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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1:3~6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LNCK 2022. 7. 27. 08:08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엡1:3~6              2022.06.05.출처

 

성경은 복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복’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엡1;3절에 “찬송하리로다”는 어느 영어 역본에는 “Blessed be the God”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십니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복을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를 더 원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대 관심은 복입니다. 우리나라도 복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래서 벽이나 이불, 그릇 등 모든 곳에 복을 새겨 놓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어떤 것이며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요?

사람들은 막연하게 복을 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이 대답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복을 받은 사람인가?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언제 행복했던 적이 이었는가?

돈을 많이 벌었을 때인가? 결혼할 때였는가? 원하던 집을 살 때였는가?…’

 

물론 이런 것들도 복의 일부분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계속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것이 복이라고 한다면 돈을 잃어버리는 순간 복은 사라집니다.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복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유효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확실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의해서, 아니면 나의 실수에 의해서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란 모두가

상대적이고 유한적입니다.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복은 그런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복의 표현이 독특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복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 조건, 형편에 관한 것이기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미래의 모든 일까지 관여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개념이

이 신령한 복의 개념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복이라고 여겼던 것이 한순간에 깨어져 버리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신령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이기 때문에 쉽게 깨어질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 복은 한마디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복되게 하는 복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나의 정체성과 연결이 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복과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이는데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내가 누구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이란 어떤 것에도 제한받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도 즐겁게 나누며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늘 부족하다며 옹색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가진 것의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교도소와 수도원을 비교해 보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곳 모두 들어가면 마음대로 나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에는 저주와 원망이 가득하다면 수도원은 감사와 만족이 있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받은 복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택함을 받은 복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엡1:4

 

여기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단어는 ‘우리를 택하사’입니다.

여러분, 복이란 택함을 받는 것입니다. 반대 단어는 무엇일까요? 버림받음입니다.

어떤 사람, 어떤 직장에서 버림받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유기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버림받은 자의 상처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의 후예들 안에는

거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보호하려고 하고 사람들을 의심합니다.

존재론적으로 불안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경험하거나

청년의 시기에 실연의 경험, 이혼의 경험 때로는 실직의 경험, 관계 속에서 배반의 경험은

깊은 상처로 남습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선택받지 못한 것으로 인한 상처가 많습니다.

취업 실패가 반복되면 단순한 취업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영혼의 깊은 자존감을 건드립니다.

 

▲택함을 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택함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심으로 우리를 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어쩌다가 신자가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소속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손홍민 선수는 토트넘이라는 구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선수이지만 유럽에 알려진 프로축구팀에 들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의 스토리는 달랐을 것입니다.

 

축구선수에게 속한 팀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유럽의 프리미어 리그의 구단들은 막강합니다.

거기에 속했다는 것 자체가 축구선수에게는 최고의 로망입니다.

그래서 손홍민 선수는 인터뷰할 때마다 팀에 속한 것에 대한 감사를 빼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속했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 선택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는 선택을 받지만 어떤 사람은 거절을 받고 미움을 받습니다.

인생의 힘듦이 무엇입니까? 이 선택과 거절 사이를 오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행위와 노력, 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결정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선택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조건이나 상황에 흔들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선택을 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도덕적 우월주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 사람과 나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들킨 죄인, 안 들킨 죄인밖에 없습니다.

돈 많은 죄인, 돈 없는 죄인, 유식한 죄인, 무식한 죄인이라는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분 나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모두가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하면서 자기는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어떤 고백을 합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원본으로 보면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과거의 괴수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죄인 중에 괴수로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자신을 괴수라고 말한 것은 지은 죄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우쳐 주시면 다른 사람의 죄와 비교할 엄두도 못 내고,

내가 가장 큰 죄인처럼 여겨집니다.

자신의 죄가 너무도 선명하게 밀려오면서 나보다 더 큰 죄인이 없을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짓는 일에 선수들입니다. 할 수 없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짓다가 죽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유전자 중 핵심적인 것은 죄의 유전입니다. 본질상 우리는 진노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셨다는 것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쌓아온 의로 하나님에게로 가려고 애를 썼던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도,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나를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요15:1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이것은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정감입니다. 내가 버림을 받지 않을까, 내가 언젠가는 아웃되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격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잘난 것 하나 없고

주장할 의가 없는데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그 택함을 받음으로 이미 복이 있는 자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은혜를 알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복 1:5

 

또 다른 신령한 복은 무엇입니까? 본문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청소년 시기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으로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정체성이 정립이 안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립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흔들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연말에 인사발표가 나면 불안합니다.

직급에 따라 수시로 나라는 존재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직업이 정체성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을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고

내 생애 전체를 쏟아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직급도 없고

영원한 직업도 영원한 직장도 없습니다.

 

어떤 자리를 절대적으로 붙들고 산 사람은 그것을 잃는 순간 충격을 받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게 무엇입니까?

자세히 보면 세상에는 나를 완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요동하지 않는 정체성이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관한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삶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인가? 나는 나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아야 합니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유명 스타 가운데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인기가 그렇게 많음에도 왜 공황장애에 걸릴까요?

대중의 뜨거운 시선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내가 나를 지나치게 의식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생긴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 대중의 욕구에 나 자신을 맞추어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타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못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언젠가 인기가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본래 모습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과연 나는 나인가?’라며 의심하게 됩니다.

결국 본래의 나는 어느 순간 실종해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나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공은 했는데 나라는 존재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기 스타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애를 쓰는 아이가 있습니다. 너무 착하고 말도 잘 듣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본인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날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지워져 버립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불안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은 했는데 불안한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에게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증은 삶을 소진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욕망에 부응해가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건강한 정체성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요1: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지위는 어떤 경우에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가끔 외국인이 비자를 받았어도 어떤 범죄로 인하여 강제 추방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잃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최고의 특권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가진 것을 함께 누리는 특권입니다.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신분의 변화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삶 전체의 영향을 끼친다는 말입니다.

 

눅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진짜 탕자는 누구일까요?

아버지가 있는데 없는 자처럼 살아가는 게 탕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지위는 어떤 경우에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보다 더 높은 신분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면서 힘든 것 중 하나가 자존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짓밟히면 견디지 못하고 심하면 목숨까지 끊습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별것 아닌 거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열을 받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온 생애 모든 것을 다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영광을 굳게 붙들면 우리를 당당하게 하고도 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확신이 주는 당당함이 우리의 삶을 붙들고 있다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을 찬송하는 복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6

 

바울은 편지를 쓰며 가장 첫 번째로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기쁨이 넘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복을 받은 자는 우울해하지 않습니다. 누가 찬송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받은 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찬송은 내가 하는 것이지만 찬송을 부르게 하는 주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은 내가 부른다고 하기보다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찬송을 할 수 있습니까? 억지로 부르면 힘듭니다.

내가 열심히 부르는 것과 내 영혼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찬송하게 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엡1:12절에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찬송을 부르는 자가 복된 자입니까? 인간은 목적에 맞게 쓰여질 때 가장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가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존재로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찬송하는 기계로 만드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쁨으로 찬송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 영광이 올라가시고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영광이 추락하는 분이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영원까지 영광중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찬송을 부르시게 하신 걸까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찬양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찬송을 올려드리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될 때,

우리의 삶의 모든 무질서함이 해결되고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엡1;3~14절까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쉼표도 없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그 말은 바울이 3절부터 14절까지 기록할 때

숨도 쉬지 않고 정신없이 써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이 우리에게도 넘쳐나야 할 줄 믿습니다.

 

세상의 대단한 것들이 있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시들합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의 말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감탄하고 놀라워도 잠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은 다릅니다. 신앙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내 안에 구원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누리는 일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의미를 아는 순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 복은 우리의 열심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나 의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고 소망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내가 구원받았는지,

왜 나를 택하여 주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게 될 때, 그 은혜에 깊이 빠져들고 사무치게 될 때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누가 선교 가자, 헌금하자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들,

구원받은 자들로 인해 그냥 자연스럽게 돌아갑니다.

 

누가 아프리카에 갈 수 있겠습니까? 누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위해 오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측량 없는 은혜를 깨달은 자들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어떤 것도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복은 기꺼이, 즐거이 주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찬송하는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복을 받은 자입니까?

이미 복을 받은 자입니까? “YES”라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관련글 / 복인가, 천벌인가?

 

눅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처녀가 임신한 것은

당시의 유대관습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 천사가 전하는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인간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천벌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은총’, 아니 천벌 앞에서

탄원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고

그 뜻을 차분하게 묻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사벳의 일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마리아에게 가르칩니다.

 

교회의 옛 문헌에 따르면 ‘이 순간 바람이 불지 않았고, 파도도 치지 않았으며,

모든 동물과 새도 숨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마리아의 대답에 숨을 죽이며 귀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귀 기울인 그 여인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장황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대답을 했습니다. 눅1:38

 

이 대답을 듣고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고,

마리아의 대답을 숨죽여 지켜보던 온 세상은

아마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은총은, 하나님이 주신 복은, 택하심은.. 내 생각과 다른 면도 있습니다.

은총이라고 하면.. 우리는 무조건 인간적으로 좋은 면으로만 생각합니다.

 

내 기분이 업 되고, 잔고도 두둑해지고, 고속 승진이 되며,

사회적 명성을 얻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은총을 받은 여인 마리아는,

참 쉽지 않은 삶을, 그 은혜 받은 결과로, 살게 됩니다.

 

마리아가.. 그 쉽지 않은 자기 삶을, 끝까지 사명 완수 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마리아를.. 사명자의 자리로.. 끝까지 이끌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말로 복, 택하심)

세상에서 무슨 유복한 삶을 살게 된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그 사명을.. 묵묵히 살아나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그를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 위험천만한 은혜.. 그런데 나도 받았습니다.

 

엡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위 말씀은 ‘사랑받는 자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인데,

헬라어로 눅1:28의 ‘은혜를 받은 자여!’와 같은 말입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 받아들여졌으며’

그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친 마리아처럼.. 그 은혜가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세상 가운데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그 삶에 고난이 아주 많습니다.

그 은혜가.. 그를 구원/회개/성화의 자리로 주도하고 이끌어 가셔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는데,

그 길은, 마치 풀무불에서 금을 연단하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이것이 은총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은총과 복을 구합니다.

어떤 은총과 복을 주십사고 청하고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거나 남들보다 한 50년은 더 살게 해달라고 청하십니까?

 

그런데 실은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더 살면 무엇하며, 돈을 많이 벌면 무엇하겠습니까?

죽으면 다 놓고 가야하는 그것들은, 진정한 복이 아니지요.

 

본문의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은총(=은혜)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