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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16~27,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의 경건한 삶

LNCK 2022. 8. 20. 14:58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의 경건한 삶           약1:16~27          여러 설교 정리


◑ '믿음'이란 말 대신, '경건'이란 말을 강조한 야고보

 

어느 신학자는 '믿음'이란 뜻의 다른 표현이 성경에 약 60가지가 나온다고 말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경건'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히4장에선 '안식'으로 표현했죠,

본문 25절에는 '자유케 하는 율법'이 나오는데, '자유' 역시 구원의 한 가지 다른 표현입니다.)

 

그럼 믿음은 뭐고, 경건은 뭐냐?

믿음이 주로 '내면적 신앙'이라면, (물론 '믿음의 행위'도 포함하지만, 주로)

경건은 주로 '외형적 신앙'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내면적 경건'도 포함하지만, 주로)

 

그 사람이 경건한지는, 그의 마음을 봐서는 모르죠.

그의 겉으로 드러나는 언어, 예배, 구제, 가정생활.. 등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 서신에서 '믿음'을 격하시키는 듯한 말을 자주 했습니다.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 이유는, 경건이 빠진 믿음, 삶의 열매가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라는 것이죠.

   또한 믿음은, 주로 처음 믿을 때, 즉 칭의를 얻기 위해서 강조되는 것이라면, 

   경건은, 믿고서 칭의를 얻은 후에, 성화의 과정에서 강조되어야 하기에... 이렇게 야고보는 경건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경건'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본문에는 '경건'이라는 단어를 세번씩이나 사용하여 강조하였습니다. *1:26절에 2번, 27절에 1번
                *<경건> 관련글 click

영어성경에서는 '경건'을 religion 이라는 단어로 대개 번역을 했는데 
원문 헬라어의 의미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 예배함' 이란 의미입니다.   *스레이케이아     주1)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를 칭의 (롬1:17~18)로 잡으면 안 됩니다.

그건 마라톤 달리기 선수가 조금 뛰다가, 초반에 그만 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를 경건 (야고보서는 '경건', 히브리서는 '예수님 바라보기, 즉 닮기')로 잡아야 합니다. 

그 경주는 일평생이며, 우리에겐 구름과 같은 허다한 관중들도 있는 것입니다. 히12:1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인의 목표는 줄곧 '경건'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이상하게 그 목표가 바뀌어져 버렸는데,

이제는 중생과 칭의는 따놓은 당상이요, 이제 신앙생활의 목표는 성공과 번영으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 2가지는,

- '쪽복음'의 남용과,  *인스턴트 복음

-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이 도입된 이후부터로 봅니다.) 

 

 

말씀을 통해서 경건하게 됩니다 

 

본문 약1:16~27절까지 줄곧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경건은,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라는 거죠.

17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은사와 선물은 비슷한 말을 중첩해서 쓴 것이죠.

그게 뭐냐면,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말씀'입니다.

 

18절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낳았다' .. 우리가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가 되려면, 먼저 말씀으로 거듭나는 일이 첫 단추인 셈이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란

    사도 베드로도,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이렇게 증거했죠.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1절에 결국 말씀으로 너희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죠.↙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또한 25절에서는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표현했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25

 

'자유롭게 하는 율법'은 새언약의 특징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해서 지키는 면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자원해서) 행하게 하리니' 겔36:27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2번째 단락, 본문 약1:16~27절 사이에
흐르는 일관적인 주제는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의 경건한 삶"이며,

경건한 성도는 이렇게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이제 19절부터, 5가지를 권면하는데요.

 

 

◑말씀을 따라사는 경건한 성도의 5가지 모습

 

▲1. 경건한 성도는 화를 다스립니다.   (19~20절)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18~21 화 다스리기

▲2. 경건한 성도는 '새언약'을 따라 삽니다.

 

21절에 '마음에 심긴 말씀 implanted word' 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요즘 '임플란트' 라는 말이 아주 유행입니다. 치과에서 제일 많이 쓰고, 성형할 때도 잘 씁니다.

그래서 아주 임플란트 안 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노인이 될수록 한 두 가지씩 임플란트를 하고 사는데요,

본문 21절에는 '마음에 말씀을 심어라(말씀을 마음에 임플란트 해라)'는 식으로 권면하죠.

 

이 말씀은 새언약을 염두에 두고, 야고보 사도가 하신 말씀입니다.

렘31:33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새기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심어진 말씀, 임플란트 된 말씀 :21' 이란 뜻은, 아주 단단히 고정되어,
강력히 각인된 말씀이란 뜻인데, 바로 새언약의 특징이죠.  
☞새언약 관련글 모음 

 

야고보가 본문에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은,   *렘31:31~33, 겔36:25~27

당시 초대교회가 구약에 예언된 '새언약'을 살고 있었고, 또는 일반화해서 신앙생활 했다는 것을 뜻하죠.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체험된 역사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있지 않느냐!'

 

본문 18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는데' (중생을 뜻하고),

21절에서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셨습니다'. (새언약을 뜻하죠) 

 

이렇게 경건한 성도로 살려면, (새언약에 따라) 말씀을 임플란트해서 산다는 뜻입니다.

꼭 이렇게 각오하는 게 아니라,  진정 거듭한 성도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죠. 

   

▲3. 경건한 성도는 말씀을 행합니다. (22~25절)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19~27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2  中  6  

   

☞1:22 나는 왜 풍성한 축복을 못 받을까? / 앤드류 머레이


▲4. 경건한 성도는 혀를 재갈 물립니다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말을 급하게 하는 것은미련한 자입니다 



▲5. 경건한 성도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1:22~27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1:27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경건


☞1:27  빈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절별 해석 .....................................................................................................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지 말라'(메 플라나스데)는 심각한 말로 권면할 때 사용된 어법으로 (고전 15:33, 갈 6:7, 요일 3:7)

'메'는 금지를 암시하는 완곡어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그 시험(유혹)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런 착각은 스스로 미혹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므로 속지 말아야 한다.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 풍족하게 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5절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본절에서도 좋은 은사와 선물들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은사'(도시스)와 '선물'(도레마)은 동일하게 '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도미'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체론적 변화이다.

'좋은 은사'는 일반 은총이 아닌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내리는 특별 은총을 의미하며

'온전한 선물'은 성도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화로운 상태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이다.

 

이러한 은사와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혹에서 범죄치 않도록 도와준다.

 

한편 '빛들의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빛의 왕으로 모든 빛들을 창조하시고 주관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빛들의'는 하늘의 빛나는 별을 가리키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을 찬양하는 표현이다.

한편 본절은 특별히 6행시로 구성되어 있다.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한 첫 열매'(아파르켄 티나)는 구약성경에서 수확된 첫 곡물을 하나님께 드리는것을 나타낸다(출 34:22, 레 23:10).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불레데이스'는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로(엡 1:11, 벧전 1:3)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다(엡 1:4,5).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라는 말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

즉 첫 열매된 자들이 옛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를 권면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현상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지속되는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히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말하기는 더디하며' 이것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성내기도 더디 하라' 본문은 일반적으로 분노, 증오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격분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義)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행한 권면에 대한 근거임을 나타낸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야고보는 본문에서 다시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언급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는 것이며,

이미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단지 듣기만을 좋아하는 자는 나태한 자이며 자신 속이는 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본절에서 그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권면한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들은 자는 그것을 행하여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마7:21).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야고보는 본절에서 도를 듣고 행치 않는 자를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다.

'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운티'는 경솔하게 힐끔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나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질 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낸다. 이는 단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음을 시사한다.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제 자신을 보고 가서...곧 잊어버리거니와' 본절은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이 마치 회미한

거울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였지만 거울을 떠나면 자신의 모양을 곧 잊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행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론적인 지식으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수 없다. 말씀은 오직 듣고 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있는 자'

본절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야고보와 수신자가 유대지향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구약 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의미한다(렘 31:33, ).

 

구약 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율법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이다(요 8:32, 고후 3:16).

이것은 제도를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지닌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확실하게 드러난 실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율법의 특징은 첫째로 택하신 자들을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것에 모순과 결합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 특징은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구속력을 지녀서 억지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들여다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큅사스'는 몸을 구부려서 (주의 깊게) 보는 것을 나타낸다.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알라'('그러나')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실행하는자'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그 행할것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한편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을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할 경우 율법을 지키는 그 일로 인하여 만사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행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행위 자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    -출처-

앞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고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말씀을 들었으면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오늘도 같은 권고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독특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힌트는 한참 내려가서 2:8에 나타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거든요.
즉,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목적과 내용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이고,
결국 온전한 율법이란 복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온전한 율법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법을 지키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들여다본다'는 단어는
그냥 슬쩍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앞에 머물러 있다'는 것까지 포함한 단어이지요.
즉 말씀을 자세히 듣고 그 말씀과 함께 있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어떤 복을 받을까요?
메시지의 표현대로 기쁨과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의 삶에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생명을 낳게 되며 풍성한 삶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아,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서
복을 받아야겠습니다.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경건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레스코스'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하는 '드레오마이'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는 예배의 외적인 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해서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렇게 말과 행위가 틀린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다(마 6:2,16).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본 절은 경건의 정의라고는 할수 없지만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헬라어 '파라토 데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평가 방법으로 사람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 함은 경건의 구체적인 한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라 하겠다.

'더러움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미안토스'는 '더럽히다'의 '미아이노'와

부정 접두어 '아'가 합성된 형용사로서 후에 의미가 변천되어

'정결한( 카다라)이란 의미로 사용 되었다.

 

이로 보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이란 표현은 의미상 동의어 중복으로 강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종교 예식에 있어서 기독교든 이교도든 정결하고 흠 없는 제사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 바리새인에 의해 지속되어졌었다(마23:25, 막 7:3).

야고보는 본절에서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부류의 대상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류인 나그네나 병든 자, 갇힌 자 등을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이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마 25:40) 구제 대상들이다.

 

한편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프테스다이'는 문자적으로 '보러 가다',

'조사하러 가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교제를 나누기 위한 돌아봄보다는

극히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돌아보는 것을 시사한다(갈 5:6).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야고보는 '세속'(코스무)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통한 죄악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사도 요한이 잘 쓰는 표현 방법으로(요일 2:16) 이웃 사랑은 물론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의 삶에 있어서 이웃 사랑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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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약1:26~27절의 경건 (스레이케이아) 

행26:5엔 '(우리) 종교'로, 골2:18은 '(천사) 숭배'로, 그리고 본문 약1:26, 27절에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경건 piety'은 유세베이아 로서, 신약에 약 15회 이상 나옵니다. 딤후3:5절 

그러므로 본문 1:26절과 27절에서 piety 로서의 경건이기 보다는
영어성경들이 religion 으로 번역한 것은, '종교, 예배, 신앙의 외적인 모습'을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라 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 스레이케이나 나 유세베이아를 모두 같은 단어 '경건'으로 번역한 것은
두 단어가 비슷한 말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