을 선택해서 선민을 삼으시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신본주의 사회"를 이루게 하시고 
가나안으로 떠나게 하시고, 그 땅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들의 상태(근본)을 몰라서 그렇게 하신 것이냐?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취약성이 있고, 어떤 시험에 약하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을 모르고... 그렇게 선택, 구원하신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죠. 하나님이 그걸 모르실 리가 없지요. 

그럼 모세는,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희망과 믿음으로 이들을 이끌기 시작하였느냐? 
그것도 천만의 말씀이지요. 

모세 자신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어요. 여러번 그들의 본성을 경험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일을 지속하시는 줄을 믿었기 때문에 
모세는 매번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이 일(출애굽, 구속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원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지난 2천년 교회사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독교 교회사를 살펴볼 때, 제일 멋지고 제일 신나는 순간이 언제였냐면 
오순절 다락방 사건과,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배도로가 설교하여 3천 명이 회개한 것, 
그것이 가장 신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나는 순간은, 처음 시작하는 첫날 하루 뿐이었어요. 
그 첫날은 모든 것이 창창하게 보여줬죠. 
기독교의 미래가 창창해 보였습니다. 희망이 충만했어요. 

만약 이대로 간다면, 1세기가 지나지 않아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도 있겠다... 
이대로 가면, 무적이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을 거에요. 

그러나 애굽에서 나온 히브리 민족이, 결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고 
마실 물 없는 것으로도 불평할 수 있었던 민족이었던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그런 면에서 다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사를 돌아보면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습니까. 
한국의 교회사를 돌아보더라도 우여곡절이 많은데 
2천 년 기독교 교회사를 돌아보면 오죽하겠습니까!

차라리 역사를 공부 안 하고, 모르쇠로 지내는 것이 은혜가 될 정도로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고.. 
이렇게 타락했고, 저렇게 타락했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걸 모르시고 
교회를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까? No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교회를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까? 

사도들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이 일(사도행전의 역사)에 뛰어들었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No!

▲예수님은 애초부터 경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칠십인을 내보내실 때 '사람들을 삼가라' 하고 이미 경고 하셨어요. 
'사람들을 조심해라' 라는 뜻입니다. 

저들이 너희를 재판정에 넘겨줄 것이고 
이런 일을 할 것이고,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삼가라'라고 주님이 경고하시며 내보내신 거에요. 

주님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이상적인 기대를 갖고 계셨던 것이 아니에요. 
장차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 교회에 들어오게 될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죠. 

주님이 사람들을 믿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시고 복음을 전하신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걸 우리가 눈여겨 봐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생각할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완벽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기꾼이 있고, 거짓말쟁이가 있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습니까?' 

 

사돈이 남말 하면 안돼요!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도 그렇지 않느냐는 거죠. 

당신도 남을 속일 때가 있지 않느냐, 
당신도 비굴하지 않느냐, 
당신도 거짓스러울 때가 있지 않느냐, 

당신은 그러면서, 남에 대해서 왜 남말을 하느냐? 
당신이 남들보다 나은 줄로 생각하느냐? 
나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상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완벽한 사람이 누구에요? 

오늘날 우리가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결코 타락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람이 누구라는 얘기입니까?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 남편, 고모, 이모, 할아버지, 은사... 누가 완벽합니까? 
누가 이상적인 인간이 어디에 있어요?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상적인 인간이 역사상 언제 어디에 있었어요? 없지 않습니까! 
없는 것을 알면서, 왜 우리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이상적인 사람이 될 줄로 막연히 기대하고 
그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만약 실망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해야 되죠. 
그런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는 것도 올바른 믿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이 받으셨기 때문에요. 

바울이 말했지요. '나도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그렇다고 내가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때가 되기 이전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라 주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고전4;5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판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왜 이럴까? 
예수님을 믿은지 한참인데 왜 이럴까? 

그렇지만 믿기 이전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 입니다.
내가 믿음이 없었을 때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 입니다. 
지금 상당히 성숙한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죠. 

믿기 이전과, 이후가 무엇이 달라졌고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른지를 잘 몰라요. 
그것은 외모를 보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본다면 당연히 다르죠. 당연히 달라요. 

우리가 이 면에 있어서는, 좀 긍휼을 베풀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휼의 안목으로 사람들을 평가를 해야지 

그게 아니고 시어머니가 며느리 보는 식으로 늘 쳐다보면 
모자라는 걸만 눈에 보이지요.

사람들도 이렇게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친정어머니가 시집간 딸을 보는 것처럼 바라봐야지, 
시어머니가 며느리 보는 식으로 보면, 모든 게 못마땅하다는 거예요. 

생긴 것도 못마땅하고, 밥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입는 옷도 못마땅하고, 
앉아 있는 모습도 못마땅하고, 걸어가는 모습도 못마땅해요. 

그런데 친정엄마가 딸을 보면, 모든 게 예뻐 보이고 불쌍해 보여요. 더 주고 싶어요. 
'저 새끼를 내가 안고 키웠는데, 제대로 먹고 사나? 
그 사위란 놈은 제대로 사랑 해주나?' 이렇게 염려가 되죠.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일반인들을 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예수 믿는 형제, 자매, 성도들을 볼 때만큼은 
좀 긍휼의 눈으로 봐야 됩니다. 

-얼마나 현실이 어려우면 
-얼마나 이런저런 염려가 있으면 믿음이 그렇게 쉽게 흔들릴까? 나도 그런데... 
-그럼에도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이 참 예쁘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라고 보면 한도 끝도 없고 
그런 말은 성숙한 성도의 입에서는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하는 사람은, 2천년 전에 살았더라면
아마 예수님보고도 '예수님이 왜 저래?' 이럴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예수 믿는 사람이, 언제부터 당신의 기준에 맞춰야 된다는 얘기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당신의 마음에 들어야 된다는 겁니까?

 

왜 당신이 기준이 돼서.. 당신이 뭔데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판단을 하는 것인가요?
당신이나 스스로 좀 돌아보십시오.

주님이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고 믿는다면 
남들에게도 당신이 긍휼의 관점으로 좀 바라보면 이해가 되지 않겠는가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긍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적어도 그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 여호와는 외모를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느니라' 라고 하셨죠.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당신의 자녀라고 보실 이유,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보시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에게 연합된 것을 보시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을 통하여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거예요. 용서하시는 거예요.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거죠. 
당신의 자녀로 여겨주시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죠.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인데 
'선민이 왜 이래?'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거죠. 

당신도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으면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마라에 이르렀는데 마실 물이 없으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이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엿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이 민족이 마라에 이르는 것을 막아주지는 않았습니다. 
마라에 이르게 하셨어요. 
마라.. 마실 물이 없는 곳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다만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심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셨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인생의 시련과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을 막아주지는 않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서, 우리가 믿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마라에서 '나무를 던졌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쓴 물에 나무를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다..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처음으로 이 구절에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제가 합니다. 
제가 성경을 해석할 때 알레고리적 해석을 가급적 피하죠. 

왜냐하면 그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이기 때문이죠. 
저의 해석 방식은, 그 사례를 보고, 그때 상황을 생각하고 
우리의 상황을 거기에 적용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 하신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사례로써 그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판례를 통하여 해석하는 것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던졌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이에요. 

왜냐하면 마라의 '쓴 물' 이라는 것은 
이후에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라고 했던 것처럼 '인간의 괴로움'을 뜻하는 것인데 
사람의 마음이 괴로우면, 그 중심에서 마실만한 물이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이 괴로우면, 쓴 생각, 쓴 감정, 쓴 말밖에는 나오지 않아요. 

축복의 말을 기대할 수가 없고, 사랑의 언어를 기대할 수가 없어요. 
쓴 마음을 단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찬송가)

이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경험,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경험한 것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만 쓴 게 아니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과 마음이 모두 썼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신 것은 
이들의 마음 상태를 그렇게 바꿔주신 거죠. 

그렇지만 이건 심리 치료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심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가 오로지 사람들이 필링, 
즉 자기의 느낌을 좀 개선시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비판을 하는데.. 그런 면도 없지 않죠. 
하도 사람들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 속에 쓴 물이 차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제 누구를 사랑할 수도, 축복할 수도 없고, 누구를 섬길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주님이 어떻게 바꾸셨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바꾸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보혈이, 그 사람의 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이건 그냥 격려로 되는 게 아니고 
누가 사랑해줘서 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되는 게 아니고 
이건 근본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경험을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을 했어요. 

내 못된 생각과, 나의 상처와, 그리고 내 신세에 대한 한탄과 불평과 
내 인생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했던 영혼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아들을 내어 주지 않았느냐? 
그만큼 사랑을 증거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의 못된 마음을 회개하고, 너도 좀 십자가를 지고 감사할 줄 알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는 법을 배워라!'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신세 한탄을 하지 않고, 감사하고 
'옳소이다!' 하며,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이제 뭔가 주님의 나라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렇게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속에서 솟아나는 단 물을 사람들이 마시고, 복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