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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2:1~13,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

LNCK 2022. 8. 22. 13:31

https://www.youtube.com/watch?v=MTQPG6i-BKs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           약2:1~13          여러 설교 정리

 

본 단락은 주제가 '차별하지 말라'인데, *2:1

단순하고 쉬운 메시지 같지만, 그 속에 심오한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적용 

2절에 '만일 너희 회당에...들어올 때에’

야고보가 본 단락에서 회당 '쉬나고게'를 사용한 것은

이 서신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죠.

바울도 처음에 선교할 때 초기에,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찾아가서 전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신약성경 중에서 맨 처음 쓰여진 성경으로 봅니다.  *AD 40~45년 경

본절에 '회당'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차츰 <유대인-회당 중심>의 선교가, <이방인 중심 선교>로 변천해 가는데 

본서는 아직 <유대인-회당 중심>의 시기에 작성되어 배포되어졌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가,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핍박으로 인하여 성도들이 사방에 흩어졌을 때  *행8:1, AD 34년 경

써서 보낸 서신으로 여겨집니다. 신약27권 중 최초 저작으로 봅니다.

 

 

▲1. 사람을 차별하지 맙시다 

오늘날 국제적 관심과 문제가 되고 있는 '시리아 난민'들 처럼   *5백만으로 추산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마리아를 넘어서 소아시아 (터키) 등 각지로 흩어진 초대 기독교인들은

아주 가난하였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유럽 여행을 하더라도, 혹시 돈이 떨어지면 한국의 재정을 끌어 쓸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기에,

별로 걱정이 없을 것이지만, 이 때는 마치 625피난민 시절과 비슷한 거죠.

떠돌이로 다니거나, 혹시 타 지역에 정착했을 때, 절대 가난을 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회자인 야고보는, '그런 성도들을 가난하다고 차별(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1)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기 때문이요   *2:5

2)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율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2:8~9

라고 권면합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들은, 혹시 사람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나요?

요즘은 학교 아이들도, 아파트 평수가 비슷한 아이들끼리 논다는 말도 들리고 있습니다. 루머겠지요.

그리고 학교에서도 다민족 아이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도시 근처에 나가면, 외국인 노동자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에 나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남수단에서 온 현지인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내가 요청해서 나와 같이 사진을 찍는데 응해 준 그 관광객은 '땡큐!'를 서너 번 반복해서 말했죠.

궁에 와서 아무도 자기에게 아는 체를 안 해 주는데, 어떤 한국인이 말을 한 번 걸어 준 것이

그렇게 고마웠나 봅니다. (사실 그렇게 고마워하는 눈치의 외국인들이 많아서, 나는 종종 말을 걸어줍니다)

 

△아래는, 과거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국민 나환자(한센병자)들을 차별하고 박대했지만,

외국인 의료진들이 한국에 와서 그들을 사랑해 준 것에 대한 자성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여수 애양원에 갈 때마다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양원 원장이 1대부터 5대까지

    다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을 거두어 주며 그들의 살 공간을 만들어 준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나병환자들을 수용해서 돕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500명, 600명이 모여 들었습니다. 지금의 봉선동에 땅을 사서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집값 떨어진다고 나병환자 수용소를 옮기라고

    윽박지른 사람들은 다름 아닌 광주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데리고 피난 간 곳이 여수 애양원이었습니다.

 

    포사이드는 미국 프린스턴 의대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그가 뭐가 부족해서

    가난한 나라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동족들조차 싫어하고 차별하는 나병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주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 이후에도 윌슨등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와서 헌신했습니다.

 

    다행히도 지금 원장은 우리 한국인 의사인 김인권 장로입니다.

    그는 서울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지만

    나병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여수에 내려와서

    지금까지 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 뿐 아니라

    연세가 오래되신 노인들의 휜 다리를 아주 저렴하게 수술해서 재활해 주는 데

    세계적인 권위자요, 명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실력과 명성으로 힘없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실력으로, 힘으로, 권력으로, 부족한 자들, 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냉대합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경제논리, 힘의 논리입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꼬우면 너도 출세하라’고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차별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세상논리가 은연중에 교회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사랑이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얼마나 삭막해지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가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이 단락 출처-

 


▲2.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가 믿음이 더 좋다'는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성공주의, 기복주의'를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에서 감추어 버리고 싶은 말씀일 것입니다.

 

물론 부자 중에도 믿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가난한 자 중에도 믿음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꼭 빈부의 차이에 따라서, 믿음이 비례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못 먹고 못 살던 1970 년대와,

지금 그나마 잘 먹고 잘 살게 된 2020년대를 비교해 봅시다.

우리가 언제 믿음이 더 좋았던가요?

 

계시록에 또 이런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계2:9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인데요, 환난 당하고 가난해진 그들에게

주님은 '네가 (영생에, 믿음에 더) 부유한 자라'고 단정지어 주십니다.

 

그러니 한국 교인들이, 우리보다 못 사는 계발도상국가에 단기선교를 가는데요,

우리보다 가난한 그들이 '믿음에 더 부요한 자들' 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옷을 깨끗하게 입었고, 통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코 현지인들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실 현지인들 중에는 은행 통장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야고보서 1장에도, 우리 상식을 뒤집는 말씀이 이렇게 나옵니다.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9절의 '낮은'이, 신분이 낮다는 것인지, 아니면 물질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으나
둘 다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신분도 낮으니까요.

그리고 10절과 연결해서 보면, 문맥상 
물질의 가난으로 인해 낮아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렇게 비천에 처한 자들이 자랑해야할 것은 '높음'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높음'이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피조물의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신분을 나타냅니다. 

요15:15에 ‘너희를 나의 친구라 하리니..’ 제자들을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제자이면, 단벌 신사라도, 예수님의 친구인 것입니다. 
우리 친구가 또는 우리 아버지가 억만장자이면, 내가 가난하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9절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신 것이죠.

계3:21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우리를 왕이 되게 하신다, 왕의 보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혀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 곁에 있었으며
자색 옷을 입었던 부자는.. 영원히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9절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아멘!’하게 됩니다.

△그럼 10절에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 말씀도 일견 비상식적입니다.

'낮은 형제'와 마찬가지로 부자들도 취해야 할 마음이 있죠.
그것은 자신들이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어지는 말씀에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0b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1


세상에서 부자가,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부자가 될 것 같으면... 지금 자랑할만 하지요.
그러나 세상에서 부자가, 천국에서 지푸라기만 남게될 것이라면... 지금 자랑할 게 전혀 없죠.

그러니 9절과 10절을 합쳐서 보면, 야고보는 지적하기를
‘가난한 자는 너무 자신을 평가절하 하지 말라’는 것이고, 그 영적인 지위가 높으니까요!
‘부유한 자는 자신을 너무 평가절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영원히 높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의 키는 좀 높여 주고 있고
부유한 자들의 키는 좀 낮춰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 키높이를 좀 비슷비슷하게 맞춰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 차별이 없어지니까요!

 

△그런데 섭리적인 가난도 있습니다.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이건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처럼
뭔가 중대한 말을 할 적에, 서두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얘기를 한다는 거죠.

그 중대한 내용인즉,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5

이건 한 마디로 ‘섭리적 가난’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를 가난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고수부지에서 자전거를 열심히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자전거를 잘 타는 사람입니다. 하루에 100킬로도 달리는 사람입니다.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은.. 사실 자전거를 잘 타지 않습니다.

    수영도, 등산도, 핼쓰도, 스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하고, 
    못 하는 사람들은 아예 안 하는 경향이 있죠. 못 하니까 하고 싶지 않은 거죠.

    이 논리를 경제에 한 번 대입해 봅시다.
    돈을 누가 잘 벌까요? 잘 버는 사람이 더 열심히 법니다. 
    돈을 누가 안 벌까요? 못 버는 사람은 아예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코인 투자, 각종 재태크,
연금 관리, 해외 주식 투자, 동남아 부동산 투자... 
이런 것도 잘 하는 사람이 더 잘 하고
못 하는 사람, 과거에 몇 번 실패한 사람들은... 더 안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경제 투자활동에 밝을수록, 믿음이 반비례 하는 것입니다.
예외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런 투자 정보를 늘 물색하고, 돈을 여기서 빼서 저기로 넣고
이렇게 돈을 굴리는데 (자산 운용 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면
믿음이 점점 식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도 늘 ‘주식, 부동산 대박 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다가
반대로 또 낙폭이 커지면... 그나마 있던 믿음도 다 까먹어 버립니다. 시험 들어서요!
늘 오르기만 하겠습니까? 떨어지는 날도 오는 거죠.

그래서 ‘섭리적인 가난’이란, 
하나님이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려고,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려고
그를 아예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경제에 아예 신경 끄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목회자나 선교사가 
늘 여기 돈 빼서 저기 주식 사고, 
저기 주식 빼서 부동산에 투자 하고...
또 해외주식까지 만지작 거리고... 그래가지고 무슨 사역이 되겠습니까!
자기 온 신경이 거기에 다 팔려있는데.. 무슨 영혼구원 사역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섭리적 가난’을 주시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주십니다. 
‘너는 오직 믿음에만 부요해라, 너는 오직 하나님 나라 상속 받는 일에만 몰두하라!’
그리고 그 외는 다 섭리적으로 끊어 주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만 주시는 거죠!

그래서 부자로 살다가, 목회의 길로 들어선 분들 가운데
아주 쫄딱 망해서 거지처럼 된 분들이 주위에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나 목회자들이 하는 말인데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이 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부자들은 (예외도 있습니다만 대체로) 헌금을 잘 못합니다. 
왜냐면 ‘더 큰 부자 되는 것’이 인생 목표니까, 지금 투자금도 모자란 판국에
그 돈 빼서 헌금할 용기는 없는 거죠. 그래서 여행도 못 다니는 부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신자들은, 물질에 대해, 부자만큼 각별하지는 않습니다. 
비교적 상대적으로 물질에 대해 자유롭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가 헌금도 내는 것입니다. 

지금 부자/가난한 자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섭리적 가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너무 발버둥치면.. 시간 낭비입니다. 
자기가 뭘 투자해서 돈 벌려고 하지 말고, 
교회에서나, 누가 헌금해서 주면, 그것 받고 그들을 축복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곰곰이, 깊이 묵상해 봐야 합니다. 
특히 요즘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말 꿀팁입니다.

괜히 목회자, 선교사, 평신도 사역자들이
너무 부자되려고, 가난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칠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물질적으로 잘 나가다가, 자기 믿음 잃어버리게 될까봐...
주님이 섭리적으로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 물질로.. 남 giver 을 축복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권면 대로, 가난한 자를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는데

그들을 차별하면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2:9

 

▲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   (그러니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본문의 정황은, 누구를 차별하지 말라는 얘기냐면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나서, 피난을 떠나서 난민이 되어서, 가난해진 성도들인데,

그냥 넓게 보면, 지역 사회의 '가난한 신자들, 낮은 신분의 신자들'도 포함되겠습니다. 

 

저자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약2:8, 레19:18의 인용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율법은 한 계명만 어겨도, 모든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으므로   *약2:10, 레5:17참조 

그렇게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모든 계명을 어기게 되는 큰 범죄라는 논지를 펴고 있죠.

 

이런 문맥을 따라서 13절을 해석하면,

차별 대신에 긍휼을 베풀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차별(1절)로 시작해서, 차별이 아니라 긍휼(13절)로 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 일을 하라는 논리와 마찬가지죠. 엡4:28) 

 

운전을 하다보면, 교통법규를 모두 완벽하게 지키기가 어렵듯이

사람은 살다보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란.. 사실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번만 죄를 지어도, 또 '율법의 위반자'라는 딱지를 붙이게 될 터인데,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 평소에 긍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러한 긍휼을 행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며(마 5:7)

이것은 심판의 자리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될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삶 속에서 나타난 긍휼을 통하여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요일 4:17),

그래서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심판도 그 긍휼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듣는 이야기인데, 무슨 부잣집에서 평소에 '우리 마을에는 거지가 없게 하라'해서

늘 구제와 긍휼을 베풀었더니,

어느 날 난리와 폭동이 일어났을 때,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자원해서 그 부잣집을 지켜주었다는 얘기와 비슷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거죠'

 

실제로 우리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안전하게 사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늘 사랑과 긍휼을 베풀면,

동네 사람들이 자원해서 일어나서, 그 외국인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인심을 얻는 것이죠.

 

물론 인심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긍휼을 베푸는 것인데,

부수효과로 그런 혜택도 누리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보호는, 마지막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수많은 변호인과 보호자들과 증인들이

나를 위해 일어나서 탄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그리스도의 중보와 탄원만을 강조하는데,

그것도 물론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고요, 그러나 사람들의 탄원과 변호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대 법정에서!

 

 

 


◑본문 설명 및 절별 해석 .........................................................................................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이는 야고보서에서 새로운 주제로 전환시킬 때 사용하는 표현 방식인데요, (5절, 1:19, 3:1, 5:7).

1절은 본 단락의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입니다.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는데, 

'가르'는 2-4절까지가 1절의 '차별하지 말라'고 권면한 이유를 나타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들어올 때에’

야고보가 본절에서 회당 '쉬나고겐'을 사용한 것은

이 서신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쓰고 있기 때문이죠.

바울도 처음에 선교할 때 초기에,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찾아가서 전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신약성경 중에서 맨 처음 쓰여진 성경으로 봅니다.  *AD 40~45년 경

본절에 '회당'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야고보는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과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을 대조시켜서

당시 수신자들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죄를 지적합니다.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가난한 자를, 발등상 아래 마루바닥에 앉으라는 의미로

사람을 차별하는 모욕적인 행위를 암시합니다.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즉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지음을 받은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야고보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데, 

앞절까지는 사람 외모로 판단했을때 죄가 되는 것을 언급하였지만

본절 5~11절까지는 사람을 구별하여 판단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교회 당시 사회에서 별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부류였어요.(마11:5, 고전 1:26-29)

또한 그들이 스데반 때 일어난 핍박으로 (행8:1)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으니..

유랑민으로서 더 가난해진 요인도 있었겠죠.

 

그러나 그들이 돈이 없고 가난해서 사회에서 천대 받는 자들이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에 대해서는 결코 가난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세상에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시각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안목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죠.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소망을 품게 하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모두 다 믿음이 부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의 헬라어 '투스 프토쿠스' 에서 관사 '투스'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한정된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고전1:26-28).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 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죠.

그러면 보상으로 인한 약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르셨으며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급으로 마련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믿고 바라는 자는 심령이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됩니다(마 5:3, 눅 6:20).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지를 업신여겼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을 무시하는 행위는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외모로 취하여 멸시하였죠.

 

야고보는 수신자들이 존귀하게 대했던 '부유한 자들'의 행위를 세 가지의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를 외모로 취해 차별 대우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1)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당시에 부자인 사두개인들은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악독하게 박해하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민족인 디아스포라를 다스릴 수 있는 상당한 지배권을 부여하고 있었죠.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습니다(행 4:1-3, 9:2, 16:19).

그들의 압제는 종교적인 것은 물론 경제적인 이익과 관계된 것들이었습니다(행 19:23-41).

 

'압제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뒤나스튜우신'은 '카타'('아래로')와

'뒤나스테스'('유력자', '군주')의 합성어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2)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당시 유대 사회에서 채권자는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다루었음을 나타냅니다.

야고보는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3인칭 대명사 '아우토이'('그들')를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끌고 가는 자가 부자들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죠.

 

3) ‘저희는 너희에게 대해서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에피클레덴 에프 휘마스'는 문자적로

'너희 위에 일컬어진'이란 의미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고전 1:2, 딤후 2:19)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 관습으로, 관습에 의하면 어린아이에게 자기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붙이곤 하였죠(창 48:16).

이것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짐을 나타내었고

그 개개인은 하나님이 택한 자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 구별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게 됨을 시사합니다.

 

한편 '훼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무신'은 '악을 말하는'의 의미인 '블라스페모스’

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문에서는 '신성 모독'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부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농락하고 압제함으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이 외모로만 사람을 취하여

부자들을 옹호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들의 범죄에 동조하는 죄악이 됩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온전하게)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개역성경에는 '멘토이'('참으로')가 생략되어 있다. '멘토이'는 의심스러운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확신을 뜻하는 말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미입니다.

 

'너희가 만일...지키면'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텔레이테'는 조건문으로

'너희가 완전하게 지키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완전성보다는 지키기를 노력하는 성실성의 관계를 시사합니다.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행위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왜 불합리한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고한 법'

이 말의 헬라어 '노몬 바실리콘'에서 '바실리콘'은 '왕'을 의미하는 '바실류스'에서 유래한 말이죠.

'바실리콘'을 '노모스'에 적용한 것은 로마 시대에 있어 왔던 일반적인 표현 방식으로(4:11)

당시에 로마 황제에 의해 제정된 법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이었죠.

 

야고보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법은 그 자체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죠.

더욱 이 하나님의 법은 다른 율법보다 포괄성을 가지고 인간 관계를 주장하는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레 19:18, 마 22:39).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본절은 외모로 사람을 취한 자들을 향한 징계를 나타낸다.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여기서의 '율법'은 성경의 일반적인 법보다는

야고보가 8절에서 언급한 최고의 법을 가리키죠.

 

사람을 외모로 취한자는 최고의 법을 어긴 자이며,

율법은 그를 범죄자로 정하여 범죄하였음을 드러냅니다.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죠.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의 근거임을 시사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야고보는 본절에서 사람들이 율법 중 자기의 필요한 부분만을 취하여 지키는 것을 지적하고 있죠.

실제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부자들에게는 지나치게 마음을 쓰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율법을 취사 선택하여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죠.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본절은 앞절의 원론적인 언급에 대한 예죠.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포괄적인 최고의 법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외모로 보는 한 가지만을어겼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과 동일하죠.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야고보는 본절에서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모든 율법에 차별없이, 간과하지 말고 행하라는 것이죠.

 

'자유의 율법'은 앞서 언급한 최고의 율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새 계명 즉 복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은혜와 긍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입니다(마 5:44, 13:34, 골 3:12, 요일 3:11).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을 자처럼(고후 5:10) 말을 하고 행해야 합니다.

본문은 행하는 것뿐 아니라 말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됨을 나타냅니다.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자비심으로 본절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비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긍휼을 행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며(마 5:7)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게 됩니다(마 6:2).

 

그러기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기보다는 멸시하고,

도리어 부유한 자에게 관대한 자는 결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삶 속에서 나타난 긍휼을 통하여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요일 4:17),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심판대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심판도 그 긍휼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