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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5:21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LNCK
2022. 8. 8. 09:58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20:17, 신5:21 출처
▲수 십 년 전에 유행했던 팝송 중에 '퀘 세라 세라 Que sera sera'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아마 중년 되신 분들 중에는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요즘도 가끔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노래를 제가 기억하는 이유는 제목도 특이하지만
가사에 철학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사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나는 커서 예쁜 사람이 될까요, 부자가 될까요?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요?”
그때 어머니의 대답이 “인생이란 네가 마음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인생은 정해진 데로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que sera sera'
이 말은 스페인어로 '될 일이 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What will be will be.' 되어질 일이 되어질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상당히 운명론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인생에 대해서 물어볼 때
여러분도 ‘que sera sera’ 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이미 정해진 그 범위를 넘어 설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말씀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먼 나라로 떠났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달란트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주인이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 달란트를 받은 다음에
그것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고 했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어서 썩혀 버렸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환경, 외모, 나의 성격,
남자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고
이런 것들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지만
그러나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내가 무엇을 이루고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운명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놀라운 말씀 중에 하나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현자도 이처럼 대담한 선언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잘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되게 할 수 있느냐 이건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담대하게 선언하시기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랬어요.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 이예요.
자기의 믿음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그의 삶의 열매를 좌우하는 것은 그의 재능도 아니요, 그의 환경도 아니요
그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재능대로 되리라’ ‘네 운대로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너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리라도 그리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한 사람은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있는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안드레, 요한, 바울, 이 사람들 다 갈릴리의 무명 어부였습니다.
갈릴리에서 태어나서 갈리리에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다 예수님을 믿고 일을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에 ‘All in'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 속된 말로 하면 팔자가 사나운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믿었더니 팔자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성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중에 결혼하기를 바라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옛날에 교회 생활을 같이 했던 어떤 형은
자기 결혼 문제에 대해서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형의 말이 ‘우리 어머니가 알아서 하실 거야.’
결혼을 하기는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배필이 있더라도 내 앞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먼 하란에 신뢰하는 종을 보내서 배필감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리브가입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얼굴 본적도 없는 이삭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그 먼 길을 낙타를 타고 왔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용기가 없이는 시집도 못갑니다.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보면
그들이 물론 성령의 인도도 받고 때로는 환상도 보고 꿈도 꾸었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이들은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하고
자기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중요한 일을 만날 때마다 어찌할까 망설이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들의 결정에 더 용기가 있고
더 확실하고 분명한 선택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 그랬어요.
그 말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고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내가 일상생활에서 내가 판단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선택하는 것,
내가 말하고 일하는 것,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동행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는 것이 내가 선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이요, 성령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내가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주저하는 것이 아니고, 더 확신이 있고 용기가 있고, 담대하고 능력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삶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은 신이 나고 즐겁고 바쁘고
그리고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할 여지가 없고
세상일에 눈을 팔 여지도 없고 자기가 하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뻐서 하고 즐거워서 하고,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경주라고 부릅니다. 경주, 나의 경주, my race, 이렇게 말합니다.
◑탐내지 말라
▲오늘은 열 번째 계명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다른 계명들은 구체적인 행동을 명하거나 금하는 것에 비해서,
열 번째 계명은 마음 상태를 금하고 있습니다.
탐내는 것은, 훔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탐내는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을 탐내는 내 심리 상태일 뿐입니다.
훔치는 것도 아니고 도적질 하는 것도 아니고 살인하는 것도 아니고
이웃의 아내를 탐낸다고 해서 간음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열 번째 계명에서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마음속에서 탐내는 일조차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웃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열 번째 계명이, 소위 기득권자들을 위한 계명이 아니겠느냐,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만,
여러분 주님께서 이 열 번째 계명을 말씀하신 이유는
남의 소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의 삶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 속에서 가장 불행한 마음가짐은 남의 것이 좋아 보이고
남이 더 행복해 보이고 남의 떡이 더 커보일 때
그때의 마음 상황처럼 불행한 마음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금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열 번째 계명을 소홀히 여기면서 삽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한은 이웃이 가진 것,
이것을 탐내는 한은 우리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백 미터 경주를 할 때 몇 가지 명심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스타트가 좋아야 됩니다. ‘땅’ 했을 때 즉시 출발을 해야 되고요,
둘째는 뛰는 동안에 옆 사람을 쳐다봐서는 안 됩니다.
요즘에는 단거리 경주가 몇 십분의 일초로 승부가 결정이 나기 때문에
옆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속도가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내 경주지, 남의 경주가 아닙니다.
내가 뛰는 것이지 남이 뛰는 것을 쳐다보는 시간이 아니 예요.
그러므로 옆 사람이 얼마나 빨리 뛰고 있나 어떻게 뛰고 있나
어디에 있나 이거 바라보지 말고
스타트 라인을 끊을 때까지 앞만 보고 뛰어야지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은,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 삶을 살기에도 바쁩니다. 내가 할 일도 많습니다.
남의 것까지 신경 쓸 시간 없습니다.
여러분 스토커가 뭡니까? 스토커는 팬이 지나쳐서 스토커가 되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관음증이 유행하는 시대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동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동경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다니나
그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나 그가 누구를 만나나 이런 걸 몰래 훔쳐보고
따라다니고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을 스토커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불행한 인간의 모습 이예요. 내가 나의 삶을 살아야지
왜 남이 어디가고 누구 만나고 남이 뭐 좋아하고
왜 거기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빠지게 만들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남의 삶을 부러워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의 삶을 더 열심히 살면 됩니다.
남의 소유가 부럽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소유를 키우면 됩니다.
남이 얼마나 가졌고 무엇을 가졌고, 거기에 집착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한은
우리에게 열린 길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우리 각자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지혜와
내게 열어주시는 길과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와
내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가진 은혜, 남이 가진 은사를 내가 갖지 못했을지라도
내게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내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것이 믿음의 사람 이예요.
은과 금은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은과 금은 없지만
그래도 내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얼마든지 섬길 수도 있고
은과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가진 것을 바라보고 남이 가진 것을 탐내는 사람은
내게 주신 것, 내게 허락하신 기회,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남이 가진 것을 흉내 내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아니고,
내게 주신 것, 나에게 허락하신 일, 나에게 열린 문,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의 것을 탐내는 한은 자기의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웃에게 복을 주셨다면, 나에게도 복을 주실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웃과 함께 하신다면, 나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내 믿음을 사용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5장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그 말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함으로써 남이 행한 일, 남의 업적,
남의 양을 내가 탐내지 않겠다 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좀 대담한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영적인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이 해 놓은 일 위에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곳에서 새 일을 시작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가져오지 않아도, 남의 것을 빌려오지 않아도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내 몫을 주신다, 이걸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것을 탐내는 한은 자신의 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것이 남의 눈에는 화려하게 안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얻은 것입니다. 내가 이룬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이 있어야 됩니다.
비록 남이 얻은 것 보다는 못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적어도 내가 땀을 흘려서 내가 얻은 열매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내 자식이 남의 자식처럼 공부를 아주 잘하지 못하더라도
내 자식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나의 기업입니다. 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스럽고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고등학생 이었을 때 고등부를 담당하시던 전도사님이, 지금은 목사님이신데,
이 전도사님이 그때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설교를 하시다가 당신의 사모님을 소개를 하시면서
‘foxy한 여성은 아니지만-foxy란 말은 여우같다는 말입니다-참 착한 여자입니다.’
하면서 사모님을 소개를 하는 것을 지금까지 기억을 합니다.
그때 제가 고등학생으로써 foxy하지도 않고 착한 것을 뭐 자랑을 하냐,
왜냐하면 그 당시에 저는 foxy한 여자랑 결혼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나 제가 철이 들고 보니까 ‘아 그때 그 전도사님이 참 지혜롭고 성숙한 분이였다’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이 보기에 화려해보이지 않더라도
착한 여성,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짝이고 나는 그것으로 참 기쁘고 감사하다,
이런 자족하는 마음.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이 너는 남의 집을 탐내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고
남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남의 소나 나귀나 남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남의 것 탐내지 않아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나에게 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기에 탐낼 일도 없습니다.
내가 남에게 배울 수는 있습니다. 남의 본보기를 따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미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만약에 불충분하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 믿음으로 나의 삶을 창의적으로 개척해 나가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백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