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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3:4~12 후기 기독교 시대에 교회의 사명

LNCK 2022. 8. 17. 12:44

◈후기 기독교 시대에 교회의 사명          행13:4~12        2022.08.14.설교 정리


▲20~30년 전에, 한국도 후기 기독교 사회의 특징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곳이 바로, 기독교 학교의 채플 시간이었어요. 

벌써 20~30년 전부터, 한국의 기독교 고등하교, 또한 일반대학 채플 시간은,
흡사 예비군 훈련장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교목 목사님의 바램은, 그저 떠들지만 말고, 자더라도 좋으니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거였죠.

학생들이 핸드폰을 하든지, 책을 보든지... 
그래서 예배와 설교에 관심있는 극소수의 학생들을 위해서, 그저 소란만 피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또 학점을 따야 졸업을 하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강당에 가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후기 기독교 시대의 특징은
기독교가 점점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기독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대하는 기독교란, 
별 능력이 없고 지루한 기독교!

이렇게 현대인이 대하는 기독교란,
별 내용이 없고, 알맹이가 없고, 껍데기와 형식만 남은 교회... 
(현실이 이만큼 비관적은 아니어도, 앞으로 더욱 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쉽다는 거죠) 

그럼 이런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전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과연 전도를 할 수는 있기나 한 것일까요?

전 세계가 후기 기독교 사회로 흐르고 있는 물결... 그건 어느 사회이든 마찬가지고요. 
그 사람들이 뭐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다, 껍데기만 있는 기독교인이다... 라고 굳이 분류를 할 필요가 없고 
비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비기독교인이든,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슬림이든 
사실은 본인들이 회심하기 전까지는 다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가 비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이 그렇게 썩 만족스럽느냐? 
그런 자기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행복해 하느냐?
그건 말할 필요도 없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신앙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 밭은... 사실 '못 죽어서 산다'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도, 진정 예수님을 발견하고 싶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싶은
그런 욕구가 충분히 있을 수 있거든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영적인 욕구와 갈급함, 허전함이 있어요. 

왜냐면, 뭐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은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영적인 욕구가 반드시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방법으로 사역을 하게 된다면 
누구든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지난 20세기를 지탱해 온 것이지요. 

그러니까 본인이 배경이 어땠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뭐 과거에 설령 본인이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났고, 교회 직분자였다 하더라도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어쨌든 현재의 영적인 필요가 다들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데 눈을 뜨고, 그들의 현재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거죠. 물론 거기엔 '중보기도'가 필수이고요. 

우리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이 없어요.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전도는 가능하고, 
교회는 얼마든지 존속될 것이고, 어쩌면 더 부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그 대상이 유대인이든/이방인이든,
뭐 세리이든/ 니고데모같은 관원이든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 사람의 현재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하셨죠. 
그들을 친히 찾아가기까지 하셨어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심정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고유한 부분이 있었어요. 소위 '영적인 필요'라고 하지요. 

그래서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주님이 필요해요. 
모든 사람이 주를 필요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들이 교회에 나오는 거 아니겠어요... 

 

▲지금 2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사의 변곡점에 이르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 이 세기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시대적인 사명이요, 적어도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목격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김일 선수, 역도산 선수가 레슬링 매치를 할 때 
그 시대에 살아서 그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처음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가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갈 수 없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 3년이 지난 후에는 
'굳이 나가야 될 필요가 있느냐?'를 반문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가 언제 박멸될 것인가?' 와는 별도로 
'왜 굳이 교회를 나가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후기 기독교 시대의 시대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후기 기독교' 라는 말을 제가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요? 
'후기 기독교' 라는 말은, '후기 종교'라는 말로 이해하면 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한 부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왜 굳이 종교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이루어야 되느냐?' 하면서
그 필요를 느끼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포스트 종교', 즉 종교에 대한 필요성과 명분을 지난 시대라는 의미에서 
'포스트 크리샌덤' 즉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되었다.. 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필요 없는 시대)

이런 변화를 맞이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결단이 필요하고, 
교회적인 차원에서의 결단이 필요하고, 
목회자들은, 목회 사역 차원에서의 결단과 지혜와 그리고 선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먼저 성도 개개인들은 무슨 결단을 내려야 했느냐? 
과거에는 '내가 종교가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다녔다면, 

이제는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내가 왜 예수님을 믿느냐? 왜 내가 예수님을 섬기느냐?'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가져야 됩니다. 

어머니가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믿는 집에 시집갔기 때문에도 아니고 
목사의 자녀이기 때문도 아니고 
유일하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정당한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에요. 

내가 예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는 것은 내가 확신하기 때문에 
정말 예수쟁이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 차원에서 
교회가 왜 존재하느냐, 교회가 왜 있어야 되느냐? 
이 교회가 있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다른 교회도 많은데, 시내 바닥에 널린 게 교회인데 
또 하나의 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무엇이냐? 

주님이 우리 교회에 어떤 사명을 주셨고, 어떤 은사를 주셨고,
어떤 역할을 주셨고, 우리 교회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이 험한 시대에, 지역 교회가 생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목회자의 차원에서 
자기가 왜 이 일을 하느냐, 내가 왜 목회자가 되었느냐? 
여기에 대한 확실한 믿음, 소명.. 이것을 가지지 않으면

이 힘든 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왜 목회 일을 굳이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일까? 

유일하게 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나는 이 일 이외에는, 다르게 할 일이 없다. 나는 여기(교회)를 떠나면 할 일이 없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사나 죽으나 나는 이 일을 해야 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나는 이 일을 할 때, 내 자신이 살아나고 즐겁다...' 
이런 사람이 아니면, 이 목회 일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따르는 변화 중에 하나는, 
교회가 따를 수밖에 없는 변화 중에 하나는, 
교단의 라벨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장로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장로교회에 30년 몸을 담았어요.

장로교가 저를 초청해서 목사 안수를 주고, 격려하고, 
제가 한국에 오게 된 이유도 장로교회가 저를 맞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단에 대한 충성, 교단에 대한 애정이 없을 수가 없죠. 

 

그렇지만 우리는 교단을 좇는 것이 아니고, 전통을 좇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좇는다면 
이제는 교단의 라벨 label 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편의점에 가실 때, 집에서 가까운 편의점, 물건이 좋은 편의점, 친절한 편의점을 갑니다. 
거기가 꼭 CU냐, GS냐, 이마트냐, 세븐일레븐 이냐? .. 이렇게 라벨은 따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회를 정할 때 
장로교이기 때문에 가는 게 아니고, 감리교 이기 때문에 가는게 아닙니다. 
거기에 가면 은혜가 되고,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그 사실을 아는데, 목회자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교단이라는 것은 이제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교단의 라벨을 차츰 탈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어느 교회도, 그 교단의 신학만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장로교회 라고, 장로교 신학만을 가르칩니까? 
감리교라고, 감리교 신학만 가르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르치느냐?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은혜 받을 만한 것, 
성경을 통해 깨우친 것,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을 가르치고 
교회가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흉내내는 추세입니다. 
그렇다면 교단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교단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차츰 교단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추세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과거에 우리는, 교회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을 크게 선전하고 
마치 그것이 무슨 비결인 것처럼, 
마치 교단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던 시절도 한 때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같은 후기 기독교 시대에, 정통 교단은 쇠퇴하지 않는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교단 이름 내걸고 목회하던 시절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는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성령으로부터 교회의 능력과 지혜와 메시지와 사명을 얻는다고 믿는다면, 
이제는 교단의 벽을 넘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서로 협력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그래야 서로 같이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기도 하실 때,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한 것은  *요17:22

어떤 기관적인, 조직적인 그런 하나됨을 말씀하신 게 아니고 
진짜 주님의 일을, 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능력 대결 Power Encounter 을 마주한 사도바울

 

오늘 본문에, 바울이 자기의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첫 시점에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강력한 적수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후기 기독교 사회를 맞이하는 대응책입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이죠!)

이같은 적수는,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든, 지금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반대하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죠.
이 사람이 그만 반대한 게 아니고,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이 사람은 박수 라고 했어요. '그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행13:8 

거짓 선지자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총독이 예수님 믿는 것을 막으려고 했어요.

이건 조직적이고 영적인 반대입니다. 
이런 적수를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이 그 사람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13:10

사도바울도 이런 심한 말을 할 때가 있었어요. 
성령의 감동이 임하시면, 기독교인이 이런 말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같은 존재가 복음을 가로막고,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을 때도 '더럽고 악한 귀신아!'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귀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이요, 의의 원수요,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권세를 사용합니다. 

이걸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후기 기독교 사회에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을 진지하게 생각할만한 이유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신 영적인 권세를 보여 줘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권세를 사용한 것이 11절입니다. 

행13: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바울이 이 박수 무당을 저주했더니, 그가 눈이 멀어버렸어요. 
바울은 자기의 영적인 권세를 드러낸 것이지요. 

강한 영적인 권세로, 박수 무당이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으로 대항한 것입니다. 

12절에,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믿었다고 그랬어요.

우리는 '보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배웠는데  *표적주의 신앙을 뜻함
그런데 이 총독은 '보고 믿었어요.'

이걸 보고 '오~ 예수님의 권세가 있구나, 예수님의 권세가 박수무당의 권세보다 크구나!'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칳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그러니까 그걸 (표적을) 보니까,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깨달아 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모든 교회, 교단을 막론하고 가져야 될 것이 있습니다. 
3P 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praise 찬양
여러분, 찬양은 이 시대에 거스릴 수 없는 대세입니다. 

어느 교회는 해도 되고, 어느 교회는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찬양을 회복해서, 다윗의 하프(수금)를 회복해서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 병자들이 나을 수 있고, 
찬양을 드릴 때 귀신이 떠나가고, 찬양을 할 때 사람의 강팍한 마음이 열리고 
찬양을 드리는 중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찬양을 드리는 중에 사람이 회심합니다. 

찬양을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합니다. 

2. 두 번째는 Power 능력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는다'고 하셨죠. 행1:8

바울이 능력이 있으니까, 박수무당이 영적으로 총독의 믿음을 방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막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이 총독이 믿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처럼 
여러분 우리는, 또는 모든 교회, 교단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해야 되고, 성도들이 기도의 능력을 소유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능력을 소유했습니까? 
기도의 능력을 소유했다는 말은, 
기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의 문을 열고, 

쉽게 낙심하지 않고 기도의 줄을 붙들고 
그리고 남이 기도할 수 있도록, 남의 기도를 돕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의 능력이에요. 

찬양의 능력을 소유해서, 내가 찬양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교회 예배가 뜨거워져야 합니다. 

서울에 어떤 유수한 교회 목사님이 
당신의 성도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런 특징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첫째는 시간을 잘 지키고, (칭찬)
둘째는 봉사할 때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하더라.. (칭찬) 
그런데 셋째는 누구도 신앙이 뜨겁다고 말하지는 않더라' (지적)

성도들이 뜨겁지 않다는 말은, 능력을 결여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뜨겁습니까? 
여러분은 영적인 능력을 사모하십니까? 
능력을 구하면 주실 줄을 믿습니다. 

3. 세 번째 Preaching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권하는 게 아닙니다. 
권위로 선포하고 대언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 '이러면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생각되어집니다' 그게 아닙니다. 

'말씀이 이렇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게 Preach (말씀 선포)입니다. 


여러분, 미래로 나아가려면 
애초에 (사도행전 때, 초대교회 때)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기억하면 됩니다. 
미래의 열쇠가 시작에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했느냐? 
처음에 어떻게 믿었느냐? 
처음에 사도가 어떤 메시지를 전했느냐? 
처음에 성도들이 어떤 식으로 믿었느냐? 
어떤 식으로 설교하고 전도했느냐? 

애초에 어떻게 했느냐에.. 미래의 열쇠가 있어요.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되는 게 아니고 
기독교를 리인벤트 reinvent 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고려해야 될 일들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이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애초(초대교회, 오리지널)에 있습니다.  

어떻게 시작했느냐, 
예수님이 뭐라고 명하셨느냐, 
제자들이 무엇을 믿었느냐, 
처음에 무엇을 가르쳤느냐?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