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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26장 신명기 두번째 설교의 마지막 마무리 메시지

LNCK 2022. 7. 23. 04:23

 
◈신명기 두번째 설교의 마지막 마무리 메시지           신26장           여러 설교 정리


신5장부터~26장(본문)까지 진행되어 온 모세의 두 번째 고별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모세는 신5장에서 십계명을 전달한 후에,

6장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원해서 기꺼이 십계명을 다 지키려 한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모세는 본문 16절에도, 마치 수미쌍관법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26:16

 

모세의 두 번째 설교가 5~6장에서 시작해서, 26장에서 끝난다는 증거입니다.

 

참고로 세번째 설교는 (27~30장)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때는 축복이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온다.

그래서 축복과 저주에 관한 주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언약에 대한 상벌 규정이죠.

 

그 외 31~34장은, 모세의 마지막 축복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요> 신26장은 세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소산물을 드리라 (1-11절), 
-제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관한 규례를 언급하고,   (12-15)
-그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자세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16-19절)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1~11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한 후에 농사하여 첫 수확을 얻었을 때
이를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릴 것과 
그 때 드릴 신앙 고백을 규정하고 있으며, 

12~15절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표로>

소위 구제의 십일조를   *레27:30-34참조 
제3년에는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도록 한 것과 
그 때 드릴 신앙고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16~19절은 <그럴 때 받는 은총>을 모세는 설교했습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모세 오경에서 처음 언급되는 것이 아니지만 
고별 설교의 결론적 주제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즉 전반부(1~11절)는,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의무와 사랑, 
후반부(12~15절)는 이웃에 대한 성도의 의무와 사랑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맏물을 드리라   *26:1~11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가나안에서의 십계명의 규례들을 가르쳐 준 후에 
모세는 마지막으로

모든 소산의 첫 번째 것을 여호와께 드릴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앞서 모세는 보리의 첫 수확을 드리는 초실절(유월절)과,  
주식인 밀의 첫 수확을 드리는 칠칠절(오순절)과
모든 실과의 첫 수확을 드리는 수장절의 규례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16:1~8  유월절 (초실절) 규례 

*16:9~12  칠칠절 규례

*16:13~17  초막절 규례

 

어떻게 보면, 16장에 이은 반복된 설교이지요.

모세가 16장에 이어서, 반복해서 26장에 말씀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절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본문 이해를 위해서 다른 각도에서 보면)

모세는 지금, 과거 우리 나라에서 40년 전에 부흥회 할 때, 마지막 날에 부흥사가 꼭 헌금 작정 시키듯이  

신명기의 하이라이트 설교를 마치면서 

헌금 (헌물)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왜 모세는 '전문 부흥사'도 아닌데, 헌금으로 결론 지을까요?

 

헌금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만큼 드려서 기쁜 일이 없습니다.

 

지금 모세가 설교 막바지에, 헌금 얘기로 설교를 마무리 짓는 것은

모세 자신이나,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하나님을 사랑해서 안달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자나, 듣는 회중이나 '헌금' 때문에 시험들 이유가 1%도 없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야 40년을 마무리 하는 시간입니다.

신혼부부로 치면, 결혼한지 40년만에 '내 집 마련'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다들 흥분했을 것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말년 병장이 제대하고 귀가를 기다리듯,

이스라엘이 지금 가나안에 들어갈 날만 학수고대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헌금이 안 들어온다고.. 다들 고민하는데,

그만큼 우리 신자들의 사랑이 식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더 많이 못 드려서 안달이 나겠죠.

 

▲하필 왜 '맏물'일까요?

왜 모세는 하필 수확물 중에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을까요? 

'맏물'에 담긴 여러 가지 고상한 이유가 있겠지요... 존경, 충성, 헌신의 의미로

수확한 소산물의 첫 수확물(맏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세속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맏물'을 안 드리면요, 나중에 못 드리게 됩니다. 

아예 처음에 딱 헌물로 떼 놔야지... '중간 물'이나 '끝 물'을 드리려고 하면,

나중에 드릴 게 없어서.. 못 드리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헌금을 드리는 성도/ 못 드리는 성도의 차이가 바로 '맏물'입니다.

'맏물'을 딱 떼 놓지 않으면... 며칠 지나면 나중에 '없어서' 못 드리는 것입니다.

드리고 싶어도 못 드리는 거죠. 돈이 없으니까요.

 

요즘 여름 휴가철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름에 휴가를 떠나는 경우가 대세로 자리잡은지 오래 됐습니다.

 

좀 주님을 잘 섬기려는 사람은,

휴가비로 책정한 비용가운데 10%를 '맏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조금 절약해서 자면 되고, 조금 덜 비싼 것 먹으면 됩니다. 

 

12절에, '셋째해 십일조는 그것을 레위인과 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이렇게 네 부류의, 가난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레위인은 지금이나 옛날 그 때나,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는가 봅니다. 

(이스라엘 신자들이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벌어서 내 돈 쓰는데 누가 뭐라 그러냐?'는 생각을 하면.. 보통 신자이고,

내 주위에 있는 레위인, 객, 고아, 과부를 생각하며,

내 것을 그들과 나눠쓰는 성도야 말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본문을 굳이 적용한다면,

1~11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고

12~15절은, 내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구제금인 셈입니다.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요.

그래서 장성한 자녀들 가운데,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자녀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녀가 있는데... '맏물'의 차이입니다.

 

그러니 월급 받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께 드리고,

또 부모님 몫으로 '맏물' 중에서 떼 놓는 자녀는.. 5계명에 순종하는 자녀이고,

'맏물'을 드리지 못하면.. 부모 공경도 못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 부모에게 '맏물'을 드리라는 얘기는 없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죠)

 

▲여러분, 교도소에서 누가 가장 행복할까요? 그런 얘기 들어보셨나요?

교도소 전도 하시는 분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교도소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사형에서 무기수로 감형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단 사형을 면했으니.. 그게 그렇게 기쁘고 즐겁다고 합니다. 무기수인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 나의 생명을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나를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과하게 하시며,

결국 가나안(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맏물'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2. 하나님도 사랑하지만, 이웃도 사랑하라   *26:12~15

 

네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네 주위의 레위인, 객, 고아, 과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십일조의 종류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서 다른 백성들이 십분의 일을 정기적으로 드리는 정규 십일조(민18:21-24)

 

둘째는 유대인의 7대 절기 때 필요한 경비와 성소를 보수하는데 드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절기 십일조(신12:5-19)

 

셋째는 본문 신26:12절에 기록된 구제 십일조입니다. 이것은 삼 년에 한 번씩,

레위인이나 고아나 과부 등 약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목적에서 거두는 것입니다.

이 구제 십일조는 ‘제 삼의 십일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규 십일조는 매년,

절기 십일조와 구제 십일조는 절기-절기-구제-절기-절기-구제 이렇게 드린 거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사실상 10의 2조를 매년 드린 셈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헌금 드리지 않고,

또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날강도이든지, 아니면 착각이 도를 지나친 것입니다.

 

간혹 헌금 드리지 않아도.. 물질의 복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아닙니다.

 

모세가 지금 설교 막바지에 헌금 얘기를 하는 것은,

헌금을 내라는 얘기가 아니라,

마음과 뜻을 다해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라.. 입니다. .
 
그러면 꼭 give and take 목적으로, 내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련히 안 갚아 주시겠습니까!

 

▲옛날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차 손님들을 초대하여 우유를 대접할 예정이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지금부터 미리 우유를 짠다면 (과거에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담아 둘 데가 없을 것이며, 또 우유가 부패할 우려가 있다.'

'차라리 우유를 소의 뱃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손님을 초대하는 날에, 한꺼번에 짜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암소 어미와 새끼를 붙잡아 각기 다른 곳에 매어 두었습니다.

송아지가 어미 젖을 못 먹게 한 것이죠.

 

그리고는 한 달 뒤에 연회를 베풀어 손님을 맞이하고,
소를 끌어다가 젖을 짜려 했으나,

소젖을 오래 안 짠 탓으로 젖이 말라붙어서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손님들은 성내기도 하고 비웃기도 했습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이와 같아서
구제를 행하고자 하는 경우에, 흔히 이와 같이 말합니다.

“재물을 크게 모아놓고, 그 다음 한꺼번에 구제해야겠다.”
그러나 재물을 많이 모으기도 전에, 도둑에게 뺏긴다든가, 사업이 망한다든가,
그런 화를 면한다 해도, 문득 죽게 되어서 구제할 겨를이 없어지든가 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우유를 한꺼번에 짜려 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3. 지켜 행하라     *26:16~19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모세가 신명기에서 '제2의 율법'이라고 후대 사람들이 제목을 붙일만큼,

길게 율법(규례와 법도)을 다시 설명한 이유는,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마무리 메시지죠!

 

바꾸어 말하면 '마음속으로 믿어라'라고 한 것이 아니죠.

그런데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마음으로 믿고' 있고, '행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행함으로 믿는 것은 '행위구원론'으로 여깁니다.

 

신명기에서 '행하라', 또는 '행하고'라는 구절을 대충 찾으면 40번이상 나옵니다.

성경 전체에서 찾으면 아마 셀 수 없을 것입니다.

 

16절에도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데도 우리는 '행함'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듣고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쉽고 편리하게 끝내버립니다.

 

특히 성경을 조금 공부한 분들은 '율법을 주신 목적은 (행하라고 주신 것인데, 그 큰 목적은 버리고)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하기 위해 주셨다,

율법을 한 개 어기면, 모든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라는

로마서의 서너 구절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수 백 번 강조하는 '행하라'는 말씀을, 폐기처분 시켜 버렸습니다.

 

나라마다 교통법규를 제정한 이유는, '지키라'는 목적이지,

'그걸 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위함이다'.. 이런 식의 엉뚱한 궤변을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지키라'고 만든 것이 첫번째 목적이지,

죄가 뭔지 깨달아라고 법을 제정한 것은, 부차적 목적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만> 공부한 사람들은, 대부분 율법폐기론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계명, 규례, 법도를.. 가르치지도 않는 것입니다.

 

도덕법을 제외한 시민법, 의식법이 신약에 폐지되었다 할지라도,

그 정신, 그 신념, 그 의미는.. 신약에서도 계속 유효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초실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지는 않아도,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을 지키지 않습니까.

 

로마서에서 바울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가 율법을 행할 수 없는 것을 깨닫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한 목적은

'은혜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그 은혜로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한 일종의 서론이요, 예를 든 것이지... 그게 율법을 주신 '큰 목적'은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큰 목적은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로마서 후반부(10장~)나, 그의 모든 서신서들에 보면

율법의 도덕법을 실제로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믿으면 된다, 믿으면 그것으로 끝!' 식으로 기록한 서신서는 한 권도 없습니다.

 

율법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은 '내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10:13

우리를 불편하게 하려고, 기강을 잡으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규례와 법도를 열심히 가르치고, 또한 배워서 힘써 지켜 행해야 하겠습니다.

 

구약에 오경 말고도, 역사서, 성문서(시가서), 예언서 등이 34권 더 나오는데

그 주제가 바로 이것이죠. '율법을 지켰더니 흥했고, 행복했으나

율법을 불순종했더니 망하고, 끝장 나고 말았다' .. 그 사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율법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친다면, 설교할 게 너무너무 많습니다.

성경 66권 1189장이 다 하나님의 율법, 규례와 법도입니다.

 

그런데 율법폐기론 신학이 선입견처럼 머리에 박혀 있어서, '이신칭의'만 가르치려 한다면

성경을 가르칠 게 별로 없습니다. '이신칭의'와 그 외 모두는 '율법' 이렇게 나눠버리면,

우리는 성경 1189장 가운데, 아마 1180장 이상을 잘라내 휴지통에 버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 1189장을 모두 가르치고 배우는 'Back to the Bible' 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실질적인 신명기의 마지막 메시지(본문)에서, 지켜 행하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16~18절).

그러면 너희가 행복해지고 복을 받는다는 것이죠(19절).

 

그리고 다음 장부터  '상벌 규정'이 나옵니다.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끔찍한 벌을 받는다는 거죠. *27~30장

   

*관련글 : 피트니스(체육관)에 가서, 운동은 안 하고 구경만 하는 신자들

 

 

 

◑절별 해석 .......................................................................................................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 이스라엘의 유일 중앙 성소를 가리킨다(12:5).

당시 이방인들을 그들의 다신교적(多神敎的) 사상과 예배 양식에 따라 예배 처소를 도처에 두었고,

또한 자주 바꾸었다.

그렇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의 기호(嗜好)에 따라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 풍습을 완전 배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한 곳을 지정하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곳에서만 제사드리도록 규정하셨다. 신12:5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 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우리에게 주리라고...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 아브라함

(창 12:7, 13:15, 15:18-21, 17:8)과 이삭(창 26:2,3)과 야곱(창 28:13-15, 35:12)에게 하셨던

언약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찬양하며,

그분께 가나안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드려 감사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 백성들이 가져온 가나안 땅의 토지 소산의 첫 열매를 제사장이

하나님께 소제물(素祭物)로 봉헌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내 조상...아람 사람'

- 뒤이어 나오는 하반절을 볼 때, 여기서 '내 조상'이란 이스라엘 12지파의 직접적인 조상인 야곱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람(Aram)은 셈의 다섯 아들 중 한 사람(창 10:22)일 뿐

야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야곱은 셈의 아들 중에서도 아르박삿의 후예이기 때문이다(창 11:10-26).

 

그런데도 야곱을 가리켜 '아람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 까닭은

아마 그가 아람 지방 곧 '밧단 아람'에서 20년간이나 생활하였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아람 사람 라반의 딸인 레아 및 라헬과 결혼,자녀들을 낳아 가문을 형성했기 때문인 것 같다(창 28-31장).

이밖에도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 역시 밧단 아람 출신이란 점은 그 의미를 더해 준다(창 25:30).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애굽 사람이...중역을 시키므로' - 이처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수확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칠 때,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뼈저린 과거를 고백토록 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즉 그들은 과거 애굽의 압제하에서 고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자녀를 낳되 남자 아이인 경우에는 집에서 기르지 못하고 하수(河水)에 던져야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땅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그 땅의 소산을 풍성히 맛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여야 할 것이었다.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에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신실성에 의지하여 간구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권념하여 주셨다(출 2:24,25).

 

‘고통과 신고와 압제'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생활하는 동안 애굽인들로부터 받은 갖가지

고난과 학대를 3중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험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강한 손과 편 팔' - 이미 4:33,34에서 언급되었던 의인법적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병거와 마병(馬兵)을 갖춘 애굽 군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능동적이고도 다이나믹하게 역사하신 것을 의미한다.

 

‘큰 위엄' - '위엄'에 해당하는 '모라'는 '두려운 것'또는 '공포'를 의미한다.

4:34에는 '두려운 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렸던 10대 재앙을 의미한다.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가나안 땅이 풍요롭고 축복된 땅임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어디까지나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애 3:38)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측면에서 이해하여야지,

단지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여서는 곤란하다. 11:9 주석 참조.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 - 이스라엘이 새롭게 거하게 된 가나안 땅과 그곳에서 거두는

모든 수확물들이 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제로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라고 한 다윗의 고백은

이 땅에서 청지기적 삶을 사는 모든 성도들이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대명제이다.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 가나안 땅의 토지 소산의 '맏물'을 여호와의 단에 바칠 때, 그 헌물과

더불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신앙 고백 (5-10절, 내 조상은...가져왔나이다)

을 하도록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비록 그들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에서 기름진 열매를 풍성히 맛보며 평안하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결코 자신들의 과거 비참했던 처지와 또한 그 처지를 권고(眷顧)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 여기서 '여호와 앞'이란 구체적으로 제물을 놓는 제단 위를 가리킨다(4절).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기에 앞서 이처럼 예물을 바치는 것은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가 곧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임을 교훈해 준다(시 50:14, 골 3:16,17).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여호와께서...주신 모든 복' - 여기서 '복'에 해당하는 '하토브'는 직역하면

'그 좋은 것들'(NIV,the good things)이란 뜻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기름진 땅 가나안에서 생산되는 오곡백과(五穀百果)를 가리킨다.

 

‘레위인과...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 하나님께 바쳐진 첫 열매들(4절)이

레2:1-3의 규정에 따라 소제물(素祭物)로 사용되지 않고, 레위인 및 객과 더불어 감사 잔치를

여는 데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표시로 당신께 봉헌된 자기 백성의 소출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이웃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나눠 주는 용도로 사용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 헌금 역시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구제 사업이나 복지 사업에

중점적으로 사용되어야 마땅함을 교훈받을 수 있다.

 

12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 - 안식년을 기준으로 세번째 해가 되는 때,

곧 제 3년과 제 6년째를 가리킨다. 이때에는 이스라엘이 '제 2의 십일조'<14:22,23>로

중앙 성소에서 감사제를 드리는 대신,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일명 '제 3의 십일조'<14:28>라 한다. 14:22-29 주석 참조.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다 내기를 마친 후' - 여기서 '모든 소산'이란 논밭의 식물 뿐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생축(生畜)까지 의미한다(14:23). 이스라엘은 이러한 모든 것들의 한 해 총수입 중

1/10을 '제 1의 십일조'로 레위인들에게 내야 했으며,

그 나머지 9/10에서 다시금 1/10을 '제 2의 십일조'로 구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 - 여기서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른바 이스라엘의 3대 약자 계층이다(14:29, 16:11,14, 24:17,19-21 등).

그런데 여기에 또한 레위인들이 포함된 것은, 이들 역시 이스라엘 12지파 중 기업이나 분깃이

없는 자들로 오직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십일조(十一條,tithe)에 의지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14:27).

 

‘먹어 배부르게 하라' - 이미 14:28,29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규례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3의 십일조'로 이스라엘의 예배 생활을 돕는 레위인들을 공궤(供饋)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13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 하였나이다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때(5-10절)에는

그분의 영광을 기리기 위하여 큰 소리로 고하여야 했지만,

자신의 떳떳함을 밝힐 때(13,14절)에는 개인의 공덕이 강조되지 아니 하도록

낮은 음성으로 고하여야 (아뢰어야) 했다고 한다.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 '성물'(聖物)에 해당하는 '코데쉬'는 '바쳐진 분깃

'(RSV,NIV,the sacred portion)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십일조'를

십일조라 하지 아니하고 이처럼 '성물'로 칭하는 까닭은 고백자가 자신의 힘으로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구제하는 것 뿐임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주의 명령을 범치도...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 여기서 '범하다'에 해당하는 '아바르'는 단순히

법률 따위를 '어기다'는 뜻 뿐 아니라, 정도를 넘어서 '지나쳐 달리다'란 뜻도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적으로 거역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과도하게 만용을 부리는 것도 역시 잘못임을 깨우쳐 준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한 잘못은 아예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해 버리는 일이다.

이러한 자는 단순히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홀(慢忽)히

여기는 자이니 큰 죄악이 아닐 수 없다.

 

14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애곡하는 날에...먹지 아니하였고' - 십일조를 결코 사적(私的)인 일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여기서 '애곡하는 날'이란 초상(初喪) 기간을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은 대개 7일정도의 장례 기간을 가졌는데,

이때에는 초객들을 위한 많은 음식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행여 하나님께 구별해 놓은 십일조를 유용코자 할 수 있는데, 전혀 그러하지 아니하였다는 뜻이다.

 

‘부정한 몸으로...떼어두지 이니하였고' - 시체나 기타 이유로 의식상(儀式上) 몸이 부정해진 중에는

성물(聖物)을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였다는 뜻이다(민 19:11-19).

그 까닭은 몸이 부정(不淨)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것은

율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22:3).

 

이는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을 드리되, 구별되고도 성결한 마음으로 드리지 아니하고

형식적으로 바치기 일쑤인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경종을 울려 준다.

 

‘죽은 자를 위하여...쓰지 아니하였고' - 공동 번역은 "그것을...죽은 혼령에게 바친 일도 없습니다“

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죽은 자(故人)의 기일(忌日)을 맞이하여 제사 음식을 장만하는 데

여호와께 구별된 십일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명령하신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 이는 고백자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다는 뜻이다.

한편 선지자 말라기는 이러한 십일조와 관련하여 과부와 고아 및 나그네 등을 돌보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행위라고 언급하였다(말 3:5-10).

 

이는 가난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십일조 정신이며(호 6:6),

형식적으로 바치는 십일조는 무의미함을 교훈해 준다.

 

15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 -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3층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우주 개념을 지녔다.

 

1층천은 새가 날아다니는 공간이고, 2층천은 해와 달과 별이 붙어 있는 우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하늘인 3층천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처하는 장소로 생각하였다(고후 12:2).

 

‘하감하시고(솨카프)' - 7절의 '하감하다'(라아)와는 어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라아'는 의도적으로 '보다', '주시하다'는 뜻이지만, '솨카프'는 은밀하게 '지켜 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사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은밀히 지켜보시고 그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마 6:3, 4).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 기도의 제목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를위한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본래 개인의 번영이란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집단 전체의 번영과 병행될 때

참된 의의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드림에 있어서도 개인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먼저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고전 10:23, 24, 33).

 

17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

 

‘그 도를 행하고' - '그의 길 또는 그의 뜻을 따르고'로 의역할 수도 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을 자신의 인도자로 전적 의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 이는 곧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자이심을 행동으로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누구든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의 일을 하기 마련이다(요일 3:8-10).

 

‘그 소리를 들으리라' - 자신의 온 마음과 의식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해 있음을 뜻한다.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마음과 정신이 온통 상대방에게로만 쏠려 있어, 단 한 마디의 말도

놓쳐 버리지 아니하고 단순한 동작 하나조차도 예사롭게 보지 않기 마련이다.

 

18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너를 그의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라 확언하셨느니라

 

‘보배로운 백성' - '보배로운'에 해당하는 '세굴라'는 '특별한 소유'를의미한다(출 19:5).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열국 가운데서 '특별히 구별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은 선민(選民)인 것이다(사 43:1).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특별히 구별해 놓으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인(印)치신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이다(요 17:6-10).

 

19 그런즉 여호와께서 너를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사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삼으시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너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뛰어나게 하시고' - 여기서 '칭찬'(테힐라)은 '찬미'와 '찬송'을,

'명예'(쉠)는 '높은 지위'와 '명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영광'(티프아라)은 '아름다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어휘들은 본래 하나님께만 합당한 수식어이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높이 드사 다른 어떤 나라보다 위대하게 만들고 찬송과 영광과 명예를 취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이 본절의 의미이다(렘 13:11, 33:9, 습 3:19,20)

 

‘성민(암 카도쉬)' - '구별하다'(카도쉬)와 '백성'(암)이 합쳐진 말로서, 곧 '보배로운 백성'(18절)과 같은 의미이다(출 19:5,6).7:6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