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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2:14~26,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

LNCK 2022. 8. 23. 20:49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된다       약2:14~26     여러 설교 정리

                                                                                         *야고보서 설교모음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가르치는 책이고,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온전 됨을 가르칩니다.

 

‘의롭게 된다’는.. 다른 말로 ‘칭의, 구원의 시작’이라면,

온전케 된다’는.. 다른 말로 ‘구원의 완성’을 뜻합니다.

 

바울은 빌2:12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완성하라)’고 했는데,

야고보는 약2:22절에서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완성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다른 복음을 가르친 게 아니라, 똑같은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대상이 ‘초신자들에게’ 필요한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가르쳤고,

야고보는 대상이 ‘이미 믿어 의롭게 된 신자들에게’ 필요한 ‘믿음의 열매, 즉 행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로마서는, 이방인 초신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이고,

야고보서는, 행2장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행7장까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지금 행8장에서 일어난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 또 그들 난민 신자들을 맞이하는 성도들...

그러니 제법 경력신자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라서.. 믿음에 더하여 행위(삶의 열매)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충돌되거나 모순될 게 전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을 무시하는 것이요,

저자가 하나님 되심을 무시하는 발칙한 처사이지요.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참고로 본문의 정황을 살피자면,

행8:1절에서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요즘 말로 하면 ‘난민’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AD 34년 경으로 보며, 야고보서의 저작 시기는 AD 40~45년으로 추정)

 

그들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5

말로만 ‘평안히 가라, (잠에 잘 때 불을 지펴서)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하면,   2:16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되며..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14

 

그러니 유대와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에 흩어진 교회들이

예루살렘 난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라는 메시지이지요.

그런 믿음의 당연한 행함이 없으면, 여러분의 믿음은..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22절)이란 관점에서, 본문의 믿음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온전’이란 말이 신약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곳이 마5: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텔레이오스 (형용사)

 

여기서 온전은 ‘성숙한, 장성한, 온전한’이란 뜻입니다. (*‘완벽주의’는 아닙니다)

어린아이 같은 미숙한 신자가 되지 말고, 어른처럼 성숙하고 장성한 신자가 되라는데,

 

같은 말로, 본문 약2:22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텔레이오 (동사)

 

그런데 히브리서도 ‘온전함’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12:2

 

('믿음의 주'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퀴리오스의 '주'가 아니고,

창시자, 시작하는 자, 앞에서 인도해 가는 자, 파이오니어 라는 뜻이고요. *아르케고스)

  

'온전케 하시는 이'는 *텔레이오테스 (어근이 텔레이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을 온전케/성숙케/장성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이유도, 우리를 온전하게 성숙시키기 위한 목적입니다.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텔레이오스

 

그러니 마5:48 = 히12:2 = 약1:4 = 본문 약2:22 ... 다 같은 맥락입니다.

 

-마5:48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처럼 온전하라’ 명하셨고,

 

-히12:2절에서는 ‘예수님이 너희 믿음을 온전하게 이끌어가신다’고 하셨고,

 

-약1:4절에서는, '시험을 인내해서 너희가 온전해 져라...'

 

-본문 약2:22절에서는 ‘너희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해진다’ 라고 설교하죠.  ☞완전(온전)하라는 의미

 

그러니 중요한 것은,

맨날 ‘이신칭의’ 롬1:17절만 강조하지 말고, (이미 교인들이 다 이신칭의 받았으니까)

이제 앞으로는 ‘믿음의 성숙/온전/장성함, 즉 약2:22절을 강조해야 될 시점인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아래 설교문에서 스크랩 했습니다.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믿음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지금 교인 중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서는 불신자나 초신자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은) 기존 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중요
그러므로 칭의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칭의 받은 후에 삶의 열매인 행함을 강조하는 거죠.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1절에 보면 '아브라함도 아들을 바치는 행함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라고 예를 들었어요. 근데 이상한 주장 아닙니까? 

왜냐면 성경을 좀 아는 분들은 
로마서 4장, 갈라디아서 3장을 읽어 보면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신칭의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구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들었단 말입니다.
 
근데 오히려 야고보는, 그 아브라함을 똑같이 예로 들면서 
<이행칭의의 대표로 즉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논지를 펴고 있습니다. 약2:21 

그러니까 동일 인물 아브라함에 대해서 
두 사도가 정 반대의 관점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래서 이 부분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게 만들어 주겠다' 
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창15:6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가 믿음을 가졌을 때, 그것을 의롭다고 여겨 주셨어요. 

그리고 결국에 이삭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은, 믿음의 결실이었던 거죠. 

근데 하나님께서 또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나에게 번제로 죽여서 바치라고 하셨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인 거죠. 

아니 그 아들을 통해서 수많은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아들을 죽이면, 그럼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거잖아요.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아~ 내가 아들을 바쳐도, 
그 아들을 다시 살려서라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거야' 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종의 실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창22장의 아들을 바치는 사건이에요. 

그러니 바울은 창15장을 예로 들어 믿음을 강조한 것이고, - 이신칭의, 초신자
본문의 야고보는 창22장을 예로 들어 행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온전함, 성숙

그러니까 창22:12절에 나오는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왜 '이제야' 인가요?
창15장과 22장 사이는, 굉장히 긴 기간이거든요. 몇 십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지만 
그렇게 그 하나뿐인 아들까지 내어 드릴 때 
'진짜 네가 나를 신뢰하는구나!, 네 믿음이 이제 정말 온전해졌구나!' 
라고 인정해 주셨다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은, 창15장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인생 여정에서 그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어요. 창15장에서. 
그런데 창22장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내용을 보면 
그가 부부간에 잘못 합의해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잘못된 자녀를 낳기도 했으며

'우리가 이렇게 나이가 많은데, 과연 자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중간에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의 믿음이 처음부터 뭐 완성형 이어서 
쉽게 결실을 거둔 게 아니라 

중간에 그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도와주셔서 
그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결국에 믿음의 결실인 이삭을 얻은 거죠. 

근데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결국 그의 믿음은 정점에, 완성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

그렇습니다. 믿음생활, 신앙생활은
천국을 향해가는 순례자의 긴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으니까 
나는 교리상, 믿음의 공식상, 이제 천국이 보장된 거야!'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가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칭의는 한순간이지만, 성화는 일평생입니다!
중요해서 다시 얘기합니다.
칭의는 한순간이지만, 성화는 일평생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그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통회 자복하고 
주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은.. 대부분 한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내가 정말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야지.. 
그렇게 매일의 삶에서 실천해가는 삶, 이것은 평생의 마라톤 레이스와 같은 것입니다. 

자 이어지는 22절이 본문의 핵심구절입니다.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위 구절은 2가지를 말씀합니다.
-믿음은 행함과 동역한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

자 그러면 어떻게 동역하는 것인가요? 
지금 우리가 바울과 야고보를 다시 한 번 비교해 보면 

바울은 믿음을 강조해서 <이신칭의>를 주장한 것 같아보이고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에서 <이칭의>를 주장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바울과 야고보는 반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근데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그 감사와 감격과 순종이.. 삶의 실천(행함, 순종)으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믿음의 결과, 증거, 열매, 반응 입니다.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그러니까 행함만 맞고 믿음은 틀렸다,
뭐 믿음만 맞고 행함은 틀렸다... 
이렇게 한쪽만 옳다고 주장하는 게 지금 아니에요. 야고보도. 
둘 다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칭의>가 이루어졌지만 
<믿음의 증거요, 결과인 행함으로도 믿음이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영어 구문으로 표현하자면 
    not A but B .. A는 틀렸고 B만 맞다..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요.  *믿음과 행함

    not only A but also B .. A뿐만 아니라 B도 맞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라는 얘기를, 24절에서 야고보가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 믿음만 강조했고,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주장했던 사도바울! 

근데 그 사도 바울도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얘기를 했어요. 
바울이 언제 그런 얘기를 했을까요? 여러 번 했어요. 

고전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우리가 아는 바울이, 그 바울이 맞습니까?
바울이 행위구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게 아니죠. not A but B 가 아니라   *믿음과 행함
not only A but also B 라는 거죠.
처음 믿을 때는, 믿음으로 칭의를 받는 거고요,
칭의 받은 후에는, 행함으로 즉 순종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결국엔 야고보와 똑같은 얘기를 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라면 완벽해진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변화 되지 않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또는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하게 살면 
그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를 보면서. 
진짜 하나님의 생명(믿음)이 내 안에 있으면 
그 생명은, 반드시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는 거죠.

예수님이 요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잖아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그냥 붙어있기만 해도 
그 생명의 영양분이 공급되니까, 자연히 자라서 포도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는 것이죠. 

'내가 막 열매를 맺어야 돼!' 애를 써서 맺는 게 아니잖아요.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께 맞대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결실을 거두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22절에서 또 눈 여겨 볼 것은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된다"
'완성'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보셔야 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b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해진다'는 말이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 perfect, complete 라는 단어로 번역했는데요.
완전하다, 온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것이죠.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면 
이게 어린묘목 일지라도 사과나무인 것은 맞죠. 

그러나 이 사과나무가 잘 자라서 사과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똑같이 권면했어요.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work out your salvation

아니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게 아니라, 그 분이 이루어 주시는 것인데 
'너희가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핼쓰장에 가면 work out 한다는 말을 쓰는데,
자기 몸을 '만들어간다' ..는 뜻입니다.

그러면 빌2:12절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그 구원을 네가 만들어 가라'는 뜻입니다.

이미 주신 구원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 갑니까? 
삶의 성화의 실천으로 그것을 이루어 가라는 말씀을 하는 거죠! 

아까 사과의 어린 묘목이 심어졌어요. (칭의의 구원)
그때까지 완전한/성숙한/장성한 자리에 이르기까지 점점 자라가야 하는 거죠. (성화의 구원)
이제 그 묘목이 완전히 성장해서, 온전한 사과 열매를 맺는 거죠. (구원의 완성)

또 가령 이런 거죠.
결혼도.. 뜨거운 연애가 전부가 아니며, 
한 번의 결혼식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두 사람이 매일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면서, 
결혼을 work out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혼과 가정을 점점 더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거죠.
사실 이게 진짜 결혼의 핵심이고 소중한 거죠. 

그러니까 젊은이들은 몇 개월에 걸쳐서 
자기들의 결혼식으로 얼마나 화려하고 멋있게 만드느냐.. 거기에 온갖 집중을 하지만 

그러나 인생의 연륜이 있는 어르신들은 
매일 매일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이것이 (화려한 한 번의 결혼식보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평생 사랑하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책임지기 위해서, 평생을 함께 살아가고 계시는 거잖아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님과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work out 점점 만들어져 가야 하는 것이죠1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과 과거에 한 번 연애만 하고, 결혼식만 하고
지금은 마치 이혼한 관계처럼.. 그 결혼 생활을 work out 즉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진정 회개를 통한 칭의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진정한 칭의가 있었지만, 실족한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탈선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다시 트랙으로 돌아와서, 
이미 받은 '칭의 구원'을, '성화 구원'을 통해 매일 온전히 이루어가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내용을, 야고보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절별 해석

 

특별하게 해석할 게 없습니다. 본문을 그냥 읽으면 다 이해됩니다.