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롬5:12~21 아담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LNCK 2022. 8. 16. 11:12

아담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로마서 5:12-21 - YouTube

 

◈아담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롬5:12~21      2022.08.14.  로마서 설교모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인간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해 주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입니다. 
불의한 인간을 의롭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죄와 죽음의 그늘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한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새하늘과 새땅이 약속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구속 하셔서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신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며, 어떻게 이 세상이 새로워진다고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만일 그런 의구심을 갖는 분들이 있다면 
어떻게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이렇게 죄와 죽음으로 가득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성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어떻게 한 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이 구원받는 일이 가능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에게 어떻게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이 세상 전체가 저주받는 일이 가능했는가? 
라고 질문하라..'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가 얼어붙고, 큰 피해를 입고,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분명, 이 지구상의 어느 한 사람의 몸 안에 시작된 감염으로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사람의 감염으로부터, 모든 세상의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통해서 볼 때 

   우리에게 만연되어 있는 이 죄와 죽음의 바이러스 또한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이 죄로 망가진 것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시작됐다면,
반대로 이 세상이 구원 받는 것도, 한 사람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우리는 우선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죽음이 왕노릇하는 세상으로 망가진 것이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이 세상이, 생명이 왕노릇하는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한 사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한 사람 아담의 죄와 불순종이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이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 사람 아담의 죄와 불순종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3단계를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 첫 번째 단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 입니다.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 세상 속에, 죄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죄를 막을 능력이 없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죄가 존재하지 않도록, 장치를 해놓으실 능력이 없었습니까?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죄가 들어와야만 했습니까? 
왜 죄가 시작되도록, 하나님은 방치 하셨을까요?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께 불순종 할수 있는 인간,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가, 진정 자유의지가 되려면,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는, 불순종할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 이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여러 동물, 생물들처럼 그저 본성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면 
하나님을 반역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죄가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요. 

하나님은 그런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닮은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나라를 
만드시기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비록 하나님을 반역하였을지라도 
선하시고 온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히 구속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었기에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유의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고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전인격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고의적인 것이고, 의도적인 것이고, 
그리고 계획적인 불순종 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12절 본문에 '한 사람'은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아담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세밀하게 읽은 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겁니다. 
   '아니 아담이라뇨? 창세기를 읽어보면 먼저 불순종한 사람은 하와 아닙니까? 
   하와가 먼저 속임을 받아 불순종하여 과실을 먹고 
   아담에게 주어, 아담도 합류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이지 않나요? 롬5:12

타락의 순서로 말하자면, 하와가 제일 먼저죠. 
그런데 왜 이 '한 사람'을 아담이라고 보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의 대표성'을 의미하는 것이고 
창조된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고 
창조된 순서와 대표성으로 인하여, 그 책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와가 먼저 꾐을 받아 불순종하여 
아담이 거기에 참여했을지라도 
그 모든 상황의 궁극적 책임은 
먼저 지음을 받은 아담에게 있으며, 

또한 인류의 대표, 인류의 조상으로서의 아담의 책임을 의미하기에 
이 '한 사람'을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이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가 세상에 들어온 문이 되었듯이 
죄는, 사망이 세상에 들어온 문이 된 것입니다. 

이 죽음 또한 하나님의 창조 계획가운데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죄를 따라서 들어온 것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육체적으로 잠시 살다가 죽도록 창조하신 것은, 원래 아닙니다. 
죄가 가져온 결과이지요. 
그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죽음이 최고의 법과 권력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이 왕 노릇 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죽음도 의미하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죽음,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열매를 따 먹는 순간 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9백년 넘게 살았죠. 하나님께서 왜 이런 기간을 허락 하실까요? 
회복의 기간을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기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3. 세 번째 단계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 :12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미쳤고,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라는 이 단어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롬5:12

'이와 같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두 개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 '이와 같이' 라는 말을, 모든 사람이 아담이 죄를 짓는 것처럼 
그렇게 불순종의 죄를 지음으로써 죄인이 되었다.. 라는 아담의 모방으로 보는 것 
그것은 원죄를 부인하는 것이죠. 

아담처럼 죄를 짓는 사람도 있지만, 
죄를 짓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죄를 짓는 한에서만 죄인이지,
타고난 죄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죠.

- 두 번째는,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이와 같이' 아담안에서, 아담과 함께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거죠.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우리는 실제로 그 죄에 참여한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반드시 부딪히게 되는 장벽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자신이 아담의 죄와, 왜 상관이 있어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왜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냐?'는 거죠.
아담이 지은 죄가, 왜 나에게 연결되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조상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다는 사실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1) 아담은 모든 사람의 자연적 조상입니다. 
모든 인간은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돌되지 않습니다.
인족, 민족, 언어는 다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부모와 자녀를 통해, 죄가 후대로 유전된다는 겁니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자녀들은 죄를 짓습니다. 

자녀가 그렇게 살지 않기를 바라지만, 자녀가 그렇게 사는 모습이 있습니다. 
조상 쪽부터 내려오는 그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끊지 않는다면 
여전히 대를 이어 내려가는 악습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를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누이라고 속이는 그 모습을 
이삭이 그랄에 가서 동일하게,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는 모습이 나타나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가르치길 '네가 위험에 닥치면 꼭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라'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왜 이삭은 부친과 동일한 죄를 범했을까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것은 죄의 유전인 거죠.

갓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가 제일 먼저 거짓말을 가르치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근데 어린 자녀들이 뭔가 잘못했을 때 
'이거 누가 했니?' 그러면, 순간적으로 자기가 했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애도 있지만 
'내가 안 했다'고 거짓말 하는 애들이 많습니다. 그 거짓말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요?

한 가지 대답 밖에 없습니다. 아담 할아버지 안에서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게 거짓말이었죠.

사람들 안에 계속 내려오는 죄의 DNA 는 
바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함께 죄에 참여 함으로 
그 DNA가 계속 존속해서 내려오는 것이죠.

모든 사람들은 부모가 있습니다. 스스로 알에서 깨고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모가 있고, 그 부모에게는 부모가 있고, 부모의 부모가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조상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슬러 올라가면 한 조상이 있었고, 그 사람의 죄 안에서 
실제적으로 우리는 그 죄의 DNA를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2) 두 번째 이유는, 아담이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 타락했을 때
우리는 그 영향력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는, 아담 한 사람과만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대표의 원리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로서 
그가 범죄 했을 때, 인류 전체가 범죄한 것 같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이런 '대표성의 원리'를, 사람들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를 보면, 골리앗이 무너지나 블레셋이 패하여 도망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스포츠 경기를 보면, '대표성의 원리'가 잘 드러납니다.
국가 대표로 선발된 선수들이 경기 했을 때 
그 경기에 지면, 모든 국민들이 졌다.. 라고 인정을 하죠. 

아담은 인류의 실제적 조상으로서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하였기에 
아담안에서 모든 후손들은 
실제적으로 죄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표자 아담의 범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죄의 전가,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에게 사망이 임한 것처럼, 

한 사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5번씩이나 계속 구절구절 반복하여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
16절 '심판은 한 사람으로 인해 정죄에 이르렀으나'
17절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죽임이 바로 그 한 사람을 통해 왕노릇 하였다'
18절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
19절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아담 한 사람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정죄와 심판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연계성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 한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지만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도 죄를 끊임없이 범하는 죄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를 강조하는 중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또 한 사람(예수)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그 분의 의로운 행위(십자가)가 우리 모두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15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렇게 구절 구절, 한 분의 순종, 한 분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대표성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때문에 앞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강조한 것이죠)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일어난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과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전세계 미친 영향을 다시 한번 도표로 정리해 보면 이렇게 대조됩니다. 


얼마나 정반대의 결과입니까.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의를 가져왔습니다.

아담안에서, 우리의 현실을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현실은 삶이요, 생명입니다. 

고전15:22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니라'

▲여러분,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의와 생명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새로워졌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가 사라져야 합니다. 
첫째는 죄, 두 번째는 죽음입니다. 

이 죄와 죽음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법으로, 어떤 제도로, 어떤 기술로, 어떤 지식으로,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새로운 세상이 됩니다.  

예수께서 왜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독생자 그 분이 
영원하신 그 분이, 왜 세상 속에 들어 오셨습니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처해 있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 죄의 치러야할 대가를, 자신의 죽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서였죠.

또한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인데 
그 영원하신 생명을, 죄인된 우리에게 그냥 나누어 주실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죄가 씻어져야 하고, 인간이 되신 분이 
죽음을 이긴 생명으로 변화된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 예수님은 역사 속에 오셔어, 사람이 되셔어 
우리 모두를 대신한 대가를 지불하는 죽음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우리에게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을 나눠주실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해결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죄를 해결하였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죄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택권이 없이 
죄에 전염된 상태로, 죄의 종된 상태로 태어났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긴 생명을.. 우리가  전달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또 일어날 것인가?' 
이것이 인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류의 인구는 수십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류의 인구는 단 두 사람입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거의 70억이 넘습니다. 
70억 인구가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두 사람이에요. 
아담과 그리스도! 

토마스 굿윈 Thomas Goodwin 이란 청교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는 두 사람만 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허리 끈에 매달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담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내 소속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아담의 몸은, 죄와 죽음이 통치하는 세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의와 사명과 은혜가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는 우리의 모든 축복을 다 가져가 버렸어요.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축복, 우리 인간관계의 축복, 내면의 샬롬의 축복, 기쁨을 다 파괴해 버렸어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평을 회복해주고, 기쁨을 회복해 주고, 축복을 회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명한 말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언제나 주지만, 죄는 언제나 빼앗는다'
Grace always gives, whereas Sin always takes away!

그런데 첫째 아담으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이 죄와 죽음이 
우리에게서 가장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갔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는데 

정확하게 죄가 파괴시킨 것을, 정확하게 보상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그것을 17절,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20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파괴시킨, 그래서 모두 망가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의와 생명이
정확하게 100% 일치하게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넘치도록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그것은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죄가 없는 상태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보다 더 넘치도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타락 이전의 아담을 부러워 하실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죄와 죽음의 통치를 뛰어 넘는, 
의와 생명이 왕노릇하는 그 공동체, 그 나라 안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전혀 모르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아담이 알았던 하나님보다 
우리는 더 깊고, 더 놀라우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찬양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것이 '더 넘친다'는 단어 속에 들어있는 뜻입니다. :20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어 살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담은,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와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종노릇 하게 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한 의로우신 행위로 인하여 
의와 생명을 세상에 가져왔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이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새하늘과 새땅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예수님을 믿음 으로 인하여 
아담에게 속한 몸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태어날 때는, 우리의 선택권이 없었어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죄와 죽음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갈 때는, 
그것은 우리의 선택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바로 그 선택이라는 자유의지의 작동이, 
바로 타락을 선택하였던 인간의 타락한 자유의지 마저
완전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 속의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담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옮겨져서 
의와 생명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한 사람 선장이 피난민 10만명을 구한 일화          롬5:19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 이런 한 사람이 됩시다.)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6.25전쟁 당시, 동부전선으로 진격했던 알몬드 장군 휘하의 미10군단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서, 1950년 12월 10일부터 흥남부두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흥남 해안에 미조리 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주력부대가 온통 집결하여
흥남외곽을 둥글게 화망폭격을 해 대면서
흥남에 집결한 부대를 질서 있게 철수시켰습니다.

한국인 피난민들도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있는 군인은 12만 정도였는데
이들과 함께 탱크, 대포, 장갑차, 차량, 화약 등을 단 기간에 철수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美해군기록에 의하면, 이때 흥남부두 해군철수작전으로 철수한
군인 수는 10만5천명, 화물은 탱크 1만7천5백대, 포탄 등 군수물자 35만톤,
그리고 민간인 9만1천명입니다.

철수 군인에 거의 맞먹는 민간인 피난민을 실어날았습니다.

세계군사사상 군인과 맞먹는 숫자의 민간인 피난민을
철수시킨 예는 없습니다.

레오나라드 라루에 선장

피난민을 실어 나른 배중 ‘기적의 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Meredith Victory라는 10만톤 급 유조선인데

이 배는 당시 미군에게 기름을 보급하기 위해, 흥남에 들어갔습니다.
철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름을
내려줄 필요가 없어 회항할 예정이었습니다.

12월20일이었는데, 선장 Leonard P. Larue씨는
바다를 향해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민간인 피난민들을
(배 위에서) 멀리서 보면서 도무지 뱃머리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배는 유조선이어서, 사람을 태울 수 없게 되어있고
사람을 태우면, 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어서 고민했습니다.

선원30여명만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전부인 유조선이기 때문에
기름 냄새가 독해 사람을 태울 수 없었습니다.
화재위험도 큽니다.

그러나 뱃머리를 차마 돌리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고민하고 있던 중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너의 배에 태우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다급할 때.. 기적을 동원하십니다.)

그는 John Childs대령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조선에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 유조선 위에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1만4천명을 태웠습니다.

(유조선에)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운 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배에 오른 1만4천명은 앉을 자리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꼿꼿이 섰습니다.
화장실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으며, 통역자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1950년 12월 21일 흥남을 출발하여, 아주 느린 속도로 부산으로 내려와
12월 24일 밤 거제(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유조선 위에서
모진 추위와 먹을 것도, 화장실도 없이 3일을 여행하여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고 무사히 거제항에 도착했는지 모릅니다.

배위에서 5명의 아기도 태어났습니다.
지금 그 아기의 한명은 가톨릭 신부가 되어있습니다.

선장 레너드 라루씨는 너무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한국전이 끝난 후 1954년 수도사가 되어
지난 2001년 천국으로 갈 때까지, 단 한번 워싱턴에 나온 것 외에는
수도원에 조용히 머물렀습니다.

수도사가 된 선장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가끔 그 항해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싣고 끝없는 위험을 넘으면서
한 사람의 영혼도 상하지 않고 향해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 크리스마스 파도위에서, 분명하고 잘못일 수 없는
메시지가 내에 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한국 해안의 을씨년스럽고 비통한 바다위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나의 배의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 (정일화 논설위원) 는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는 동안
이 신부님을 한번 찾아보기 위해 애쓴 일이 있습니다.

좀 더 열심을 냈더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보스턴의 어느 수도원에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결국 전화통화 한번 하지 못했고.. 물론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1만4천명의 구원된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어떻게 구원되었으며
어떻게 그런 혹독한 항해를 견딜 수 있었는지를
미처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것은, 그 기적의 배는 한때 퇴역했다가
월남전에 다시 동원되어 임무를 다한 후
고철로 팔려 중국 어느 항구에서 1996년 해체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